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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이야기 : 홍콩 이소룡의 옛집을 찾아서

雲靜, 仰天 2019. 7. 23. 17:26

이소룡 이야기 : 홍콩 이소룡의 옛집을 찾아서

 

중학생 시절, 1973년에 상영된 龍爭虎鬪라는 영화를 보고 말 그대로 완전히 사람들을 가게 한 액션 스타가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신인이었다. 다름 아닌 이소룡(李小龍)이었다.

 

덩치도 커지면서 힘이 솟구치던 시절, 태권도니, 씨름이니, 유도니 하면서 운동을 하기도 하고 때론 다른 애들과 맞짱을 뜨니 하면서 쏘다니던 때였으니 이소룡의 현란한 스텝, 스피드와 파괴력을 동시에 지닌 발차기를 보면 운동을 하는 청소년은 누구든 반하지 않을 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기괴하고 때론 코믹한 그만의 독특한 표정 그리고 마치 동물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괴성 하나만으로도 팬들을 사로잡기에 족했다.

 

 

이 모습은 영화 용쟁호투에 나오는 이소룡의 트레이드 마크랄 수 있는 대표적인 격투 장면이다.

 

당시로선 상상을 뛰어 넘는 호쾌한 이소룡의 무술영화를 보고선 나는 용쟁호투 외에 그의 첫작품인 精武門(1972), 猛龍過江(1972), 死亡遊戱(1978) 등 한국에서 방영된 이소룡 영화는 거의 다 봤다.

 

정무문과 맹룡과강은 이소룡이 주연을 맡고 자신이 감독해서 촬영한 영화지만, 사망유희는 그가 죽고난 뒤 로버트 크라우스(Robert Clouse)라는 감독이 이소룡 재세시 그가 써놓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찍은 영화인데, 구성이 엉성하고 연기도 이소룡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졸작이었다.

 

 

낯 익은 이소룡 영화의 포스터들이다. 새삼 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당시 나와 같은 또래의 많은 애들이 이소룡의 발차기, 쌍절곤, 권법에다 표정과 괴성까지 흉내를 내면서 돌아다녔다. 나 역시 그가 영화에서 멋들어지게 구사한 쌍절곤을 사놓고 연습하기도 하고, 그의 매력적인 표정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옆차기, 돌려차기, 공중회전차기 등의 발차기도 연습했다.

 

결국 중학 3학년 가을 무렵에 이소룡의 발차기를 그대로 재연해보느라 오른팔까지 부러뜨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깁스 한 채 왼손으로 치기도 했었다. 그는 나에게 청소년 시절 한 때 적지 않은 추억을 안겨준, 나의 삶에서 잊지 못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이소룡이 올해로 사망한지 어느덧 46주년이나 된다. 덧없이 세월이 흘러도 잊어지진 않는다. 홍콩에 볼 일차 온 김에 이소룡의 故居를 찾아가봤다. 九龍반도의 九龍塘 전철역에서 내려서 약 1km 남짓한 거리의 고급주택가인 Cumberland Lord(金巴倫道) 41호에 위치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羅曼('로망'의 음역)이라는 이름의 호텔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 전재산 중 약 8000억원을 사회공익을 위해 기증한 주윤발이 바로 이소룡의 옆집에 살고 있다는 건 여기 와서야 알았다.

 

 

이소룡 故居로 들어가는 컴버랜드로 초입
공사중인 이소룡의 옛집
영화와 실제 삶이 일치하는 인간, 영화에서처럼 인간미가 일품이어서 누구든 좋아할 수밖에 없는 배우 주윤발의 집
굳게 닫힌 대문은 이해가 되지만, 높은 담 위에다 족히 2m나 되는 철망과 철조망까지...... 과거 도둑들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도둑이 들어와도 주윤발의 무술 실력으로 충분할 건데?

 

찌는 폭염에 연신 땀을 흘리며 물어물어 겨우 찾아갔더니 이소룡의 집은 그간 진행되던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게다가 문이 굳게 닺혀 있어 집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해놨다. 오기 전에 나는 이미 오래 전 이소룡이 살던 집을 사들여 살다가 기증한 집주인 자선사업가 余彭年, 이소룡 기념관 및 박물관 겸 무술 교육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홍콩의 이소룡 팬클럽 회원들과 홍콩 정부 간에 의견 차이가 있기 때문이란 걸 알고 왔다. 홍콩 정부 측은 이 집이 지반과 균열에 의해 안전에 위험이 있다고 판단 돼 완전 철거를 주장하고 있음에 반해 팬클럽측은 기념관을 지으려면 이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되고 새로 개조를 해서 쓰자고 맞서고 있다.

 

 

땀을 흠뻑 흘리면서 찾아간 이소룡의 집 내부를 들여다 보니 리모델링 공사가 중단된 채 있었다.

 

사실 이소룡 故居라고 불리는 이 집은 이소룡이 태어난 곳은 아니고 1972년에 이사 와서 살다가 46년 전 어제, 720일에 쓰러져 죽은 집이다. 그러니까 그가 죽기 전 길어야 1년 정도 살았던 최후의 거주지였던 곳이다이소룡이 태어난 곳은 홍콩이 아니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唐人街)이다. 19401127일이었다. 李小龍의 본명은 李振藩이었고, 널리 알려진 Bruce Lee는 미국명이다.

 

이소룡은 일찍부터 영화와 인연이 있었다. 그가 배우로 데뷔한 것은 1941년 그가 만 두 살도 안 되던 아기였을 때 벌써 영화 'Golden Gate Girl'에 출연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뒤 이소룡은 영화와는 거리가 있는 생활을 했다유아기에 홍콩으로 돌아온 이소룡은 청소년 시절을 이곳 구룡반도의 九龍 일대에서 보냈다. 그는 柯士甸道에 위치한 德信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나중에 喇沙書院으로 전학했다. 1956大角嘴區에 있던 聖芳濟書院에도 들어갔다.

 

이 시절, 이소룡이 무술인의 길로 들어선 건 껄렁하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던 아들이 엇길로 나갈까 봐 걱정이 된 경극배우였던 그의 아버지 李海泉이 자신의 친구이자 詠春拳宗師葉問에게 데려가 그의 문하에서 詠春拳을 배우게 하면서부터였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이소룡은 그때까지만 해도 홍콩 뒷골목에서 싸움을 많이 하고 다녔던 순전히 싸움꾼이었다. 이소룡이 詠春拳, 홍가권, 절권도는 물론 권투와 격투기까지 배우고 연구한 것은 이 시기였다. 격투기란 말이 거창해서 격투기이지 사실은 심판과 규칙을 빼면 맞짱과 같은 것이다.

 

배우의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이소룡은 남들이 꺼려하는 엑스트라, 단역 등도 마다 않고 줄곧 출연하면서 점차 배우로 어느 정도 이름이 나게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불행하게도 홍콩의 조폭조직인 三合會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의 의문사와 관련이 없을까하는 추측에서 20세기 동아시아 각국의 주먹사를 통합적으로 연구하면서 밝혀볼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바로 이 시기 아들이 암흑계로 빠지지 않을까 하면서 이소룡의 앞날을 걱정한 부친의 강권에 이끌려 18살 때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그는 워싱턴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철학도이기도 했다. 배우자로 린더 카드웰과 만나 슬하에 11녀를 낳게 된 것은 1958~1964년 미국 체류기인 이 시기였다. 11녀는 아들 브랜든 리(중국명 李國豪)와 딸 李香凝이다.

 

어찌 보면 개인의 행복이라는 면에선 이 시간이 가장 소중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기간 동안 이소룡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무술 연마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옆차기, 돌려차기와 뒤돌려차기 같은 발차기는 196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방부 요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서 미국사회에 태권도의 진가를 알려 이름을 날린 이준구 사범에게 배웠다. 이준구 사범은 알리에게도 태권도의 주먹 기술을 전수해준 세계적인 무도인이었다.

 

이소룡이 다시 영화계로 들어가게 된 것은 1964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벌어진 가라데 토너먼트 무술시합에서 그가 보여준 발군의 실력이 당시 무술 유단자이자 배우로 이름난 윌리엄 도지어(William Dozier)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윌리엄 도지어는 영화 제작자이기도 했다. 이것이 이소룡의 운명을 갈랐다.

 

윌리엄 도지어의 제의로 이소룡은 바로 오디션에 들어갔고, 오디션에서 그가 보여준 순발력과 스피드에 놀란 TV PD들이 바로 이소룡에게 출연을 제의했다. 당시 20대 한창 때의 젊은 이소룡의 실력은 대단히 경이로웠다. 내가 감독이었다고 해도 바로 전격 스카웃을 제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소룡은 그 후 몇몇 TV의 무술극에 출연했으나 이런저런 운이 따르지 않아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미국에서의 활동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자 1970년 이소룡은 홍콩 영화제작사 嘉禾電影公司(골든 하베스트) 책임자인 鄒文懷(Raymond Chow)의 권유를 받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영화출연 제의를 받고서였다. 그가 다시 홍콩영화계에 발을 들여 출연한 첫 작품이 바로 1971년에 나온 唐山大兄(Big Boss)이었다. 당산대형이란 중국을 떠난 중국인들이 외국의 어느 한 곳에 모여들면서 형성된 화교사회에 고국 중국에서 온 따꺼정도의 의미다.

 

이소룡 주연의 당산대형은 홍콩에서 개봉되고 동시에 일본, 대만, 한국 등과 동남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어서 공전의 히트를 친 게 바로 위에서 소개한 정무문, 맹룡과강과 그 이듬해 1973년에 찍어 또 다시 히트를 친 용쟁호투 등 4편의 영화였다. 용쟁호투를 찍은 곳인 홍콩 屯門區青山禪院은 지금도 있다고 한다.

 

영화는 지금이나 그때나 영화로서의 작품성과 흥행성이 고려돼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본이 뒤따라야 작품을 작품답게 소화해낼 수 있고, 흥행을 흥행답게 치를 수 있다. 당시 1960년대말 70년대는 대만 자본이 홍콩의 영화계에 엄청나게 들어왔는데, 홍콩이 구로사와 아끼라(黑澤 明) 같은 걸출한 감독을 배출한 일본영화계와 함께 아시아영화계의 전성기를 일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즉 이소룡의 영화들이 히트를 친 데는 역시 한 몫한 대만 자본과 맞아 떨어졌다는 소리다.

 

더군다나 용쟁호투는 홍콩의 자본과 미국의 워너스 브라더스라는 미국영화계의 거대 자본이 합작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취권 등 홍콩의 간판 영화 스타 성룡이 아역의 엑스트라로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고, 흥행에서 아시아권을 넘어 미국과 유럽에서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바로 이소룡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영화였다.

 

호사다마인가! 용쟁호투가 개봉하기 3주 전, 이소룡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는 의문사를 당한다. 1973년 7월 20일이었다. 갑작스런 미스터리한 그의 죽음에 전세계가 놀랐다. 그의 장례식에는 그와 함께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마지막 결투 씬을 벌여 흥행 성공에 크게 일조한 척 노리스(Chuk Norris)는 물론, 떠벌이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뿐만 아니라 홍콩과 미국 영화계의 내로다 하는 스타들이 대거 장례식장으로 모여 들었다. 삼합회의 조폭들도 참석했다. 20세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계적인 무술인이자 대스타는 그렇게 갔다.

 

 

운구를 맡은 스티브 맥퀸과 제임스 코번이 이소룡의 관을 옮기고 있다. (사진 출처 : 블로그 샘이 깊은 물)

 

그리고 반세기가 지나고 있지만, 무술계에서나, 영화계에서나 무술 배우로서는 그만큼 임팩트 있는 무술인 배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내가 보기에 앞으로도 그를 뛰어넘는 무술인 스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소룡을 높이 평가하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다. 그는 기존의 권법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이 완전히 소화하고 권투, 격투기까지 가미해 기존 권법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식의 절권도(截拳道)를 만들어낸 창조성을 가진 무술인이자 영화인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가 기존의 截拳功夫로 불린 명칭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截拳道로 이름을 바꾸어버린 데서도 나타난다. 그의 무술관이 도가적 인식의 경향을 띠고 있었으니 한계와 막힘이 있던 기존의 절권궁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한으로 유한으로 삼고, 무법으로 유법으로 삼는다는 것(以無限為有限以無法為有法)李小龍 截拳道의 철학적 이념이었다.

 

또 그는 체중이 같은 급끼리만 대적하는 무술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급의 제한 없이 싸우는 격투기에는 다소 작은 체격(173cm의 키에 62kg의 체중)이 핸디캡이 될 수 있는 걸 자신에 맞는 무술을 만들어 결점을 장점으로 만든 무술인이기 때문이다. 작은 체구는 아무래도 체구가 큰 사람 보다 스피드와 순발력이 앞설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그의 모든 동작은 스피드와 정확성과 순발력에 강점이 있다. 스피드는 힘을 동반하고 정확한 급소에 가격됐을 때는 상대에겐 치명적인 필살기가 된다. 그의 스텝은 알리도 배웠을 정도고, 그의 빠른 잽과 펀치의 가공할 위력이 발차기와 함께 모두 그곳에서 나온다.

 

 

지금이야 다 지나간 옛날 일이지만, 사실 고등학생 시절엔 싸움이라면 최다 8대 1 이상으로도 붙어 본 바 있어(전학 간 학교에서 2학년 2학기 때 8명 이상의 3학년 선배들과 맞붙은 사건은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임!) 이소룡이 생존해 있다면 한 수 지도를 부탁할 겸 자유대련을 청했을 것이다. 농담이라고 응해줄지는 의문이지만......

 

이소룡이 살아 있다면 올해 꼭 80세다. 그가 일찍 죽지 않고 살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무수한 무술영화를 찍어 이웃집의 주윤발과 성룡처럼 거부가 돼 있거나 아니면 아이디어가 고갈돼 영화계를 떠나 다른 사업을 했을 수도 있다. 살아생전에 그의 적극적인 성격을 봤을 땐 사업을 해도 아마도 절권도를 세계에 보급하는 무술 관련 교육 사업을 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뿌리 깊은 홍콩의 조직폭력단인 三合會에게 살해됐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 '친구'를 찍어 대박을 터뜨린 곽경택 감독과 부산 칠성파의 악연처럼 이소룡도 남에게 머리를 굽히기 싫어하던 그의 성격으로 봐선 삼합회와 좋은 관계로는 지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아무튼, 이소룡이 남긴 영향은 지금도 선연하다. 그 범위도 가히 세계적이다. 홍콩 측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영화사적으로는 중국영화배우들이 영화산업의 메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최초의 테이프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절권도 창시에 이어 종합격투기를 영화에 접목시킨 선구자였다. 게다가 동영상 영화를 홍콩영화의 주류로 만든 영화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李小龍의 출현으로 미국영화에도 중국인을 무술의 고수로 출연하게 만든 작품들이 많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서양인들에게는 중국인들이 모두 무술의 고수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평가는 李小龍이 할리우드(Hollywood Walk of Fame)黃柳霜, 成龍과 함께 3인의 중국인 무술영화배우의 한 사람으로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봤을 때 거의 실제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풀리지 않은 의문사로 32살의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떠난 이소룡은 시애틀의 래이크 뷰 공동묘지(Lake View Cemetry, 湖景公墓)에 아들과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말 없이 자는 듯 누워 있다. 호걸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제 아쉬움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겨야 된다. 갈 길이 먼 나그네다. 기다리고 있는 중국대륙으로 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소룡의 고거 철거 및 기념관건립 문제가 원만하게 잘 풀려서 이소룡의 모습과 행적이 무술계와 영화계의 한 역사로서 길이 보존되길 바란다. 그게 홍콩과 중국인들만의 과제가 아니지 않는가?

 

2019. 7. 21. 21:23

홍콩 九龍塘 李小龍 故居에서 초고

7. 23. 08:08 중국 廣州에서 가필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