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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두려움의 원인 및 극복방법은? : 프로이트와 석가모니의 경우

雲靜, 仰天 2018. 10. 9. 21:05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 및 극복방법은? : 프로이트와 석가모니의 경우

   

현대인들은 저마다 넓은 의미에서 정신질환을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정신질환의 근저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놓여 있다. 불안은 마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초조해 하거나 뒤숭숭해서 일상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의식한 상태에서 마음이 위축되고 무서워하여 마음이 불안한 상태를 말한다. 두려움의 한자어가 恐怖이지만 공포는 한국어 어법이나 뉘앙스에선 두려움 보다 정도가 더 강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연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서 비롯될까? 그것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해소할 수 있을까? 아예 처음부터 그것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순 없을까? 현대 정신의학에서나 심리치료 등에서 이를 제거하거나 해소하는 다양한 치료방법이 있을 것이다. 마음의 통어를 존립의 본질로 삼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도 불안과 두려움 및 공포를 제어하거나 원초적으로 생성을 막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처럼 바른 수행을 통해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를 통찰함으로써 無上의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해방됐다가도 다시 그것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고, 단 한번에 되돌아가지 않는 경지에 오를 수도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정혜쌍수니 하는 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인류역사상 인간의 심리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체계라고 볼 수 있는 정신분석학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연구해왔다. 체계적인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세운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불안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불안의 감정을 사람이 출생시에 느꼈던 것을 다시 되풀이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심리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의 영역이 되도록 개척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러나 그의 이론 및 학설도 완전하지는 않다. 19세기 서양인, 특히 유럽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정신적, 심리적 특징을 동양인이라든가 전체 인간의 일반으로까지 확대시킨 일반화의 오류가 있다. 이론적 심연 또한 불교 唯識學에서 제7식을 넘어 존재한다고 얘기되는 제8식인 아뢰야식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프로이트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출생 시 내적 호흡이 중단됨에 따라 엄청난 강도의 자극이 가해지고 이것이 불안체험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또한 출생함으로써 어머니와 분리 되는 데서 불안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두 가지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불안이 개인에게 뿌리박혀 있어 벗어날 수 없고, 살아가는 과정 중 감정 속에서 불안이 규칙적으로 재생된다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이었다. 프로이트는 또한 성욕, 즉 리비도(Libido)가 억압을 받으면 불안을 통해 리비도가 배출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불안을 현실적인 불안과 신경증적 불안 두 가지로 나누었다. 전자는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불안이다. 예컨대 밤중에 공동묘지를 간다든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산악이나 정글 속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불안 같은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이해 가능한 현실적인 불안이다. 이런 경우에 느끼는 불안이란 위험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기보존본능에 따라 발동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이런 불안을 통해 원 감각을 동원하여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처한다고 한다. 즉 불안이 발동하지 않으면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이 때 불안의 정도가 적당해야 함은 물론이다. 불안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면 온몸의 감각과 근육이 얼어붙을 수가 있어 대응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후자인 신경증적 불안은 기대 불안, 공포증, 히스테리 증상에 수반하는 불안이나 흥분상태에서 발생하는 불안 등 세 가지가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기대 불안이란 어떤 상황을 예상할 때 일어나는 불안이다. 이 유형의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늘 가장 끔찍한 가능성을 예상한다. 이들은 모든 우연을 불길한 사태의 조짐으로 해석하고, 모든 불확실성을 좋지 못한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공포증은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들과 연결되어 있다. 공포증의 대상은 전쟁, 납치, 홀로 있는 것, 괴물 혹은 맹수를 만났을 때, 닫힌 공간에 갇힐 경우, 높은 낭떠러지에 서게 될 경우, 칠흑 같은 어둠, 높은 고층 건물의 난간에 서 있는 일 등등 매우 다양하다. 이것들은 사람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주관적인 요소도 없지 않다.
 
이러한 공포의 대상에 대해 느끼는 공포심은 이해가 되는 것도 있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또 이해가 된다 하더라도 공포를 느끼는 정도는 매우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흥분상태에서 불안이 아닌 다른 감정이 표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가운데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불안이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히스테리 증상들에 수반하는 불안이나 흥분상태에서 발생하는 불안은 말 그대로 히스테리 증상이 있을 때나 흥분상태에서의 불안을 말한다. 이 경우는 불안과 불안을 야기시킨 상황과 상황들 사이에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즉 흥분 상태에서 불안이 아닌 다른 감정이 표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데 예상하지 못한 불안이 표출되는 것을 일컫는다.

 

프로이트는 임상실험과 관찰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발견했고, 이 발견에 입각해서 환자의 억압을 자각시키는 작업을 통해 환자를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하려는 학문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들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유럽 사회의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동양인을 포함한 전인류에게 적용이 되는 절대적인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상당 부분 적실성이 규명된 경우도 많지만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가설적 틀임을 알고 그의 주장을 맹신하거나 절대시 할 필요까지는 없다.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의 데이터로 말하는 프로이트 보다는 실제 자신이 직접 체험을 통해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원인을 깨달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훨씬 실감이 간다. 석가가 남긴 수많은 말씀(경전)들 중에 『두려움과 공포에 관한 경(Bhaya bherva sutra)』(「맛지마 니까야」, 제1권, 134~147쪽)은 그가 파악한 불안과 두려움, 공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또 그는 어떻게 해서 그것들을 극복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석가가 당시 자신을 찾아온 인도사회의 저명한 바라문교의 바라문인 자누소니(Zanusoni)와 나눈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자누소니는 석가에게 이런 문제제기를 했다. “숲이 우거진 곳에 홀로 떨어진 거처에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홀로 떨어져 수행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비구가 사맛디(Samadhi, 즉 삼매, 불교에선 入定이라고 함)를 얻지 못하면 숲이 그 비구를 앗아가 버릴 것 같다”고 했다.

 

석가모니는 자기도 깨닫기 전에는 자누소니가 한 그 말대로 느꼈다고 하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어떤 사문이든지, 바라문이든지 신체적인 행위를 청정하게 하지 않고 숲이 우거진 곳의 홀로 떨어진 거처로 가면 신체적인 행위가 청정하지 않은 오염된 것이 원인이 돼서 不善인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난다.”

 

불안과 연계돼 있는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나는 원인은 신체적인 행위가 청정하지 않은 오염이라는 것이다. 즉 어디에 거하든 장소의 적절성은 중요하지 않고 본질은 신구의의 청정함이라는 소리다. 석가는 신체의 행위를 청정하게 하고 고귀한 사람이 되어서 숲이 우거진 홀로 떨어진 거처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신체적인 행위를 청정하게 한 상태에서 숲에서 아주 편안하게 머물렀다고 했다. 즉 석가는 불안,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을 청정하지 않은 신체적인 행위에 있다고 봤고, 신체적인 행위를 청정하게 함으로써 두려움과 공포의 불안을 극복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경에서 석가는 계속해서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는 여러 가지 상태를 언급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청정하지 못한 신체적인 행위가 원인이 되어 사람 마음속에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는 현상은 총 15가지인데, 순서대로 적으면 아래와 같다.

 

① 청정하지 못한 언어행위
② 청정하지 못한 정신행위
③ 청정하지 못한 생계
④ 탐욕과 감각적 욕망
⑤ 악의의 마음과 사악한 생각
⑥ 해태와 혼침
⑦ 들뜸과 고요하지 못함
⑧ 의혹과 의심
⑨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멸시하는 것
⑩ 겁을 집어 먹고 겁에 질린 것
⑪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바라는 것
⑫ 게으르고 정진이 약한 것
⑬ 마음 챙기지 않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⑭ 마음이 집중되어 있지 않고 마음이 산란한 것
⑮ 지혜가 없이 바보 같은 것

 

위 열 다섯 가지는 모두 각기 身口意 3업으로 귀결된다. ③⑥⑫는 신업에 해당되고, 구업은 ①⑨이며, ②④⑤⑦⑧⑩⑪⑬⑭⑮는 의업에 해당된다. 결국 身口意 3업을 짓지 말라는 것으로 귀결되는 셈이다. 과연 위와 같은 것들은 어떻게 통어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이 경의 후반부에 가면 석가가 자신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바라문이여, 그때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달이 떠있는 14일과 15일 또는 8일처럼 상서로운 날 밤에 누구나 두려움에 떨게 하고 소름 끼치게 만드는 동산이나 숲, 밀림의 탑묘에 홀로 머문다면 두려움과 공포의 참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상서로운 날 밤, 더욱 깊은 숲속을 향해 홀로 들어갔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곳은 과연 사람들이 두려워할만한 곳이었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무서운 맹수들이 곁을 맴돌고 커다란 공작새가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렸습니다. 바람이 괴성을 내며 휘몰아칠 때면 무수한 낙엽들이 거칠게 소용돌이쳤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이것이 바로 두려움과 공포인가?’
   그런데 그 순간, 다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이토록 두려움을 기다리고만 있는가? 어떠한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든 조금도 나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치리라.’ 바라문이여, 내가 포행을 하고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서지도, 앉지도, 눕지도 않고 계속해서 걸으면서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쳤습니다. 바라문이여, 내가 서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왔습니다. 나는 걷지도, 앉지도, 눕지도 않고 서 있는 자세 그대로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쳤습니다. 바라문이여, 마침내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마음 챙김이 확립되었으며, 몸은 가볍고 편안하였으며,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이 되었습니다.”

 

위 내용은 석가모니가 가장 두려움이 일어날 수 있는 곳에 가서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면 그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때까지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마음을 집중했는데 두려움과 공포를 피하지 않고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쳐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 마음의 집중과 평정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또한 석가는 두려움과 공포를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직관, 즉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석가는 그러한 현상들이 어디서, 어떻게, 왜 왔는지 원인을 성찰하고 그 원인을 제거한 뒤에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 즉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변화를 체험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석가모니는 선정에 들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 내면의 욕망이나 불만, 의심, 공포 등등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솔직하게 보고 자기 스스로를 분석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한 석가의 그 의지가 금강석처럼 대단히 굳건했다는 점이다. 불교의 수행에서 용맹정진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기에 석가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해부하고 해체시켜 끝까지 욕망, 두려움, 공포의 근원을 직관할 수 있는 마지막 최고 단계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경에서 석가가 四禪定에 들었다고 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사선정은 번뇌를 끊고 불법의 공덕을 발생시키는 4단계의 根本禪定을 말한다. 단계별 선정의 4단계는 첫 단계가 惡, 不善을 대치하는 初禪, 둘째 단계는 선정의 기쁨과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제2선, 셋째 단계는 正念正智로 쾌락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제3선, 넷째 단계는 마음의 궁극적인 청정을 체득하는 제4선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는 사선정에 이어 宿命通, 天眼通, 漏盡通을 차례로 얻어 해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宿命通은 전생을 아는 능력, 天眼通은 중생들이 각기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남을 아는 능력, 漏盡通은 감각적 욕망, 존재, 무명을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석가모니는 위와 같은 과정을 다 겪고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낸 뒤 자신을 찾아와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라고 간청한 天神에게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천신의 간청은 이랬다. “일어나지 않는 일이나 이미 일어난 일로 항상 마음이 두렵고 안절부절 못 하겠습니다. 만약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이에 대해 석가모니의 답은 이랬다.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고, 모든 것을 버려라. 그러면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쑤브라흐만의 경』 (Subrahman sutra) 「쌍윳따니까야」, 제1권, 226~227쪽.〕 깨달음의 고리는 칠각지(七覺支)와 고행을 닦는 것을 말하는데, 고대 석가 재세시의 초기 불교에서는 고행은 감관의 제어, 즉 감관기관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소개한 대로 석가모니가 본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 그리고 어떻게 해서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제어할 수 있었는지를 보면 우리 일반인들도 마음의 평정을 얻고,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를 깨치고, 그것을 해소하거나 혹은 처음부터 발생시키지 않게 통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물의 본질을 보면 집착해야 할 게 없게 되고, 집착할 게 없으면 불안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가 그만큼 줄어든다. 본질을 보게 되면 집착할 게 아님에도 집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이 사라진 경지가 열반이다. 열반이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苦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열반을 죽음이라고만 알려진 것은 잘못된 불교의 가르침 때문이다.
 
 

고타마 시타르타가 행한 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불상. 그는 당시 인도사회에 유행하던 모든 수행법을 몸소 체험을 해본 후 위 사진처럼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굶고 몸을 혹사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의 고행은 바른 깨달음(正覺)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뒤 정각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수행방법을 개발했다.

 

석가모니가 깨침을 얻은 것이 혹독한 고행을 통한 결과이니 일반의 범부들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단념할 건 아니다. 2,500년 전에 석가가 혹독한 고행을 했었지만 그 고행을 반드시 거쳐야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석가가 그런 고행은 정각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경험을 통해 제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고행을 버리고 八正道 등의 바른 수행을 통해 깨침을 얻는다면 누구나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했다. 실제로 그렇게 된 산 증인이 석가모니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고행을 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신구업 3업을 짓지 말고 자기 마음속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훈련을 쌓아보면 좋을 것이다.
 
身口意 3업을 제거할 수 있도록 마음속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적은 목록을 만들어 하나하나 그것들을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선승들이 화두를 갖고 씨름하듯이 끝까지 參究하고, 그 원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거나 이미 발생한 경우엔 그것을 소멸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보는 게 좋겠다. 부처가 따로 없다. 깨달으면 내가 바로 부처가 된다. 부처란 게 깨달은 자를 뜻하는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는 말이니까!

  

2018. 10. 9. 13:3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