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기행 : 일본古文詩 사미시라(さみしら) 해마다 무궁화가 만발할 때면 떠오르는 두 사람의 傳記的 이해
먼저 시를 한 수 읽어보자. 일본어 고문으로 된 장문의 긴 시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시를 한국어로 번역한 어떤 번역자(덕혜옹주를 주제로 한 일본어 저서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펴낸『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역자)가 원래의 일본어를 의역한 게 지나친 면이 있어서 시의 서두 6개 연(아래 일본어 원문이 있는 부분)은 내가 조금씩 수정했다. 나머지 연들은 모두 고치지 않은 번역문 그대로를 실었다.
미쳤다 해도 신의 자식이므로(狂へるも神の子なれば)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あはれさは言はむかたなし)
혼이 빠진 사람을 병구완하느라(魂失せしひとの看取りに)
덧없는 세상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うたかたの世は過ぎむとす。)
젊은 날을 무엇으로 회상하랴(わかき日をなにに偲ばむ)
날 밝기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마음이 흔들릴까?(あたら夜の石の怯えか)
꽃이 아름답게 핀 창을 등지고(花さそふ窓にそむきて)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つづりては破りにし反古か。)
머리카락에서 나는가 하고 생각되는 은은히 퍼지는 향기(髮かともあはく匂ひて)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도(たらの芽のほぐるる朝も)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 있고,(きぬずれのかそけきに似て)
떡갈나무 잎에 내리치는 가을비에 저물었다.(樫の葉のしぐれに暮れぬ。)
사람에겐 젊었거나 늙었거나(ひとじもの若きも老も)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일테지.(せつなきは片戀なら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いまあへていづれと問はば)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지.(老いずまの歎きといはむ。)
이 세상에 신분이 높든 낮든(世に立てる高きと否と)
그리움에 애타는 몸의 마음은 같다.(こがるる身あつきはおなじ)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おほかたはさめなむものぞ)
새벽 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曉のほし薄るるごとく。)
빛바랠 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いろあせ黑きひとみに)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つね目守るまぼろしの影)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네.(うつそみの在りかを知らず)
물어도 대답 없는 사람이여.(言問へどこたへぬくちょ。)
사미시라는 영혼과 비슷해서
사람의 숨결로 타고 온다 한다.
한 번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면
오래 눌러 앉아 나가지 않는다 한다.
호적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누구나 부부라고 하지만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괘씸한 아내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도 있겠지.
이름도 모르는 아비의 아이를 가져
어미가 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어깨를 서로 맞댈 기회조차 없을지라도
서로 통하는 영혼도 있다고 한다.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 된지
이미 봄가을이 손가락으로 세고도 남을 정도로 지났다.
귀엽다고도 사랑스럽다고도 보았다.
그 소녀는 이름을 사미시라라고 한다.
나의 넓지 않은 가슴 한편에
그 소녀가 들어와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인 것을,
마치 마음 놓고 쉴 틈도 없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신하게 무릎을 딱 붙이고 앉아 있다.
하룻밤도 침실로 들이지 않고
꽃잎 같은 입술도 훔치지 않지만
아내라고 부를 것을, 내게 허락해다오.
나이먹지 않고 언제나 어린 아름다운 눈썹의 소녀여.
어떤 때는 당신이 가리키는 입술을
저녁노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색의 요염함에 견주었다.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칠석 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 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내 몸도 또 언젠가는 죽어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 바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서
이 한 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 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산은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고
바다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거라고 생각하여
어느 날 후지산 꼭대기에 올라
쯔루가의 여울이 빛나는 것도 내려다봤다.
또 어느 날은 파도치는 해변가에 나와
하늘을 가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달래어 지지 않고 바위를 끌어안는 것처럼
애처로운 가슴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개미가 모여드는 계곡의 깨끗한 물을
손으로 퍼 올리는 사람은 그 맛을 알고 있겠지.
높은 산봉우리 봉우리에 피는 꽃향기는
볼을 가까이 대야지만 비로소 맡을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내세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환상은 마침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꿈은 꿈으로 깨어나지 않을 뿐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별것 아니야.
죄라고 해도 좋아. 벌도 받지 뭐.
유괴도 좋고 함께 도망을 갈 수도 있어.
함께 죽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뿐인 생명을 받았다.
이 세상을 감히 저주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미 미쳐버렸는가. 아니 아직 미치지 않았어.
지금 내리기 시작한 것은 싸라기눈인가.
무거운 짐차를 끄는 사람은
가끔씩 쉬면서 땀을 훔친다.
얼마간 돈이 생기면
맛있는 술로 목을 축이겠지.
역에 내려 선 사람들은
각각의 걱정거리를 가슴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묵묵히 여기저기로 흩어져 간다.
집에는 불 밝히며 기다리는 아내가 있으니까.
거리에서 광고하는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애처롭다.
볼에 빨갛게 연지를 칠하고 거리에 서서
간판을 걸치고 손짓발짓으로 손님을 청한다.
되돌아 나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어린 여학생의 무리는
내게 가벼운 인사를 한 후 느닷없이 명랑하게들 웃더니
무리지어 화려하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숨 휴식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남모르는 죄를 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 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의 큰 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이 시의 저자는 중국 당대의 白居易(772~846)가 지은 長恨歌를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한가처럼 딱 30개 연 120수를 썼다. 제목은 ‘환영의 처를 그리는 노래’(まぼろしの妻を戀ふる歌)라는 부제가 붙은 ‘외로움’(さみしら)이다. 지은이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옹주 덕혜(德惠, 1912~1989)의 일본인 남편 소우 다께유끼(宗武志, 1908~1985)다. 두 사람의 사정이 어땠는지 몰라도 언뜻 보기만 해도 다께유끼가 자신의 처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시가 수록된 것은 1956년 4월에 간행된 다께유끼의 시집인『海郷』(東京 : 第二書房)이다.
두 사람은 수년 전 8월 내가 대마도(對馬島)에 갔다온 뒤로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무궁화가 만발할 때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한다. 아침 햇살을 받아 찬연한 무궁화 꽃의 자태와 함께 그곳 대마도의 이즈하라(厳原)의 돌담 옆에 있는 덕혜옹주의 비석을 보면서 생겨난 習이다.
모든 게 척박해서 우리의 세종대왕께서 조선에 편입되길 원했던 대마도인들의 간청을 물리치고 “너희들끼리 살라”고 내친 바 있는 섬 대마도! 여행 중 뜻밖에 보게 된 이곳 일본 땅에 화사하게 핀 무궁화가 무척 반가웠지만 어쩐지 앙상블을 느끼지 못했다. 덕혜옹주의 한이 떠오르면서 내게는 통한의 꽃으로 느껴졌다. 평생을 한스런 고통 속에 살다간 덕혜옹주! 외모로는 단아하게 핀 무궁화 꽃을 연상시키지만 속은 현해탄 밤바다의 검은 海水를 떠올리게 한 여인이다. 현해탄 바닷물처럼 검푸르게 속이 멍들었고, 아픔과 한의 깊이가 짚이지 않는 그녀의 삶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의 일본인 남편 소우 다께유끼! 남편이었지만 자기 아내의 한을 풀어주거나 덜어주기엔 어찌 할 방도가 없어 혼자서 고뇌한 사람이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조선의 왕녀 덕혜 옹주를 배우자로 둔 업보로 자신의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고 한, 어쩐지 동정이 가는 남자. 해마다 8월, 무궁화가 활짝 필 때 두 사람이 떠오르면 늘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애석하다 못해 처연함이 결국 올해는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詩 사미시라는 저자의 내심이 쉽게 밝혀지지 않도록 여러 겹의 빗장으로 굳게 걸어 잠궈 두 사람의 과거사를 미궁에 가둬두고자 한 의도가 보인다. 다께유끼는 왜 이런 시를 남겼을까? 과연 두 사람은 어떤 인연이었기에 이역만리의 현해탄을 건너 제국의 심장부에서 백년가약의 부부가 됐고, 그 결말이 왜 비극으로 끝났던 것일까? 여기엔 평심하게 읽어 내려갈 수 없는 한일 근대사의 비극이 휘감겨 있어 개인간 애정사의 범주를 넘어선다. 국가와 폭력과 야만과 침략의 간계가 살을 저미듯 깊숙이 개입돼 있다.
1912년 5월 25일, 초록빛이 짙어가던 덕수궁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어난 아기는 조선의 마지막 옹주 德惠였다. 덕수궁은 당시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의 거처였는데, 여기서 딸을 낳은 것이다. 농와지경(弄瓦之慶)이었다. 덕혜옹주의 어머니는 궁내 소주방 나인 출신으로 고종의 후궁이 되면서 貴人이 됐던 복녕당(福寧堂) 梁貴人이었다.
덕혜옹주는 출생이 대한제국이 망한 뒤인 1912년이었기 때문에 황족은 아니었지만 고종이 회갑을 맞아 태어난 늦둥이 고명딸이어서 고종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신분이 공주가 아닌 옹주라는 걸 핑계로 일제가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생 뒤부터 이름 없이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었고, 1917년 여섯 살 때에 가서야 정식으로 왕족의 이름을 얻었다. 이것이 다가올 그녀의 비극적 삶을 암시한 것이었을까? 비극은 이미 출생 전부터 시대에 잉태돼 있었다. 그녀의 한은 시대가 낳은, 그래서 가냘픈 한 여인의 두 손으로선 아무리 해도 거부하거나 물리칠 수 없는 운명의 소산이다. 그런 의미에선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덕혜옹주의 한을 배태시킨 원흉이지만, 자신과 일족의 부귀영달을 위해 나라와 백성을 송두리 채 일제에 내맡긴 조선의 못난 양반들도 공범이다.
고종은 조선이라는 국호가 유약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해서 고대 三韓을 잇는다는 의식에서 韓에다 大를 붙여 대한제국이라고 국호를 지었다. 그러나 일본이 강제 합병 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으로 되돌려버렸다.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보고 朝鮮人, 즉 “조센징”이라고 부른 연원이었다. 이 땅을 손아귀에 넣은 일제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조선의 국혼을 없애고 조선민중의 저항의 싹을 잘라 내는 일이었다. 두 과제는 서로 같은 맥락에서 위 아래로 서로 맞물려 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 황실을 말살하면 될 일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이 한국인들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이 될까봐 우려하면서 대한제국 황실의 혈통을 묽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들을 다 동원했다. 대한제국 황족을 “朝鮮王公族”이란 이름으로 바꿔 일본 황실 밑에 끼워 넣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즉 일본 천황과 그 일족이 일제의 중심이었다면 대한제국 왕족은 주변으로 밀려난 귀족계급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일본 궁내성에 대한제국 황족의 관리를 전담할 기구인 李王職을 설치해 조선의 황가를 통제했다. 또한 고종과 순종의 왕자와 공주를 모두 일본 황실 친족들과 정략적으로 결혼시켜 대한제국 황실의 피가 섞이도록 하려고 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나는 대한제국 왕족에게 일본식 교육을 시키면 대한제국 황실의 순수성은 크게 흐려질 것이라는 게 일제의 속셈이었다. 한일 강제병합 이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고종과 엄비 사이의 10살 밖에 되지 않은 영친왕 李垠(1897~1970)을 1907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일본 육군교육을 받게 한 뒤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1901~1989)와 혼인시킨 것도 이러한 술책 가운데 하나였다.
평온하게 지내던 덕혜옹주에게 갑자기 슬픔과 사랑의 상실감을 맛보게 한 사건이 찾아왔다. 일제에게 강압적으로 퇴위를 당해 아들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유폐되다시피 덕수궁에서 지낸 고종 황제가 1919년 1월 21일 승하한 것이다. 고종의 죽음이 덕혜에게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맛본 슬픔이었다. 그것은 기구한 삶의 길로 들어서게 한 첫 사건이었다. 68세로 타계한 고종의 죽음은 헤이그에 이준 열사를 극비로 파견해 열강에 대한독립을 호소한 것이 발각돼 일본이 독살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당시 장안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일제가 조선독립을 세계만방에 호소하기 위해 파리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는 고종을 저지한 독살이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대체로 덕혜옹주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은 이 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덕혜는 당시 7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여서 부왕을 죽인 일제의 흉계를 몰랐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3.1기미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보고 부왕의 죽음은 일본 때문이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는 고종의 독살소문에 분격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을 듣고선 파리평화회의 나흘 뒤 왕세자 이은과 마사코와의 혼인을 앞둔 시점에 일본의 간교한 이중성을 봤을지도 모른다.
고종 승하 후 1920년 봄 덕혜옹주는 모친과 함께 관물헌에서 같이 지내면서 산수, 일본어 등을 배우다가 1921년 4월 경성의 히노데(日の出) 소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고, 뒤 이어 정식으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시련이 닥쳐왔다. 덕혜옹주가 13세가 되던 1925년 3월 말 일본 유학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이다. 말이 좋아 내선일체고, 한일 친선이었지 사실 덕혜는 볼모나 다름없었다.
학교생활은 늘 혼자서 외톨이로 말없이 지냈다. 일본측과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끊임없이 받은 상황에서 자유의지가 억압당한 것이 마음을 닫았던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침묵으로 자신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일제의 흉계에 저항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는 덕혜옹주가 이은과 이방자 내외에게는 말도 하고 마음을 닫지 않았다. 이방자 여사는 일기에 덕혜옹주가 “원래 내성적인 편이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밝고 희망에 찬 말투로 장래에 선생님이 돼서……라고 말을 똑 부러지고 씩씩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깜빡깜빡하면서 단지 방에 틀어박혀 있을 뿐입니다”라고 적었다.
일본의 황족과 귀족 자제들이 다닌 學習院 재학시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한 동급생 소우마 유끼까(相馬雪香, 1912~2008)―정치인이자 교육자인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1858~1954)의 딸로서 소우마 야스타네(相馬恵胤, 1913~1994) 자작 부인이 남긴 증언을 보면 이 시기 덕혜옹주가 품위가 없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 보다는 일본 측의 강제와 감시와 억압에 자유의지가 박탈되고, 민족의식에 따른 이질감에 일본인 전체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을 키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혜옹주는 우리들과 같은 제복인 세라복 차림이었습니다만, 시중든 女官들은 핑크색이나 블루나 황색의 한복을 입고 오셔서 마치 天女의 날개옷을 생각하게 하는 듯한 모습으로 사악 교실에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같은 반에 같이 지내면서도 덕혜옹주는 “말수가 적은 분으로, 뭐라고 말해도 그다지 대답을 하시지 않고, ‘하이, 하이’라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놀자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냥 교실에 앉아 계셨습니다”라는 기억을 동급생들에게 남겼다.
일본에 간지 1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고종 승하 후 유일하게 덕혜옹주를 보호해줄 순종황제도 갑작스럽게 원인 모를 이유로 사망했다. 이 일도 덕혜에게는 작지 않은 슬픔과 불안감을 가져다 줬을 것이다. 순종은 배다른 동생이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서 부모처럼 덕혜를 보살펴줬으니 그의 사망은 또 한 번 덕혜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들었다.
덕혜옹주가 뚜렷하게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모친 양 貴人이 유방암으로 사망한 1929년 5월 30일 이후부터였다. 일본 궁내성 李王職이 그녀에게 상복도 못 입게 하고 부모의 3년 상을 치른 뒤 100일간 입는 평상복인 천담복을 입게 했으니 가슴에 쌓인 한의 깊이가 서너 뼘은 더 자라게 했을 거 같다. 1930년 3월 경부터 덕혜는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밤에도 심한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돼도 등교를 거부했다. 보다 못한 이방자 여사가 덕혜를 온천휴양지로 유명한 오오이소(大磯)로 데려가 휴양을 시켰다.
이방자 여사의 일기에 의하면 덕혜는 “여름 방학에는 내가 붙어서 이까호(伊香保)에 피서를 갔지만, 가을이 돼 학교가 시작돼도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며 종일 침상에 붙어서 식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군마(群馬)현에 위치한 이까호 온천은 나도 2년 전 여름에 다녀온 바 있지만, 온천물이 좋고 자연경관이 빼어나 휴양하기엔 일품인 곳이다.
그런데 습하고 무덥기로 소문난 일본의 여름을 서늘한 이까호에서 보낸 것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덕혜가 밤엔 심한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때로는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고 없어서 아까사카 미츠케(赤坂見附) 부근을 걷던 것을 겨우 찾아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정신과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게 하고 간호사를 붙여 당분간은 오오이소의 별장에서 정양을 하게 했다. 그러나 뒤이은 병원 검진 결과 덕혜옹주에게 조발성 치매 증세가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부친 고종과 오라버니 순종의 붕어, 그리고 모친이 차례로 죽어간 슬픔과 아픔이 컸다. 덕혜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충격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특히 모친의 죽음에 대해선 일제는 덕혜옹주에게 상복까지 입지 못하도록 하는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정한 조치를 취했는데, 덕혜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몹쓸 짓이었다.
그런데 일제의 간계는 또 한 번 덕혜옹주를 비극의 장으로 몰아넣었다. 모친이 타계한지 1년밖에 안 된 때 덕혜옹주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일본이 배필로 정해놓은 대마도 舊번주 소우 시게마사(宗重正, 1847~1902)의 조카 다께유끼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만든 것이다. 다께유끼 역시 전혀 생각지도 않게 일본 궁내성으로부터 생면부지의 덕혜옹주와 결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일제가 획책한 정략결혼이었음은 물론이다.
신랑 될 사람인 다께유끼는 1908년 2월 원래 대마도 번주 소우 시게마사의 친동생 구로다 요리유끼(黑田和志, 1851~1917)의 10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도쿄에서 자랐다. 부친 구로다는 원래 소우 시게마사의 친동생이었지만 오늘날 찌바(千葉)현의 3만 석의 쿠루리(久留里)번주 딸이었던 다께유끼의 모친 구로다 레이코(黑田鏻子, 1863~1925) 가계의 대를 잇는 사위로 들어가 성이 소우씨에서 구로다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다께유끼는 나중에 10세가 되던 해 대마도 번주인 큰 아버지의 대를 잇는 양자로 대마도에 보내져 그곳에서 소학교(尋常과정의 高等小學校)와 중학교(對馬중학교, 즉 현재의 對馬고교)를 다녔다. 그는 이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귀족이 다니는 도쿄의 명문 學習院 고등과를 마치고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과를 나온 인재였다.
1930년 두 사람은 일본 궁내성 관리와 쇼와(昭和) 천황의 부인 테이메이(貞明, 1884~1951) 황태후의 주선으로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덕혜옹주의 나이 18세 때였다. 이 시기는 덕혜옹주가 불면증도 조금 좋아지면서 식사도 잘 했고, 말하는 것도 양호해 다께유끼와의 혼담도 순조로웠다. 이듬해 3월, 다께유끼가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5월 8일 두 사람은 도쿄에서 일본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뒤 덕혜 옹주의 시댁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그해 10월 30일부터 11월 6일까지 대마도를 방문했다.
그때까지 일본과 조선 사이에 끼여 마치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오끼나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 나라의 정치상황 변화를 살피면서 외줄 타듯이 이쪽과 저쪽의 눈치를 보면서도 척박한 땅이자 일본 본토 보다 조선이 지리적으로 더 가까워서 경제와 문화적 갈구는 조선에게서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던, 단지 조선을 앞에 둔 국경의 섬으로 치부되고 무시됐던 대마도인들이었다. 조선에 대해 恩怨이 교직된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조상을 둔 그들이 다께유끼의 조선인, 그것도 왕족 아내를 어떻게 맞이했을까? 두 사람의 결혼기념비가 府中의 소재지 이즈하라의 하치망구우(八幡宮) 앞 광장에 세워진 것을 보면 부정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사람은 다케유끼의 조상들을 모신 절에 가서 제배도 했다. 덕혜가 대마도를 방문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결혼 초 한 동안 덕혜옹주는 비교적 평온한 날들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를 방문한 두 사람이 찍은 사진에 보면 덕혜옹주가 어렴풋이 미소를 짓고 있다. 두 사람은 마사에(한국이름 正惠)라는 딸도 놓고 잘 사는 것처럼 보였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남독녀 정혜가 태어난 것은 1932년 8월 14일이었다.
다께유끼와 덕혜옹주 본인이 자신들의 관계에 관해 직접 글을 남긴 게 없는 이상, 다께유끼가 남긴 시에서 두 사람의 혼인, 이국인끼리 만난 것에 대한 소회, 그 뒤 결혼생활 등에 대한 심정을 상상해보거나 추론해보는 수밖에 없다. 다케유끼가 덕혜에 대해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가졌는지는 우리가 이 글 맨 앞에서 감상한 시 ‘사미시라’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의 부제로 달린 “환영의 妻를 그리는 노래”를 보면 다께유끼가 겪은 마음의 시름과 아픔을 어느 정도는 읽힌다. 다께유끼가 이 시를 쓴 것은 그가 덕혜옹주와 결혼하고 1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던 것 같다. 시 사미시라의 제10연에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 된지 이미 봄가을이 손가락으로 세고도 남을 정도로 지났다”고 한 것을 근거로 삼으면 덕혜옹주가 결혼 전부터 안고 있던 조발성 치매 증세가 많이 악화된 대략 1941년 이후가 아니었나 싶다.
“어떤 때는 당신이 가리키는 입술을
저녁노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색의 요염함에 견주었다.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칠석 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아내의 입술이 붉은 색의 저녁노을 같이 요염하게 보였고, 그녀의 눈동자가 칠월칠석 날 밤에 빛나는 별로 보였다고 한 다께유끼의 정감이 덕혜옹주에 대한 연정을 느끼게 한다. 이 시기는 다께유끼가 자신과 유사한 처지, 아니 자신 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고 있는 아내 덕혜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많이 보듬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상 그 역시 10세 때인 소학교 5학년 2학기부터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부모의 품을 떠나 대마도주 소우 시게마사의 양자로 맡겨졌던 처지가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친의 친형님인 큰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니 덕혜옹주의 아픔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당시 항간에 떠도는 얘기로는 다께유끼가 덕혜옹주에게 차갑고 쌀쌀맞게 대했다는 것도 있고, 중매로 혼인을 했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좋지 않은 소문은 다께유끼가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이 준비한 지참금을 보고 덕혜옹주와 결혼 했을 뿐 애초부터 애정은 전혀 없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건 그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부부사이란 바깥에서 남들이 뭐라고 한들 그건 피상적 관찰에 그치는 散見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부도 마찬가지다. 사이가 어땠는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들 둘만이 알 것이다.
다께유끼는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선 덕혜옹주 남편으로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문학자, 시인, 화가로 활동한 그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성을 지녔기 때문에 격동기 망국의 아픔과 부모 형제가 순탄하게 세상을 하직하지 못하게 만든 일제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로 인한 한을 품고 사는 자신의 처에게도 그러한 아픔을 공감하고 위안이 되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은 그의 사람 됨됨이와 교양이었다.
이에 관한 일부를 알 수 있는 것은 덕혜옹주 부부를 다루면서 다께유끼의 위 시를 발굴해 처음 세상에 알린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저서『徳恵姫 李氏朝鮮最後の王女』(덕혜옹주는 왕족이었지만 공주처럼 정실인 왕비에게서 난 왕의 직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殿下’라는 경칭을 붙이지 않고 ‘姫’로 불렀음)다.
혼마는 이 책에서 다케유끼가 상당히 매력적인 남성으로서 큰 키에 미남형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 시가를 짓는 것은 물론, 영어에도 능했으며, 특히 위트도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 학창시절에는 시와 그림에 몰두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예능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후 1946년 6월 귀족원 의원에 선임돼 정치인으로도 활동했고, 말년에는 레이타쿠(麗澤)대학에서 교수로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또 혼마에 의하면, 무엇보다 다께유끼의 시 さみしら를 읽었을 때 흡사 다께유끼가 “따뜻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듯한 갈등을 포함하는”(温かい愛情と憐憫, そしてなんとも言いようがない葛藤を含む) 눈으로 덕혜옹주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혼마가 제대로 봤다면, 다께유끼는 사람 됨됨이가 좋았으며, 천성적인 감성과 상당한 교양을 가진 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결혼 초기엔 다께유끼는 덕혜에게 그렇게 대했던 심사가 다음 연에서도 보인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 된지
이미 봄가을이 손가락으로 세고도 남을 정도로 지났다.
귀엽다고도 사랑스럽다고도 보았다.
그 소녀는 이름을 사미시라라고 한다.”
결혼 초기엔 다께유키는 덕혜옹주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봤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께유끼가 덕혜옹주에게 부인으로서 마땅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에 부응하지 못해서 기대가 점차 실망으로 변해간 듯하다. 그러면서도 다께유키는 병들고 실성 증세가 깊어지는 아내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렸을까? 그러한 심사가 시 사미시라에 나타나 있다.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괘씸한 아내여”라면서도 “혼이 빠진 사람을 병구완하느라 덧없는 세상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호적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누구나 부부라고 하지만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괘씸한 아내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도 있겠지.”
분명한 사실은 결혼 초기엔 두 사람의 감정이나 가정생활이 순조로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께유끼와 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이 굴곡이 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덕혜옹주의 치매가 더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치매증세를 악화시킨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친정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볼모자로서 받은 스트레스, 민족적 정체성을 두고 일어난 남편과의 충돌, 일본인에 대한 민족적 울분, 딸 정혜와의 잦은 다툼, 차별이 유달리 심했던 일본이라는 사회의 집단문화 속에 살면서 당하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수모 등등이 그에게 심한 울화를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들은 거의 다가 아무리 왕족이라 할지라도 조선인이라면 곱게 보지 않고 차별과 멸시의 눈으로 봤던 시대였다.
소녀 시절에는 소강상태에 있던 선천성 정신, 지능질환이 재발된 것이다. 그의 남편은 학문과 직무를 해나가면서 덕혜옹주를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둘 사이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정신병이 악화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발에 대한 걱정”과 “조선의 피를 억지로 무리하게 일본의 피 속에 동화시켜보려고 하는 당국의 의도에 대한 반발도 몰래 느끼고 있었던 나였다”고 기록을 남긴 이방자 여사의 일기가 이를 시사한다.
병의 상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남편과 주변 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이 되지 않자 덕혜는 1946년 가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덕혜옹주의 정신분열 증세는 결혼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나빠져서 병원신세를 지는 일이 잦았다. 이로 인해 애초부터 애정이 없었거나 애정이 식은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엔 피차간의 삶이 너무 고달팠다. 다케유끼의 시에는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는 표현과 덕혜에 대해 가진 애증이 교차돼 나타나 있다.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덕혜옹주를 향한 다께유끼의 애증을 무게로 달면 증보다는 애의 추가 밑으로 기울 것이다. 다께유끼가 남긴 이 시에는 자신의 조선인 처에 대한 생각과 당시 그가 처한 주위의 비난(1950년 이후, 특히 한국인들 사이에 소우 다께유끼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았던 것)을 의식한 듯한 구절도 있어 보인다.
결국 덕혜옹주와 다께유끼 두 사람은 이혼했다. 해방된지 10년이 지난 1955년 6월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덕혜옹주 “친정의 요청”으로 이혼을 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부모는 고사하고 형제도 없는 친정이었는데 누구를 가리켰을까? 이혼을 요청했다면 이방자 여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께유끼는 이 해 가을에 일본인 가쯔무라 요시에(勝村良江)와 재혼해서 오늘날의 치바현 까시와(柏)시로 옮겨 새 살림을 꾸렸지만,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梁德惠’로 고치고 일본호적을 만들어 약 7년 동안 일본에서 병원생활을 했다.
다께유끼는 평생 죽을 때까지 처 덕혜옹주는 물론, 덕혜옹주와의 사이에 난 딸에 관해선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도 그런 그의 뜻을 헤아려 감히 물어보려는 이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게 불가능하고, 다께유끼가 남긴 시들 중에 그의 생각이 나타나 있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덕혜옹주가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던 시점이었다.
하나뿐이었던 딸 정혜도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뒤 23세 때 대학시절 알았던 26세의 중학교 영어교사 스즈끼 노보루(鈴木昇)와 연애 결혼했지만, 결혼한지 석 달도 채 안 돼서 1956년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간 뒤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지점에 이르러 가정이 완전히 파탄 난 셈이다. 불우한 가정사가 자살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거의 매일 같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일과처럼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한창 때인 20대의 딸이 어머니의 실성한 모습, 애정이 말라버린 부부사이에서 일어나는 건조한 장면, 장면을 매일 같이 본다는 것은 참으로 견뎌내기 힘들지 않았겠는가?
더군다나 어머니와는 일본인이냐 조선인이냐 하는 정체성 문제로 갈등이 끊임없었다. 정혜는 자라면서 학교 등 집 밖에서 조선인 어머니를 둔 자신을 “조센징”으로 놀림을 받고,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닌 주변인, 공중에 뜬 인간으로서 심하게 따돌림을 당하는 등 모친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이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던 것도 모녀 사이를 악화시킨 요인으로 보인다.
덕혜옹주는 몸도 쇠약하고 마음도 극도로 우울한 상태에서 1961년 1월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와 같이 살았다. 덕혜옹주가 귀국할 때 마중 나온 옛 상궁을 알아보지 못해서 상궁이 오열했다고 한 것을 보면 치매와 실어증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귀국한 셈이다. 그 뒤 주변의 무관심 속에 귀국 20년 만에야 한국 호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조국의 품이 좋았던 모양이다. 귀국한 뒤 덕혜옹주는 마음이 편했던지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고 글을 쓰기도 했으니 말이다.
훗날 소우 다께유끼는 한국을 방문하여 덕혜옹주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쨌거나 25년이나 부부로 살았던 인연이니 덕혜를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옹주를 돌보던 이방자 여사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다께유끼의 청이 염치없이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으로 돌아가는 다께유끼의 심정은 어땠을까?
1985년 4월 22일, 다께유끼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수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77세였다. 그는 죽기 전 생의 마지막을 정리한 글들을 남기면서 덕혜옹주에게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짤막한 글을 남겼다. 그로부터 4년 뒤 실어증까지 앓던 덕혜옹주도 1989년 4월 21일 만 76세를 일기로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1951년 경, 대마도 이즈하라의 옛날 가네이시(金石) 성터로 옮겨진 덕혜옹주와 소우 다께유끼의 결혼기념비는 지금도 남아 있다. 새겨진 글자들이 선연하지 못해 더욱 외롭게 보이는 암갈색의 비석은 내게 대마도에 피는 무궁화 꽃을 보는 것과 같은, 왠지 모를 부조리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에선 얼굴이며, 자태며 무궁화를 닮은 그녀의 한이 손에 잡힐 듯해서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실 痛恨의 종자였다. 내게는 불교의 唯識學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얘기되는 마나스(manas)識에 갈무리된 이런 종자가 여럿 되는 모양이다. 이런 것들이 모여 자주 애처롭거나 가슴 아프고 슬픈 장면이나 그런 처지의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부의 인연이란 참으로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리는 관계다.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인연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부부의 인연에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뉘앙스로 “愛縁奇縁 혹은 相縁機縁, 아이엔끼엔)”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넘어서고 국적까지 초월하는 관계다. 시 사미시라는 소우 다께유끼가 이국의 왕족 여인과 부부의 인연이 돼 희노애락과 병고를 함께 하면서 남에게 말 못할,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아내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에서 고통, 회한, 비통함으로 이행해갔을 자신의 한을 노래한 것이다. 혼마 야스코가 갈파한 대로 시 사미시라는 소우 다께유끼가 자기 아내를 어딘가에 살고 있을 소녀로 바꿔 놓은 것이다.
대마도 여행 이후 해마다 여름, 무궁화가 활짝 필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두 사람이다. 올해도 그렇다. 저승에서라도 오로지 서로 解寃이 되길 바라고 바랄 뿐이다.
2018. 8. 4. 07:55 초고
2018. 10. 10. 04:29 가필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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