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恩來의 술에 얽힌 이야기
대체로 혁명가들은 감성적이기도 하고 격정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다 술을 잘 마신다고 단정하면 논리의 비약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 중에도 유달리 주량이 센 이가 있듯이 현대 혁명사에서 혁명가들 중에도 술이 유달리 센 자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혁명가로서 능력을 발휘한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부하린, 스탈린 등등 보드카를 즐긴 러시아 혁명가들을 얘기할 때 또 소개할 일이 있을 것이다.
지난 세기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중국 공산혁명의 주역 중국공산당 내 지도급 고위 인사들 중엔 누가 가장 술이 셌을까? 아마도 역대 중공 중앙위원회 정치국 서기들 가운데 가장 술을 잘 마신 자는 “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千杯不醉)고 일컬어진 周恩來가 최고의 주당이 아니었을까 싶다.
周恩來는 술을 잘 마셨을 뿐만 아니라 술을 마실 줄 아는 혁명가였다. 이를 말해주는 예증으로 술에 얽힌 周恩來의 일화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홍군 전사들의 기억에 따르면, 장정 시기 周恩來는 1량이 넘는 잔으로 마오타이주를 25잔이나 마신 적이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이른바 ‘빼갈’ 잔으로 1량이면 500ml의 큰 잔이다. 그런 잔으로 25잔을 마셨다면 총 12,500ml다. 쉽게 실감나도록 비유하면, 한국의 중국집에서 팔고 있는 빼갈이 보통 아래 사진의 금문고량주처럼 750ml인데, 이런 빼갈을 16병이나 마셨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주량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붙어 다닌 “千杯不醉”라는 별명이 거짓말이 아닌 셈이다.
술이 센 것도 때로는 적과의 회담에서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周恩來의 예에서 알 수 있다. 周恩來가 센 술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국공 내전 시기 1945년 국공 양당이 사천성의 重慶에서 평화담판을 거행했다. 담판기간 중의 한 연회석상에서 周恩來는 毛澤東을 대신해 한 잔, 한 잔 계속 술잔을 비웠다. 이 자리에서 국민당 인사들이 周恩來에게 잔을 들고 권하면서 “공세”를 펼쳤다. 周恩來는 몇 바퀴나 자기 앞으로 온 술을 사양 않고 다 받아 마셨다. 그렇지만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술이 취한 듯해도 정신이 멀쩡했고, 자세도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끝까지 국민당 인사들에게 실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현대사에서 周恩來의 술 실력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것은 이러한 과거 전력을 본 국민당 사람들의 소문도 한몫 했을 것이다. 과연 이날 밤 周恩來의 빼어난 술 실력이 그 다음의 국공담판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줬는지는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지만, 아무튼 같은 술자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기자가 “周恩來 혼자서 전체 국민당을 패배시켰다”고 감탄사를 발했다.
과연 周恩來의 발군의 주량은 천부적인 것이었을까? 대학 시절 일본의 중국사학자가 쓴 책에서 읽은 주은래의 술 관련 일화가 생각난다. 주은래는 미리 술이 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에다 보이지 않게 위장에까지 닿는 긴 실을 걸어 실끝을 목구멍 안에다 넘겨 놓고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회 중에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다가 술이 오른다 싶으면 혼자서 화장실에 가서 손가락으로 목구멍으로 넘어가 있는 실을 끄집어 내면 바로 오바이트가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과연 그런 방법으로 구토가 되는 것인지는 조금 의심이 든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 판단은 유보하고 있다.
암튼 周恩來의 주량을 소개하면서 酒德은 빼 먹고 그냥 지나칠 순 없다. 그는 평소 먹고 마시는 게 간단했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날이라면 평소엔 서민들이 먹는 소박한 찬이 전부였다. 周恩來가 유일하게 좋아한 게 술을 조금 마시는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중국국민당 사람들이나 민주당파를 상대로 한 통일전선 업무를 맡아 봤기 때문에 업무상 술을 마시다보니 필요에 따라선 엄청나게 많이 마시기도 했다. 그렇다고 술잔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잔을 부딪칠 때는 늘 웃음 띤 얼굴로 우호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봤다.
周恩來는 다른 이들에게 절대로 술을 강권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손님이 술을 잘 못 마실 경우 그는 흔쾌히 양해해줬다. 그리곤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시고, 마실 수 없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음주시에 건성으로 사람을 대한 적이 없다고 한다. 누가 “건배”하자고 하면 반드시 잔을 다 비웠지 꼬리를 내리고 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국인의 음주문화에서 ‘乾杯’라는 건 잔을 다 비운다는 뜻이다. 잔을 다 비우지 않고 자기 주량껏 알아서 마시겠다고 할 경우에는 "隨意"(쉐이이)라고 말하면 된다. 周恩來가 일생 동안 가장 자주 마신 술은 마오타이주(茅台酒)였다. 얼마 전 내가 소개한 바 있는 마오타이주를 즐겨 마셨다니 마오타이주의 술맛을 아는 나로서는 대략 周恩來의 술취향을 알 것 같다.
周恩來의 酒德만 소개하고 술로 인한 실수는 건너 뛸 순 없다. 위에서 말했지만, 周恩來의 주량은 가히 “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런 그도 술을 이겨내지 못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는 일생 동안 술에 취한 일이 세 번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절제력을 잃어버려 코가 삐뚤어지도록 만취(酩酊大醉)했을 때였다.
첫 번째는 결혼식 날 신부로 맞이한 鄧潁超와 화촉을 밝히던 날 밤이었다. 周恩來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서 하객들이 권하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다 받아마셨다. 결과는 인사불성의 만취! 그 상태로 신혼 첫날밤은 제대로 보냈을까? 이것도 자료를 뒤져봐서 사실을 알면 야사로 얘깃거리가 되겠다.
두 번째는 1954년 초 제네바 평화협상회의에 출석하기 전 모스크바에 들렀을 때였다.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 지도자들과의 회동 과정에서 周恩來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소관계는 겉으로 보기엔 괜찮아 보였지만 중소 양 지도부 사이에선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지도자들 사이의 자존심과도 얽힌 여러 가지 긴장 국면도 없지 않아 對美 공조라는 측면에서 모스크바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북경지도부의 입장에선 술이 친선의 윤활유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날은 긴 여로의 여독으로 인한 과로까지 겹쳐 연회장에서 구토까지 했다. 현장에서 토하게 되자 나중에 주은래는 스스로 중공 지도부에다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세 번째는 1953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개선해 돌아온 "中國人民志願軍"(중국지도부가 국가가 동원한 게 아니라 중국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실상을 호도하면서 꼼수를 부린 잘못된 용어임. 이래도 중국을 대국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가?)을 영접했을 때였다. 周恩來는 환영회에 참석한 중공군 각 단위 부대의 거의 모든 당대표들과 술잔을 부딪쳤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차로 귀국한 병력이 수십만 명이었으니 당대표들도 수백 명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날도 취기가 올라 좌중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마지막에는 만취한 나머지 결국 휴게실로 실려 나갔다.
이 일로 周恩來는 毛澤東에게 한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周恩來는 나중에 毛澤東이 “혁명과업을 그르치지 말라”고 한 지시를 깊이 마음에 새겼다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로 인해 周恩來는 중국정부의 외교와 外事 일을 보는 직원들에게 “술을 마시면 본인 주량의 3분의 1을 넘어선 안 된다”는 규정을 만들어 국내외 각 부처에 전달해 철저하게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우리는 어느 급수의 지도자가 됐건 술을 마시면 모두 자율적으로 마시고, 하급 관리들도 자신의 상관(領導)을 보호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술을 적게 마시고, 더욱이 술에 취하지 못하도록 (보좌)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년의 周恩來는 건강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기도 했고, 마지막엔 원래 있던 심장병에다 방광암까지 더해 사망하게 된다. 수술을 하고 싶어도 모택동이 수술을 못하게 지시해 놓았기 때문에 고통을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보다 못한 부인 鄧潁超가 안락사까지 거론했을 정도였다. 암투병 1년 만에 체중이 무려 61k로 줄어들어 피골이 상접한 상태가 됐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몸 상태가 더 좋지 않게 되자 의사의 금주요청에 따라 그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게 됐다. 주은래에게 병이 찾아온 것은 1972년부터였지만 그는 병환이 있어도 일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가급적 중요한 주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손님과 술잔을 부딪칠 때 그는 잔만 들고 마시지는 않고 손님에게 사실대로 상황을 설명해줘 이해를 구하곤 했다.
周恩來는 아마도 술을 분해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던 모양이다. 뛰어난 주량이 혁명시에나 건국 후에나 작지 않은 정무적 능력으로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알코올 해독의 간을 소유한 자라도 술에는 장사 없다. 周恩來가 시쳇말로 술고래였던 게 진실이라면 이 말은 진리다. 진실을 따를 게 아니라 진리가 주당들을 구할 것이다.
2018. 12. 5, 14:05
북한산 淸勝齊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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