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의 김구 輓詞를 통해 본 장개석, 김구, 이승만 관계의 한 단면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경, 白凡 김구 선생이 환국 후 거주하고 있던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내) 서재에서 때 아닌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바로 2m 앞에서 김구를 저격한 암살이었다. 김구는 이 흉탄에 쓰러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현장에서 즉사했던 것이다. 육사 제8기로 졸업한 안두희는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여 포병사령부에 소속돼 있으면서 그 전부터 김구를 자주 찾아가 시국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범행 후 체포돼 법정에 선 안두희는 그 전부터 이승만과 함께 김구를 국부로 존경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왜 그는 존경해마지 않던 김구를 살해했을까? 그는 1917년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나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에서 유학까지 한 지식인이었다. 또 그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덕분에 대학시절부터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품행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범행은 조폭류의 우발적인 단순 살해가 아니라 해방 후 1947년 그가 서북청년회에 가입하면서 극단적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듯이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정치적 동기에 따른 계획적인 살해였다.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한 동기 혹은 이유, 그리고 단독범인지 배후 세력의 사주를 받았는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검찰조사 그리고 법정에서 행한 안두희의 진술(‘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의 홈페이지에 탑재돼 있는 ‘백범 살인범 안두희 공판기’) 등의 자료들을 종합하면, 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한 이유는 크게 정치적 동기와 개인적 감정이 얽힌 것으로 요약된다. 전자는 비교적 손에 잡힐 듯이 실체가 보이지만 후자는 분명하지가 않다.
첫째, 전자와 관련해서다. 김구와 그가 이끈 한국독립당이 단독정부 수립 반대, 한국 주둔 외국 군사고문단 반대 및 외국군 철퇴 주장, 미국으로부터의 1억5,000만 달러의 경제원조 반대 등등 사사건건 이승만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한 것에 격분해오고 있었다. 특히 김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단독정부 반대를 주장하고 온 뒤부터는 김구를 사상적으로 불온한 것으로 의심했다. 요즘 시쳇말로 하면, 한독당은 반정부적 ‘빨갱이’ 정당이고, 김구에 대해선 ‘종북 좌파’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모자를 씌어놓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그날도 안두희는 김구를 찾아가서 그에게 “본심으로 돌아갈 것을 말했으나 선생은 그럴 때마다 화를 냈다”고 한다. 안두희는 김구에게 “지금 이 때가 바로 선생님이 개심할 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본심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십시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더니 김구는 “크게 노하시며, 에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안두희는 “이 순간, 틀림없이 선생을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하면서 순간적으로 격분해서 권총을 뽑아 살해했다고 한다.
둘째, 후자와 관련해서 그러면 안두희는 범행을 혼자서 한 것일까? 배후가 있었던 것일까? 단독범은 아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결과다. 먼저 김구에 대한 오랜 개인적 사감을 가진 염동진의 부추김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멀리 1930년대 초반 중국국민당군의 중앙군관학교인 낙양군관학교 재학시절 한국인 재학생들은 김구와 이청천의 두 계열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는데, 염동진은 이청천 계열에 속해 김구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장개석 휘하의 반공 결사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해 1944년 11월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 학생들을 규합해 반공 결사조직으로 백의사(白衣社)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백의사는 미군 정보부대인 CIC와 연계해서 반공 테러활동과 대북 첩보활동을 펼쳤으며, 그 일환으로 1946년 3월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암살을 기도한 바 있기도 하고, 북한지역 토착 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을 암살했다. 김구가 피살되고 사흘 뒤인 1949년 6월 29일, 미 육군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이 남긴 기록에는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돼 있다. 안두희는 바로 이 백의사의 조직원(전직 백의사 출신 이성렬은 안두희가 CIC요원과 백의사 요원이 아니라고 한 바 있음)으로 활동하면서 염동진의 사주를 받아 김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안두희의 김구 암살에 이승만 대통령도 개입돼 있었다는 설도 있다. 김구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이나 미국 OSS 또는 이승만의 신임을 받던 육군헌병사령관 김창룡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임시정부 출신으로서 육군헌병사령관을 지낸 퇴역 육군 헌병대령 장흥은 신성모가 배후였다고도 주장한 바 있고, 안두희가 포병사령관 장은산과 김지웅, 홍종만의 사주를 받았다는 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승만과 미국의 배후설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다른 설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낭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구 피살 사건 발생 후, 이승만이 보여준 대응에서 몇 가지 그가 김구의 피살과 관련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만한 증거들이 있다.
이승만은 김구 피살 후 6월 28일, 7월 2일 두 차례 김구 선생 급서와 관련해 성명을 발표했는데, 두 번째 성명에서 이승만은 “김구 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해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만한 때가 되면 물론 반드시 공표될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공표되지 않은 것이 의심쩍은 일 가운데 하나다. 또한 안두희가 김구 총격 후 즉시 사전에 미리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던 듯한 경찰에 체포된 뒤 바로 육군특무대로 이관 연행되어 재판을 받게 됐으며, 법정에서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해줄 것을 판사에게 여러 차례 외쳤지만 무기징역을 받았고, 겨우 석 달 뒤 15년형으로 감형된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부분이 아니다.
당시 판사가 국사범 피고인 안두희를 감싸고도는 심리를 한 것도 배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판사는 그에게 “우국지정에서부터 그런 일을 했으나 인간적으로 선생을 숭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고 다시 한 번 재생하여 창공을 바라보는 그러한 기분을 가질 수 없을까?” 김구 암살을 우국충정에서 한 일이라고? 우국충정만 있다면 사람을 죽여도 죄가 없다는 말인가? 요즘 유행어로 사법적폐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 뒤 안두희는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년 남짓밖에 안 되어 잔형 집행정지라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1950년 7월 10일 다시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했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한 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돼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전역)하였다. 특별사면이라니? 말 그대로 특별하게 봐주는 뒤가 있었다는 소리다. 현역 복직, 잔형 면제, 국사범 전과자를 빠르게 진급시키고 복권시킨 이 모든 것은 배후에서 누군가가 안두희를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 안두희의 김구 암살에 간접적으로 개입돼 있었다는 주장은 당시부터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돼 온 것이다.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한 미 육군 정보장교 조지 실리 소령은 ‘김구 : 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라는 비밀문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 “안두희는 한국주재 미정보부대(CIC) 정보원인데, 암살 명령을 내리면 누구든 죽이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면서 “김구는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했으며, 한국에서 명망 높은 정치인”이라고 한 기록이 있다. 훗날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전면 부인한 바 있지만, 앞으로도 이에 대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 안두희의 김구 살해사건에 관련해 우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면 이렇다. 즉 김구를 최대의 정적으로 여기며 남북통일운동을 가로 막고 단독정부를 세웠고,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 등용과 반공정책을 지지한 반 김구 세력이 배후에 넓게 포진돼 있었고, 그들에 의한 정적 제거를 노린 비열한 암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는 그가 어떻게 죽는가 그리고 죽은 뒤 남겨진 세상 사람들의 평가를 보면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청천벽력 같은 김구의 서거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톱뉴스가 됐다. 전국 각지의 애도와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국외에서도 많은 애도문과 추도문들이 날아왔다. 김구가 암살당했다는 충격적인 비보를 접한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도 직접 김구의 서거를 애도하는 만사(輓詞)를 지어 보냈다.
장개석 이외에도 국민정부 총통을 지낸 이종인(李宗仁), 국민정부 행정원장을 지낸 손문(孫中山)의 아들 손과(孫科), 사법총장을 지낸 왕총혜(王寵惠), 송미령의 동생이자 장개석의 처남으로서 국민정부의 재정부장을 지낸 송자문(宋子文), 한 때 장개석에게 대적했던 군벌 출신 국민당군 장군 염석산(閻錫山) 등등 유력 인사들이 보낸 애도 전문들이 답지했다.
특히 장개석의 만사를 뜯어보면 오랫동안 중국 대륙에서 백범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한 그로선 김구의 급서를 애석해 하고 마음 아파한 애통함이 남달랐던 점이 드러난다. 이 만사에는 장개석이 김구의 서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여러 가지가 엿보인다.
輓 白凡 金九先生
樞星一夜客江山 북두의 맏 별이 하루밤새 강산에 떨어지니
天動地悲水自鳴 하늘이 울고, 땅이 슬퍼하고 물도 절로 우는구나!
別淚溱溱滄海濶 이별의 눈물이 흘러흘러 창해에 넘치고
憤心疊疊泰山輕 분한 마음 첩첩이 쌓여 태산도 가볍소
堂堂義氣生前事 당당한 의기는 살아생전의 일이었구려
烈烈精神死後名 열렬한 정신은 사후에 이름이 남으리라
千秋寃恨憑誰問 천추에 맺힌 원통한 마음 뉘에게 묻겠는가?
寂寞皇陵白日明 적막한 황제의 무덤이 대낮처럼 밝구나!
위 만사의 보이지 않는 행간에는 당시 김구와 장개석 두 사람이 얽혀 있던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내재돼 있다. 김구에 대한 장개석의 진정어린 우의 그리고 반공진영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인 협력 대상으로서 장개석 자신이 기대한 김구가 서거한 것에 대해 크게 애석해 한 심사가 짙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제1연에서 추성(樞星)은 북두의 첫 번째 별을 말하는데, 큰 별로 옮겨도 무방하다. 그냥 “큰 별”이라고 하기 보다는 장개석의 흉중의 심사를 헤아려 “맏 별”로 옮겨봤다. 장개석이 굳이 樞星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김구를 한국의 범위를 넘어서 아시아의 큰 지도자로 인정하는 의미가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제2연에서는 하룻밤(一夜)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 김구의 시해 소식을 들으니 하늘도, 땅과 물도, 즉 천지가 슬피 운다고 했다. 그래서 제3연에서 김구의 서거에 슬퍼해 장개석 자신이 흘린 눈물이 넘쳐흘러 바다에 이를 정도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장개석이 김구가 타계한 것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애통함 외에 자신의 전후 동아시아 반공정책을 함께 할 파트너를 잃었다는 정치적 상실감도 더해 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후 한반도에 친중적인 정치세력이 집권하기를 원했던 장개석은 김구를 지원해 임시정부 계열의 인물들로 한국을 친중적인 위치에 두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개석의 마음속에는 미국의 지지와 지원을 받고자 한 이승만 보다는 김구를 더 가까이, 그리고 더 믿음이 가는 지도자로 봤다.
장개석에게 내심 이러한 심산이 없었다면 장개석이 왜 1945년 11월 하순 김구와 임정 요인들의 환국 직전 환송회를 융숭하게 베풀어준데 그치지 않고 김구에게 정치자금으로 미화 2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거금을 건네 줬는지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우의를 표시한 것이었다라고 보기엔 미화 20만 달러는 너무나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치로 약 40억원 이상의 거금이었다.
아쉽게도 김구는 미 군정청이 허락을 해주지 않아서 이 돈을 국내로 들고 들어올 수 없었다. 이 돈이 국내에 들어와 김구 및 임정 측의 정치자금으로 쓰였더라면, 이승만이 김구 세력을 제압한 배경 중에 하나가 정치자금을 확보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볼 때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지형은 많이 달라졌고, 나아가 건전한 우파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김구는 하는 수 없이 이 돈을 뉴욕 주재 중국대사관에 잠시 맡겨뒀다가 나중에 반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우남 이승만이 귀신 같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승만이 백범에게 이 자금을 자신이 쓸 수 없느냐고 부탁조로 물어오자 김구는 평소 호형호제해오던 우남에게 “아, 형님 쓰세요”라고 흔쾌하게 승낙했다.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상황에 있었다. 전북 정읍을 찾은 이승만이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소위 1946년 6월 3일의 ‘정읍 선언’이 있기 전까지는 두 사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김구는 이승만이 정읍 발언에서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하려면 독립운동을 왜 했는가?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절대로 안 된다. 남북이 갈라지면 동족상잔의 전쟁 밖에 할 것이 없다”고 일갈했다.
김구는 광복 후 한반도가 38도선으로 남북이 갈리고 좌우로 갈려 서로 싸우던 상황에서 전쟁을 예감했던지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만은 피해야 한다면서 이승만과 다른 노선을 택하기 시작했다. 김구가 일부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8년 4월 19일 김규식, 엄항섭과 함께 육로로 38도선을 넘어 평양방문을 결행해 김일성에게 남북이 모두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한 것이 이승만과 다른 노선을 걸은 절정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구에게는 임정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포진해 있었다.
반면, 국내에 자기 기반이나 세력이 없었던 이승만은 친일파들을 받아들였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임정의 한국독립당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친일했던 사람들은 이승만을 옹립하는데 더욱 필사적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식으로 완전히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때부터였다.
어쨌든 김구의 승낙을 받자 이승만은 미국에 갔다가 1947년 4월 귀국하던 길에 이 돈을 받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을 거쳐 중화민국 수도 남경에 들러 장개석과 만났다. 김구는 이승만이 남경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장개석에게 서한을 보내 이승만을 “특별히” 환대해줄 것을 당부했다. 반어법적으로 자금 양도를 거절하라는 의사표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말 장개석은 이승만이 바라던 것과 달리 김구의 소유가 된 정치자금의 양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양도를 거절당한 채 귀국한 뒤에 김구는 재차 장개석에게 서한을 보내 이승만을 환대해줘 대단히 고맙다는 사의를 표했다. 이 역시 이승만에게 자금을 넘겨주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반어법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한다. 김구는 나중에 이 20만 달러 중 절반인 10만 달러를 김구가 중국에 파견한 ‘駐華代表團’(단장 박찬익)에게 중국에 머무르고 있던 한국교민들의 귀국과 연락 등의 업무에 사용하도록 했다. 나머지 10만 달러는 어찌 됐을까? 중화민국은 이 돈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행방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장개석의 만사 얘기로 되돌아가서, 제4연의 ‘憤心’은 백범이 분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김구가 불의의 흉탄에 저격당해 비명에 간 사실이 너무 분하다는 장개석 자신의 얘기다. 제5연에서는 정치 지도자로서 김구의 인품과 품격을 그렸다. 살아생전에 삿됨이 없고 공명정대한 김구의 사람 됨됨이를 “당당한 의기”로 표현한 것이다.
김구가 당당한 의기를 가진 지도자였다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라 장개석이 실제로 겪은 체험에 근거를 둔 평가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직접 김구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눠본 경험으로나, 또 김구를 잘 아는 여타 국민당 고위층 인사들의 전언으로도 그가 의기와 결기를 가진 지도자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제6연에서 장개석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최후의 일각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조국의 독립을 쟁취한 김구의 열렬한 애국애족정신은 사후에도 만고에 남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제7연에서는 20개 성상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항일투쟁의 동지로서 우의를 나눈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게 된 애석함과 원통함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마지막 제8연의 “적막한 황제의 무덤”은 김구가 충분히 일국의 최고 지도자의 寶座에 오를 수 있었음에 견주어 김구의 무덤을 국가지도자의 묘소로 격상시킨 표현이라는 점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김구는 살아생전 하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기 때문에 평소 목숨을 새의 날개 터럭(鴻毛) 같이 여겨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38년 5월 7일, 임정이 중국 장사(長沙)에 피해 있었을 때 남목청(楠木廳)이라는 곳에서 조선혁명당 당원인 이운환이라는 한국인에게 총격을 당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운환은 김구가 임시정부 내 단결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논의한 한인 정당의 3당 합당을 논의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김구를 비롯해 일부 요인들을 저격한 것이었다. (이운환은 김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일제에게 매수돼 저지른 것이었다는 설도 있음.)
병원으로 실려 간 김구는 대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 후유증으로 수전증이 심해져 글씨를 정상적으로 쓰지 못하게 됐다. 그가 쓴 글씨가 “떨림체”라고 불리는 이유다. 장개석이 이때에도 김구의 수술비와 치료비로 3,000원을 지불해줬다.
하지만 안두희에게 불시에 당한 죽음은 너무나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김구의 타계는 친일파를 용인한 이승만의 독주를 막지 못하고 우파가 독재로 나아갈 가능성을 열어줬으며, 더욱이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킬 세력을 견제할 구심점이 상실됐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김구 서거 후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이승만 대통령과 협력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개석이 중공에 대한 반격을 통한 중국대륙의 수복목표를 단념하지 않는 한, 다른 선택지와 대안이 없었다. 당시 주한 중화민국 초대 대사 소육린(邵毓麟)이 파악한 바 이승만은 장개석을 훌륭한 아시아의 민족지도자로 시종 존경해오고 있다고 장개석에게 보고됐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일본, 미국파를 등에 없고 득세하면서 중국 출신 독립운동 인사들을 소외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도 실권이 없었으며, 전국 7개 사단장 중 겨우 두 명의 사단장만이 중국군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 사관학교 출신이었음) 중국에 대해서도 나쁜 인상을 갖고 있는데다 이해도 부족했다. 장개석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이승만 정부와 반공을 위한 협력을 하게 된다. 장개석에게는 중국공산당에 쫓겨 온 뒤로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기회를 엿봐온 중국대륙의 수복이 훨씬 더 중요하고 긴박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글의 원래 주제인 김구에 대한 장개석의 만사로 되돌아가서 촌평을 끝으로 글을 매듭짓기로 하자. 이 세상에 완전한 것과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듯이 현실정치에서 김구와 장개석의 관계 역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지난 세기 일제에 대한 공동 저항이 시대적 과제였던 암울한 시대에 두 지도자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김구 사후, 장개석이 이승만과 그리고 그 뒤에는 박정희와 함께 반공노선을 축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냉전이 동아시아로 전이해온 정세변화에 대응해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며, 단지 국가 이익만이 존재한다고 한 영국 파머스톤 경의 말이 새삼 진리임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자연스런 사례일 뿐이다.
2018. 11. 26. 07:35
북한산 淸勝齋에서
백범 김구재단 김구포럼 학술기획위원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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