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오키나와 슈리성이 불탄 걸 보고 좋아할(?) 사람들

雲靜, 仰天 2019. 11. 1. 17:30

오키나와 슈리성이 불탄 걸 보고 좋아할(?) 사람들

 

일본의 국보이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키나와 슈리(首里)성의 正殿, 南殿, 北殿 등 주요 건물들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화재 발생은 오늘 새벽 230분경이었다.

 

슈리성은 몇 년 전에 집사람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다. 굉장히 아름답고 독특한 성이었는데, 오키나와 역사를 상징하는 이 아름다운 성이 불에 타서 흉물이 되었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현장에서 화재를 보았거나 뉴스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도 대부분 안타깝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슈리성 본전 앞에 선 필자 부부

 

그런데 슈리성이 불타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오키나와 독립을 희구하는 사람들 중의 일부와 류큐의 쇼씨(尙氏)왕조에게 침략, 약탈, 지배를 수백 년 동안 당하면서 살아온 오키나와 부근 작은 섬들의 주민들이다.

 

나는 오키나와를 여행하면서 현지의 저명인사 두 친구와 밤늦게까지 만취가 되도록 술잔을 기울이면서 많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 사람은 류큐민주공화국 임시 대통령이라는 직함으로 현재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오키나와 독립운동 대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과거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지배를 당한 가슴 아픈 사실을 끝까지 잊지 않고 있는 오키나와 소재 대학의 현직 교수였다. 류큐민주공화국 임시 대통령은 오키나와인이지만 일본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건축가로서 70대 초반의 마키시 선생인데 오키나와 본도 출신이다. 60대 초반의 카와미치 교수는 오키나와에 속해 있는 작은 섬 미야코지마(宮古島) 출신이다.

 

조금 전 슈리성 화재 소식을 듣고 이들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물으려다가 조금 망설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이 함께 오랫동안 오키나와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는 동지이지만 오키나와 과거사에 대해선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각기 뭐라고 안부를 물어야 될지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두 사람은 공히 오키나와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마키시 선생은 오키나와 역사를 긍정한다. 물론 三山(北山, 中山, 南山)왕국을 통일해서 창건된 류큐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쇼왕조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그러나 카와미치 교수는 쇼왕조로부터 자신의 조상들이 당한 수난과 질곡의 역사를 잊지 못하고 있다.

 

쇼 왕조는 근대 역사에서 중국과 일본 두 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역사학에서는 전문용어로 이를 '兩主제도'라고 칭한다. 중국 대륙이 안정되면 중국에 조공을 바치다가 만약에 대륙이 내분이나 혼란에 빠지면 일본에 조공을 갖다 바쳤다. 근대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선 중국이 옛날처럼 거인 행세를 못하자 류큐왕국은 일본 가고시마 현을 중심으로 한 사츠마(薩摩) 번에 강제로 소속되면서 일본에 조공을 갖다 바치는 수난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류큐 왕국은 동시에 그 주변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는 수시로 침략하거나 착취하면서 못된 패자, 지배자로서 군림했다.

 

현재 인구 5만 명 정도의 작은 미야코지마도 류큐왕국에게 엄청나게 착취를 당했다고 한다. 현재 오키나와 전체 인구는 약 125만명 정도인데,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인구 차이와 군사력이나 경제력 면에서 힘의 차이가 컸고, 미야코지마는 오키나와 본도에 비교가 안 되는 약체다. 비유컨대 류큐 왕국은 자신보다 강한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깍듯이 대하면서도 자기보다 힘이 약한 작은 섬들에겐 소대장 정도의 완장을 차고 횡포를 부린 동네 골목대장 역할을 해온 셈이다.

 

자기 조상들이 얼마나 호되게 당했던지 지금도 역사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카와미치 교수는 옛날 자기가 미야코지마를 떠나서 나하(那霸)로 유학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슈리성을 찾아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학시절이나 30여년이 더 지난 지금이나 미야코지마에서 고향사람들이 나하로 놀러 와도 자신은 절대로 그들에게 슈리성을 안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나하에 살면서도 슈리성을 한 번도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세상에나! 그 좁은 땅에서 갈 데가 얼마나 있다고...! 나에겐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이 말을 듣자 그에 대한 진한 연민이 솟구쳐 온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미야코지마 사람들은 오키나와인을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슈리성을 수난과 질곡의 아픈 과거사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카와미치 교수는 심지어 오키나와 말도 사용하지 않고 미야코지마 말을 쓰거나 일본어만 사용한다고 한다. 오키나와 말과 미야코지마 말은 소통이 어렵고 차이가 적지 않다.

 

그날 밤, 성품이 조용한 이였지만 류큐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오키나와인들에 대해서 울분을 토로하는 카와미치 교수에게 나는 동병상련의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면서 많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덧붙여 나는 과거 조선과 중국, 조선과 일본, 중국과 티베트 혹은 몽골, 그리고 유럽의 중앙과 변방국, 특히 러시아혁명의 사례 그리고 지금은 15개 나라로 쪼개졌지만 서로에게 강제병합 당한 러시아와 다른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연안, 발트해 연안 국가들 등등의 역사 사례를 많이 들려줬다. 마키시와 카와미치 두 분에게 일단 서로 다투지 말라고 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왼쪽 수염 난 분이 마키시 선생, 중간 분은 카와미치 교수, 오른 쪽이 필자 부부

 

옛날 류큐왕국이 청일 간 교섭 과정에서 그랜트(Grant)라는 자가 쇼정권에 중재안을 제시한 바 있다. 또 청나라의 李鴻章(류큐 3분할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류큐 2분할론)의 중재안도 거론된 바 있다. 오늘날 미국의 오키나와 미군 주둔에 대해서도 반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미국의 지지는 받지 못한다. 유일하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중국과 대만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중국과 대만의 힘을 빌려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 독립 후에 센가쿠열도의 해저 석유와 가스를 중국 및 대만과(가능하다면 한국도 집어넣어서!!) 공동개발하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이도 있다. 물론 이건 정말 만화나 소설 같은 현실성 제로의 이야기다.     

 

아무튼 그 두 친구는 그날 술자리에서 나를 오키나와가 독립국이 되고 나면, 아니 그 전이라도 고문으로 모시면 좋겠다고 농 섞은 진심을 말했다. 내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더니 그러면 내년이라도 당장 그곳 대학으로 초청할테니 와서 이곳의 언어, 문화와 역사와 권력 관계를 연구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의도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맡아서 하는 일이 적지 않아서 그렇게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대신 기회가 되면 우선 미야코마츠리(宮古祭)에나 놀러가 보겠다고 해놓고 벌써 4~5년이 지났다.

 

나는 젊은 시절 여행자유화가 되기 전인 1985년 7월 처음으로 일본을 약 한 달 간 배낭여행을 한 이래 지금까지 대략 20여회 정도 일본 각지를 여행했었는데, 그 중에 오끼나와는 기억에 많이 남는 곳 가운데 하나다.

 

http://m.blog.daum.net/suhbeing/291

 

오키나와인들이 근대 이래 국력이 약해 강대국 중국과 일본에게 그렇게 당하면서도 자신보다 힘이 약한 또 다른 작은 섬들에게는 사정없이 착취를 했다니 인간사에서 참으로 과욕과 탐욕에서 비롯된 권력이 무섭긴 무서운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또 다른 이유로는 오키나와가 너무 먹을 게 없이 궁핍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살아 남기 위해선 인근의 작은 섬들 주민들의 먹을 것까지도 뺏어야 하기 때문이다. 

 

류큐인들이 어느 정도로 가난했냐 하면 역사 이래 척박한 작은 섬의 류큐인들은 수백 년 동안 맛있다”, “배부르다라는 개념을 몰랐을 정도라고 한다. 오키나와말에도 이 단어들은 없었다. 맛있게, 배불리 먹어본 경험이 없으니 그런 단어가 있을리가 없고, 단어가 없으니 그런 느낌을 알 턱이 없다. 너무 못 살아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류큐인들은 한 번도 맛있게 먹어 본 적도 없었고, 배불리 먹어 본 적도 없었으니까! “맛있다”, “배부르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중국과 교역을 하면서 중국에서 먹거리들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맛있다”, “배부르다라는 이 말도 중국인들이 쓰던 말을 그대로 받아 와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키나와말의 맛있다’, ‘배부르다는 중국어의 방언(복건어나 광동어)과 발음이 비슷해 호자", “자빠와 거의 유사하게 발음한다. 복건어로 맛있다와 배부르다는 각기 "호자"(好吃)와 "자빠"(吃飽)로 발음한다. 어쩌면 너무 못살다보니까 자기보다 힘없는 작은 섬사람들을 착취하고 노략질 했을지도 모른다. 더 큰 도적에 대적코자 같이 힘을 합할 것이지!

 

사실 류큐 역사는 바깥에서 보는 일반적인 역사 상식에서가 아니라 이처럼 주변의 작은 섬들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면서 동아시아로, 세계로 확대해 나가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단히 복잡해진다.

 

전후, 1951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오키나와 부분은 제3조에 언급이 되어 있는데, 2조 독도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오키나와 귀속문제는 애매하게 처리돼 있다. 1972515일 미국이 오키나와에 대한 행정관리권을 이양해준 것에 이어 526일에는 오키나와에 대한 주권도 완전히 일본에게 넘겨줬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보면 현재 중일 간의 쟁점이 되고 있는 센까쿠’(중국명 釣魚島’)도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독도문제를 포함해 영토는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감이 잡힌다.

 

오키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조선과의 관계도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많다. 예컨대 우리는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걸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키나와로부터 들어온 사실도 그 중 하나다. 조선왕조실록엔 류큐 관련 기록이 제법 나온다.

 

지금까지 짬이 없어 수년 전 오키나와 여행 중 수집한 각종 자료들도 정리를 못하고 있고,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해본 바 없다가 오늘 슈리성 화재 소식이 계기가 돼 갑자기 길게 장광설을 늘어놓게 됐다. 자연스레 오키나와의 친구들에게 각기 뭐라고 해야 할지 정리가 됐으니 이제 오키나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과연 두 사람이 슈리성 화재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할지 궁금해진다.

 

2019. 11. 1. 15:27

臺北 中央硏究院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