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국 최고의 암흑가 두목, “상해의 황제” 杜月苼
지난 세기, 중국이나 일본의 과거사에는 주먹으로 거부가 되고 권력까지 거머쥔 건달들이 적지 않았다. 수많은 건달들 가운데 두월생(杜月苼, 1888~1951)은 중국과 일본을 통 털어 그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두월생! 우리에게는 20세기 조선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이성순)가 압록강을 넘어 만주를 드나들던 젊은 시절, 중국 관내에까지 가서 그와 교류가 있었다고만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선 시라소니가 두월생과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내가 두월생 관련 모든 자료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한 현재로선 정말 시라소니가 두월생과 교류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관계였는지 행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 오늘은 우선 두월생의 묘소를 찾아 나선 김에 그의 인생 전반을 스케치하기로 하고 각론 보다는 먼저 총론을 소개한다.
1888년 8월 22일 강소성 川沙(오늘날 상해 浦東新區)의 촌락 高橋南杜에서 태어난 두월생은 본래 이름이 月生이었지만 나중에 당시 “國學大師”로 불린 당대 저명한 지식인 章太炎이 권해서 名鏞으로 개명했다. 月笙은 그의 호였다.
두월생은 네 살도 되기 전에 모친과 부친을 차례로 여의었다. 모친 사망 후엔 계모 밑에서 자라다가 나중에 부친이 사망하고 난 뒤엔 외숙부집에서 양육됐다. 그는 14세 때 혈혈단신으로 인근 대도시 상해로 갔다. 상해는 당시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최고로 번성한 국제도시였다. 상해로 들어온 두월생은 "鴻元盛"이라는 상호의 과일가게를 찾아가 그 집에서 도제식으로 장사기술을 배웠다. 그는 태생부터 워낙 부지런하고 명민해서 일을 빨리 익혔다.
그런데 두월생은 낮에는 가게에서 일을 거들었지만, 밤만 되면 껄렁껄렁한 건달(流氓)들과 어울려 다녔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도박에 눈을 떴다가 가끔씩 과일가게의 돈을 몰래 훔쳐서 도박을 했다. 당시 도박, 매음, 아편이 횡행하던 상해에서 도박은 젊은 그에게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두월생은 가게에서 훔쳐 가져간 돈을 도박으로 탈탈 털리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는 더 이상 과일가게 주인을 볼 면목이 없어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 집을 나가 버렸다.
과일 가게를 나온 두월생은 집 없이 상해 황포항의 부두(상해탄)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는데, 어느 날 그가 집을 나온 과일가게 주인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 주인은 두월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선 그를 전혀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고 예전처럼 그대로 대했다. 이런 과일가게 주인의 행동이 두월생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뒤 그의 인생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나중에 출세해서도 도의와 사람됨의 본분 혹은 사람을 대하는 신조 같은 걸 가지게 됐다.
두월생은 우연히 東門 일대에서 가장 잘 나가던 陳世昌이란 자를 알게 돼 두목으로 모시고 지냈다. 陳世昌을 통해 두월생은 당시 상해 최고의 조직폭력단인 ‘靑幇’의 두목 黃金榮이 거주한 프랑스조계 일각의 공관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눈칫밥을 먹어서 그런지 남달리 눈치가 빨랐고, 영민했다. 때로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무엇 보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처신을 한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참아야 할 때를 알았고, 잘난 체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다 그는 정치적 감각까지 갖춘 모양이었다.
아무튼, 두둑한 배포, 용맹과 지략이 겸비된 두월생이 자연스레 청방의 두목 黃金榮의 눈에 띄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정확하게는 황금영 부인의 눈에 들었다가 남편에게 추천된 것이다.) 일본의 야꾸자들이 그렇듯이 조폭이 갖춰야 할 몇 가지 능력 중에 과감하게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용맹성은 두월생에게도 갖춰진 모양인데, 이 점에서 그는 가히 천부적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존이라는 미국의 전기작가가 두월생을 두고 “중국에서 가장 용맹한 사나이로서 아시아에서 최고로 주목 받는 대인물”이라고까지 평가했으니 말이다.
두월생은 삼흠(三鑫)이라는 회사(公司)를 설립해 군벌 당국과 상해 조계당국(工部局)의 비호 아래 法租界(프랑스조계) 내 아편판매 사업을 독점했다. 그 시절 중국에서 아편으로 돈을 번다는 건 남의 고혈을 짜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사업이 번성함과 동시에 그는 지위도 높아져 프랑스 조계 商會總聯合會 主席 자리에 올랐다. 그러더니 어느덧 황금영, 張嘯林(장소림)과 함께 “상해의 3대 두목 중의 한 사람”(上海三大亨之一)이 됐다가 마침내 중국 최고의 조폭조직으로 유명한 청방 두목 黃金榮의 자리까지 이어 받았다.
청방의 최고 자리에 올라선 두월생은 아편뿐만 아니라 문화, 금융, 도박, 매춘, 오락 분야에까지 사업영역을 넓혀서 다른 조직의 두목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상해 암흑가의 최고 지엄이 됐다. 상해 암흑가의 최고 지엄이면 중국 전역 암흑가의 최고 지엄인 셈이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성공에 공짜가 있던가?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두월생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남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고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그의 손에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그의 지시를 받은 부하들의 손에 황천길로 간 이들도 몇 명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시기 두월생이 “상해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배경이었다. 비루한 가정에서 태어난 볼품없던 사내아이가 상해의 암흑세계를 주름잡는 가장 두려운 보스가 된 것이다.
두월생은 단순한 암흑가의 보스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정치, 군사, 외교 분야에도 손을 뻗쳤다. 그래서 중국현대사의 흐름 중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에는 죄다 연관이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는 1927년에 개시된 중국국민당의 북벌에서부터, 두 차례의 국공합작, 북벌 중 상해에서 중공당원들을 샅샅이 색출해서 백주에 도살하다시피 죽인 이른바 장개석의 “4.12 淸黨”, 항일은 물론, 심지어 장개석과 송미령의 혼인에까지 관련돼 있었다. 두월생은 중국 국민정부가 중국을 침략한 일제에 대해 전면 항전을 선언한 이른바 항일전에서 승리하도록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즉 그는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큰돈을 손에 쥐게 된 사업가의 기질과 수완도 보였던 데다 일제 침략에 대항한 민족의식과 애국심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두월생이 세기가 지난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면들 외에 그가 살아온 과정에서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기묘묘하고 신출귀몰하거나 기상천외한 전기적 일화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오로지 주먹 하나로 어느 정도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출세할 수 있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흔치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로 상해가 잠잠해지거나 들썩거릴 수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1937년 11월, 일제가 상해를 점령했을 때 두월생이 일제 당국의 회유 혹은 포섭 대상 제1호 인물이 된 이유였다. 그에게 접촉을 시도한 일제는 갖가지 조건과 특급 대우를 제시했다. 그러나 두월생은 당당하게 거절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두월생은 아예 즉각 상해를 떠나 아직 일본 점령군의 마각이 닿지 못한 국민당 치하의 홍콩으로 사업과 암흑세계의 활동무대, 이른바 “나와바리”를 옮겨버리기까지 했다.
홍콩으로 옮겨 온 뒤로도 두월생은 암흑세계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조폭두목의 삶을 청산하지 않았다. 상해에서 했던 것처럼 그는 홍콩에서도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가라지 않고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추구했다. 그런데 중국사회에선 두월생이 벌인 사업들이 자신의 개인적 영리와 부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에 대처한 수단의 하나였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두월생이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캐내어 국민당측이나 중국군 당국에 넘겨주었던 사실을 두고 내리는 평가들이다. 이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치깡패에 불과한 인물이었는지는 앞으로 관련 '팩트'들을 더 체크하면서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좀 더 자료를 뒤져봐야 하겠지만, 현재로선 분명한 건 두월생은 당시 여타 중국의 부자들과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였다는 점이다. 1930~40년대 일제가 왕정위(汪精衛) 괴뢰정권을 앞세워 중국대륙의 반을 통치하면서 장개석 정권과 대치하던 시절, 중국의 부자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도피해갔을 때 두월생은 결코 중국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망은커녕 오히려 두월생은 거금의 사재를 털어 의료물자나 무기들을 구입해 항일전선의 국민당군에게 보냈다. 한 마디로 그는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관심 있는 보통의 여느 조폭이 아니라 애국과 구국운동의 대열에도 참여한 민족정신이 바로 박힌 암흑세계의 두목이었다.
과연 두월생의 이러한 애국과 구국행위가 자신이 상해 시절 남들에게 피와 눈물을 흘리게 했고, 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까지 앗았던 범죄들과 상쇄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 어쩌면 그러한 죄과에 대한 회개라도 하는 듯이 홍콩체류 시절에는 짧은 기간이나마 애국적 면모를 보여줬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후, 두월생은 상해로 돌아가지 않고 홍콩에 남았다. 그에게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만년을 홍콩에서 보내기로 한 두월생은 63세가 되던 1951년 8월 16일 오후 병으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죽기 얼마 전,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채권 영수증을 남김없이 모조리 찢어 없애 버렸다.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채무자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찾아와 빚을 탕감해 주라느니, 안 된다느니 하면서 실랑이를 벌여 자식들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쓴 것이다. 비열한 최후였다. 결국 조폭이라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두월생의 영구는 네 번째 처 姚玉蘭(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두월생은 5명의 처와 함께 살았다. 오늘날도 대만에는 복수의 처를 데리고 사는 이들이 간혹 있다. 내 지인들 중에도 3명 혹은 2명의 부인들과 한 집에서 함께 사는 이도 있다)에 의해 국민정부가 천도해온 대만으로 옮겨져 와서 신북(新北)市 석지(汐止)의 秀峰國民小學(초등학교) 뒷산에 안장됐다. 당시 장개석은 헬기를 내줘 그의 영구가 안장되는 이곳 상공을 순회비행 하게 했고, 두월생에게 친히 “義節聿昭”(의절이 여기에서 빛난다)라는 만가를 지어 보냈다.
장례는 장개석이 신임하던 그의 왼팔격이던 陳誠, 張群, 于右任, 王寵惠, 張世英 등 유력 정치인, 고위 관료들로 장례위원회가 꾸려져 치러졌다. 장례식과 운구행렬에는 대북시 전역에서 평소 두월생의 이름 석 자를 들어본 장삼이사, 필부필부는 물론, 주먹깨나 쓰는 건달에서부터 사회 명사들 가운데 내로다 하는 이들이 모두 애도의 물결에 모여든 萬人空巷, 즉 집집마다 모두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운구행렬을 뒤따르느라 엄청난 성황을 이뤘다.
세기가 바뀌고 두월생이 저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한 갑자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평가가 상반되는 지난 세기 영화나 무협소설처럼 격을 뛰어 넘은 기묘한 그의 행적들은 모두 허공에 흩어지고 겨우 일부 책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두월생 사후, 배 다른 그의 자식들(5명의 처에게서 총 11명의 아들딸들이 있었다)은 모두 해외로 떠난 뒤 오랫동안 대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과 7~8년 전인 2010년대 초에 미국에 거주하던 그의 장손이 선친 두월생의 묘소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갔을 뿐이다.
그러기 전, 오랫동안 골육이라곤 아무도 찾지 않아 그의 묘소는 버려지듯이 적막했다. 우연히 길가를 지나던 어떤 노인이 허물어진 두월생의 묘소를 보고 3년이나 돌봤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 노인은 80고령의 李開明이라는 사람이었다. 대북시 북쪽 陽明山 아래 장개석 관저의 總機(관저의 비서 겸 집사의 총책임자)를 지냈을 뿐, 두월생과는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노인이었다. 애오라지 이승에서의 끈이라 해봐야 두월생과 동향인 江蘇人이란 사실뿐이었다.
하기야 지난 세기 두월생은 장개석과 애증이 교차한 사이였으니 아마도 장개석을 오랫동안 모시면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황량하게 방치된 두월생의 묘소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지 않았나 싶다.
사실, 두월생은 장개석이 1930년대 당시 중국 최대의 조폭조직 靑幇을 소탕하고자 할 때 잡아 없앨 거세 대상 제1호 인물이었다. 반면, 자기가 장개석에게 이용당하기도 해서 출세하게 됐다고 본 두월생은 스스로 “나는 장개석의 夜壺”(요강을 가리키는 夜壺란 이용 가치가 있을 때는 사용됐다가 필요가 없게 되면 버림을 받는 것을 말함)라고 말하기도 했다.
李開明이라는 이 노인은 우연히 산길을 지나다 묘비마저 없어 누구의 묘소인지도 모를 만큼 버려져 있던 두월생의 묘를 보고 시름에 젖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매주 하루 날을 잡아 묘소에 와서 묘지기 역할 하듯이 묵묵히 3년 동안이나 두월생의 묘소를 가꿨다고 한다.
지금이야 상황이 크게 달라져 두월생의 묘가 관광자원이 되고 있지만, 수년 전만 하더라도 썰렁했다. 중국대륙에서 두월생의 묘지를 찾아와 참배하는 중국관광객들이 많아지게 되니까 상해시 당국에서 그의 유골을 고향인 상해로 이장해 문화재로 관리하겠다는 의사를 비치자 그에 질세라 이곳 신북시에서 이장을 반대하고 묘소를 잘 관리하면서부터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오늘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문득 과거 찬찬히 훑어보려고 생각해온, 중국의 밤의 세계를 좌지우지 한 불세출의 두월생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의 묘소가 마침 올 한 해 내가 머물고 있는 중앙연구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물에 생각이 미치자 오늘은 잠시 짬을 내어 그의 묘소를 찾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 버스로 30분이면 닿는 곳에 있었다. 푹푹 찌고 삶는 가마솥 안을 걷는 듯한 더위에 땀을 콩죽 끓듯 흘리면서 올라가본 야트막한 산 중턱에 위치한 그의 묘 석관 위에는 술잔도 몇 개 놓여 있고, 한쪽에는 청소도구도 있다. 이걸로 봐선 누군가가 묘지를 관리하는 모양이다.
묘역 전체는 정돈되지 않은 숲들에 이리저리 가려져 있어 정갈한 느낌은 주지 않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두월생의 사후세계로 통하는 묘혈도 녹슨 듯이 서 있어 과거 두월생의 위용과 대비돼 더 없이 처연하게 다가왔다. 돈으로 마음먹으면 누구든지 움직일 수 있었던 그 많았던 재산, 중국의 밤의 세계를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던 그 컸던 권력, 살아생전에 그가 누렸던 부귀영달 그리고 말년의 오욕과 비참함이 모두 거품처럼 사라진 지금, 가없는 무상감만 떠올리게 만든다.
2019. 7. 10. 11: 47
新北市 汐止 杜月笙 묘소 앞에서
雲靜
혹시 두월생 묘소를 찾아가보려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 간략하게 찾아가는 길의 순서대로 사진을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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