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古典紀行 : 王安石의 '桃源行'

雲靜, 仰天 2017. 12. 11. 12:07

  古典紀行 : 王安石의 '桃源行'

 

연일 거대한 촛불 행렬이 서울 도심의 밤을 수놓는다. 이른바 ‘적폐’의 진원지인 지도자의 무능과 혼용무도에 분노한 시민들의 함성이 만추의 밤공기를 날카롭게 가른다. 자기 언어도 구사하지 못하는데 애초부터 왕이 되기엔 자질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한 두 번의 실수가 아니라 지도자 자신의 맹함으로 인해 명백하게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 언행을 반복하고 있는데도 집권세력의 정치인들과 관료들 중 바른말, 옳은 말, 곧은 말을 하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솝 우화의 벌거숭이 임금처럼 그 혼자만 뭐가 뭔지 모른다. 나머지 모두는 뭔가를 알아도 모른 체 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하느라 ‘여왕’의 비위만 맞춰오고 있다. 21세기의 한국판 指鹿爲馬다.

세상 어디든 사람 사는 데는 대개 엇비슷하지만, 유달리 한국사회는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살거나 바른 말을 하고 살면 바보 취급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세상이 된지 오래다. 사회 곳곳에 이성과 합리성이 사라지고, 무지와 편견, 탐욕과 전횡이 날뛰지 않는 데가 없다. 기존 식민지체제의 견고함에 절망하고 절규한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가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에 비유한 시구처럼, 오늘날 이 “매운 계절”에 우리사회의 사악하고 간특한 무리들의 비정상적인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강철로 된 무지개”는 언제쯤 무너질까?
 
국민적 합의는커녕, 국가 최고 권부에서 전문가들의 반대의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밀어부친 국가 토목사업 같은 일들이 숱한 문제를 남겨 고스란히 국민에게 부담을 안기고 있다. 토목사업은 그리스, 이집트, 이란(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빈번하고 혹독했다. 옛적 중국에는 나라 안 만백성을 동원해 일으킨 만리장성 축조 같은 토목사업에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指鹿爲馬'의 고사가 있었다.

이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반추하면서 자신이 수행한 국가적 개혁이 기득권층의 반대와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자 그에 대한 울분, 개혁실패에 대한 회한 등의 사념이 녹아 있는 한시가 있다. 중국 송대(960~1279) 王安石(1021~1086)이 지은 桃源行이라는 작품이 오늘 우리가 음미할 대상이다.
 
桃源行
        
            王安石(宋代)
 
望夷宮中鹿爲馬
秦人半死長城下
避時不獨商山翁
亦有桃源種桃者
 
此來種桃經幾春
采花食實枝爲薪
兒孫生長與世隔
雖有父子無君臣
 
漁郞瀁舟迷遠近
花間相見驚相問
世上那知古有秦
山中豈料今爲晋
 
聞道長安吹戰塵
春風回首一霑巾
重華一去寧復得
天下紛紛經幾秦
 
 
桃源行
 
秦나라 궁궐에서 사슴을 말이라 우겨도 아니라 말하는 이 없는 사이
변방 만리장성 아래에선 성 쌓느라 진나라 백성이 반이나 죽어갔다.
이런 난리를 피한 이는 商山翁 혼자만이 아니었고,
桃源에서 복숭아나무를 심으며 은거한 이도 있었다네.
 
이곳에 와서 복숭아나무를 심은 지 봄이 몇 번 지나갔던가?
꽃을 따고, 열매를 먹고, 나뭇가지는 땔감으로 삼았다.
아들 손자들이 자랐지만 세상과 떨어져 살다보니
父子는 있어도 君臣은 없도다.
 
어부가 배를 젓다 길 잃어 가까이, 혹은 멀리 흘러가기도 하는데
꽃들 사이로 서로를 알아보고 놀라서 서로 묻는구나.
세상 사람들이 옛날 無道했던 진나라가 있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산 속에 살면서 지금이 晋왕조인지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西漢의 수도 長安에 전쟁의 흙먼지가 인다는 소릴 들으니
봄바람에 고개 돌려 수건이 젖을 정도로 눈물이 나는구나.
舜임금 같은 성군이 다시 나타나려면
진나라와 같은 어지러운 천하를 몇 번이나 거쳐야 할꼬?
 
 
저자 王安石은 북송의 문인으로서, 또 정치가이자 사회개혁가로서 중국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인물이다. 王安石은 撫州의 臨川(오늘날 江西 撫州)에서 출생해 慶歷 2년 1042년 22세 때 진사 시험에 4등으로 급제한 뒤 지방 관리직에서부터 벼슬을 시작해 나중에는 두 번이나 재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웅혼하고 기백이 넘치는 문풍으로 유명하여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술로『上人書』,『臨川集』,『三經新議』(周禮義, 書義, 詩義),『字說』등을 남긴 그의 시문은 맑으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그가 남긴 詞도 거침없이 호방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명재상으로 평가되고 있는 왕안석의 초상

 

왕안석은 중국역사에서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전면적인 국가개혁을 시도한 개혁가로서는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럼에도 현대 중국의 개혁개방 설계사이자 주창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다른 역사적 인물에 대해 인물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왕안석에 대해서도 인물평을 할만도 했을 법한데도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다. 아마도 왕안석의 개혁이 성격상 중국공산혁명처럼 아래로부터의 민중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지 개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세기 전반,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을 일으킨 레닌(Lenin, Vladimir Il'Ich, 1870~1924)이 왕안석에 대해 상찬하는 언사는 쓰지 않고 단지 그를 일컬어 “중국 11세기의 개혁가”라고 간단하게 가치중립적으로만 평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왕안석이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재상 신분으로 저 유명한 新法(變法, 즉 개혁)을 추진한 인물이어서 그의 학문이나 시문세계를 탐색하려면 반드시 그가 걸었던 주요 정치적 족적과 시대환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의 틀을 덧씌우지 않더라도 어떤 저작이든 무릇 문자로 남겨진 것이라면 구조적으로 개인과 시대와 사회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산물은 없기 때문이다. text와 context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역사학 연구의 기본이다.
 
1058년 嘉祐 3년, 왕안석은 仁宗(1010~1063)에게 ‘萬言書’라는 소를 올려 송대 초부터 지속돼온 법도를 비롯해 국가개조를 가리키는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의 제안은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0년 뒤 神宗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즉 熙寧(신종의 첫번째 연호로 1068~1077) 1년인 1068년, 왕안석은 翰林學士侍從의 신분으로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해 1069년에 參知政事직에 있으면서 전국에 걸쳐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한림은 한 마디로 황제의 문학 시종관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의 지근거리에서 문고리나 붓대를 거머쥐고 있는 자가 최고의 실세다.

당 현종(685~762) 때부터 문학시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서 등용이 시작된 翰林學士라는 관직은 북송 때에 와선 전임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는데, 황제가 직접 내명하는 극비 문서, 재상의 임면, 토벌령 선포 등을 전담한 직책이었고, 부재상급이었던 參知政事는 973년 이후부터 이 관직의 직권과 의례가 재상과 비슷해졌으니 왕안석은 개혁을 추진하기엔 시작할 때부터 권력이 그런대로 뒷받침됐다고 볼 수 있다.
 
왕안석은 나라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빈곤한 이유가 기득권층의 겸병에 있다고 보고 이 적폐를 제거하고 상황을 호전시켜보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문제의 진원인 것이다. 그는 개혁의 기치를 부국강병에 뒀고, 실현수단은 생산력을 증장시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구상이었다. 엉터리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뒤 빈부격차가 널뛰기 하듯 벌어진 요즘이나 그 옛날이나 잘사는 자와 못사는 자 간의 격차는 인간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셈이다.
 
개혁의 주체 및 성격은 神宗과 왕안석 자신이 위주가 된 일부 개혁파 사대부가 전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이유는 민생, 민본적 비전을 품은 왕안석이 자신의 이상 실현을 위해 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이 사회의 기득권층, 즉 대지주, 대관료, 두 사람의 태후, 황제의 족친과 보수파 사대부들의 이익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마치 청말 光緖帝(1871~1908)의 지지를 등에 업고 변법자강이라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펼쳤다가 서태후(1836~1908) 등 권력 최상부와 기득권층의 반동에 부딪쳐 실패로 끝난 康有爲(1853~1927), 譚嗣同(1865~1989), 梁啓超(1873~1929) 등등 유신파 인물들의 전철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공산혁명가들의 평가와 달리 청말 입헌군주론을 주장하면서 입헌파의 '유신운동'을 주도한 양계초는 왕안석을 "夏商周 시대 이래 결점이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夏商周以來没有缺點的最完美的人)이라고 극찬했다. 양계초가 왕안석을 완전무결한 사람이었다고 평한 것은 아마도 그가 재주가 출중했으면서도 평생 재물, 여색, 명성에 연연해 하지 않았던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부유하고 사치스런 송대 귀족들이 거의 모두 처첩을 서너 명씩 거느렸지만 왕안석은 여색을 탐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아내만 두었다. 보기 드물게 전근대형 인물에서 벗어난 사대부였던 것이다.

개혁에 저항한 전체 보수파 사대부와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왕안석은 熙寧 7년에 첫 번째로 재상에서 물러났다. 특히 개혁의 설계자인 왕안석과 개혁의 최고 주도자인 神宗(1048~1085)이 어떻게 개혁을 이끌 것인가 하는 전략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기 때문에 왕안석에겐 재상에 다시 기용된 상황이었지만 개혁을 끌고 갈 힘이 거의 실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개혁파 내부가 분열됐다.
 
결국 왕안석은 재기용된 재상직을 熙寧 9년(1076년) 10월에 내려놓고 한직인 江寧府(오늘날의 南京)로 내려갔다. 江寧에서는 鍾山 白塘지방에 집을 짓고 거처를 半山園이라고 이름 지어 살았다. 1086년 황권이 神宗에서 哲宗으로 넘어가자 권력을 잡은 보수파들이 왕안석의 신법을 모두 폐지시켰다. 정국이 역전되자 한직에 나 앉았지만 왕안석은 불안해 했고, 나중에 자신이 제시한 면역법마저 폐기되자 비분강개의 울분 속에서 살다가 병사했다. 향년 66세였다.
 
이 시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仁宗 嘉祐(1056~1063)년간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왕안석이 송나라 수도 汴京에 출사하고 있었을 때 깊이 교류한 梅堯臣이라는 인물이 常州知事로 나가게 된 왕안석을 위한 전별시로 '送王介甫知毗陵'과 '桃源行'을 주고받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시의 내용으로 보아선 왕안석이 1076년 재상에서 완전히 물러나 江寧府로 좌천돼 간 뒤에 지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앞선 시대의 문인들 중에는 도원을 주제로 쓴 시들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왕안석이 이 시들을 몰랐을 리 없는데 왜 다시 도원을 주제로 삼아 시를 썼을까? 뒤에서 제목이 나올 것이지만, 중국 詩學史에서 桃源과 桃花源이 배경이 된 작품들은 꽤 된다. 위 시도 그 중 하나다. 그 뒤로 그는 고독한 말년을 보내면서 좌절감, 울분, 회한 등으로 여생을 살았다. 이것이 그가 도원을 詩材로 삼은 이유로 보인다.
 
이제까지의 설명이 桃源行이 지어지게 된 시대적 배경과 저자를 소개한 것이었다면, 지금부터의 언급은 이 시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거나 감상에 해당된다. 나는 한시의 측에 대해선 그다지 밝은 편은 아니지만, 기존 이 시에 대해 해설해놓은 것에 따라 먼저 七言古詩로 된 이 시의 구성을 보면, 제1~4구는 上聲 馬韻이고, 제5~8구는 平聲 眞韻, 제9~10구는 去聲 問韻, 제11~12구는 평성 眞韻과 거성 震韻이 통용됐고, 제13~16구는 평성 眞韻으로 돼 있다.
 
위 시에는 고유명사들 중 桃源과 長城을 제외하고는 望夷宮, 鹿爲馬, 商山翁, 長安, 重華 등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적지 않다. 이 단어들은 모두 중국고대사와 관련된 역사용어들이어서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자의 詩想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작품의 깊이를 측정할 길도 막힌다.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 시어들의 개념적 이해가 이 시를 감상하기 위한 출발선인 것이다.
 

위 단어들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桃源이 될 것이다. 누구나 삼국지 ‘桃源의 결의’ 쯤은 들어봤을 테니까 말이다. 桃源은 실존 지명이기도 하지만,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이 가보고자 하는 관념상의 이상향이다. 禮記에서 말하는 大同社會와 비슷하고 서양사회의 유토피아(Utopia)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도원이 현실의 곤고함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동경해온 문인들에게 자신의 심사를 도원에 투영시켜 자주 시의 소재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원행의 ‘行’은 중국 고대 시가에서 일컬어지는 일종의 체제로서 ‘歌行’이라고도 부른다.

 

望夷宮은 진나라 황제가 거처한 궁궐명이다.『史記』秦始皇 本紀에 진시황 “2세는 望夷宮에 거했다.”(二世乃齊於望夷宮)는 기록이 있듯이 선왕 진시황과 그의 아들 2세 황제 胡亥가 거하던 곳이었다. 오늘날 궁궐은 사라지고 없고 옛터만 陝西省 涇陽縣 蔣柳鄕五福村과 二楊庄 사이에 남아 있다고 한다.
 
‘鹿爲馬’는 指鹿爲馬를 말한다.『史記』에 나오는 승상 趙高(? ~ B.C. 207)가 보여준 ‘指鹿爲馬’에서 연유한 말이다. 폭정과 전횡을 일삼은 최고 통치자의 흑백전도에 대해 아무도 직언하거나, 고언 또는 충언을 하지 못한 신하들의 비굴함과 용렬함을 탓하는 내용이다. 진시황 사후 그의 열 여덟째 아들 胡亥(B.C.230 ~ B.C. 207)가 2대 황제의 보좌에 올랐지만, 사기에 胡亥가 "극히 어리석은(胡亥極愚) 자"로 기록됐을 정도로 어리석어서 실권은 승상 조고에게 있었다.
 
조고는 권력을 손에 넣자 황위에 욕심이 생겼다. 황위를 찬탈하려고 해도 신하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우려해 먼저 그들의 반응을 살필 요량으로 호해에게 사슴 한 마리를 헌상하면서 그걸 말이라고 했다. 호해가 웃으며 “승상, 뭘 잘못 아신 게 아니오? 사슴을 말이라니요?”라고 되물었다. 그래도 조고가 말이라고 강변하자 호해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물어봤더니 사슴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조고의 위세에 눌려 말이라고 하면서 조고의 비위에 맞췄다.
 
나중에 조고는 사슴이라고 하는 신하들을 기억해서 사그리 죄를 씌워 제거하니 조정에서 조고의 말을 따르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지록위마는 이 고사에서 대체로 지도자의 일방적인 우격다짐, 그 아류들의 견강부회, 그리고 그로 인한 흑백전도,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는 것을 비난하거나 거론할 때 쓰는 사자성어로 발전한 것이다.
 
長城은 기원전 진나라가 북방 흉노족의 남침을 막기 위해 쌓아올리기 시작한 성이었다. 오늘날 중국정부가 이 성의 시작과 끝을 엿가락 늘리듯이 멋대로 늘려 동쪽 끝을 압록강 어귀까지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당시 서쪽으로는 函谷關까지 가지 않은 陝西省의 어느 지점이었고, 동쪽으로는 현재의 河北省 山海關 근처 정도였다.
 
오늘날의 만리장성처럼 길이가 길게 된 것은 명대에 와서야 이뤄졌다. 또 처음엔 오늘날과 같은 석벽도 아니었고, 모래무지나 흙과 자연석을 쌓아 올린 둔덕의 형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진시황 생전에 시작한 장성의 축조공사가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원시적인 동력과 인력에만 의존한 당시로서는 토목공사의 규모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매일 같이 노역에 동원되고 있었다.
 
長安은 秦末漢初 西漢의 수도인데, 中原의 故國을 가리킨다. 훗날 수, 당 제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고, 오늘날의 陝西省 성도인 西安이다.
 
商山翁은 진나라 말기 ‘商山四皓’이라고 불린 네 명의 늙은이들, 즉 東園公, 綺里季, 夏黃公, 用里선생을 가리킨다. 商山翁의 典據가 되는『史記』‘留侯世家’에 의하면, 이들은 진나라의 난을 피해 商山(현 陝西省 商縣 동남쪽)이라는 곳으로 피했고, 나이는 모두 80여 세였는데, 商山四皓은 수염과 눈썹이 희다(須眉晧白)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重華는 요순시대의 전설적 인물로 알려진 舜임금의 이름인데, 이 시에서는 上古시대 성현들의 총칭으로 봐도 될 것이다.
 
이제 작품의 정수리로 올라타 보자. ‘桃源行’은 王維(693?, 694?, 701?~761)의 桃源行, 韓愈(768~824)의 桃源圖와 함께 가장 유명하고 널리 회자되는 시다. 청대의 王士禛(1634~1711)은 도원을 주제로 한 시들 중 이 세 작품을 꼽았다. 물론 이 세 작품은 도원의 고사를 주제로 삼은 것이지만 각기 고유한 맛과 시적 정취를 내포하고 있어 盛唐, 中唐, 北宋을 거치면서 중국의 시풍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東晋시대 陶淵明(365~427)의 桃花源紀도 꽤 유명하다. 桃花源紀는 진나라 말기의 난들이 일어난 원인을 조고의 指鹿爲馬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성에 있다는 점을 나타낸 내용이다. 왕안석의 도원행 역시 도연명이 그린 것처럼 指鹿爲馬를 주요 詩材로 해서 신선, 무릉도원 등으로 상징되는 도교적인 색채를 걷어내고 도원에서 현실적인 인간세상의 흥망성쇠의 역사적인 서사와 서정을 결합시켰다.
 
예를 들면, 위 시의 첫째 연 4개 구에서 도화원의 연원을 조고의 指鹿爲馬와 장성축조에 대한 백성의 원성을 병치시켜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제시한 점을 표현한 게 대표적이다. 또한 장성 축조에 동원된 노역의 잔혹함을 ‘난리’라고 표현하고, 백성들이 이 난리를 피해 도원으로 은거하게 된 배경을 거론했다. 한 마디로 왕안석은 칼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 1896~1988)이 말한 동양적 전제주주의 상징인 치수관개 류의 거대한 동원 사역이 전개된 진시황의 토목사업을 비판한 것이다.
 
토목사업 말이 나온 김에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한 마디 덧붙이겠다. 인도의 타지마할,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불가사의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 있는 만리장성 류의 유적들을 보면 그 웅장함과 조영의 과학성과 예술성에 압도돼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것들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 계급적 산물로서 숱한 노예나 하층민들이 겪은 고통, 피와 눈물의 결정체로 보여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 
 
고대에 이러한 거대한 건조물을 축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돼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갔을까 하고 생각하면 한 동안 우수에 젖게 되는 이유다. 이를 물려받은 후손들이야 볼거리로, 관광거리로 활용할 수 있어 좋겠지만 당시 도탄에 빠져 고통 속에 죽어간 백성들을 생각하면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차라리 이런 것들은 남기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둘째 연 4개 구에서는 경쟁이 없는 사회여서 소박한 채집생활과 자연합일의 삶을 살고 있는 도원을 그렸다. 전제 왕조시대의 엄혹한 계급이 없는 자유평등을 희구한 것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로는 그야말로 이상향을 그린 셈이다. 이 점에서 이 시는 도화원의 묘사를 통해 평화와 사회 안정을 희구하는 이상향을 표현한 도연명의 ‘도화원’과 일치한다.
 
셋째 연 4개 구는 세속의 어부와 도원에 살고 있는 사람 사이의 교류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도원에 들어와 보지 못하면 진나라의 폭정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옛날 無道했던 진나라가 있었는지 어찌 알겠는가?”(世上那知古有秦)라고 묻는다. 왕안석은 漢, 魏, 晉 등 많은 왕조들이 오랑캐와 다른 王化를 받지 않아 세상사의 험악한 창상지변(滄桑之變)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자신이 살던 송나라 백성들이 현실 정치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비시킨 것이다.
 
마지막 연의 4개 구는 도원에서 현실을 바라보니 長安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갈 것으로 생각돼 “봄바람에 고개 돌려 수건이 젖을 정도로 눈물이 나”고, 결국 “舜임금 같은 성군”을 기대하면서 옛 성현이 다스린 시대를 동경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긍휼, 회한, 평화를 희구하는 마음이 짙게 깔려 있다.
 
왕안석의 내면은 군주의 폭정, 왕조의 흥망, 난세를 탓하고 백성의 고충을 대비시키면서 평등사회의 希愿, 요순사회의 동경, 유교사상을 왕도와 패도로 이원화 하고, 전자를 이상시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왕도란 단적으로 말해 도덕성을 갖춘 통치자가  도덕적이고 건강한 삶의 비전을 현실정치에서 구현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역사적으로 그 사표가 된 이는 요임금, 순임금이 꼽힌다.
 
이 시에서 “舜임금 같은 성군이 다시 나타나려면 진나라 같은 혹독한 왕조를 몇 번이나 거쳐야 할꼬?”라는 어구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왕안석은 ‘위록지마’에 비춰 송나라의 조정이 혼미하고 정치가 패도로 가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왕안석도 몰랐을 리가 없었겠지만, 정치와 도덕은 동일하지 않다. 양자는 원론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같이 하면서도 존재 양태와 실현의 수단에서는 상당 부분 동일하지 않다. 또 온전히 포개져서도 안 되고, 포개질 수도 없다. 도덕이 바탕이 돼 있지 않으면 사유화 되거나 패도로 변질되기 쉬운 게 정치다.
 
따라서 정치는 민을 위한 위민정신과 민이 주인이라는 민본주의와 민주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이와 달리 도덕은 그 자체로는 합목적적으로 현현되는 게 아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반드시 정치가에 어울린다고 볼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정치가라고 해서 모두 고상한 도덕성을 갖추는 게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정치가는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을 어떤 곳으로 만들 것인지 경쾌한 비전과 정당한 다수가 찬성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굳은 신념 그리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식견과 능력, 유비쿼터형의 리더십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과연 왕안석 자신은 道學的 사대부로서가 아니라 경세가, 즉 정치가로서의 이러한 덕목을 갖췄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이 글 말미에 가서 독자들에게 판단케 할 생각이다.
 
이 시가 왕안석 자신만의 회한과 분노를 넘어 독자들까지도 농밀한 회한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추진한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이처럼 백성이 도탄에 빠지지는 않았을 터인데' 라고 하는 심사가 은유법으로 숨어 있기 때문이다.
 
상층부 통치계급의 잦은 권력투쟁과 그 잔혹함을 목도한 전통시대 중국사회의 지식인들은 이른바 ‘盈滿之憂’를 깊이 가슴에 품고 살았듯이 왕안석의 그러한 심사는 민본의식의 발양이 기득권 세력의 비토로 좌절됨으로써 사대부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부채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盈滿之憂란 누린 부귀권세와 저지른 죄과를 씻지 못함을 우려하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의 저변에는 도가적 이상과 유가적 민본사상이 현실참여의식으로 결합돼 있다. 성품이 겸손하고 예의 발랐던데다 박학다문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왕안석은 유교적 교양 외에도 楞嚴經을 疎解할 만큼 불교에도 일가견이 있었는가 하면, 노장사상도 섭렵했기에 通儒로 불렸다.
 
불교와 노장사상이 자신의 뇌수에 츰입돼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평생을 살면서 몸은 조정의 재상직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강호의 전원을 향해 있었다. 또한 그는 사직하고 초야에 묻히길 좋아하는 성향을 지닌 은둔적 유자의 기질도 다분했다. 유자의 기질이란 자신이 제시한 개혁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벌어진 권력투쟁 시에 과감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용퇴하려는 성향을 보인 점을 말한다.
 
道學的인 기질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행적은 熙宗 2년~7년에 이르는 짧은 5년 사이에만 일곱 차례나 황제에게 사직을 윤허해주기를 청한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점은 같은 儒子이자 문인이었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 있으면 죽기를 무릅쓰고 밀고 나아간 맹자(B.C.372~289)와 韓愈(768~824) 등의 정신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고, 왕안석이 개혁을 끝까지 성공시킬 수 없었던 내재적 요인 가운데 하나였지 않았을까 싶다.
 
이외에도 현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말한 대로 왕안석이 고전에 능통한 전문지식이 있는 학자이긴 했지만 전체를 꿰뚫는 안목이 없었던 데다가, 사회 전체가 개혁을 알도록 하지도 않아서 계책이 먹혀들지 않았던 게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됐다.(無通識, 幷不周知社會之故, 而行不適之策也) 마오의 이 평가는 귀담아 들을 만한 상당히 적실성 있는 얘기다.
 
마오쩌둥의 위 평가가 옳든 그르든 그것과 별개로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왕안석의 시 ‘桃源行’은, “문장은 세상의 쓰임에 어울려야 한다”(文章合用世)는 자신의 문학관을 표상하는 결정체로 볼 수도 있지만, 현실참여를 통해 유가적, 도가적 이상을 실현해보려고 한 의지가 쇠락한 뒤에 나타난, 회한이 짙게 밴 철지난 西山落日의 풍광을 그릴 뿐이라는 점이다. 과연 왕안석이 지닌 인문학적, 혹은 군자로서의 성향이 신법을 성공시키기 위한 경세가로서의 자질에 합당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개혁의 실패를 초기와 달리 개혁의지가 용두사미처럼 된 신종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2016. 11. 15 초고.
2017. 12. 10 부분 가필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