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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慈大悲와 同體大悲

雲靜, 仰天 2018. 4. 6. 21:42

大慈大悲와 同體大悲

 

大慈大悲라는 말은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다. 통상 부처님을 상징하는 말로서 부처의 가없는 자비를 형용할 때 쓰인다. 그런데 같은 불교 용어 중에 同體大悲라는 말도 있다. 전자에는 모든 중생에 대한 자애로움이 슬플 정도로 광대무변하다는 뜻으로서 무차별적 자애와 큰 사랑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어떤 의미일까?

 

뒤의 大悲는 다르지 않으니 異說이 없고, 다른 것은 大慈와 同體라는 앞의 두 글자다. 同體! 같은 몸이라는 뜻이 아닌가? 맞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즉 중생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자기 몸이 겪는 苦와 悲로 받아들일 정도로 아파하고 슬퍼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불교에선 부처를 대자대비의 수준에 있는 존재라고 본다.

 

현실에서도 드물지만 간혹 쌍둥이 형제 중 한 사람이 아프면 나머지 다른 한 사람도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나는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이웃에 사는 쌍둥이 형제에게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내 눈으로 여러 번 보고 신기해 한 적이 있다. 또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처럼 형제가 아닌 남녀 간의 연인 사이에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관점을 바꾸면 이 세상에 자신과 연관이 되지 않는 건 하나도 없다. 굳이 불교의 연기적 관점이 아니라도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되는 진리다.

 

‘사랑과 영혼’은 조금 맥락이 다르지만, 영혼교감과 다른 형식의 동체대비의 실행을 표현한 영화다. 연인 사이인 몰리와 샘은 생전에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샘이 몰리의 곁을 떠나게 됐지만 그는 저세상으로 가지 않고 사랑한 그녀를 떠나지 못해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몰리는 육체가 없는 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샘은 다른 영혼의 도움을 받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몰리에게 사랑을 전하면서 연인을 향한 동체대비의 의지가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았던가?

 

조용필이 부른 노래 중에 그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그가 있으며, 내가 없음에 그가 없고, 그가 없음에 내가 없다는 식의 가사가 있지 않았던가? 누가 작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1980년대 초 군대생활 시절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인과적 연기관계를 얘기한 의미심장한 가사라고 감탄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 모든 원리는 석가모니가 증득한 진리에 연원을 두고 있고, 대자대비와 동체대비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경전적 典據로 들 수 있는 게 있다. 예컨대『觀普賢行法經』에는 “모든 사람을 부처님이라 여기고, 모든 중생을 부모라 얘기하라”는 구절이 있다. 또『梵網經』에서는 “모든 남자는 나의 아버지이며, 모든 여자는 나의 어머니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핏줄과 가족의 범위를 뭇 중생으로까지 무한대로 확대시켜 공대하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내 자신이 직접 느끼며 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니 쉽지 않은 게 아니라 숫제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실제 삶 중 그렇게 살다 가셨다. 하나님과 달리 실존적 존재였던 석가모니는 삼라만상 중에 그 자체로 고유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소멸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증득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자기가 영원한 자신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불변의 아트만(Atmam)이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쳤던 것이다. 그래서 해탈하지 못하는 한, 윤회라는 쳇바퀴로 天界에서 축생에 이르는 6道 사이를 끝없이 돌고 도는 과정에서 내 부모가 전생에선 나를 괴롭히고 못살 게 군 권력자였을 수도 있고, 내가 모시고 있는 부모는 전생에선 나의 원수였을 수도 있다. 또 살다가 因緣假合이 끝나면 그가 나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내가 그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을 편 게 아닌가 말이다.

 

대자대비든, 동체대비든 상관없다. 부처의 입장에선 둘 다 내적으로 같은 함의를 지닌다. 대비면 더 좋고, 小悲라도 좋다. 동체가 아닌 異體도 괜찮다. 내 몸뚱이, 내 가족만 생각하지 말고 주변은 물론, 생판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삶과 죽음,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도 최소한의 관심과 연민이라도 가져보자.

 

다시 4월이 오니 문득 영상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세월호 침몰로 물속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는 아이들, 그리고 그 자식들을 구하지도 못하고 두 눈 버젓이 뜬 채 떠나보낸 부모들의 애통함과 원통함을 생각하면 그게 남의 일처럼 생각될까? 수백 명의 생명이 기성세대의 탐욕과 삿된 권력이 개입된 시스템의 문제로 눈 뜨고 죽어갔는데도 수학여행 가다가 죽었다니 어쩌느니 하는 생각들이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자신이 자비의 인이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널리 회복시켜야 할 것은 생명이 시들어가는 것에 대해 같이 안타까워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 바로 자비심이다. 다른 말로 돌려 말하면, 평소에도 세상 돌아가는 것에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닫지 말고 살라는 소리다. 그게 業(Karma) 중의 共業의 입론처가 아닌가? 그걸 행하는 것이야말로 대자대비와 동체대비의 길로 접어드는 분명한 첫걸음이다.

 

2018. 4. 6. 17:55

雲靜

오후 휴식 중에 4월이라는 것에 의식이 가니 불현듯 세월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떠올라 쓰다.

 

위 글은 2018년 4월 8일자『오마이뉴스』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