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이야기
나는 음식 중에 죽(粥, congee)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에도 자주 즐겨 먹는다. 간혹 친구들과 어울려 일식집이나 횟집에라도 가면 나는 회나 초밥보다도 보통 죽을 연거푸 세 그릇이나 맛있게 비운다. 횟집에서 회가 아닌 죽으로 배를 채우는 셈이다. 어릴 적 부모님께서 가난하게 사셨을 때 죽을 자주 먹어서 생각나는 향수 때문이 아니다.
사실 내 기억에 죽은 좋은 향수는 아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내가 유아 때 매일 먹는 죽이 물려 죽을 먹기 싫어 도리질을 쳤다고 얘길 해주신 것을 듣고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자주 죽을 먹는 이유는 속이 편해지고 마음까지 평온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내가 매번 죽을 먹을 때마다 느낀다. 단순히 죽을 먹고 포만감을 느끼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몸의 평온상태가 찾아와서 즐겁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죽을 자주 애용해서 그런지 나는 위장이 좋은 편이다. 낭설인진 몰라도 김해 김씨의 후손들이 위장 하나는 최고라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김해 김씨였던 돌아가신 나의 모친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나 역시 위장은 튼튼한 편이다. 그래도 과음이라도 한 다음날엔 속이 쓰릴 때가 적지 않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미음을 먹으면 감쪽같이 쓰린 속이 잠잠해진다. 내 몸에 죽이 맞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죽이라고 하면 옛날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 자주 먹으면 영양이 부실해지지 않을까 우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100㎏가 넘는 일본의 육중한 스모도리들이 체중을 늘리기 위해서 짱고나베(ちゃんこ鍋)와 죽을 자주 먹는 이유를 알면 그것은 기우라는 걸 알 수 있다. 짱고나베란 된장을 푼 큰 냄비에다 육류와 생선 및 각종 채소를 듬뿍 넣어 끊인 것으로 영양이 풍부한 일종의 '잡탕'을 말한다. 그들이 죽을 많이 먹는 이유는 영양은 많은 데 금방 소화가 되니 자주 먹어야 돼서 몸을 불리는 데는 이 이상 더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이 좋다고 해도 하루 세 끼를 모두 죽으로 때우면 소화력이 떨어지니 저녁 한 끼 정도면 족하다.
사실 죽은 나에게만 좋은 게 아니다. 죽은 소화를 돕고 체질을 증장시키며, 비위와 위를 보하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에게도 좋다. 그래서 죽은 참으로 유용하고 고마운 먹거리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죽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음식을 먹고 난 뒤 특별히 먹은 음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곰곰이 음미해보지도 않았다.
평생을 즐겨 먹은 게 죽인데 죽을 아무렇게나 대했으니 말 없는 죽이지만 나를 야속하게 생각하겠다는 마음이 든다. 지난 연초부터 대만에 장기 체류하게 됨에 따라 과거 약 30년 전에 와본 타이페이(臺北)시의 유명한 ‘죽집거리’에 오게 돼 옛날 중국의 죽 관련 기록들을 접하면서 식용, 약용, 양생 기능을 다 갖춘 죽을 여느 음식처럼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죽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농경의 시작, 불의 사용에 따른 화식과 함께 생겨났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트밀 죽 같은 죽과 함께 중세 때 서민들이 각종 수프들을 많이 먹었다는 서양은 논외로 치고 동양 사회에서 죽을 처음으로 만들어 먹은 곳은 어디였을까? 중국학계에서는 기원전 약 6,000~7,000년 전 쯤에 중국인들이 죽을 일용한 것으로 돼 있고, 기록상으로는 이미 漢代에 이르면 여러 가지 의학서에 죽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역사서에 죽이 최초로 나오는 것은 周書라는 책에서다. 이 책에 나오는 “황제가 처음으로 곡식을 끓여 죽으로 만들었다”(黃帝始烹穀爲粥)는 기록이 그것이다. 중국 역대 正史인 24史 중의 하나인 周書는 636년에 北朝(557~581)를 기록한 역사서다. 죽은 역사기록이 있기보다 훨씬 더 이전의 황제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4,700여년 전에 이미 식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기록에는 죽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돼 와서 죠우몽(縄文) 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돼 있다. 죠우몽 시대라면 야요이(弥生) 시대 이전 기원전 약 1만2,000~4,500년이고 이 시대는 기원전 3~2세기경에 끝나니 대략 이 시기 끝 무렵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죽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듯이 중국에서 한국으로도 전래돼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에는 죽이 언제 전래됐는지 분명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실록 1395년 권7~8에 수원의 李造라는 생원이 모친을 여의고 시묘를 3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었다”(朝夕食粥)는 기록이 최초다. 물론 조선 조 이전에도 죽이 있었을 것임은 물론이지만 현재로선 기록이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내가 전거를 찾아본 바로 죽의 기원은 중국에 있고, 문자 기록상에 나타난 바로는 黄帝가 죽을 최초로 만든 ‘셰프’였다. 즉 약 4,000수백 여년 전에 벌써 죽이 주요 식용으로 사용됐다고 하니 죽의 역사가 중국이나 한국의 웬만한 유력한 성씨들의 역사보다 훨씬 더 길다. 물론 인류가 화식을 한 것은 이 보다 더 오래전이었고, 소위 조리를 한 것은 1만 6,000년도 더 전의 일이니 황제시대 이전에도 죽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에서 죽은 속칭으로 ‘멀건 밥’이라는 뜻으로 稀飯(porridge rice)이라 불렀다. 속칭이기도 하지만 『康熙字典』에 그렇게 설명돼 있다. 지금도 중국, 대만, 홍콩 등지의 중화문화권 지역에선 '粥'과 '稀飯'이 같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는 죽의 농도에 따라 뻑뻑한 죽은 ‘饘’(단), 멀건 죽은 ‘糜’(미), 옅은 죽은 ‘酏’(야)라고 불렸다. 대략 2,500년 전부터는 죽은 약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史記 』扁鵲倉公列傳 제45에 西漢의 명의 太倉公淳于意(倉公)가 병을 앓고 있던 제나라 왕에게 “火齊粥”을 먹여 그의 병을 고쳤다는 기록(西漢名醫淳于意用火齊粥治齊王病)을 보면 그 이전에도 죽이 약으로 쓰였을 수도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편작은 춘추시대의 유명한 의사다.
한대의 의학 경전이랄 수 있는 張仲景의『傷寒論』에도 “桂枝湯을 복용하고 뜨거운 죽을 한 그릇 낫게 먹으면 약효가 나오도록 도운다(桂枝湯, 服已须臾, 啜熱稀粥一升余,以助藥力)는 기록이 있다. 우리말에 손쉬움을 비유할 때 “식은 죽 먹기”라거나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고 말하지만, 사실 건강 면에서 죽은 식어서 먹기 보다는 “뜨거운 죽”이 좋다는 것을 옛날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죽은 식용으로 먹어도 속이 편하고, 약용으로도 사용돼 건강을 도우는 양생에도 좋은 것이라면 분명 옛날 중국에도 나처럼 죽을 좋아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문인들 중에서도 죽을 좋아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고, 죽을 소재로 글도 썼을 수 있다. 죽을 소재로 한 글을 남긴 문인들 중에는 먼저 宋代의 蘇東坡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죽에 대해 이렇게 예찬한 바 있다. “밤에 배가 출출해지니 吳子野가 흰죽을 권했는데, 신진대사에 좋고 소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죽은 먹으면 바로 (상태가) 좋아지는데, 죽을 먹은 뒤 한 숨 자고나면 묘할 정도다.”(夜飢甚, 吳子野勸食白粥, 云能推陳致新, 利膈益胃. 粥既快美, 粥後一覺, 妙不可言.) 죽의 효능이 묘하다고 양생기능을 간파했으니 그는 필시 죽을 즐겨 먹었을 ‘죽예찬론자’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죽은 식용과 약용 단계를 거쳐 養生의 단계로 나아갔다. 南宋의 저명한 시인 陸游도 소동파처럼 죽의 양생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는 죽이 능히 “수명을 연장시켜 장수하게 만든다”(能延年益壽)고 하면서 ‘粥食’이라는 시를 지어서까지 죽을 찬미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장수를 배우지만 장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 줄 모른다. 그 방법이란 내게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이다. 죽만 먹어도 신선에 이를 것이다.”(世人個個學長年, 不悟長年在目前, 我得宛丘平易法, 只將食粥致神仙).
陸游의 이 시는 중국사회에서 죽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한 단계 높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죽이 장수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죽을 장복해서 장수한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蔣介石을 구금한 서안사변을 일으켜 중국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張學良도 죽을 즐겨 먹어 100세가 넘게 장수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죽을 예찬한 시는 清代 褚人獲의 시집『堅瓠集』에도 있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長壽詩’ 두 수가 그것인데 그 중 한 시에 양생의 道로 사람들에게 받들어지고 있는 죽을 권장하는 대목이 있다. “술을 적게 마시고, 죽을 많이 먹어라.”(少飮酒, 多啜粥) 이 말 뒤에 나열된 다른 권유들도 음미할만한데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채식을 많이 하고, 육식을 적게 하라. 말을 적게 하고, 눈을 많이 감아라. 머리를 많이 빗고, 목욕을 적게 하라. 같이 어울리는 것을 적게 하고, 홀로 있기를 많이 하라. 독서를 많이 하고, 옥(재물)을 많이 모으지 말라. 명성을 얻으려고 하길 적게 하고, 많이 참고 견뎌라. 선행을 많이 하고, 녹봉 받는 것에 목메지 말라. 이런 취지에서 사람들에게 맑은 마음으로 욕심을 적게 부리고 利에 급급하지 말라고 권하라.”(多茹菜, 少食肉, 少開口, 多閉目, 多梳頭, 少沐浴, 少群居, 多獨宿, 多收書, 少積玉, 少取名, 多忍辱, 多行善, 少干禄, 便宜勿再往, 好事不如没)
이 글의 주제인 죽과는 관련이 없는 여담이지만, 위 글 중에 “목욕을 적게 하라”는 말은 과거 중국인들이 왜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평가됐는지 저간을 짐작케 해주는 실마리를 발견한 셈이다. 과거 중국인이 왜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살았는지에 대해선 중국인의 위생관념을 논하게 될 때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위 글에서 이미 죽에 대해서 선하고 순한 음식이란 느낌을 받았겠지만, ‘죽’하면 가난을 떠올리고, ‘가난’하면 ‘善’하다는 인식이 드는 게 사실이다. 문인 색채가 나는 이런 생각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상상해보라. 죽이라 하면 안빈낙도의 이미지를 가진 허름한 옷차림에 풀뿌리를 먹고 산다는 “布衣菜根”이 연상되지 않는가? 죽으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일하고 책읽기에 힘쓴다는 의미의 “青灯黄卷”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옛날 어릴 적 내 기억으로는 가난한 집에서는 밥을 해먹을 쌀이 부족해서 쌀을 아끼느라 멀겋게 쑨 죽을 많이 먹었다.
이처럼 죽은 군자나 선비의 안빈낙도를 떠오르게 만든다. 안빈낙도는 대략 清淡, 内斂(내향적, 함축적), 寡欲을 강조하는 老莊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서민들의 음식인 죽에게 中庸을 부여하고 隱忍의 문화적 색채까지 더한 것은 도가 계열에서 나왔다. 죽이 선비의 청빈과 안빈낙도를 상징하게 된 배경이 아닌가 싶다.
옛날 중국 문인들은 근본적으로 빈궁을 맛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빈궁이 주는 정신적인 만족을 병적이랄 정도로 크게 부르짖었다. 아마도 그 최고 정점에 선 이는 孔子와 그의 제자 안회(顔回)가 아닐까 싶다. 안회도 스승 공자를 쫓아 가난과 곤궁을 긍지 비슷하게 여기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죽의 효용을 유교의 전적에까지 올려놨다. 『論語』 (述而篇)에서 그는 “거친 음식을 먹고 찬물을 마시고, 베개 없이 잠을 자도(베개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해도) 즐거움은 그곳에도 있다네.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얻은 부귀는 내겐 하늘에 뜬 구름과 같은 것일세.”(飯蔬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스승인 공자를 “큰 현자”(大賢)라고 찬양했던 안회를 두고 공자는『論語』(雍也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친 음식을 먹으며, 누추한 작은 집에 살아도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빈궁을 참을 수 없어 했지만 안회는 (이런 곳에 살면서도) 배우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改其樂.) 위 글들 중의 ‘蔬食’과 ‘簞食’(‘거친 음식’)이 죽이라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가난을 미덕 혹은 운명처럼 삼아라고 한 사회적 가치는 자본의 집적을 어렵게 했고, 결국 무소유를 사회적 가치나 미덕으로 삼았던 고대 인도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서양 보다 자본주의 발달이 늦었던 사회경제적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죽은 빈궁에 대한 중국 문인계층의 모순적이고 이가적(二價的, ambivalent)인 심리가 내재된 듯한 측면도 보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중국에는 “돈이 있으면 詩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지만 돈이 없으면 모친을 욕한다”는 속담이 있다. 돈이 있으면 시심이 생겨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돈이 없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요즘이야 부자들도 건강을 생각해서 죽을 먹는 이들이 있겠지만 옛날엔 중국이든, 한국이든 부자들은 죽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이 가난을 상징했으니까.
내가 보기에 절개를 지키느라 고사리만 뜯어먹고 산 백이숙제 형제, 새로운 왕조 청나라를 반대해 평생을 초야에 묻혀 저술과 후학 지도 그리고 주유천하의 유랑을 하면서 생을 마친 明朝의 유신 黃宗羲, 顧炎武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옛날 중국에서의 전통시대 선비와 유자들이 빈궁과 가난을 즐거워했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미화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돈을 벌기 위한 농사일이나 상공업 관련 노동을 하기 싫다거나 혹은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없는 자신을 합리화한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이다.
그게 아니면 반대로 사농공상이 주요 직업이었던 옛날엔 농업, 공업, 상업 관련 일이나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벌려면 매관매직이나 가렴주구 같은 부패뿐이었는데, 수입과 직결되는 부패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의지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돈의 필요성을 알고 있고, 돈을 싫어하지 않거나 속으로는 돈을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만 내색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나의 생각과 비슷한 맥락에서 옛날 중국 선비의 청빈과 안빈낙도를 허위와 가식이라고 코웃음 친 이도 없지 않았다. 20세기 저명한 현대 문학가 梁實秋가 그런 이였다. 그는 심술궂게도 가난과 빈궁을 낙이라고 소리치는 文士들이 과연 눈이 펄펄 내리는 엄동설한에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빈궁을 즐겁다고 말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비꼬았다.
아무튼 가난한 자들은 분명 싫어하든 좋아하든 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자들과 달리 밥과 죽 중에 먹고 싶은 걸 선택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종의 체념적인 심리상태에서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청대의 朱柏廬가 말한 대로 옛날 농경사회에서 한 그릇의 죽은 농민들의 행복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옛날부터 가뭄, 한발, 홍수, 기근 등의 자연재해로 농사가 헛되거나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늘 가난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민들에게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과 청빈한 유자들은 손에 들어오는 물건은 무엇이든 쉽게 오는 게 아니어서 항상 아끼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말하자면 중국사회에서 죽이 후손들에게 가난을 미덕으로 삼게 되도록 만든 음식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온갖 종류의 죽들이 발달해 있지만, 중국 전역에도 ‘광동죽’, ‘복건죽’, ‘河南 희반’ 등등 각지의 특색 있는 죽들이 다양하다. 다양한 죽의 명칭만큼 재료도 워낙 다양해서 일일이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명대 때 李時珍이 지은 『本草綱目』에 50여 가지의 죽들이 나열돼 있었으니 그로부터 400년이 더 지난 지금은 중국 전역에 수 천 가지의 죽들이 있을 것이다. 이곳 대만에도 온갖 종류의 죽들이 판매되고 있다.
나는 요즘 아침은 거의 매일 죽을 먹는다. 과거 30년 전 쯤 내가 이곳에서 공부했을 때 보다는 적어졌지만 아직도 타이페이시에는 아침 요기를 할 수 있는 가게엔 죽을 파는 곳이 더러 있어 좋다. 내게는 큰 사발로 죽 한 그릇과 멸치와 된장에다 김치만 있으면 족하다. 걸인의 찬으로 보일지라도 내게는 임금의 수라상을 받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다. 회개 후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음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해 신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던 톨스토이처럼 감사하는 마음도 생겨나고 마음도 비할 바 없이 편해진다. 죽은 매번 내게 속 편함, 마음 편함에서 오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감과 평화로움을 선사한다. 나는 앞으로도 죽을 계속 애용할 것이다. 내게는 죽이 없는 상황보다 밥이 없는 상황을 상상하는 게 낫다. 죽아 고맙다. 죽이여 영원할 지어다!
2019. 2. 18. 20:08
臺北 大安區 옛날 '죽집거리'에서 초고
2. 19. 08: 53
臺北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연구실에서 가필
雲靜
'왜 사는가? > 여행기 혹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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