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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탄생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雲靜, 仰天 2018. 5. 23. 15:30

석가모니 탄생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부처님 오신 날, 석가모니 탄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참에 불교공부를 조금 해보자!

음력으로 4월 초팔일인 오늘은 5월 22일로서 부처님 오신 날인데 마침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의 날과 겹치네요. 석가모니는 생명중시, 인간의 죽음문제 해결, 인간사회의 혁명적 변혁, 진리에 대한 인식방식의 전환, 삶의 태도의 획기적 변화를 강조한 점에서 오늘 두 기념일은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물다양성의 날’은 유엔에서 전지구적 차원에서 날로 악화되는 환경위협과 생태계위협으로부터 생물의 다양성을 보전하고, 생물자원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높일 목적으로 제정한 것입니다. 생물의 다양성은 말 그대로 생물체들 간의 다양성과 변이, 그리고 생물체들이 살고 있는 모든 생태적 복합체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죠.
 
고대 B.C. 624년 오늘, 인도 북동부 카필라국(오늘날 네팔)의 숫도다나 왕과 마야 왕비 사이에 태어난 석가모니는 일찍부터 생명을 중시하고 모든 생물의 등가성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생물은 깨달음의 대명사이자 결정체인 부처가 될 수 있는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의미로 석가모니가 ‘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강조한 게 그 예증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특히 석가모니께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계율로 이런 저런 금기를 설했는데, 그 중에서도 산목숨을 이유 없이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살생금지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강조했습니다. 특히 생명을 중히 여기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출가자가 이걸 어기면 가장 무거운 4가지 죄(4바라이)중의 하나로 정했습니다. 만약 이 계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강조함에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도 누구든 죽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노병사의 과정을 겪게 마련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사망을 숨이 멎고 두뇌가 완전히 멈춘 상태라고 보고 사람이 그 상태가 됐을 때 의사가 판단을 하지만, 석가모니는 죽음을 五蘊이 흩어지는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오온이 흩어지는 상태라는데, 오온은 불교도가 아닌 사람에게는 생소한 단어일 것입니다.
 
오온이란 원래 산스크리트로 色, 受, 想, 行, 識이라는 5개의 덩어리를 뜻하는 판차스칸다(panca-skandha)의 한역인데, 당나라 시대 현장법사가 이를 五蘊으로 번역했고, 구마라지바는 五陰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현장법사는 5개가 각기 쌓거나 쌓이는 덩어리라는 의미에 주목해 ‘쌓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蘊을 썼고, 구마라지마는 불교 唯識學에서 사후의 저승세계와 다시 태어나기 전의 중간단계에 있는 존재를 中陰神이라고 하는 것에 주목해 陰으로 번역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튼 오온은 色蘊, 受蘊, 想蘊, 行蘊, 識蘊입니다. 여기선 오온에 대해 일일이 다 설명할 순 없지만, 긴요한 뜻만 전하면, ‘색’은 물질적인 형체가 있는 것, 파괴되는 것 혹은 변화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의 rupa의 한역번역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불교에서 색이란 모든 가시적인 물체, 물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수’(vedana)는 12연기에 등장하는 불교 唯識思想에서 여덟 번째 식인 아뢰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心所의 하나로서 인간의 의식이 바깥 경계의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아들이는 감수(感受)작용을 말하는데, 감각과 호불호, 쾌불쾌 등의 주관적인 감정의 작용을 말합니다. 예컨대 동일 인물의 어떤 여자를 보고 어떤 사람은 미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그렇다고 생각한다거나, 또 같은 일인데도 어떤 이는 즐거운 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어떤 이는 덤덤하다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기분이 언짢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정신작용을 수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마다의 개성이 다른 이유가 됩니다.
 
또 ‘상’(samj~na)은 수라는 마음 작용을 통해서 대상을 받아들인 후에 그것을 자신의 틀(범주)로 정리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이는 표상 작용으로서 의식 속에 이미지, 즉 상(象, 相)을 구성하고 마음속에 어떤 것을 떠올려 관념을 형성하는 것인데 지각이나 표상 등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인지기능에서 대상을 이미지화하기 위해선 반드시 언어가 개입되는데, “이 사람은 백인이다”, “저 사람은 흑인이다”라고 분별하듯이 바깥 대상을 개념화(언어화)해서 인식하죠. 이러한 정신 작용이 바로 상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과정은 내용(분별작용과 감정이 제거된 것)은 달라도 작동원리는 사진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한자로 ‘가다’라는 의미의 行으로 번역된 ‘행’은 원래 산스크리트에서도 ‘가다’라는 뜻의 samskara에서 온 말인데, 실제로 정신적 움직임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것을 말합니다. 서양철학의 개념으로 말하면 일종의 의지력(will)으로서 간구, 바람, 기원 같은 마음 상태이자 특정 대상에 대해 관심이나 흥미를 느끼는 기억, 상상, 추리 등의 정신작용입니다. 즉 인간이 경험하는 어떠한 것을 현재에 존재하는 것처럼 형성하는 작용을 말하며, ‘수’, ‘상’, ‘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한 것으로서 마음의 의지 작용을 말합니다.
 
‘식’(vij~nana)은 대상을 식별하거나 구별해 인식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작용 전반을 총괄하는 주체적인 마음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 이 식은 제6식 외에 제7식(마나스식)과 제8식(아뢰야식) 세 종류가 있어 이해하기가 가장 복잡한 것인데, 이에 대해선 설명을 생략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다섯 가지 온들 가운데 맨 처음에 나오는 물질적 요소인 색온 이외의 수, 상, 행, 식 4온은 모두 정신적 요소인데, 이는 색온과 결합하여 몸과 마음(心身)을 이루기 때문에 ‘명색’(名色, namarupa)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오온은 제각기 별개로 작동하는 게 아니고 모두 연동돼 있다. 그 과정이 바로 마음(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과정인 것이다.

 
석가모니는 생명이나 존재를 구성하는 이 다섯 가지 성분이 각기 잠시 인과 연으로 맞아떨어져,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因緣假合, 五蘊假和合으로 존재하다가 그 오온의 인연이 다해 흩어지면 죽음의 세계로 이행한다고 정의한 것입니다. 또 오온 중의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영원히 변하지 않음을 뜻하는 Atman, 즉 ‘我’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五蘊無我라는 것이죠. 오온이 공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 불교경전에서 보이는 五蘊皆空이라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오온은 나중에 개념이 확대돼 현상 세계의 모든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오온 그 자체도 空한 것으로서 실체가 없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육신은 오온의 임시적인 집합체로서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인연이라는 조건이 사라지면 제각기 흩어지고 마는 것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몸뚱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인간의 삶이 괴로운, 즉 苦라고 하는 이유의 하나죠.
 
석가모니는 생명과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삶의 끝이나 단절로 보지 않고 자신이 몸(身), 입(口), 생각(意) 3업으로 지은 업의 과보에 따라 여섯 종류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는 六道行을 하고, 바른 수행에 의한 업보로 이 6도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즉 해탈하고 열반에 들 수 있다는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해탈은 끝없이 윤회를 반복하는 6도의 쳇바퀴를 벗어나 다시 태어나지도 않고, 태어나지 않으니 죽는 일도 없다는 이른바 不生不滅이라는 경계입니다. 석가모니는 살아 있을 때 바르게 잘 살고 이러한 불법의 실체를 깨달아 증득하기만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윤회라는 고통을 벗어나 죽음을 영원히 초월한 경계를 제시한 것입니다. 해탈이란 또한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괴로움에 처해 있는 苦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한편, 석가모니는 인간들이 가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현세의 사회적 제조건을 개선하는 것에도 많은 얘기를 하고 가르침을 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현재적 삶에 충실하고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 즉 삶과 죽음이 같은 것이라는 生死一如의 구극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현재의 사회와 국가 등 인간의 삶의 질과 조건을 결정하는 정치, 제도, 법, 관습, 문화 등등의 분야에서 악습과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그러한 것들 가운데 당시 인도사회에서 대중의 삶의 질을 저하시킨 것 가운데 가장 질기고 악랄하게 남아 있던 것이 바로 카스트제도(Casteism)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석가모니가 당시 고대 인도사회에 고착적으로 지속되고 전승돼온 신분제도인 이 카스트제도에 대한 타파를 선언함으로써 가히 당시 사회에선 혁명적이랄 수 있을 정도로 사회변혁을 일으킨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힌두교의 사제계급인 브라흐만(Brahman), 왕족, 귀족, 무사계급의 크샤트리아(Ksatriya), 평민계급을 뜻하는 바이샤(Vaiśya), 노예계급인 수드라(Sudra), 그 아래 달리트(Dalit) 또는 하리잔(Harijan)으로 불리면서 노예 보다 더 천시된 불가촉천민(Untouchable)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된 카스트제도는 현대 인도사회에서 법적으론 철폐돼 없어졌다고 인도 헌법에도 명시돼 있지만 관습적으로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불가촉천민은 인도 전역에서 도살, 시체 처리, 가죽 수리, 길거리청소, 음식찌꺼기 처리,  소작농, 농장 머슴, 재래식 변소의 분뇨처리 등의 밑바닥 일을 하면서 살아 가는 이들인데, 전체 인구의 약 7%인 1억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대로부터 거주, 직업 및 취직, 혼인 등에서 엄격한 차별을 받아 왔습니다. 불가촉천민이 지금 현대 인도사회에도 7%나 되는데 석가모니 재세시에는 전체 인구의 3할은 족히 됐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카스트제도의 철폐엔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콜롬비아 대학의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독립 초기 신생 인도정부의 헌법을 기초했으며, 네루 정권의 법무부장관직에까지 올랐던 바바사허브 암베드카르(Babasaheb Ambedkar)라는 인물의 공헌이 컸습니다. 인도 현대사에서 인도가 전근대성을 탈피하게 되는 과정에서 역할이 컸던 그의 책을 번역해서 소개하려고 수년 전 인도여행 중 그의 저작과 전기물을 몇 권 구해왔지만, 아직도 인연이 닿지 않네요.


암베드카르 저서. 표지 인물이 암베드카르다.


아무튼 카스트 제도는 헌법 명문에서 공식적으로 없어지게 되기 전까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것입니다. 이 제도는 힌두교에서 한 마디로 인간 자신이 숙세나 현세에 지은 업보(業報)대로 저마다 다섯 계급 중의 한 계급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결정론적인 교리로서 최상의 계층인 브라흐만과 크샤트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기득권을 보호 유지하고 영속시키도록 제도화하는 질곡입니다. 즉 노예나 그리고 노예 보다 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불가촉천민들은 자신의 그런 불우한 처지가 모두 자신이 숙세에 지은 업의 결과이니 현실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숙명론적 종교적, 제도적, 정치적 장치라는 것이죠.
 
그런데 석가모니는 이러한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타파하고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으니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의미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선언을 했습니다. 흔히 석가모니의 탄생게로 알려져 있는 이 선언은 석가모니가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와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외친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종교 교주의 생로병사는 인간의 눈과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신화적 요소가 가미돼 있다. 특히 탄생 부분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상징의 내용 중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쳐야 한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이 역시 교주인 고타마 싯타르타에 대한 신격화가 가미된 신화적 색채를 띤 것이지만, 본질은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서나 오로지 고타마 싯타르타 혼자만이 존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존귀하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즉 “唯我獨尊” 중의 我는 석가모니 자신이 아니라 인간을 가리킨다는 것이죠. 이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인본주의(Humanism)의 표현이었고, 더 넓게는 생명존중의 사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천상천하유아독존'은 고대 중국인들이 인도의 불교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 번역한 것들 중의 한 가지입니다.
 
또한 석가모니 재세시 교리적으로는 無常과 無我를 설함으로써 힌두교에서 신분을 영속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해졌던 我를 부정하여 카스트 제도의 근간을 허물려고 의도했지요. 이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로 갈 수 없다”고 한 예수의 말씀 중에 “나”, 즉 바로 인간을 말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며,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God is dead)라고 외친 것도 신에 예속된, 근대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기독교 문화를 허물기 위해 행한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선언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다만, 불교에서 평등주의(equalitarianism)가 부처의 가르침의 근저에 깔려 있지만 이는 고대 불교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원인 중의 한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이는 무소유의 가르침과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샤카(Sākya)족 출신의 수승한 성자, 즉 고타마 싯타르타(Gautama Siddhārtha)가 인간평등을 주창한 것은 엄격하고 불평등적인 카스트제도에 따라 움직여진 고대 인도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선언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가 각기 당시 고대 중국, 그리스와 유태사회의 변혁을 꾀했듯이 석가모니도 인도사회를 평등사회로 개혁하고 나아가 인류 보편적인 인간평등을 실현시키려는 사회혁명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죠.
 
석가모니는 6년에 걸친 긴 시간 동안 다종다양한 각고의 고행과 참선 등의 수행을 통해 정각을 이룬 뒤 인간의 완전하지 못하고 부족한 언어로는 자신이 깨친 깨달음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음을 알고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지력이 떨어진 당시 고대의 중생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와 중생의 세계에 대해 가르침을 펴기로 결심한 뒤부터는 중생의 근기에 맞춰 많은 예화와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49년 동안 부처가 숱한 제자들과 중생들에게 설한 항하사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은 그 많은 설법들 중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을 추려내면 대략 세 가지로 가닥이 잡힙니다.
 
첫째는 진리에 대한 인식방식의 전환이며, 둘째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한 방편의 하나로서 형이상학을 지양하고 현실을 중시하라는 점이고, 셋째가 억겁의 인연들 중에 가장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으로 태어난 사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인식하고 나태하거나 방일하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할 수 있도록 삶의 태도에 대한 획기적 변화를 강조한 점입니다.
 
우선 세계관과 관련해 석가모니는, 세계와 우주는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분절적이지도 않고 전체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인드라의 그물망으로 서로 연결돼 있음을 설했습니다. 이 세계는 인연법의 적용을 받아서 서로 밀접한 관련 하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으니 나 이외의 일체 중생들과 나와 같은 몸이라는 대자대비, 동체대비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석가모니는 당시 고대 사회에 사상가들이나 수행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피해 현실을 직시하라는 가르침을 편 사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세계는 시간적으로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 ‘세계는 공간적으로 무한한가, 유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는가?’, ‘석가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공자도 그랬듯이 이런 류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죽음, 사후세계, 귀신 등과 같은 논의와 화두는 수행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도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흥미와 관심을 가진 제자 말룽카풋타(Malunkyaputta, 한역 경전에서의 이름은 摩羅迦子)는 어느 날 평소 석가모니가 이 의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답을 해주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를 그만두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석가모니가 사밧티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머룰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독화살에 맞은 사람을 예로 들면서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간의 괴로움을 해소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즉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숲에서 누가 쐈는지 알 수 없는 독 묻은 화살을 맞은 이가 독화살로 인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부르지 않고 자신을 쏜 사람이 “어떤 출신인지”, 또 “이름, 키, 피부 색깔, 주소를 알지 못하면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또 그가 “화살의 종류, 화살이 대나무인지 아닌지, 화살에 사용된 깃털이 어떤 종류인지 알지 못하면 화살을 뽑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해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수명은 다할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 너의 태도는 화살 맞은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부처는 말룽카풋타에게 자상한 어투로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말룽카여! 세계는 영원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어도, 또는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있어도, 여전히 생노병사가 있고 걱정, 슬픔, 괴로움, 고민이 있다. 나는 생로병사 등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가르치려고 한다. 말룽카여! 너희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는 인간이 안고 있는 괴로움 해소와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말룽카여! 따라서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라. (내가) 말한 것은 말한 것으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라.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은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이고, 내가 말하는 것은 사성제이다.” (말룽카풋타 소경, 한역명은 '箭喩經')
 
석가모니는 이런 질문을 던진 말룽카풋타라는 제자에게 끝까지 이성으로 알 수 없는 형이상적인 문제에 대해선 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10無記’ 혹은 ‘14無記’라고 불립니다.
 
결국 이 예화는 고통과 고뇌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쓸 데 없는 논의에 빠져들지 말고 지금 현실에서 고뇌를 없애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지혜롭게 천착하고, 또 그 괴로움을 제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죠. 즉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살면서 고통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즉 해탈해서 행복하게 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는 석가모니의 관심은 오로지 인간을 향해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죠. 실제로 석가모니 자신도 인간임을 강조했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말입니다.
 
“나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인간세상에서 인간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얻었다.”(我身生於人間長於人間於人間得佛)―『增一阿含經』.
 
지금까지 제시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한 마디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로 모아집니다. 즉 특히 불교도들은 자신과 자기 가족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회와 나랏일에는 무관심할 게 아니라 나 자신과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일에도 더 많은 관심과 관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답이 명료해졌습니다. 오늘 ‘부처님오신 날’의 의미를 불교도들이 이웃과 사회와 국가, 나아가 인류의 각종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관여해야 할 당위성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에 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메시지는 2주 전 본인이 대만 南華대학이 주최한 국제 불교학술대회에 초청돼 가서 발표한 논문(‘人間佛敎’在韓國 : 現實與課題) 내용 중 아래와 같은 일부 내용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석가모니는 늘 사회 속에서 생활했고, 탁발(托鉢), 걸식(乞食), 설법(說法), 중생제도(度化衆生)도 모두 사회 속에서 행했습니다. 그런데 후대 불자들이 입산해 은둔수행(山隱蔽修行)하기를 주장해 사회와 단절되고, 적극적으로 세간에서 구해야 할 불법을 세상회피라는 소극적 의미로 뒤바꿔 놓았습니다. 후대 사람들로 인해 신격화 된 석가모니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잘못 알려진 석가모니의 바른 모습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이죠. 석가모니가 고행을 하고, 깨친 법과 진리를 중생들에게 설한 것도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었듯이 오늘날 한국불교도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부처님오신 날을 맞아 석가모니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본래 인간의 본모습으로 나투길 바라는 마음과 希願을 가지게 되고, 동시에 더 많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처럼 사회개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2018. 5. 22. 14:59
구파발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