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고전기행 : 莫言의 소설 檀香刑

雲靜, 仰天 2018. 7. 30. 08:29

고전기행 : 莫言의 소설 檀香刑

 

檀香刑(단향형, 중국어 발음은 탄샹싱)! 옛날 중국의 엽기적인 형벌 명칭이자 중국 현대 소설가 모옌(莫言)이 2003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의 제목이다. 발표되자 중국대륙에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킨 탄샹싱은 작가의 대표작이다. 총 18개 장으로 구성된 이 장편소설은 한국에도 번역 소개돼 있다.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탄샹싱』중앙 M&B, 2003년, 1권, 2권).
 
모옌은 장이모(張藝模) 감독이 영화로 제작해 19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소설 ‘紅高粱’(붉은 수수밭)의 원저자이기도 하다. ‘紅高粱’은 한국에서도 상영돼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남녀간의 애정과 중국의 항일 민족주의를 엮은 영화다.
 
긴 여로에 오르는데 이 작품의 지은이를 빼놓고 갈 순 없다. 먼저 작가부터 대충 훑어보고 가자. 1955년 山東(산둥)성 까오미(高密)縣에서 태어난 모옌은 본명이 꽌모예(管謨業)다.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81년 ‘봄밤에 내리는 소낙비’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대부분의 중국 현대소설가들이 중국공산당 체제 내에서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썼던 것에 반해 모옌은 인간의 심리와 정신을 깊이 파헤쳤다. 중국 문학평론가들의 평단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魔幻 현실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소설작품에서 독특한 주관적 감각세계를 그려내고 있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탄샹싱 외에 豊乳肥臀, 歡樂, 四十一炮, 白狗秋千架, 酒國, 食草家族, 蛙 등 약 10편이 있다.
 
모옌은 탄샹싱이 중국의 저명한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제6회 마오뚠(茅盾)문학상의 예선을 통과하고 최종 투표에서 한 표 차이로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제1회 띵꺼우(鼎鈞雙年)문학상을 수상했다. 모옌이 마오뚠 문학상을 받은 것은 2011년 장편소설 ‘개구리’(蛙)가 당선된 제8회 때였고, 이어서 이듬해 10월에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돼 현대 중국문단에서 최고의 소설작가로 올라섰다.
 
 

중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

 
작가는 기나긴 이 장편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기에 탄샹싱을 주제로 삼았을까? 모옌이 작품 제목을 탄샹싱이라고 한 이유는 엽기적으로 잔혹한 탄샹싱이 집행되기까지 다섯 사람의 주요 등장인물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애증, 사랑, 분노, 갈등, 반외세 민족의식, 외세에 비굴하게 굴복한 청조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들을 응집시켰다가 이 형의 집행을 정점으로 대미가 장식되는 구도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탄샹싱은 원래 고대 중국에서 시행돼오던 형벌의 한 종류였다. 수년 전 중국 고대의 주요 형벌들을 소개한 바 있지만 탕샹싱은 이번에 처음 소개하는 형벌이다. 檀香은 박달나무다. 박달나무는 단단하기로는 나무 중 최고다. 탄샹싱은 죄수를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놓고 박달나무로 매끄러운 꼬챙이를 만들어 참기름에 잘 삶은 후 이를 죄수의 항문에서 미골 사이로 위로 쑤셔 넣어 내장을 상하지 않게 관통시켜 목 뒤로 빼낸 다음 최소 5일 동안 숨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형벌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도와 중국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각지의 박물관들에 진열된 갖가지 고대의 형벌도구들을 보면서 자료수집용으로 사진도 찍고 관련 글로 쓴 바 있다. 과거 전제 왕권이 수십 세기 지속된 유럽의 형벌도 잔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인도, 페르시아, 유럽, 중국 등 전제국가로서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많은 형벌이 고안되고 집행됐다. 탄샹싱도 잔인하기로는 이에 뒤지지 않는다.
 
무시무시하고 소름이 돋는 이 탄샹싱을 당하는 자의 고통을 상상해보라! 숨이 끊어지지 않는 5일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자신이 이 형에 처해져 있다고 상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지 않는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은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가 모옌은 탄샹싱이 작품의 주제인 만큼 이 형의 집행에 대해 몇 개 장을 할애해 자세하게 묘사해놓고 있는데, 중국문학 용어로는 각기 猪肚部와 豹尾部라고 하는 소설의 핵심부에 걸쳐 있다. 猪肚部와 豹尾部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뒤에서 거론된다.
 
탄샹싱은 능지처참에 비견되진 않더라도 대단히 엽기적이며 참혹한 형벌인 것만은 분명하다. 능지처참은 이 소설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소설에는 능지처참이 세 등급으로 나뉘어 묘사되고 있다. 1등급이 죄수의 몸을 3,357조각으로 잘라내고, 2등급이 2,987조각, 3등급이 1,585조각으로 잘라내는 것이다. 1등급은 2등급인 2,987번 칼질을 해도 죄수가 살아 있어야만 3,357번을 칼질할 수 있다. 그러나 모옌은 성품이 모질지가 못해서 그런지 소설 속에서는 망나니로 하여금 이 정도로 많이 잘라내지는 못하고 500조각으로 살을 도려내게 했다. 물론 마지막 최후의 500번째 칼질을 할 때까지 죄수는 살아 있었다.
 
소설에서는 가슴 근육을 다 도려내고 나자 갈비뼈 사이로 얇은 막에 싸여 뛰는 심장이 보인다고 묘사돼 있다. 이쯤 되면 살을 잘라낸다고 표현하기보다는 발라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리곤 죄수의 성기를 잡아당겨 세 번에 걸쳐 잘라내고, 주사를 자주 맞으면 혈관이 숨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통을 당해 사타구니 속에 숨어 있던 고환은 칼로 파낸다고 되어 있다. 끝으로 두 귀와 코를 도려내고, 498번과 499번째에는 두 눈을 도려낸다. 맨 마지막 500번째 칼질은 죄수의 심장에 꽂는 것으로 능지처참형의 대미를 장식했다.
 
 

프랑스 선교사가 찍은 실제 형벌집행 장면. 능지처참형과 비슷하게 신체의 주요 부분의 살점을 뜯어내거나 도려내는 가혹하고 야만적인 형벌이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독일이 청조정부에게 ‘膠澳租借條約’ 체결을 강제해 산둥성을 자국의 세력범위로 넣고 이곳 내지의 풍부한 광산 자원을 약탈하기 시작한 1897년에서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일어난 1900년 여름까지의 중국 산둥성, 그 중에서도 특히 高密縣 東北鄕이다. 1899년 가을, 쟈오지(膠濟)철로는 칭다오(靑島)에서 서쪽으로 놓이기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까오미 현 경계에 이르렀다. 이 지역에는 특이하게도 강물이 대부분 남북으로 흘렀다. 쟈오저우(膠州)-지난(濟南) 간 철도인 쟈오지선 철로를 부설한답시고 수로를 막고, 큰물이 논밭에 넘쳐나게 돼 농사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됐다.
 
철로와 기차라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낯선 근대문명의 이 괴물은 피해를 보게 된 현지인들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상것이고 사대부이고 간에 서방문명에 대한 무지는 온갖 소문과 괴담을 낳았다. 즉 화차가 일단 발진해오면 주변 십 몇 리는 모두 공포감에 휩싸이고 만다. 화차에 대한 공포심리에다 독일인의 야만행위들이 더해지자 까오미 현 중국민중들의 독일인에 대한 적개심이 들불처럼 격하게 일어났다. 그것이 쌓여 결국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해 독일에 대해 항거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한 항거를 주도한 중심인물이 쑨원(孫文)이라는 사람이었다. 성과 이름은 같아도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을 세운 혁명가 쑨원과 다른 인물이다.
 
쑨원은 1899년 11월, 1900년 1월, 4월과 7월 네 차례에 걸쳐 청조의 군대와 독일군에 저항하는 민중들을 인솔해 그들을 기습하거나 까오미현성을 점거하다가 나중엔 진압되면서 체포되고 만다. 나중에 민중들이 쑨원을 구출하려고 성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쑨원은 결국 살해되고 만 일이 있었다. 쑨원은 비록 처형됐지만 까오미 현 민중들의 마음속에 민족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혈기왕성한 의로운 이가 가고나자 증기를 뿜어내는 화차가 다가왔다. 흰색의 증기는 흩어지고 없어졌지만, 쑨원의 대독일 항쟁 얘기는 까오미, 쟈오저우(膠州) 일대와 쟈오지철로의 상공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쑨원 얘기는 까오미 현의 많은 예술인들에게도 높이 평가돼 여러 가지 지방극과 창극으로 시연되곤 했다. 그러한 창은 압박을 받던 아녀자들의 피울음이 섞인 호소처럼 극화되곤 했다. 까오미 현에서 나고 자란 모옌은 어릴 적부터 노인들의 입에서 철도부설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에 저항한 쑨원의 고사를 수없이 많이 들었다. 작가 모옌이 어릴 적에 고향에서 자라면서 누누이 들은 이러한 얘기들을 바탕으로 극화한 소설이 바로 이 탄샹싱이다. 그것은 실제 淸末民初 산둥성에서 일어났던 쑨원의 행적을 주인공 및 등장인물과 내용을 조금 바꿔서 만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남자 주인공에 대해 탄샹싱을 집행하게 되는 시대적 배경과 연유 그리고 실제 형집행을 주요 동선으로 전개된다. 중국청조가 정치적으로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굵직한 사건들, 예컨대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탄스퉁(譚嗣同) 등의 개혁파 인사들이 일으킨 戊戌變法(변법자강운동), 의화단사건, 열강들의 중국침략과 약탈 사건들이 언급된다. 이른바 ‘의화단사건’이란 민중봉기 세력인 의화단이 중국을 침략해온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일본 등 이른바 ‘8개국 연합군’에 “扶淸滅洋”(청조를 부흥시키고 서양오랑캐를 멸하자)이라는 기치를 들고 저항한 반외세 봉기였다.
 
그들은 처음엔 서방열강에게 저항하다가 나중엔 저자세로 타협해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국권을 넘긴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에게 창을 돌렸다. 베이징을 점령한 서방 열강의 8개국연합군에게 의화단이 공격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청 조정에 거대한 배상을 물게 했다. 의화단 세력이 가장 성했던 곳은 베이징을 둘러싼 허뻬이(河北)성, 러허(熱河), 산둥성 등지였다. 1900년 독일이 쟈오지선을 건설한 산둥지역에서 저항한 의화단을 진압한 것은 산둥성장 위앤스카이(袁世凱)였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허약한 청조를 압박해 철도를 부설한 독일의 폭압과 서양문명 및 침략 그리고 이에 저항한 중국 저층민들의 저항과 민족의식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고 뒤이어 서방 열강들이 제각기 청나라를 과일 자르듯이 잘라서 일정한 지역을 서로 나눠 가지려고 한 이른바 ‘瓜占’이 진행되는 내우외환의 위기 상황에서 독일은 산둥성을 기반으로 잡았고, 이곳에다 청조 정부로부터 획득한 철도부설권을 행사해 쟈오지선을 부설한 것이다. 1898년 9월 철로부설을 위한 측량작업을 개시해 1899년 겨울 쟈오지선 측량작업을 까오미현성의 시하오리(西濠里) 일대로까지 연장했다.
 
소설에서 실제 사건은 독일이 중국 산둥성 省長 위앤스카이의 지원 아래 까오미현 동북향 지역에 철로를 놓는 것이 거시적인 발단의 배경이었다. 까오미현은 과거에 급제한 진사 출신의 문인이면서도 무술도 뛰어나고 기개가 높은 현령 치엔띵(錢丁)의 관할이었다. 이 마을엔 연극 배우인 쑨삥과 그의 딸 쑨메이냥(孫眉娘), 짜오샤오쟈오(趙小甲)라는 이름의 백정 등이 살고 있었다.
 
쑨메이냥 역시 어릴 적부터 부친 쑨삥을 따라 연극을 하던 배우 출신이었는데, 전통적으로 전족(foot binding)이 여성의 아름다운 발로 여겨져 온 시대에 여자로서는 발이 큰 치명적인 흠 때문에 정상인과 혼인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나중에 반은 바보 같아서 온전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백정 짜오샤오쟈오에게 시집을 갔다.
 
짜오샤오쟈오는 키가 크고 이마가 훌떡 벗겨진 대머리로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바보였는데, 까오미 현 일대에서 백정으로 널리 알려졌다. 쑨메이냥은 바보에게 시집을 갈 수밖에 없었던 백정의 젊은 아내로서 개고기를 안주로 파는 주점을 운영하지만, 얼굴 하나 만큼은 고을에선 “개고기집 쑨씨가 최고의 미녀”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잘 생겼다. 두 사람은 무늬만 부부였지 아내는 남편을 건성으로 대하고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어느 날 갑자기 짜오샤오쟈오의 친부인 짜오쟈오(趙甲)가 이 마을의 아들집으로 찾아와 같이 살게 됐다. 그는 수도 베이징 청조 조정의 형부에서 수백 명의 고관대작과 나리들을 처형한 당대 최고의 망나니(首席劍子手)였다. 소설에서 냉혈인간으로 그려진 짜오쟈오는 자기 스승을 죽인 것 이외에 형부에서 정확히 44년간 각종 형을 집행하면서 그의 손에 목이 잘린 이는 무려 987명이나 된다고 했다. 작가의 표현대로 까오미 현 일대에서 1년에 생산되는 수박덩이 보다 더 많았다.
 
그 가운데는 무술정변을 일으켰다가 사전에 모의가 발각돼 사형에 처해져 목이 달아난 이른바 “무술 6군자”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실권자인 서태후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짜오쟈오는 서태후와 황제로부터 엄청난 상(서태후가 사용하던 염주와 황제가 앉던 의자)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백정 아들, 며느리 쑨메이냥과 함께 살게 됐다. 이 냉혹하고도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인물은 처음에 그의 지방에서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며느리도 반년 후에야 자기 시아버지가 죄수를 죽이는 망나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편, 어느 청명절 날 우연한 기회에 쑨메이냥은 현령 치엔띵의 남성다움과 기개에 매료된 나머지 상사병을 앓고 있던 중 결국 견디다 못해 개고기가 든 바구니와 술을 들고 직접 현청의 관아로 찾아가 신분과 나이 차이를 넘어 현령과 한 몸으로 뒤엉겨 농밀하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게 됐다. 그 뒤 두 사람의 관계는 3년이나 지속됐고, 겉으로는 양아버지와 수양딸인 것처럼 가장해도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고을에 퍼졌다.
 
소설은 여주인공 쑨메이냥이라고 불린 개고기집 여주인이 소설 전체의 결말을 혼자서 독백하면서 시작된다. 소설 속에서 쑨메이냥이 사는 곳이자 작가 모옌의 실제 고향이기도 한 까오미縣에 독일 병사들이 침입해와 “시골 밭에다 철로를 놓으면서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쳤다.” 이에 쑨메이냥의 아버지인 쑨삥(孫丙)이 분격한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독일 군인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찾아가자 독일 군대는 그들에게 대포를 쏴댔다.
 
마을 사람들이 저항하자 독일 군대는 무고한 양민을 칼로 베고 도끼로 찍어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방불케 하다시피 해서 마을 벌판에 시체가 널브러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쑨삥은 산둥성장인 위앤스카이의 엄명을 받은 현령에게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쑨메이냥의 시아버지가 된 짜오쟈오(趙甲)가 위앤스카이와 독일 총독 커로트(克羅德)의 지시를 받고선 자신의 사돈인 쑨삥에게 “탄샹싱이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무서운 형벌을 가했다.” 쑨메이냥은 이렇게 말했다. “시아버지 쨔오쟈오는 내 아버지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며느리인 내 손에 죽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나도 감히 칼을 들어 시아버지를 찌르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죠.”
 
소설은 위 내용을 큰 줄거리로 전개된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버지를 그다지 존경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쑨메이냥이 목숨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자신의 부친 쑨삥이었다. 쑨삥은 보통사람이었다. 술 마시길 좋아하고, 의리와 의기를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산둥 지방을 무대로 떠돌아다니던 지방 유랑극단의 단장 겸 배우였다.
 
어느 날, 그는 독일인들이 시장통에서 악기를 타는 아내를 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격분한 나머지 바로 독일인을 몽둥이로 패 죽임에 따라 그 뒤부터 본의 아니게 모반과 저항의 길로 들어서게 된 운명을 걸었다. 동료가 타살된 것에 분노한 독일 병사들은 득달 같이 달려와 쑨삥의 아내와 두 아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까지 눈에 띄는 대로 모두 죽였다.
 
위기에 처한 쑨삥은 일단 사건현장에서 도망쳐 농민 의병조직인 의화단에 들어갔다가 마을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독일군과 청조의 지방정청의 관병에 대항하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현령 치엔띵이었다. 치엔띵은 처음엔 淸末의 혼탁상과 독일인들의 침탈에 어떻게 하면 조정의 지시에 반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돌볼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러다가 그가 결국 의화단의 봉기로 외세에 저항하는 쑨삥의 민족정신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쑨삥이 자신의 젊은 情婦인 쑨메이냥의 친부임을 알고서도 쑨삥을 체포해버린다. 이유는 자기가 다스리는 현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치엔띵은 마음속으로 늘 선비의 도를 제일로 여겼지만 쑨메이냥과의 정분은 쉽게 정리하지 못했다. 젊은 미인과의 육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는 천성이 솔직하고 선량(耿直善良)함 때문에 이 사건에 연루된 뒤 모순된 자신의 가치관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쑨삥을 놓아 주려고 하지는 못했다. 선비이자 관리로서의 양심 때문에 그가 조정과 선비의 도를 고수한 결과는 결국 쑨메이냥이 자신의 친부를 살릴 수 없게 만들었다.
 
한편, 과거 베이징의 형부 소속 망나니였던 짜오쟈오의 날렵한 솜씨에 탄복한 위앤스카이와 독일 총독 커로트는 사로잡힌 쑨삥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형벌임은 물론, 세계 형벌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유례없는 慘刑인 탄샹싱을 행하도록 지시했다. 독일이 놓은 쟈오지선 철도의 개통식이 있는 8월 중순까지는 쑨삥을 고통을 받게 하면서 살려 놓았다가 개통식날 식에 맞춰 독일에 저항한 중국민중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보란듯이 극적으로 죽이기 위해서였다.
 
지시를 받은 짜오쟈오는 바보 아들을 자신의 대를 잇는 청조 최고의 망나니로 키울 겸 해서 조수로 삼아 탄샹싱을 집행하기 위한 준비를 주도면밀하게 했다. 그는 자기 사돈에 대한 예우로 후대에 혁명가로서의 그 이름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최대한 장엄하게 탄샹싱을 실행할 요량으로 십자가 형틀에 쑨삥을 묶어놓았다.
 
짜오쟈오는 사형집행으로 사돈은 사돈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청조 최고의 망나니로서 천하에 이름을 날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쑨삥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돈! 이 같은 좋은 전기를 쓸 수 있으니 당신은 정말로 복된 사람이요.” 쑨삥은 살아 있을 적에 독일군에게 저항한 영웅이었으니 죽음에 직면해서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영웅다운 기개로 죽으려고 했다.
 
마침내 형벌 집행이 시작됐다. 저자 모옌은 박달나무로 만든 쐐기를 항문에서 박아 넣어 내장이 다치지 않고 위로 하체와 상체를 관통시켜 목 뒤로 나오게 하는 과정을 마치 현장에 나와 이를 구경하는 민중들이 보는 것처럼 현장감 있게 생생히 묘사했다. 짜오 부자는 어렵사리 형 집행을 완료한 뒤 사형수가 바로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고급 인삼을 달여 쑨삥의 입으로 부어넣는 작업도 수행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있는 쑨삥의 고통도 더해갔지만 숨이 끊어지기에는 아직도 하루가 남았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사형 집행 감독관인 치엔띵 현령이 그간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눌려 놓았던 민족의식이 되살아나 형벌이 위앤스카이와 독일 측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쑨삥을 처형대에서 자신의 손으로 찔러 죽여 버렸다.
 
이와 동시에 서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쑨메이냥도 친아버지에게 참형을 가한 시아버지 짜오쟈오를 찔러 죽인다. 형틀에 묶인 쑨삥의 입에서 피가 솟구치면서 한 마디 짧은 말이 튀어나왔다. “연극은……끝났다…….”(戲……演完了) 작품은 여기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작품에서 탄샹싱을 당해 희생된 쑨삥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혹독하게 전개된 중국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살았던 중국인민을 상징한다. 그의 딸 쑨메이냥 역시 효심 가득한 여식으로서 순량한 중국의 백성을 상징한다. 현령 치엔띵은 외세에 저항한 중국을 상징하고, 짜오쟈오는 중국인으로서 서방 침략자들에게 협조한 漢奸, 즉 매국노를 상징했다. 잔혹하고 교활한 위앤스카이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 보다 아래에 둔 전형적인 출세지향적, 권력지향적인 관료를 상징한다.
 
짜오쟈오의 바보 아들 짜오샤오쟈오는 일부 중국민중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다섯 주인공 중 자기 부인과 함께 나머지 주인공들과 전체 소설에 걸쳐 서로 얽혀 사건이 전개되고 있어 글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모옌은 이 소설에서 모든 까오미 둥뻬이 향의 민간인물의 형상들을 전반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고, 독자들에게 20세기 초 중국이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당한 침략으로 말미암아 입게 된 공포, 참혹, 압박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참상의 현장을 재현해주고 있다.
 
소설 탄샹싱의 구성을 보면 크게 鳳頭部, 猪肚部, 豹尾部 세 부분으로 돼 있다. 이러한 소설구성은 중국 전래의 기법이다. “鳳頭, 猪肚, 豹尾”는 元代 희곡작가 챠오펀푸(喬焚符)가 쓴 “樂府”의 장을 가르는 수법(章法)에서 나온 “六字訣”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시작(起)은 봉황새의 머리처럼 아름답게 시작하고, 중간은 호방해야 하고, 매듭(結)은 우렁차게 끝낸다는 것인데, 특히 얘기의 흐름이 수미일관해야 하고 의미가 청신해야 한다. 이러한 기법은 명청대 소설에서도 내용과 형식면에서 많이 나타난다. “鳳頭部”는 쑨삥 이외 4명의 주인공이 제각기 독백방식으로 극이 전개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猪肚부분은 全知的 시각을 사용해 직접 독자에게 얘기를 서술했다. 주인공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각기 자신의 신분적 특색을 드러내게 해 “猪肚部”의 사건을 전개시킨다. 이미 서술한 언어를 통해 사실들, 인물배경, 사건의 인과관계, 환경 분위기 등등을 소개한다. 그런데 鳳頭部와 豹尾部에서 서사의 시각을 제한해 주요 인물과 줄거리와 관련지어 매 주인공의 서술순서가 전체 소설과 불가분의 부분이 되게 만드는 수법이다.
 
豹尾部에서도 쑨삥이 형을 당하는 것을 중심으로 여러 층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이 묘사되고 있다. 쑨삥의 영웅적 면모를 입체감 있게 그려냄으로써 까오미 둥뻬이 향촌민들의 정의감, 강권에 굴하지 않는 투쟁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에 “연극은 끝났다”고 말하게 한 것은 쑨삥이 극을 사랑하고 극에 빠져들어 극이 자신의 인생과 일치되게 만듦으로써 육신과 극이 하나가 되는 광대의 관성적 사유, 동시에 전통사회 청조의 관리와 독일 침략자들의 야만성을 드러냄으로써 잔혹한 형벌의 연극과 죄악행위를 동일시한 것이다.
 
작가 모옌은 이 소설을 통해 어떤 사상적 메시지를 펼쳐 보이려고 했을까? 국가와 민간, 야만과 문명, 정분과 국가에 대한 충, 사랑과 효의 이원화된 대비 속에 저물어가는 晩淸의 모순이 작가가 생각한 구도였다. 외세와 자국 정부로부터 가해지는 침탈과 질곡이 극도로 높아져 비등점으로 향하고 민중의 생존 조건이 피폐할수록 삶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외세가 삶의 터전을 뒤흔들고 자기 국가로부터도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면 민중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봉기뿐이다. 아마 작가 모옌은 이 엽기적인 소설을 통하여 이를 표현하고자 한 게 아닐까 싶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작가의 대비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의 특장이기도 하다. 저자가 탄샹싱 집행과정에서 사디즘과 매조키즘적인 심리상태를 버무린 점이다. 망나니 짜오쟈오가 형틀에 묶인 쑨삥에게 학대를 가하면서 스스로 도취되는가 하면, 현령 치엔띵이 쑨삥이 잔혹한 형을 받게 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절의를 완성했다는 것은 매조키즘이 아니고 뭔가? 이는 바로 작가가 중국인의 국민성이 아닌가하는 점을 무의식 속에 의식하도록 만드는 느낌이다.
 
즉 민중들에게 생명의 위험을 느끼게 하고, 혈족 간에 서로 싸우고 다치게 한 것은 근원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청조의 무능과 부패에 기인하고 있는데, 작가 모옌의 후각을 건드려 피비린내를 맡게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통해 모옌은 중국의 전근대성과 야만성을 고발하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작가가 의도한 대비 중의 한 가지다. 청조는 문명국이라고 자임한 서방 열강들이 각종 형벌을 야만적인 것이라고 한 비난과 폐지의 압력에 못 이겨 1905년에 이 형벌을 폐지했다.
 
야만과 문명의 대비는 망나니 짜오쟈오의 탄샹싱 형집행 그리고 그에 대한 의식에서 두드러진다. 중국의 사형 집행을 하나의 예술로 본 그는 사형집행 방법의 잔인성 정도로 봤을 때 보기만 해도 공포감을 자아내는 서양의 단두대를 원시적인 것으로 코웃음 쳤다. 중국의 형벌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형집행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과 정밀한 연구를 거쳐 세계 최고의 경지에 와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탄샹싱은 유럽인들이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으스댔다. 그는 탄샹싱을 집행하는 것은 청국이라는 나라의 존엄성을 위한 것이라면서 자신의 형집행을 스스로 위대한 행위로 생각했다.
 
이러한 의식은 짜오쟈오가 탄샹싱을 집행하라고 명령한 위앤스카이에게 아뢴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소인은 천하지만 소인이 종사하고 있는 일은 천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인들은 국가 권위의 상징이며 나라의 법령도 나중에는 소인들 때문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또 자신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아래 연극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정교한 연극은 없소. 천하의 사형 방법 중에서 탄샹싱 형벌보다 더 정교한 것은 없노라. 전국을 다 뒤진다 해도 탄샹싱이라는 형벌을 집행할 수 있는 망나니가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정말이지 정권 말기가 되자 청조에서 능지처참형을 그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 모옌은 이 소설을 전개시키면서 산문, 희극적 문체, 자기 道白의 대량 사용에 전혀 구애 받지 않았다. 그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 문체의 유창함을 더하기 위해선 희극화는 물론, 과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컨대 소설 중 대화에서 야옹~야옹~ 거리는 고양이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쑨삥이 연극을 했을 때 고양이 연극단원들이 반주로 창을 해주던 그 소리였다. 그 소리는 특히 탄샹싱 집행과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는 하반부에 가면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 상황의 긴박감을 고조시킨다.
 
예를 들면 쑨삥이 사형 집행장의 승천대에 매여 형을 받아 생명이 다해가는 상황에서 연극단원들이 “생명을 잃다니~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는구나~.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소리를 내면서 창을 하는 식이다. 이 소리는 실제 고양이 연극단원들이 형장에서 직접 창을 하는 소리이기도 했지만, 쑨메이냥과 그의 바보 남편도 혼자서 독백할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하게 했다.
 
작가는 왜 이런 소리를 대화에서나 혼자 하는 독백에서도 나오도록 넣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감지되는 쑨삥의 생명의식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이 특이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민중들의 고통과 질곡의 삶에서 비롯된 생명의식이 감지되는 것과 연결된다. 그것은 쑨삥의 삶을 관통하는 것으로서 청조라는 국가의 대립 구도에서 펼쳐지는 민중의 의식이기도 하다.
 
민중의 삶들이 전개되는 민간은 국가와 대립되는 또 다른 생존공간이다. 민중의 삶과 생명은 국가의 통치계급 주류의 그것과는 결이 다른 생명의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민중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린다. 민중의 생명과 문화는 국가권력의 통제를 받는 박약한 영역에서 만들어지지만 관리 계급과 달리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활발한 형식을 띄며 스스로 그것을 보존하며, 비교적 진실하게 민중생활의 진면목과 하층 인민들의 정신세계가 표현되는 곳이다.
 
소설 탄샹싱에서 배우 쑨삥이 형을 받기까지 보여준 그의 야성적인 생명의식은 국가와 다른 민중의 삶과 애환을 체현하고자 한 민간예술의 化身이다. 쑨삥은 고양이극이라는 민간예술 형식의 대변자이자 집대성자였다. 일생 동안 30여년 간을 줄곧 연극을 해왔고 마지막엔 자신과 연극이 합일된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쑨삥과 고양이극은 일체가 되고 고양이극은 바로 그의 생명형태의 표현이었다. 즉 쑨메이냥이 말한 대로다. “아버지, 당신은 반평생을 극을 노래했어요. 연극한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얘기였어요. 그들의 경험에 당신이 몸으로 깨친 바를 집어넣었죠. 이번엔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연극하게 됐으니 평생을 연극해오다가 결국 마지막엔 당신 자신을 연극하는군요?”
 
쑨삥은 그 자신이 보기에 전체 생명의 전개과정은 바로 고양이 연극이었다. 처가 독일군에게 능욕을 당한 일, 원수에 대한 저항 등 인생 후반에 겪은 신산했던 희노애락, 슬픔과 기쁨이 모두 흩어져 있던 것이 탄샹싱의 형 집행 종결에 응집돼 모아진다.
 
처량하고도 애절하게 부른 한스런 통곡은 그가 평생 동안 뼈저리게 느낀 회한임과 동시에 생명이 다해가는 종착 지점이었다. 쑨삥이 형틀에 매여 애절하고 미친듯이 부른 곡과 단원들의 반주는 사랑과 한이 교직된 얘기로서 운명이 다해 가는 만주 왕조 통치 집단의 잔인하고 악랄함, 서방열강의 잔악함에 대한 피지배 민중의 원망이자 울부짖음으로 들린다.
 
탄샹싱을 당하면 누구라도 참수로 목이 달아난 자처럼 바로 절명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받으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돼 있다. 마치 산소가 부족한 어항 속의 물고기나 산소가 떨어져 가는 잠수함 속의 토끼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가듯이. 고통의 정도와 생명에 대한 경건함을 고려하면 차라리 참수가 낫다.
 
이 긴 장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에 이르자 필자는 불현듯 ‘대한민국’의 몰골이 떠올랐다. 탄샹싱 참형을 당한 자는 누구든지 서서히 죽어가듯이 대한민국도 서서히 죽어가는 나라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겉으론 평화로워 보여도 속에서는 온갖 갈등과 반목과 투쟁이 끊이질 않고 있으니 말이다. 모든 물리적 존재는 시간이 경과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함에 따라 끝내는 무질서하게 돼 소멸해버린다는, 우주 삼라만상에 적용되지 않는 데가 없는 궁극적인 물리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처럼 말이다.
 
인간의 도가 사라지고 非人의 邪術이 판친다. 세상 전체가 다 썩고 또 썩었다. 마땅히 정의를 외쳐야 할 기관들마저 금권에 눈치를 보고 정의의식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그 자리에 탐욕의 무리들이 횡행하는 한국사회를 보면 종국엔 소멸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탄샹싱의 형벌과 오버랩 되는 것이다. 나라의 운명과 겹쳐지는 건 아무래도 이 소설이 그렇게 느끼게 한 게 아니고 7월 염천에 정신이 덴 탓이겠지? 기우로 끝날 지나친 비약일테지? 아무래도 그렇지 응? 야옹, 야옹, 야옹!
 
2018. 7. 30. 08:00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草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