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Ⅰ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맑고 푸른 하늘, 곱게 물든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초겨울, 문득 고등학교 때 배운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이 떠오른다. 피천득 선생이 젊은 시절 일본 체류 때 하숙집 주인 딸과의 만남을 얘기한 수필이다. 내용 중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대목을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가즈미(和美)와 두 번 만났다. 그리고 십여 년 넘게 소식이 끊겼다가 세 번째는 만나지 못하고 아니 들었어야 좋았을 소식만 들었다. 가즈미는 나와 결혼 인연이 될 뻔했던 일본 오사카(大阪)의 재일교포 3세였다. 당시 그는 아름다운 자태의 방령 24세였고, 나는 그보다 세 살이 많은 27세의 더벅머리 청년이었다.
1985년 대학 3학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나는 일본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했다. 당시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지 않던 시절, 나는 한일의원연맹의 한국 측 모 국회의원의 도움으로 초청장을 받아서 여권과 일본방문 비자문제를 모두 해결했다. 평소 같은 학과에서 친하게 지내던 영환 형과 상린 형이 같이 갈 동행자로 나섰다. 영환 형은 나보다 세 살이 많았고, 상린 형은 여덟 살이나 많은 30대 중반으로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세 사람은 모두 해외여행이 난생 처음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여름 더위가 시작된 7월 17일 밤, 각기 배낭을 하나씩 둘러멘 우리 일행은 부산항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부관(釜關)페리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下關)-히로시마(廣島)-히메지(姬路)-고베(神戶)-오사카-나라(奈良)-교토(京都)-나고야(名古屋)-후지산(富士山)-도쿄(東京)를 한 달간 돌아보는 일정의 출발이었다.
우리를 태운 배는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칠흑 같은 현해탄의 밤바다를 건넜다. 말로만 듣던, 일제 때 우리 선조들이 한을 안고 오가던 현해탄을 보면서 왠지 모를 비통함이 솟구쳤다. 미지에 대한 설렘과 긴장 탓에 3등석 객실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이윽고 그 이튿날 새벽 배가 무사히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시간이 멎은 듯이 조용한 새벽녘, 선창에는 여름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항구의 먼 바다에는 비온 뒤 불그스레한 빛을 머금은 구름이 피어올랐다. 천지를 품는 듯한 대비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배에서 내린 우리는 통관을 마치고 부둣가 인근의 시장을 찾아가서 ‘우동’을 한 그릇씩 사먹고 일정대로 열차로 두 번째 행선지인 히로시마로 갔다. 그곳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건물과 평화공원을 관람했다. 같은 원폭에 피폭된 피해자이면서도 일본인 희생자들의 위령탑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번듯이 크게 만들어 놓았지만, 재일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해선 위령탑은커녕 작은 말뚝표지목만, 그것도 쉽게 보이지 있는 외딴 곳 구석에 세워놓은 것을 보고선 기가 막혀서 혀를 끌끌 찼다.
평화공원 내 기념관에 전시된 피폭의 참상들을 보면서 침략전쟁은 자신들이 도발해놓고선 짐짓 자기들이 피해자인양 ‘코스프레’하는 일본인들의 간계와 편협함에 놀랐다. 히로시마 번화가에서 우연히 만난 우베라는 독일인 여행자와 함께 밤새도록 생맥주를 마시면서 독일의 엄격한 전범처리 얘길 듣고선 일본의 간악함과 이중성을 알게 돼 크게 분개하는 가운데 날이 밝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다음 날 히메지로 가서 아름다운 히메지성을 본 뒤 고베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이꾸노(生駒)구에 소재한 한국사찰 보현사(普賢寺)를 찾아갔다. 이 절은 당시 한국인 태연(泰然) 스님께서 관장(한국의 종정에 해당)으로 계시면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한국을 떠나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해뒀다. 여장을 풀고 스님께 인사드린 뒤 오사카성을 비롯해 여러 곳을 관광했다. 또 3일간에 걸쳐 나라와 교토도 돌아봤다.
일본여행이 대략 1주일째쯤 됐을 때였다. 우리는 여행경비도 보충할 겸, 또 뜻 깊은 일도 해볼 겸 해서 태연 스님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게 없는지 여쭸다. 스님의 배려로 우리는 오사카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의 고려사(高麗寺)에 가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법당 뒤쪽의 산길을 내는 일을 3일간 하기로 했다. 고려사는 태연 스님께서 먼저 가신 많은 재일동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후손들이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들어줘야겠다는 발원으로 오사카-나라-교토 사이의 깊은 산속에 지은 절이었다.
우리는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다음 행선지인 도쿄 방향으로 갈 참으로 모든 짐을 싸들고 보현사를 떠나 고려사로 향했다. 아침인데도 벌써부터 7월 하순의 햇볕이 따가웠다. 우리 세 사람은 태연 스님 그리고 보현사의 여신도 한 분과 함께 그 여신도가 제공한 승용차에 편승했다. 여신도 분은 50대 초반 정도의 재일교포 중년여성으로서 싹싹하고 여성스런 분이었다. 한국말은 조금 어눌해도 의사 전달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산길 포장도로를 따라 고려사까지 두 시간 가까이 가는 도중 휴식차 휴게소에 들르면서부터 그 여성신도 분과 얘기가 시작됐다. 비명에 간 하나뿐인 아들의 위패가 안치돼 있는 고려사에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들은 일본 최고의 명문대인 교토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유명을 달리한 지 약 반년쯤 됐다고 했다. 그 여성신도 분은 한국에서 온 건장한 청년들을 보는 게 신기했던지 달리는 차 안에서도 우리에게 연신 말을 붙였다. 당시엔 해외여행을 나가는 대학생이 드문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신도 아주머니는 우리 일행 세 사람 중 유달리 내게 말을 많이 걸었다.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으며, 나이는 몇 살이냐는 질문에서부터 한국사정, 여행목적, 일본의 첫인상, 다음 행선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그것이 우리 일행 중 내가 유일하게 일본어가 통했으니 물어보는 거려니 하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고려사에 당도한 우리는 먼저 본당에 참배했다. 참배 후 우리는 3일간의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개시했다. 고려사는 수만 평은 돼 보일 정도로 규모가 보통 큰 사찰이 아니었다. 법당 오른 쪽 측면 뒤편의 야트막한 산에 정자를 지어놓은 곳까지 나무를 치고 산길을 내는 일이었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녹음이 짙은 꽤 운치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낫, 삽과 곡괭이로 길을 내고자 하는 곳을 따라 우거진 나무들을 쳐내거나 뽑아내고선 길을 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한나절을 보내는 동안 일하는 우리에게 수박과 기린표 생맥주 캔을 들고 찾아와서 또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특히 나에게는 뭘 전공하며, 대학생활은 어떠하며, 심지어 믿는 종교와 집안사정에 대해서까지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아주머니는 자신의 가정을 소개하면서 집안 사정까지도 알려주었다. 남편은 오사카에서 비닐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 사장이며, 슬하에 두 딸이 있는데 맏딸은 스물넷, 둘째 딸은 스물하나라고 했다. 두 딸 중 장녀인 가즈미가 혼기가 됐지만, 일본인에게는 시집을 보내고 싶지 않고 한국인에게 보내고 싶은데 마땅한 데가 없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고는 우리더러 이미 오사카를 보고 온 건 알지만 오사카의 자기 집으로 초대할 테니 와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평심하게 듣던 우리가 어떤 눈치를 차리게 된 건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였다. 그때서야 나도 비로소 아주머니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됐다. 우리는 이미 오사카는 대충 봤으니 다음에 일본에 다시 오게 되면 그리하겠다며 완곡하게 초청을 사양했다. 내 말에 아주머니는 서운한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곤 그날 오후 오사카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는 다시 하던 일에 열중했다.
고려사에서 머문 지 3일째 되던 날, 다음 날 아침이면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나고야로 떠나야 하는 마지막 날 밤이었다. 낮에 한여름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다 보니 나는 저녁공양을 마치자마자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어 곯아 떨어졌다.
그런데 두 형이 세상모르게 곤하게 자고 있던 나를 급히 흔들어 깨웠다. 이 밤중에 그 신도 아주머니의 딸 가즈미가 승용차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니 어둠이 내려 주위가 캄캄한 밤 9시경 정말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 부시는 가운데 우리가 타고 왔던 그 하얀 승용차가 시동이 걸린 채 ‘부릉부릉’ 소릴 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아주머니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내일 이곳을 떠나면 다시 보긴 어려울 거라는 걸 알고 다급하게 직접 딸을 보내신 듯했다. 해외여행이 제한돼 있던 당시 우리가 귀국해버리면 또 일본에 오긴 어려울 것이고, 그러면 다시 만날 보장이 없다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었다. 밤인데다 산길이어서 젊은 여자 혼자는 무리여서 보현사의 젊은 한국인 비구스님에게 운전을 맡겨서 온 모양이었다.
그날 밤 나는 말로만 듣던 가즈미를 처음 만났다. 가즈미는 한 눈에 봐도 이목구비가 선연한 아름다운 자태의 아가씨였다. 빼어난 미모라는 것이 어두컴컴한 산사에 비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도 한눈에 보였다. 아주머니는 딸의 미모를 내게 보여줘 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급히 의논한 결과 저리도 열성적인 아주머니의 성의를 봐서라도 초대에 응해주는 게 맞다고 보고 서둘러 짐을 챙겨 승용차에 올랐다. 가즈미는 앞좌석에 앉았다. 뒷좌석에서 보인 가즈미는 뒤태도 목단처럼 단아했다. 어두운 밤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우리 일행이 오사카 그녀의 집에 도착하니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 내외분이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집안의 환한 불빛 아래에서 가즈미를 제대로 보게 됐는데 군계일학처럼 빼어난 미모가 천하일색이었다. 지금껏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은 보지 못했었다. 우리는 키요코(淸子)라는 그녀의 여동생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가즈미가 수줍음을 타는 성격임에 반해 양 볼이 통통한 귀여운 모습의 키요코는 언니와 달리 쾌활하게 스스럼없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꽃다운 나이의 두 자매는 모두 심성이 곱고 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 다 왕방울만 한 큰 눈이 사람을 뇌쇄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눈을 보니 문득 일본에서 구전돼 오는 오사카 실 가게 딸들의 아름다운 눈을 묘사한 시가 생각났다.
大阪本町絲屋のむすめ(오사카 혼마찌 거리 실 가게의 아가씨)
姉は十八, 妹は十六(언니는 18세, 동생은 16세)
諸國大名は刀で殺すが(제국의 다이묘들은 칼로 사람을 죽이지만)
絲屋のむすめは目で殺す(실 가게의 아가씨들은 눈으로 죽인다)
뜻하지 않게 그 댁에서 유숙하게 된 우리는 약간 들뜬 기분 속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나는 다시 곤하게 잠에 빠져들었지만 다음 날 새벽이 되니 금방 눈이 떠졌다.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방에서 나가보니 거실 한편의 불단에 유명을 달리한 그 댁 아들의 영정과 위패 앞에서 가즈미와 키요코가 향을 피워놓고 배례를 올리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정성껏 그렇게 한다고 했다. 아마도 죽은 아들이 살아 있었을 땐 오누이 사이 우애가 좋았던 모양이다. 또 한 번 두 자매는 미모에다 가정교육도 잘 돼 있는 보기 드문 양가집 규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 전, 나는 집 밖으로 나와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집 옆에 위치한 그 집에서 운영하는 비닐공장은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공장설비가 꽤나 잘 돼 있는 느낌을 받았고, 오후에 보니 직원들도 적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아주머니 내외분의 배려로 순전히 우리 세 사람을 위한 새로운 오사카 관광이 시작됐다. 승용차 운전은 간밤에 운전해온 그 비구스님이 맡았다. 간밤에 운전하시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인사를 건네면서 보니 그 비구스님은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가 많아 보이고, 더벅머리에다 촌티가 풀풀 나던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이었다.
운전석 옆 좌석에 가즈미가 앉았고 우리 세 사람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가 맨 먼저 간 곳은 오사카 ‘엑스포70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그곳 호수를 배경으로 우리 세 사람은 가즈미를 사이에 두고 사진을 같이 찍었다. 그 사진은 지금도 내게 남아 있다. 오사카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난바(難波)에도 갔다. 가난한 재일동포들이 몰려 산다는 쯔루하시(鶴橋) 시장에도 다시 가봤다. 그곳에선 재일동포들이 걸어온 신산한 삶의 발자취와 역사의 애환, 한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런 모습들을 접하니 실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짠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 시장의 교포들뿐만 아니라 보현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교포들과도 얘기를 많이 나누어봤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거의 다 한국말을 하지 못해 내게 적잖은 실망을 안겨줬다.
며칠을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레 보게 됐지만 거동이 차분했던 가즈미의 미모가 새삼 돋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며 다소 수줍음을 탔다. 그럼에도 모친의 ‘분부’가 있었던지 가즈미는 약간 어색해하면서도 내게 이따금씩 말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딱히 그에게 물어볼 게 없어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가즈미는 무안해하면서 나에게 말 걸기를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이걸 본 상린이 형이 내게 “좀 살갑게 대해주지 그러냐”며 핀잔을 주면서 “잘 좀 해봐라”고 했다. 상린 형이 나더러 가즈미는 정말 괜찮아 보이는 아가씨라고 귀띔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안함 때문에 그랬던지 가즈미는 비구스님에게 “오쇼상~”(스님) 하면서 다정다감하게 얘기를 건네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모습이 나를 의식해서 일부러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비구스님도 가즈미에게 웃음 띤 얼굴로 살갑게 응해줬다. 두 사람은 차 안에서든 관광지에서든 친밀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반면 나를 대하는 가즈미의 난처해하는 표정은 빈번해졌다. 당시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유는 모두 내게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 세 사람은 고급 초밥집에 초대돼 저녁을 융숭하게 대접받았다. 식사 후 집으로 돌아와서도 다과를 앞에 두고 얘기가 이어졌다. 키요코가 분위기를 내느라 거실의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은은한 곡이 흐르는 가운데 얘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도 모친이 눈짓을 보내자 가즈미는 그때마다 내게 말을 붙였다. 그날 밤도 나는 그저 건성으로 대했다. 얼굴표정으로도 내가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역력히 보였을 것이다. 또다시 가즈미가 무안해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오히려 나는 가즈미보다는 동생 키요코에게 말을 걸곤 했다. 키요코는 당시 유학 중이던 캐나다에서 여름방학이라 잠시 다니러 와 있다고 했다. 나는 보란 듯이 그녀와 영어로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반발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한국인임에도 왜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하느냐는 속 좁은 편견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못하는 건 키요코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에겐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가학적인 심리가 아니었던가 싶다. 도대체 그런 오만과 뻗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 시절 나의 머리와 가슴은 추상적인 민족의식과 정의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감성에서가 아니라 민족의식과 감정으로 가즈미를 봤다. 그러니 그녀가 한국어를 말할 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감이 자리하게 됐고, 절세의 미모에도 전혀 이성적인 끌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식 가정교육을 받은 탓인지 몸에 밴 일본여성 같은 그녀의 예의바른 행동거지와 우아한 자태가 돋보여도 그런 아리따움조차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당시 가즈미의 모친은 고국에서 온 젊은 청년인 나를 내심 쓸 만한 사윗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국에서 온 27세의 패기만만해 보였던 나를 정말 마음에 들어 하셨다. 내가 가즈미와 나이 차도 적당하고, 종교도 같은 불교를 믿는 데다 일본어도 구사할 수 있어서 그랬던지 그 뒤 우리가 귀국한 지 꽤 됐는데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을 법한 가즈미를 데리고 내게는 알리지도 않고 내가 다니던 서울의 회사 근처까지 나를 찾아오셨으니 말이다. 일본여행에서 돌아와서 2년이 지난 1987년 초가을, 내가 대학졸업 후 공채로 입사한 서울의 K신문사에 다닐 때였다. 그 전에 나는 일본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즈미의 모친에게 여행 시 우리에게 베풀어준 후의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보낸 뒤로부터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게 됐다. 물론 언론사에 취직이 됐다는 소식도 전해드렸다.
나는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가즈미와 두 번째 만났다. 아주머니께서 딸을 앞세워 나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단히 송구스러웠지만, 아주머니께 정중히 에둘러 사양의 뜻을 전하면서 식사대접 후 돌려보내드렸다. 당시로선 혼기가 조금 늦은 꽉 찬 스물아홉 살이어서, 또 딸을 데리고 한국에까지 찾아오신 그분의 성의를 봐서라도 나는 가즈미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겉으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실망감이 드러나지 않을 리 없었다. 낙심한 채 돌아서는 두 모녀의 모습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말 없는 가즈미의 맑고 굵은 눈망울도 잊히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 딸 가진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십분 이해가 된다. 특히 가즈미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한국에까지 딸을 데리고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자당(慈堂)께선 얼마나 낙심했을까? 내 마음은 왜 그렇게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을까? 그 마음은 또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 글을 쓰기 3년 전인 2012년 여름, 북송선과 조총련을 주제로 소설을 쓰던 모 소설가와 일본 서부 해안의 항구도시 니가타(新瀉)를 여행한 적이 있다. 쌀과 물이 좋아 질 좋은 정종이 많이 생산되고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에게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북송선이 운항되던 곳으로 더 잘 알려진 니가타는 도시의 구조가 내 고향 포항과 비슷했다. 시내를 가로지른 바다 건너편 해안에 해수욕장이 있었다. 그 해변을 찾은 나는 넘실대는 파도를 보면서 동해에 해당되는 검푸른 그 바다 건너편엔 한반도의 남과 북이 분단돼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것은 통한과 비감이었다. 그 바다는 왠지 모르게 나에게 숙명처럼 아득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과거 이 동해바다를 보고 조국을 그리다 숨져간 재일조선인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고 무언가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이 들어 눈물이 많이 나고 그랬었다.
이런 감정은 1985년 내가 찾았던 오사카의 쯔루하시 시장에서 그곳의 많은 재일교포들을 봤을 때도 느꼈었다. 그곳 쯔루하시 시장엔 제주도 출신 교포들이 많이 살았다. 한창 피가 끊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불타는 민족의식으로 고난과 애환에 찬 동포들을 봤다. 굳세게 우리 민족의 혼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랐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들 대부분이 모국어를 잊고 살고 있어 실망이 적지 않았다. 일본에 대해 분개하는 마음이 컸지만, 동시에 모국어를 잊고 사는 재일동포들에게도 화가 났던 그런 시절이었다. “모국어란 민족의 정신이자 혼인데, 그걸 잊어버리다니!” 하면서 말이다.
가즈미와 그 모친에겐 매몰차게 느껴졌을 수 있는 나의 완곡한 거절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가즈미 모친에겐 인간적으로 송구스런 일임을 알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평생을 같이 할 부부의 인연이란 우연찮게 쉽게도 이뤄지지만, 인위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기에 결정은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연이란, 시절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싶다. 일생 동안 매 시기마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고, 자신의 정신과 혼을 지배하는 어떤 의식과 가치로 사물과 사람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나는 지금도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특히 그 시절엔 고지식하게 민족이니, 국가니, 정신이니 하는 추상적인 문제에 경도돼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움직인 정신과 행동양식의 준거였다. 내가 가즈미 모친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간절한 바람을 외면한 이유도 그 시절 나의 정신을 지배했던 그런 낡아 빠진 뻣뻣한 “훈장” 같은 민족의식 때문이었다. 나만의 프리즘으로 남을 봤으니 그 사람의 진면목이 보일 리 만무했다. 당시는 내게 그것이 인연을 결정한 因이었다. 그러나 절세미인이 내 앞에 나타났어도 구만리 바깥의 마음 밖에 존재한 거나 다를 바 없었으니 緣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 나는 그것으로 이승에서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서른이 넘어 늦깎이로 떠난 유학생활에서 학업을 따라 가느라 바삐 지내다 보니 이러구러 몇 년이 훌쩍 지났다. 유학생활 중에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도쿄로 가서 낮엔 ‘노가다’도 하고 저녁엔 식당에서 접시도 닦았다. 그때 잠시 짬을 내어 고려사의 태연 스님에게 안부를 묻고 인사차 큰 송이버섯 꾸러미를 들고 다시 오사카를 찾았다.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나를 잡아끌었던 어떤 미련이 남아 있었다. 가즈미의 미모가 떠오르면서 30대 후반으로 넘어가는 데도 아직도 짝이 없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보현사에 도착한 나는 태연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이런저런 얘기 중에 자연스레 가즈미네의 근황을 물어 봤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약간 근심 어린 낯빛을 지으시면서 선뜻 말씀을 하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옆자리의 다른 스님이 가즈미가 어떤 젊은 비구스님과 세속인연이 닿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해주셨다. 이 말을 듣자 퍼뜩 10여 년 전 그날 밤 가즈미를 태워 밤길에 우리를 찾아왔었고, 우리를 태워 오사카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가즈미와 즐겁게 얘길 나누던 그 비구스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단정을 지을 일은 아니었다. 나는 구체적인 사정은 더 이상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만일 그 비구스님과 일어난 일이었다면 가즈미의 인연은 따로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가즈미의 혼인이 파국을 맞았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 얘긴 내게 차라리 듣지 않은 것보다 못 했다.
오사카 보현사에서 가즈미네의 근황을 물은 뒤 또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쉰이 다 돼서야 결혼을 했다. 이 글을 쓰는 내게 동해와 현해탄은 태평양보다 더 먼 아득한 바다로 느껴진다. 그 바다 건너 가즈미와 그의 모친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제는 다 구름처럼 흘러간 옛일이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궁금하다. 특히 내게는 늘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서상~” 하면서 살뜰히 대해주신 그 모친에게는 인간적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 다시 보게 될지, 아니면 두 번째 본 것이 마지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모녀와 그 가족이 여생을 편안히 지내길 빈다.
반생을 통틀어 가즈미와 나는 두 번 만났다. 내가 두 번째로 오사카에 갔을 때는 소식을 아니 물었어야 했었다. 불행한 소식은 모르고 지내는 게 좋았었다. 인연이란 정말 불가사의하다. 어찌 한다고 해서 뭐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어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뤄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아이엔키엔’(合緣奇緣)인가 보다. 젊은 시절 오랫동안 결혼에 인연이 없는 듯이 살다가도 현재의 집사람과는 만나서 단 이틀 사이에 세 번 만나 결혼을 결정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게 인연인 모양이다. 내 의지와 별개로 저절로 바뀌는 계절을 어찌 할 수 없듯이 말이다. 나무들이 옷을 벗기 시작한 초겨울 산이 유달리 한기를 느끼게 한다. 오는 주말엔 집사람과 함께 낙엽이 지는 초겨울 산이나 가야겠다.
2015. 12. 1. 07:09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
위 글은 『형산수필』 제35집(2019년 12월)에 실린 수필입니다.
'왜 사는가? > 여행기 혹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연 Ⅲ (0) | 2019.12.16 |
---|---|
인연 Ⅱ (0) | 2019.12.16 |
중국 향산(香山) 혁명기념관 관람평 (0) | 2019.12.14 |
오키나와 슈리성이 불탄 걸 보고 좋아할(?) 사람들 (0) | 2019.11.01 |
인도 타고르 기념관에서 타고르 다시 보기 (1) | 2019.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