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고전기행 : 曹植의 七步詩

雲靜, 仰天 2018. 3. 19. 23:35

고전기행 : 曹植의 七步詩

   

여인에게 눈이 멀면 형제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될까? 한 여인을 두고 두 형제가 각기 좋아하면 그리 될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형제가 일국의 왕과 그 동생 신분이어서 권력이 개입돼 있는 옛날 왕조시대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현대엔 그런 일이 드물어 보이지만 옛날 중국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게 드물지 않았다. 지금부터 우리가 감상하게 될 시가 그 가운데 하나로서 그런 일화가 담겨 있다.    

 

七步詩

 

       曹植(192~232)

 

煮豆持作羹

男脈以爲汁

戟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일곱걸음 시

 

        조식(192~232)

 

콩을 삶아서 국을 끊이고

메주를 띄워 장을 만드는데

꽁깍지는 솥 밑에서 타고

콩은 솥 안에서 우네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났거늘

들들 볶는 게 어찌 이리도 급할까?

 

그 이름도 유명한 칠보시다. 원래 제목은 ‘형제’였지만 훗날 칠보시로 바뀌었다. 지은이는 위나라 조조의 아들 조식이다. 조식은 조조와 변 부인 사이의 셋째 아들로서 조조의 장자인 曹丕(조비)에게는 배다른 아우였다.

 

칠보시는 말 그대로 일곱 걸음을 떼는 사이에 조식이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제목이다. 일곱 걸음은 누가 떼고, 어째서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게 됐냐고? 급하기는 어찌 "들들 뽁는 꽁깍지" 같냐? 우선 시의 구문이라도 한 번 훑어보고 물어야제... 쩝~ 먼저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 없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아주 특이한 독법의 생경한 단어 몇 개를 풀어보고 가자.

 

煮豆는 콩을 삶거나 볶는다는 뜻이다. 한글 음이 ‘갱’으로 읽히는 羹은 고대엔 국을 가리켰고 콩이나 팥 등을 푹 고아서 뭉친 음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男脈은 한자대로 해석하는 것과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데, 메주를 물에 담근다는 의미다. 읽기도 남맥이 아니라 녹시라고 읽는다.

 

戟은 원래 창을 뜻하는 글자로 극이라고 읽지만, 콩깍지, 콩껍데기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기’로 읽는다. 제3구의 "그럴" 然은 불에 타다, 타오르다는 의미의 燃을 대용한 것이다. 相煎은 서로 지지거나 볶는다는 뜻인데, 相은 서로라는 의미지만 이 시에선 의미상 조식의 형 조비가 일방적으로 동생에게 볶아대는 것이어서 해석을 하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 시가 나온 뒤로 지은이 조식의 천재성이 한 번 더 실증됐고, 조조가 낳은 형제들 간의 싸움이 작시의 배경으로 알려져 더욱 유명해졌다. 그래서 항간에는 6구를 아래처럼 五言의 4구시로 줄여서 불렸다.

 

煮豆燃豆戟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콩을 삶는데 콩깍지로 불을 때니

콩이 솥 안에서 우는구나.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났거늘

들들 볶는 게 어찌 이리도 급할까?

 

조식이 이 시를 쓰게 된 데는 질투와 시기심이 많았던 형 조비가 총명하고 재능이 출중했던 배 다른 동생인 자신을 제거하려는 흉심 때문이었다. 동생이 잘 났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이려는 형이 있을까? 그 이면엔 한 여인을 두고 벌어진 치정관계도 내재돼 있었다.

 

이야기는 조식의 마음속 연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 시절 조조의 아들 조식은 유아 때부터 머리가 명민하게 잘 돌아 갔을 정도로 똑똑하고, 열 살이 갓 넘어 벌써 시경, 논어뿐만 아니라 先秦과 兩漢 시대의 辭賦까지를 통독했을 만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난데다 인품까지 갖췄다. 그래서 조조의 총애를 받았고 조조, 조비와 더불어 ‘삼조(三曹)’로 불린다. 조식에 비해 그의 이복 형, 즉 나중에 조조의 왕위를 계승하고 한나라를 멸망시킨 뒤 황제가 되는 조비도 시재에 밝았지만 재능은 그 아우만 못했다.

 

조식은 견(甄)씨 집 처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甄姬라는 이름의 그 처자도 조식을 흠모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곧 중매인을 넣어 혼인을 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한 조조는 견씨 집 아가씨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선 장남 조비의 배필로 삼았다.

 

 

중국 사극 중의 견희. 견희는 실제로도 이 배우만큼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이다.

 

甄姬는 조비의 아내가 됐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론 조식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조식도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그녀에 대한 연정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조조가 죽자 왕위가 맏아들 조비에게 돌아갔고, 조비는 한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해 황제로 등극했다. 견 왕비도 자연히 황후로 격상됐다.

 

한편, 조식은 조비가 조조의 왕위 계승자로 된 뒤로는 답답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심지어 조식은 선왕 조조가 붕어했는데도 상주가 되기는커녕 술에 취해 있었던 데다가 조비의 황제 즉위식에도 가지 않았다. 황위 계승에서 밀려난 조식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조비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이복동생에 대한 괘씸죄가 일차로 조식을 진왕으로 강등시켜 봉읍이 삭탈 당하게 만들었다.

 

조식에게는 권력도, 부귀도, 주변에 사람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세월 가는 것을 낙으로 삼아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배다른 형제지만 피가 섞인 형제는 형제가 아닌가? 게다가 아무런 실권도 없는 동생이 아닌가? 조비는 조식의 처지를 이해해주기는커녕 동생이 자신 보다 더 잘나고 뛰어난 사실에만 마음이 쓰였다. 조비는 동생 조식의 출중함이 황제로서의 권위에 손상을 입고, 혹여 후환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자고로 권력이란 이런 것인 모양이다    

 

마음속으로 질투심을 품고 있던 형 조비는 동생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조식이 견 황후에 대해 마음속으로 연정을 품고 있음을 눈치 챈 조비는 조식에게 호출명령을 내렸다. 불려온 조식은 술이 취한 상태였다.

 

이를 보자 조비는 더욱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식을 없애려고 묘수를 생각해냈다. 조비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동생에게 자기가 일곱 걸음을 다 걷기 전에 시 한 수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만일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했다. 이것도 그나마 생모의 당부가 있었기에 바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이러한 시험에 들게 한 것이다.

 

그러나 조비가 동생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이상 조건도 엄혹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을 형제로 하되 절대로 시 내용에는 자와 자를 넣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식은 과연 천재답게 조비가 일곱 발걸음을 다 떼기 전에 시를 지었다. 위 시가 바로 그 시다. 시의 제목이 칠보시가 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일곱 걸음에 시를 읊다니! 일곱 걸음이라면 몇 초가 걸리겠는가? 한 걸음을 떼는데 사실 1초도 걸리지 않지만, 한 걸음에 2초로 잡는다고 쳐도 14초 안에는 지어야 한다. 아니면 목을 내놓아야 할 경각지추였다. 그 짧은 순간에도 조식은 일곱 걸음을 다 걷기 전에 보란듯이 침착하게 시를 다 지었을 뿐만 아니라 형의 괴롭힘에 대해서도 촌철살인의 시 한 수로 서운한 심사를 전했으니 과연 천재였다. 

 

 

 

권력문제를 떠나 게임은 끝났다고 봐도 된다. 이것은 당시 조비의 두려운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서 오히려 자신의 입장만 난처하게 만든 자충수였다. 조비는 이 칠보시 한 수로 이미 패배를 자인하는 꼴이 됐다. 조비는 소인배요, 조식은 원래 풍운아였는데 위 시를 보자 조비는 그래도 양심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지 자신의 의도를 부끄러워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동생을 위로했고, 그 뒤로 형제의 정분이 이전 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비는 결국 조식의 마음속 情人 견 황후를 죽이게 됐다. 조비는 곽 귀비라는 여인을 받아들인 뒤로는 견 황후를 자주 찾지 않았다. 둘 사이는 자연히 멀어지게 됐다. 이 틈을 타고 황후 자리가 탐난 곽 귀비가 견 황후가 조비를 저주한다는 소문을 내는 음모와 술수로 견 황후가 처결되도록 만들어 결국 자신이 황후가 됐다.

 

한편, 시간이 흘러 조비의 아들 조예가 명제로 등극해 황제가 됐지만 조식의 불우한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문학사엔 조식의 시풍이 220년 조비가 등극하던 시기인 28세를 전후로 해서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전반기의 시풍이 호탕하고 늠름한 것에 비해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비분과 애상이 주를 이뤘던 것도 그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조식이 청년시절에 지은 시 ‘白馬篇’에 나타난 정치적 포부는 후반기의 ‘우차편’(籲嗟篇)에 나타난 바와 같이 패기가 사라지고 바람에 흩날리는 쑥에 자신을 비유하는 처량하고도 실의에 찬 모습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특히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자신을 콩에 비유하고 형을 콩깍지에 빗대어 형제간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읊은 ‘칠보시’는 그의 비통한 삶을 대변한 것이었다.

 

또 ‘曹子建集’에 수록돼 있는 이 칠보시는 시작의 수사학적 측면에서 은유법과 擬人法을 기막히게 구사한 대표적인 시로 꼽힌다. 순간적으로 형제를 한 개체인 콩에 비유하고, 콩을 볶는 것과 콩을 볶는 불쏘시게로 콩깍지를 생각해낸 기지와 순발력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아무리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천부적인 문학 소양과 기민한 순발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칠보시 중 “本是同根”이라는 표현이 조선의 사대부에게도 전해졌을 거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조선 광해군의 세자였던 桎이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사로잡혀 세자 신분이 폐해지고 강화도에 유배돼 있었을 때 지은 ‘在圍籠中吟’(위리안치 중에 읊는다)이라는 시어 첫 구에 “本是同根何太薄”(본래 한 뿌리임에도 어찌하여 이리도 지나치게 박대하는가?), “理宜相愛幷相哀”(이치로 따지면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애달파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구를 봐서는 桎도 조식의 칠보시를 읽고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걸로 추측된다.

 

다시 조식 얘기로 되돌아오면, 그는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를 지탱해준 건 작시였다. 그는 시작에서 고도의 서정성을 발휘함으로써 중국시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이른바 ‘建安詩風’에 다대한 업적을 남기게 됐다. 건안시풍이란 東漢 말기부터 조조 부자가 문단을 이끌던 시기의 문학 경향을 말한다. 조식은 ‘건안문학’의 대표적 문인으로서 五言詩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이 시를 읽는 모든 이들이여! 형제들과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本是 同根生이 아니던가 말일세. 하기야 요즘엔 옛날과 달리 한 여인을 두고 형제간에 싸움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어 보이지만......단 화목하더라도 형제간에 우애를 주고받는 방식에선 젊은 시절부터 거금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이제나저제나 돈이라면 환장하는 MB형제는 절대 닮지 말고!

 

2018. 3. 19. 19:34

구파발에서

雲靜 草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