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의 피격현장 남목청을 찾아서
역사연구에서 전장이나 사건현장을 발로 뛰어서 직접 확인해본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사료의 미완결성을 보완하거나 사료에서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번 여행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어제 오후와 오늘 아침에 찾아간 호남성 성도 長沙의 楠木廳 제6호 건물도 그런 예의 한 곳이었다.
중국 국가주석을 지낸 劉少奇의 생가와 기념관 관람을 마친 뒤 멋진 기념품까지 선물로 증정 받고 점심까지 대접 받은 후 이른 오후 기념관 직원들의 환송 속에 寧鄕을 떠났다. 약 1시간 남짓 지난 뒤 장사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나는 호텔 잡는 걸 뒤로 미루고 곧장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바로 1938년 5월에 있었던 ‘楠木廳사건’의 옛 현장을 찾아 갔다.
지하철 培元橋역에서 내려 택시로 갈아타고서 한참이나 찾아 헤맸다. 주소는 맞지만 호수가 순서대로 돼 있지 않고 이곳 일대가 한창 재개발 되고 있는데다, 남목청의 위치 혹은 존재를 알리는 표지도 눈에 띄지 않는 건물 한 귀퉁이의 높은 곳에 붙여 놓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이 표지판부터 바꾸도록 건의할 생각이다.)
남목청 제6호 건물은 1938년 5월 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에게 매수된 자로 보이는 李雲煥(여타 자료에서 보이는 李雲漢은 잘못된 오류임)이라는 자의 총격을 받은 역사의 현장이다. 남목청 제6호 건물은 池靑天(이청천으로도 불렸음) 선생이 이끈 조선혁명당 당본부임과 동시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속들이 잠시 살았던 거처지이기도 한 곳이다.
김구 선생을 위시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차례로 호남성 성도 장사로 들어와 이곳에서 머문 기간은 1937년 12월~1938년 7월까지였으니 대략 8개월 동안이었다. 김구도 『백범일지』에서 장사에 체류한 기간은 8개월 동안이라고 기록해놓았다. 1938년 7월 임정이 장사를 떠나 옮겨간 곳은 광주였다.
김구 등 4명의 독립운동 지사들이 이운환에게 총격을 받은 이날은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3당의 대표인 지청천, 유동열, 현익철, 김구 네 분이 이곳에 모여 3당 합당을 논의하던 자리였다. 이운환은 내가 최근 보고 있는 1920~40년대 중국 각지에서 활동한 일제 영사관 소속 헌병경찰들의 보고서, 외무성 지시 등 문건 사료에 나오는 한국인 첩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일제에 매수된 밀정이었을 것이라는 소리다.
이운환이 난사한 총탄 첫발은 김구가 맞아 중상을 입었고, 둘째 발을 맞은 현익철도 중상을 입었고, 셋째 발을 맞은 유동열도 중상을 입었으며, 넷째 발을 맞은 이청천만이 경상을 입었다. 네 분은 모두 황급히 이곳 長沙 소재 湘雅의원으로 실려 갔지만 중상을 입은 현익철 선생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했고, 같이 중상을 입은 김구, 유동열 두 분은 입원 치료 끝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말로만 듣던 남목청 제6호의 옛터에 와서 보니 책에서 보던 대로 長沙시에서 이 건물을 잘 관리하고 있었지만, 일요일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다. 그 대신 때마침 건물 바로 옆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한담을 나누던 주민들 중에 1960년대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어 이곳의 변화과정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는 60대 중반의 劉씨 성의 한 초로의 남성에게서 중요한 얘길 많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부터 다시 찾아가봤더니 지금까지 다른 연구자나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이 보지 못한 것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남목청 사건 자체에 대한 재구성과 재해석은 좀 더 시간을 두고 각종 관련 사료들을 치밀하게 재검토 해봐야 할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선 적어도 당시 왜 상해를 떠나 남경 및 鎭江에 머물던 임정 요인들이 그곳에서 뱃길로 약 1,300km나 떨어진 이곳 장사로 오게 됐는지, 그리고 민족혁명당이 왜 이곳 남목청 제6호에 자리를 잡게 됐는지에 대해선 내 눈에는 기존의 설명과 달리 다시 생각해봐야 할 부분들이 제법 보여서 수확이 작지 않다.
당시 임정은 중국국민당을 따라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긴 하지만 장사가 長江 중류 내륙지역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최대의 농산물 집산지로서 상업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함과 동시에 인구도 가장 많았던 중심 도시여서 대일 항전에 유리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던 점이 고려됐을 것이다.
그런데다 이곳 남목청 지역이 뜻 밖에도 중국현대사에서 저명한 인사들이 배출된 지역이라는 것도 그 하나다. 梁啓超, 譚嗣同, 熊希齡, 黃興 등등 적지 않다. 아무튼, 고생해서 이곳까지 온 만큼 뜻 밖에 예상하지 못한 내용들도 접하게 돼 헛수고는 하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남목청 제6호 청사가 있었던 이 터와 건물의 원래 크기 및 형태에 대한 기존의 설명들에서 부족한 부분을 새로 써넣을 수 있는 사실들과 약간의 실마리도 눈에 띈다. 또한 남목청 제6호 청사 내 전시돼 있는 내용들 중에는 중국정부가 임정 관련 역사 왜곡을 해놓은 곳도 보이는데, 차후에 이 부분도 바로 잡을 생각이다.
예를 들면, 총격을 받고 병원에서 한 달 간 지낸 김구의 수술비와 입원비는 모두 당시 상아의원까지 찾아와 병문안을 한 호남성장 張治中 장군과 장개석이 지원해줬는데 이 부분은 생략한 채 중국공산당이 도와 준 것처럼 분식해놓은 사실이다. 漢口에서 중일전쟁을 지휘하던 장개석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보를 보내 김구의 상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했으며, 한 달 뒤 김구가 퇴원한 뒤에도 羅霞天이라는 부하를 보내 치료비 3,000위앤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막바지 일정에 들어가게 됐다. 다시 廣州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광주에 가서도 장사에서 옮겨온 임시정부가 있었던 구터를 찾아 나설 계획이어서 이번 여행이 이걸로 모두 끝나는 건 아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보았지만, 여행이란 늘 그렇듯이 아쉬움이 적지 않다.
오늘 오후에 광주에서의 아주 중요한 약속이 두 건이나 있어 꼭 가보고 싶었던 洞庭湖와 岳陽樓를 올라가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게 많이 아쉽다. 부득이 다음을 기약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길과 길의 만남이다. 세계사는 길의 확장사였다. 길은 길에 연하여 있음으로 희망과 의지만 있으면 길은 열릴 것임을 믿는다.
2019. 7. 29. 12:07
長沙발 廣州행 고속철 객차 안에서
백범 김구재단 김구포럼 학술기획위원
雲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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