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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하필 사바세계에 태어났을까? :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

雲靜, 仰天 2018. 9. 29. 14:48

인간은 왜 하필 사바세계에 태어났을까? :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불교는 구구절절 설들이 많다. 그 설들을 성격별로 분류해놓은 것이 이른바 經, 論, 疎의 ‘쓰리 피타카’(three Pitaka)다. 그걸 다 집대성한 장구한 팔만대장경은 인간해방을 향한 것이고, 다른 차원에서 한 마디로 얘기하면 心자 하나로 귀일된다. 그것이 불교라는 종교다. 마음을 어떻게 통어하는가에 가르침이 집중돼 있는 것이다. 불교는 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친다. 부처는 깨달은 자(覺者), 즉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통칭이다.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인 고타마 싯타르타가 수행 끝에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됐다. 석가모니 이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종교가 된 불교에서 역대 수많은 조사와 선사들도 하나 같이 깨닫기 위해 평생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들은 평생 방하착(放下着)을 하되 방일(放逸)은 경계하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가 되면 어떤 경계가 펼쳐질까? 그리고 그리도 많은 경계가 있지만 왜 하필이면 사바세계에 인간의 몸으로 나투게 될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게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불교에선 인간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과의 관계 속에서 연기적으로 존재한다고 설한다. 쉬운 말로 하면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이는 서양철학에서 중요시되듯이 假와 참, 진리와 허구를 제대로 알게 해주는 인식론적 측면에 해당된다. 인간은 여타 동물과 달리 고차원적인 그러한 센스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고대 인도문명 내 본(Bon)교처럼 인도사회의 원시종교와 달리 불교가 하나의 보편적 합리성을 갖춘 고등종교로 만들어 질 때에도 존재론적 측면과 함께 대단히 중요한 축을 이루는 인식론적인 측면이다. 이를 종합해서 보면 과연 불교에서는 인간이 사물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타자를 받아들일까? 또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위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선 불교에서의 시공간 개념을 파악하고 가자. 불교에서의 시간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다. 불교의 삼세론은 플라톤적인 무시간적 영원을 얘기하거나 시간성(Zeitlichkeit)을 부정하는 서양철학의 어느 관점에서 보면 성립되지 않을 수 있는 이론이다. 현재는 삼세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며, 시간성의 개념을 구성하는 토대가 되지만 근대 서양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가 말했듯이 현재는 하나의 정지된 시간의 점이 아니라 지나고 있는 상태며, 통과하고 있는 점에 불가하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도 없고, 현재가 없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이 말은 “A지점에서 쏜 화살은 영원히 목표점 B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1/2, 1/4, 1/8 지점으로 무한한 수렴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은 고대 그리스의 궤변학파의 인식은 넘어섰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삼세를 실재 세계인 것처럼 설해지고 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시방에 무수한 세계가 있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부처들이 널리 존재(通在)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하면 전체 시공간 속에 두루 존재(遍在)하는 부처를 말한다. 이 대목은 기독교의 전지전능을 말하는 신적 존재와도 상통한다. 둘 다 방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불교에서 우주는 시공으로 짜여 있다. 인간은 언제부터 사후세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을까? 불교나 힌두교에 영향을 미친 고대 인도의 원시종교인 본교에 사후세계와 윤회개념이 나온 것으로 봐서는 힌두교와 불교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으면 육신은 어디로 갈까? 영육이 분리될까?
 
공자가 자기 제자들에게 현세도 잘 알 수 없는데 죽음 이후는 더욱 알 수 없다고 주지시킨 바대로 중국인들은 유교(종교가 아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에 사후세계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 한국인도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민족은 불교를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후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는 사후세계를 자세하게 설해놓았다. 또 현세의 세계와 우주에 대해서도 경이롭게 설명돼 있다. 그것이 실존 세계일지는 현재로선 규명되지 않고 있지만, 불교에서 설정된 우주관과 세계관은 너무나 광대무변하다. 여기에는 크게 인간 인식의 경계, 수행의 정도에 따라 차등이 존재하고, 이것이 극대화 돼 우주 및 세계 영역으로까지 층차가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영역은 나뉘어져 있는 듯이 구분이 된다.
 
하지만 경, 론, 소가 상징하듯이  수많은 교설로 이뤄진 불교지만, 실상 그것들은 모두 수행과 깨달음을 통한 구극처인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편 하나로 귀일된다는 점에서 시종 맥을 같이 하는 同體異狀의 관계에 있다.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은 소승불교의 논서로 유명한, 인도의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菩薩)가 지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 잘 묘사돼 있다.
 
우주와 세계를 가리키는 공간개념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대표적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Tri sahasra maha sahasra loca dhatu)를 들 수 있다. 불교에서 삼세(三世)가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 두 개념은 공간을 상징하는 개념어다. 시방세계란 동, 서, 남, 북 사방 그리고 북서, 남서, 남동, 북동의 사유(四維)와 상하를 합쳐 모두 열개 방향을 나타낸다. 360도의 입방체다. 공간적으로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삼천대천세계란 아득한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우주 전체를 가리킨 말이었는데, 대천세계(大千世界) 혹은 삼천세계로 약칭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세계의 크기는 어떠할까? 일단 기준이 되는 어떤 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이 소천세계(小千世界)인데, 현대과학으로는 은하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나중에 삼천은 말 그대로 3,000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그릇된 것이며, 1,000의 3제곱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설이 있다. 말하자면 대천세계란 1,000의 3제곱으로 10억 개의 세계를 말한다. 상상이 되겠는가? 결국 이는 우주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불교에서 얘기된 우주와 세계는 너무나 넓어서 가히 실제의 우주만큼 넓은 공간의 크기에 비견된다. 또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인 것이 중천세계, 그리고 중천세계가 다시 1,000개 모인 것이 대천세계인데, 이를 삼천대천세계 또는 삼천세계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준이 되는 세계란 과연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인식하는 인식작용을 18가지 범주로 나누고 있는데, 이를 18계(十八界)라고 부른다. 불교에서 보통 계(界)는 요소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다뚜’(dhatu)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인식을 성립시키는 요소의 하나로서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으로 보고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인 형체, 소리나 빛깔, 냄새를 가리킨다.
 
18이라는 숫자는 인간 등 일체의 존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사물을 접하는 모든 경계인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을 합친 것이다. 즉, 눈, 귀, 코, 혀, 피부(살), 마음(뜻) 등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즉 육근과 그 각각의 대상인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현상(法)의 6경, 그리고 이 6근과 6경을 연(緣)으로 해서 생겨나는 6가지 마음의 활동,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여섯 가지 식을 말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이 글이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망막을 통해 전사되는 글자의 형상이 사회적, 민족적으로 약속이 돼 있는 그 의미체계로 받아들여지는 게 바로 제6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식의 작용이다. 식 이외에 다른 감각들에 卽應해서 일어나는 작용들도 동일하다. 이러한 여섯 가지의 식을 제외한 12가지를 12처(處)라고 한다.
 
이러한 18계 안에 3계(三界)인 욕계(kama-dhatu 欲界), 색계(rupa-dhatu 色界), 무색계(arupa-dhata 無色界)가 있다. 3계를 구성하는 욕계는 유정(有情)이 사는 세계로서 3계 중 맨 아래에 존재한다. 이 세계를 욕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에 사는 유정에게는 식욕, 음욕, 수면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이 세계는 여기에다 명예욕과 재물욕을 보태 5욕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세계는 오관(五官)의 욕망에 끄둘려 사는 중생들의 세계인데, 지옥,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 하늘(天)을 말한다. 하늘은 욕계에만 있는 게 아니고 색계에도 존재해 하늘만 해도 33개의 층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른바 33천이다.
 
불교에서는 풍륜에서 대범천에 이르는 범위의 공간을 하나의 세계로 구성한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이 있다고 한다. 현대적 의미로는 이 세계는 태양계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것이 앞서 언급된 기준이 되는 세계다.
 
阿毘達磨俱舍論에 따르면, 우주는 원반형의 풍륜(風輪), 수륜(水輪), 금륜(金輪)이 겹쳐서 공중에 떠 있고, 그 금륜 표면의 중앙에 수면으로부터 높이가 8만 유순(1由旬, 약 56만 km)이나 되는 수미산(須彌山)이 있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설정된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을 일곱 겹의 산맥이 각각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에워싸고 있으며, 그 바깥에 네 개의 대륙(四大洲), 즉 남쪽의 섬부주(贍部洲) 또는 염부제(閻浮提)에 인간이 살고 있다는 곳이 있고, 그 가장 바깥을 철위산(鐵圍山)이 둘러싸고 있다. 또한 수미산의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 즉 동쪽의 持國天, 남쪽의 增長天, 서쪽의 廣目天, 북쪽의 多聞天)이 살고 있고, 그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을 비롯한 33의 천신(天神)들이 살고 있는데, 이곳을 33천(三十三天) 또는 도리천(忉利天)이라고 한다. 33천을 도리천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힌두어 33을 음역하면 도리와 유사한 음가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상정된 전체 27천 중 욕계(欲界) 6천의 두 번째 하늘에 해당된다. 그 모양은 사각형을 이루고, 사방 네 모서리에는 각각 봉우리가 있으며, 8성씩 총 32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 중앙에는 선견천(善見天)이라는 궁전이 있다고 전해지고, 선견천 안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주석하면서 사방 32성의 신(神)들을 통어, 지배한다고 한다. 사방 각 8성씩의 32성에다 선견천을 더한 이 천상계(天上界)를 33천이라고도 한다. 이 33천은 한 달 중 6재일(六齋日, 즉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마다 성 밖에 있는 善法堂에 모여서 부처님의 법에 맞지 않는다거나 법답지 않은 일을 평가하게 된다.
 
수미산 상공에는 사천왕(四天王), 도리천(忉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 化樂天이라고도 함),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는데, 이 여섯 천궁은 아직 도덕적으로도 불완전하며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였으므로 육욕천(六欲天)이라고 한다.
 
이번엔 욕계 다음의 색계(色界)를 보자. 색계는 욕계와 무색계의 중간 세계인데, 욕계에서와 같은 형상 있는 물질의 세계로서 음욕과 식욕 등의 탐욕은 끊어졌지만, 아직 무색계와 같이 완전히 물질을 떠나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에는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의미한다. 즉 색계는 선(禪)으로 형상(色)을 갖추고는 있으나 욕망을 완전히 떠나 천들이 육욕천 위에 있는 것으로 설계돼 있다. 18계 중의 하나인 색계는 형상의 세계 또는 물질적 가치관에 빠져 있는 차원으로서 욕계에서 벗어난 깨끗한 물질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탐욕에서는 벗어났으나 아직 형상에는 얽매여 있는 세계로서 선정(禪定)을 닦는 사람이 다다르는 곳이다.
 
여기에는 17개의 하늘이 있어 이를 색계17천(十七天)이라고 부른다. 또 색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처소)인 하늘이 몇 개인가의 관점에서 색계를 이루고 있는 하늘의 개수에 대해서는 경전과 논서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어 색계17천 외에도 색계18천(色界十八天)과 색계22천(色界二十二天)으로도 불린다.
 
색계17천은 대체로 고대 인도 부파(部派)불교 시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경량부(經量部)에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상좌부(上座部)와 대승불교 쪽에서는 색계18천을 설하고 있다. 이 두 견해 간의 차이는 색계의 4선천(禪天) 가운데 제4선천에 속한 무상천(無想天)을 제4선천의 제3천인 광과천(廣果天)에 속한 특정한 영역에 부여된 명칭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무상천을 광과천 위에 존재하는 별도의 처소, 즉 하늘로 보는가에 따라 하늘의 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4선천이란 3계9지(三界九地)의 관점, 즉 선정(禪定)과 수행의 정도에서 세분돼 4가지 하늘로 나눈 것을 말한다. 이를 각기 초선천(初禪天), 이선천(二禪天), 삼선천(三禪天), 사선천(四禪天)이라고도 하는데,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의 4선(四禪)이라고도 한다. 4단계 중 첫 번째 하늘에 해당되는 초선에는 대범천(大梵天)과 그 권속들이 살고 있다. 물론 수행의 최고 단계로서 정(定)을 이루어 형상마저 벗어난 무색계(無色界)의 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3계의 마지막 단계인 무색계는 오온(五蘊) 중 색(色)을 제외한 수(受), 상(想), 행(行), 식(識)만으로 구성된 세계를 말한다. 물질에 끄둘리는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탐욕에서도 벗어났고, 형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도로 선정에 든 정도를 말한다. 이러한 무색계의 선정(禪定)에는 삼매의 깊이에 따라 4단계가 있는데,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허공처럼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識이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경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이 그것이다. 이것은 욕계정(欲界定), 색계정(色界定) 보다 더 정적(淨寂)하며,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상념이 없게 된 경지다. 한 마디로 선정이 깊으면 높은 하늘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겠다.
 
우리는 과연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통 인간의 경험으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이러한 하늘들을 제시하면서 궁극적으로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걸 현대와 비교해서 식자률이 현저하게 바닥에 머물렀던 고대 사회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시청각 교재로 이해한다.
 
불교에서는 무릇 생명 있는 모든 것, 즉 有情은 육계에서 끊임없이 윤회를 한다고 한다. 쉼 없이 돌고 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윤회다. 육도에는 하늘나라인 천계, 인간들이 사는 인계, 아수라, 아귀, 지옥, 축생이 있다. 석가는 이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다른 생명으로 나투면서 환생을 반복하는 것을 괴로움, 즉 苦라고 봤다. 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했다. 해탈은 영원히 나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도 않는 상태, 즉 불생불사의 상태다. 석가는 이것을 이상향으로 설정했다. 그곳엔 모든 삼라만상의 動과 靜이 정지된 無의 상태로 있다. 그래서 니르바나(Nirvana), 즉 모든 것이 적멸한 상태인 열반이라고도 한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이룰 수 있을까?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지혜를 증득해 존재의 공성과 연기성, 人無我와 法無我를 깨달아 중생의 고통에 공감하고 계율을 지키고 자비행과 팔정도를 행해 삼독을 멸하는 것이다. 이를 천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인 아수라, 아귀, 지옥, 축생이 해탈하기 쉬울까?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하기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단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데는 가장 좋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옥에 떨어지거나 축생의 몸으로는 수행을 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흔히 보이는 개나 소나 닭 등등의 동물들을 볼 때 그들이 수행을 할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또 그들은 識이 분명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제외한 축생은 수행을 한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이게 인간 위주의 합리화일까? 하늘에 태어나는 것도 해탈하기에는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 이 글의 주요 주제인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대해 알아보자. ‘사바세계’는 산스크리트어의 saha-loka-dhatu에서 음역한 것이다. 사바세계란 “참고 견뎌 나가야 하는 세상”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인 이 세상을 뜻한다. 범위는 부처님이 섭화(攝化)하는 경토인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사바세계다. 한자로는 ‘인토(忍土)’ 혹은 ‘감인토(堪忍土)’로 의역하기도 한다. 인토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사바세계가 일체 중생이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三毒)과 모든 번뇌를 참고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오온(五蘊)으로 비롯되는 고통까지도 참고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9도(九道)가 혼재하여 같이 살고 있으므로 잡회(雜會)라고도 한다.
 
이 세계는 그 어떤 고통이나 아픔도 없다는 극락과 너무 고통스러워 감내할 수 없는 지옥의 중간에 있는 곳이다. 사바세계는 참고 견뎌야 하고, 또 참고 견딜만한 곳이라고 한다.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에게 수행 방법으로 인욕이 권장되는 이유다. 따라서 아예 苦가 하나도 없는 극락과 달리, 또 苦뿐인 지옥과도 다르게 적당한 苦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수행여하에 따라 이러한 苦는 감소되거나 소멸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오히려 증장될 수도 있다. 없앨 수도 있고, 더 많아 질 수도 있는 조건이라면 아주 매력적이고 발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고타마 싯타르타가 설한 불생불멸의 영원한 이상인 해탈을 이루기엔 사바세계만한 곳은 없다. 과학적 사실 여부와 별개로 윤회를 설정한 "한국불교"에서는 적어도 그렇게 본다. 그래서 이러한 복잡다기한 우주를 믿든 말든, 불교식으로 보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수많은 억겁에 걸친 대단한 인연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자체로 복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환생이나 윤회는 완전히 동일한 의식과 동일한 육체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정신과 다른 몸을 가져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전생의 그와는 연속체다. 현생의 나는 과거의 나임과 동시에 그가 아니고, 그가 아님과 동시에 나이기도 한 존재다. 그러니 어렵사리 이곳 穢土, 塵世에 나툰 이상 분명 하루하루, 매분 매초를 그냥 허투루 보낼 일은 아니다. 불생불멸의 해탈, 적멸의 상태에 들어가려면 말이다.

그런데 잠깐! 위에서 윤회니,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지만, 그건 사실 힌두교의 교리일 뿐 원래는 불교에 없는 얘기이다. 그러면 왜 얘길 끄집어내어 장황하게 이야기했냐고? 석가모니가 설한 윤회는 위에서 소개한 것이 아닌데 지금까지 윤회를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인 한국 불교인들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서 그랬다. 정통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말한 윤회는 어떤 것이었는지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를 하겠다.
 
2017. 8. 20. 10:50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