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소리! 중언부언! 횡설수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대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바깥엔 서로를 비방하는 소리가 춤을 추고 있다. 크고 작은 사고들이 줄을 이으니 세상이 혼탁하기 짝이 없다는 느낌이다. 세상은 왜 하루도 혼탁하지 않은 날이 없을까? 홀로 빗소리를 들으며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있으니 갑자기 처량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평소 가지고 있던 질문들이 떠오른다.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오늘 우리의 현실이 이토록 혼란스러울까?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게 연중 자살이 끊이지 않는 한국사회의 혼란, 갈등, 당쟁과 정쟁, 상식과 합리성 상실 등의 원인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가자 나도 모르게 평소 하던 습관대로 핸드폰에다 기독교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기독교 비판 글을 쓰려고 하는가? 이유는 한국의 종교 중엔 개신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천주교, 불교 등 다른 종교도 문제가 많지만 개신교가 조금 더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한 가지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게 있는데, 먼저 그런 종교들 중에 기독교부터 비판하게 된 점이다. 나중에 불교 등 다른 종교의 실태를 비판할 기회가 있을 거다. 또한 개신교 중에서도 참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개신교 내부에도 자성의 소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종재기 속의 외침으로 끝나서 대중에게 들리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암튼 우울한 풍광, 비굴한 군상들이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가다 보니 밑도 끝도 없겠다 싶어 방금 딱 멈추었다. 이 글을 잡지에라도 실으면 내게 기독교도들이 찾아와 집단시위를 벌이지 않을까? 일독 후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 촌평 부탁한다! 고백하건데 나는 솔직히 세상에 겁나는 게 없는 사람인데, 유일하게 한국의 기독교도들에게서만 약간의 두려움이 없지 않다.
본문
하느님은 한국 교회의 궤도이탈에 대해 왜 침묵하는가? : 설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신도, 저항을 잃어버린 교회와 신도, 정치에 관여하는 목사, 자본주의 보다 더 자본주의화 된 한국기독교
올해 부활절은 세월호 인양 소식과 대선정국에 묻혀 조용히 지나가는 느낌이다.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예수께서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틀 뒤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해마다 이날이 돌아오면 한국의 교회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의 빈민 및 철거민, 농성자, 재소자, 다문화가족 등 어렵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가 예수부활 예배를 드린다. 부활절은 사순절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간을 위해 대속하면서 당한 고통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에 의미가 있다.
한국 교회는 연례적으로 예배를 통해 예수부활의 의미를 되새겨본다지만, 과연 그것이 의례를 통한 형식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의 정신을 쫒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부활절 하루만 이런 행사를 치르고 말 것이 아니라 1년 365일을 매일 같이 그 같은 정신으로 지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개신교 중에서는 참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도 적지 않고, 교회 본연의 궤도에서 일탈한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개신교 내부에서도 자성의 소리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옹기 속의 외침으로 메아리칠 뿐, 바깥세상으로는 들려오지 않는 게 문제다.
교회라도 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면, 오늘날 우리사회가 이처럼 혼탁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쌓이고 쌓인 한국사회의 각종 적폐는 교회가 직접 그렇게 만든 건 아니지만 한국사회의 영적 성장을 답보 내지 퇴보시킨 것에 대한 책임은 작지 않아 보인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부활절을 계기로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한 가지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게 있다.
개신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에는 여타 종교도 대동소이한 상황이지만, 때 마침 부활절을 맞아 이를 계기로 먼저 개신교만 문제를 거론하게 됐다는 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여타 종교에 대해서도 내부를 들여다 볼 날이 있을 것이다.
통상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창조했다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중세 11세기 본체론적으로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한 신부이자 신학자인 안젤무스(Anselmus Cantuariensis 혹은 Saint Anselm, 1033~1109)는 이렇게 논증한 바 있다. “신은 완전하다. 완전성은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고. 즉 완전자라는 개념 안에는 이미 신이 실존한다는 논리인데, 이는 이미 동시대에 같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 가우닐로(Gaunilo 혹은 Gaunillon, A.D.11 ?~?)로부터 신이 “개념적으로는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비판 받은 바 있다.
안젤무스의 신의 존재증명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에게 비판을 받게 되지만, 아무튼 중세 교부철학자나 호교적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는 물론, 전지전능을 사실로 믿으면서 이를 강조한다. 또한 지금까지 기독교도들은 모두 이를 생명처럼 믿고 진리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의심해선 안 되는 것으로 돼 있다.
흔하디흔한 질문이지만 그런데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사회의 혼란, 탐욕과 온갖 종류의 부정과 종말적 비극들을 알고 있을 것인데, 왜 알고도 방치해두는가? 이 질문을 자주 받는 목사들이 답하는 대로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인간 스스로 해결하라는 뜻인가?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인간 스스로 해결하라는 게 침묵하는 신의 묵시론적 답이라면 하느님이나 예수님에게 기도는 왜 하는가? 모순이지 않는가?
목사의 답변대로 하느님은 과연 개인의 독자성과 자유의지를 인정했을까? 인간은 자유의지가 제어되면 제어 될수록 신을 찾는 나약하고 몰이성적인 존재일까? 인간은 신을 찾으면 도그마에 갇혀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존재인가? 이는 범기독교 특유의 일반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한국기독교계만의 특유한 현상인가?
피조물을 어디에, 왜, 어떻게 사용하려는 것인지 하느님의 의지는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묵시적 형식을 띠지만, 그것은 대부분 성령의 강림과 목회자의 입, 즉 설교를 통해 현현된다. 특히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의 의지를 알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지만, 실제 우리의 교회 현실은 하느님의 가르침과 배치되고 있는 게 진실이다. 이에 대해 현미경의 조리개를 더 열어 교회의 ‘설교’에 대해 길게 논의해보자. 한국 교회에서의 전교는 아우라(Aura)가 빛나는 모범적 삶이 아니라 모두 ‘말’로만 이뤄지니까!
기독교의 본향인 구미와 달리, 심지어 같은 동아시아 지역이지만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나 필리핀과 판이하게 달리 유독 한국의 기독교만 신도들이 스스로 자각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등한히 하면서 바로 목사의 설교에만 의지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의 신도들은 목사의 설교에 깊이 중독돼 있음을 알 수 있는 현상이 자주 눈에 띈다.
내가 경험한 일본이나 대만과 홍콩만 하더라도 신자들이 독자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하느님과 조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기회를 많이 갖는다. 또 그것을 목사도 장려하면 장려하지 목사로서의 권위가 떨어질까봐 눈치를 주는 교회는 드물다. 대부분의 신도들이 독립적 신앙 인격을 갖추어 스스로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그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고 삶의 지혜로 받든다. 이 평가는 필자가 과거 오랜 해외생활을 통해서 직접 목도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실 개인의 자각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에서는 신도 개인의 고독한 시간이 필요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집단적으로 오직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 하느님과의 즉자적 조우는 과거 수 세기 전 천주교 성직자들이 만든 박제화 된 교리, 박제화 된 신앙에 저항한 독일의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였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지향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본질적 정신이자 근본이 아닌가!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라는 종교개혁의 3대 원리를 제시한 루터는 욕망을 없애고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교조화 되고 권력화 된 교회와 신부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직접적 조우를 강조했다. 그가 주창했던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는 “예수로 돌아가자! 진리로 돌아가자!”는 강력한 메시지였었다. 개신교단의 성립 및 그 신학의 기틀을 다진 또 다른 종교개혁가 칼뱅(Jean Calvin, 1509~1564)도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며, 가장 권위 있는 권위는 성경에 있다고 강조하지 않았든가 말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목사와 신도들이 다 목사의 설교에 중독된 이들이라고 도매금으로 몰아붙여서는 곤란하다. 예수의 정신을 살려 가난하고 소외되고 있는 빈민과 사회적 약자,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족, 지체부자유자, 교도소 재소자, 나환자들을 돌보고 함께하는 참된 교회도 존재한다.
다만 이글에서는 단지 기독교 본연의 정신에서 벗어나 궤도를 이탈한 일부 대형교회들의 세속화를 탓하고, 여기에는 개신교 신도들의 비상식적 언행이 같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앞에서 예를 든 구미국가들과 몇몇 동아시아 국가들의 교회와 신도의 신앙행태와 달리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이 주로 목사의 설교에 의존하는 신앙행태를 문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현상을 두고 어떤 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 “교회생활을 수십 년이나 하고 장로나 집사가 되어서도 여전히 목사의 지침만 기다리거나 또는 그가 주는 모유만 찾는 영적 미숙아가 적지 않다. 그 결과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고, 설교자가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또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가고, 설교자의 지도에 따라 교회생활을 한다. 신도들이 독립적 신앙 인격을 갖추어 스스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주로 목사의 설교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한다.”
이 비판은 전혀 얼토당토하지 않게 들리거나 황당무계하게 들려야 함에도 그렇지 않다는 건 왜일까? 실제로 한국 교회에서는 루터가 중세 천주교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신앙형태로 제시한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라는 교리를 잘못 받아 들여 이를 무조건 신봉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게 돼 목사가 “믿습니까?”하고 물으면 신도들은 하나 같이 믿는다는 의미로 “아멘!”하고 답하는 게 일반화 된 광경이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루터가 타파한 중세시대의 박제화 된 신앙형태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는 사람들이 교황과 천주교회의 명령에 따라 타율적인 삶을 살았던 중세시대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한 천주교회의 목회자나 한국 교회 목사들의 집단의식을 연상시키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천주교 성당은 수녀, 수도사, 신부, 주교, 대주교, 수도원장, 추기경, 교황 등의 성직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위계(hierarchy)가 엄격했다. 그들은 신의 이름하에 온갖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교회가 나서 일반인들에게 면벌부(Indulgence)를 팔았던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러한 부조리를 허문 루터는 교회를 서로의 역할만 다를 뿐 계급이 없는 성도들의 공동체로 지향하도록 방향을 제시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자각이 출발선이다. 인간은 고독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이 필요한데, 한국 교회는 집단적 인습에 사람들이 길들여지도록 만든다. 한국 교회는 사람들을 집단화하기 때문에 개인을 고독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교회에 가면 오히려 자신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돌아볼 여지가 없어져 버린다고 한다. 감리교 신학대 교수로 20년간 봉직하면서 교수직을 걸고 대학 내의 불합리한 전횡에 맞섰다가 사퇴한 뒤 현장아카데미를 설립해 ‘작은 교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정배 원장의 관찰이다.
개인의 독자성과 유일적 존재라는 자각이 결여되면 개인은 개인이 아니라 우매한 군중의 파편일 뿐이다. 혼자서 스스로는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고 결정도 내릴 수 없는 결정장애의 질병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봐도 된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 결함, 즉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거세시킨 반지성적이고 신앙적 우민화가 가져다준 필연적 과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한국 교회가 약 500년 전 기존의 계급화, 물신화, 박제화 된 중세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을 기치로 종교개혁을 이끌어낸 루터의 정신과 멀어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도들이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의 전통, 제도와 시스템, 불합리한 국가적 권위, 개인의 신앙 양식에 대해 저항한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요, 정치적 존재다. 사회생활을 하는 보통 사람들은 안과 바깥, 즉 자기 자신의 내면과 타인과의 접촉, 영향, 훈도, 갈등, 마찰 등등의 여러 가지 관계들을 통해 사회적 상식을 득하면서 정신적 성숙이 이뤄지기도 하고, 퇴보하거나 타락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가정과 학교에서의 교육과 종교기관에서의 신앙생활이다.
교회 목사의 설교와 사찰 스님의 설법은 각기 하느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유일무이한 것으로서 중요한 사역이다. 또한 설교와 설법은 하느님과 인간, 부처님과 중생을 매개하는 가르침이자 영혼의 소리이기도 하다. 물론 그 설교가 바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기다. 사실상 바른 설교나 설법은 종교와 세속을 가르는 경계다. 이를 통해 어떤 종교이든 교주의 아우라가 현현된다. 올바른 설교와 설법이 기독교도는 기독교도답게, 불교도는 불교교도답게 만드는 편달인 이유다. 목회자의 설교 한 마디로 사람이 변화되고, 삶이 바뀌고, 나아가 사회까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설교와 설법은 하느님과 부처님의 음성 자체는 아니다. 설교자와 설법자의 말이 저절로 하느님 말씀이 되고, 부처님 말씀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설교자와 설법자는 단지 성경과 불경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전달함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는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가 매개가 되는 이상, 발화자 개인의 자의적인 해석과 주장이 스며들어갈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경우 이러한 자의성이 목사가 성경해석의 독점권을 움켜쥐고 신도들의 영혼을 쥐락펴락하도록 만드는 배경이 된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The God”을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의도적으로 왜곡해 칭해도 전혀 제제를 받지 않는 권력을 누려오고 있다. 아시다시피 한국기독교에선 하늘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라고 해서 “하나님”이라고 강변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하나뿐인 존재라면 영어로 “The one”이니까 말이다.
불교도들 사이에도 대략 엇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만, 한국의 개신교도들 사이엔 이 사실을 명심하고자 하는 긴장감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을 봐선 안 된다는 성철당의 경책의 말처럼 불교도들이 부처님 말씀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불경’에 있지 ‘설법’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하듯이 기독교도들도 하느님 말씀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성경’에 있는 것이지 ‘설교’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 여타 종교에서도 거의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교회에서 말하는 사람은 오직 설교의 권한과 자유를 행사하는 목사뿐이다. 신도는 말할 권리가 없고 오로지 설교를 들어야 할 의무뿐이다. 모든 행위의 매개가 되는 말의 독점은 독자적 사고가 자라는 것을 막는 억압의 한 형태다. 하고자 하는 말을 막거나 말이 막히면, 즉 語屈하면 억울하게 된다. 이것은 독자적인 개인이 존재하지 않고 기독교도라는 군중, 하느님의 참 말씀이 어디에 방점을 찍고 있는지 스스로는 절대로 알지 못하는 이성이 거세된 인간이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교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고용한 목사를 마치 하느님의 대리자로 알고 극진히 떠받든다. 목사라는 권위에 눌려 스스로 세뇌되거나 세뇌 당해버린다. 심지어 각종 비리, 특히 부정한 방법에 의한 과도한 부의 축재, 여성신도에 대한 성추행을 빈발시키는 목사들에 대해서까지도 말을 끄집어내기는커녕 전혀 비판도 하지 못한다. 누구 말대로 “목사니까 믿어주고, 목사니까 바치고, 목사니까 묵인하고, 목사니까 속아주고, 목사니까 참고, 그리고 목사니까 용서한다. 심지어 속으론 욕하면서도 겉으론 순종한다.” 이게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민낯 가운데 한 단면이다.
신도들은 목사의 설교에 자신도 모르게 헤어나지 못한 상태가 돼 있는 게 일반화 돼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매주 적게는 한 번, 많게는 너댓 차례나 목사의 일방적인 설교와 성경해석만 듣다보니 그 정당성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고기능이 마비되거나 퇴화된 듯하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화형식의 ‘쌍방 소통’이 아닌 그리스나 로마의 웅변 형식의 ‘일방 소통’이 한국 목사들이 행하는 설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정당한 비판이다.
문제는 한국 교회의 신도들에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세뇌시키는 목사의 설교에 대부분 ‘저항’할 의지와 공분을 잊고 산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숨어있다. 순종이 믿음이고, 복종이 믿음이라는 믿음이 보편화 돼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신앙과 맹신의 역전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교회에는 목사나 신도나 모두 순종과 복종을 ‘믿음’과 동일시한다. 또 다시 과거 중세교회로 되돌아가는 듯한 한국 교회의 이러한 박제화 돼가는 교리, 박제화 돼가는 신앙에 저항해야 하는 그 자리에 ‘순종’이니, ‘복종’이니 하는 말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비상식적인 종교행태에 대한 저항은 고사하고, 사회 기득권 세력의 배를 더 불리게 하는 제도와 법, 기존의 억압적인 권위나 국가 정치지도자의 어이없는 부정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커녕 저항과 응징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로 교회생활이 사회생활에서 겪게 되는 속됨을 정화하는 소금의 역할도 되지 않거니와 그다지 참신하고 경건한 파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게 한국 교회의 능력이자 현주소다. 목회자의 설교를 많이 듣고 자주 들어도 신자들의 삶이 영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게 이를 말해주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주로 자기 성공, 자기 성장과 자기 치장에 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 교회의 잉여자본주의화, 물신화, 세속화, 정치권력화, 계급화가 깊이 진전된 지 오래된 탓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로 조금만 눈을 돌리면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회적 약자들이 곳곳에 없는 데가 없지만, 교회건물의 첨탑과 십자가만 더 높이 올라간다. 마치 하느님에게 한 발이라도 더 다가가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물론 작은 건물에 얼마 되지 않는 신도들과 함께 올바른 목회를 이끄는 목사들도 적지 않다. 내 당숙도 그런 목사 중의 한 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계에서 대세가 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것에 문제가 있다.
한국의 어디에서든 쉽게 눈에 띄는 교회는 겉보기엔 화려하고 웅장하다. 특히 대형교회는 전당도 신도를 수만 명이나 수용할 정도의 대형이지만, 그에 비례해 하느님의 성령이 깃들 공간은 비어 있어 보인다. 하느님이 정녕 이 사회를 굽어보시고 계신다면, 이런 참담한 사회적 상황이 지속돼야 하는가?
예컨대 주변 곳곳에 끼니를 걱정하거나 오랜 동안 제도와 인심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되다보니 헐벗고 굶주린 나머지 결국 도둑으로 나서거나, 인간 이하의 부당한 대우나 억울한 일을 당해 그 분풀이로 무작위로 아무나 남을 해치거나 심지어 하늘같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것도 안 돼 자살하고 마는 이들이 늘어만 간다.
교회나 사찰 탓만 할 게 아니라 정치인과 사법계에도 준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게 어려워지고 경쟁이 치열해져 악성이 증장됨에도 종교가 그것을 해소 혹은 완화 치유해주는 역할을 못하고 있는 건 현실이다. 그 결과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성폭행하는 범죄들이 끊이지 않는 등 수십 년간 지속돼온 전통적인 공동체가 급속히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는 조짐이 보인지 오래다.
과연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이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까? 사랑과 박애심을 가지는 목사들이 얼마나 될지는 측정할 길이 없다. 만일 일반인들도 “無惻隱之心非人”(상처를 입은 이웃을 향하여 측은한 마음이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을 느끼는데 하물며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긍휼을 실천한다는 기독교 목회자가 사회적 약자를 보고서도 눈을 감는다면 그는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 권력, 정의 등의 거대담론이 아니라 일반인 차원으로 내려와서 봐도 주변에 교회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아도 가난한 서민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교회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많은 목사들이 유행처럼 크고, 높고, 넓게 외관만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만 치중한다. 신도도 부자들만 목사와 장로의 전도와 관심의 대상이고, 주목을 받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신앙심은 하느님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신도가 내는 헌금과 십일조와 연보돈의 과다와 거의 정비례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가 말이다. 신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구원을 받기 위해 더 많은 헌금 주머니를 준비하는데 비상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역시 우리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균형 문제가 반영된 것이다. 이제는 믿음의 권리도 자유가 아닐뿐더러 세습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 속에 거하라는 가르침이 실천되기 어려운 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체질이 된 듯하다. 목회 한답시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라도 되는 듯이 요란 떠는 교회는 제법 많지만, 진실로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다가서서 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교회는 많지 않다. 나라가 반듯하게 서려면 검찰, 법원, 경찰 등의 권력기관이 공정해야 하는 것 외에도 종교와 교육기관들이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하기야 한국에서는 스님들이 신도들의 보시 돈으로 도반들끼리 계를 들어 해외여행 다니고, 망자를 위한 천도제 지낸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등 출가자라면 가장 두려워해야 할 바라이죄를 저지르면서도 신도는커녕 부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스님이나 하느님을 팔아 개인 축재에 여념이 없는 목사나 오십보백보, 도긴개긴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신도, 즉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교회가 중심인 게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신도가 중심이거나 주인이 아니라 목사가 중심이고 주인이다. 모든 것은 교회와 목사를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교회에 간다. 이는 한국불교와 사찰이 신도가 중심이 아니고 신도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스님이 중심이고 스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국교회는 마치 성직자 중심의 엄격한 위계조직이었던 중세 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는 듯하다. 루터가 기존 천주교의 계급화, 계서화 된 위계를 무너뜨린 뒤 새로이 형성된 개신교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돼 신도들의 공동체로 불렸다. 여기에는 어떠한 계급도 없고, 서로 하는 역할만 다를 뿐이었는데, 이것이 교회 차원을 넘어 전체 유럽에서 민주적인 의회제도가 태동하는 모태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교회 내 계급화, 계서화 된 이것이 어쩌면 전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성숙하지 못하게 만드는 최대 복병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모든 현실이 한국의 목회자를 어떤 이미지로 고정시켜 놓게 된다. 목회자는 교회와 목사가 일반인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비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정말 무겁게 받아 들여야 한다. 교회를 보면 “아름다운 헌신과 훈훈한 사랑을 보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저 교인들끼리 친목을 나누고 즐기기에 바쁜 교회들 투성이다.”
실제로 곁눈질로 힐끗 봐도 사교를 위한, 인맥을 맺기 위한, 혼맥을 찾기 위한 장소로 전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독교를 잘 아는 내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즉 “원래 어릴 때 끼 있는 애들 연애장소로, 그 다음엔 보험영업이나 동네 구멍가게라도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지니스 장소로, 시의원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선거운동장소로 유용한 곳이 교회 아니었던가? 현대사회에 나약하고 고독한 인간들에게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끼리만의 패거리를 만들게 하고 그 대가를 챙기자는 것이 한국 교회의 성공한 비즈니스모델 아니던가?”
게다가 한국교회는 기독교 본연의 세속의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저항정신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는 게 기독교의 정신인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당시 ‘안식일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돼있던 유대율법을 근간으로 질서가 형성된 이스라엘 실정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시지 않았던가?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으로 이어진 독재권력이 거의 반세기 동안 민중을 착취하듯 지배한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었어도 천주교 이외 개신교는 방관하고 오히려 체제 위호적인 자세로 기득권 세력에 협조하고 그들과 공생해오지 않았던가?
상황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퇴보한 듯한 느낌이다. 기독교 신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과 혼용무도의 박근혜 대통령이 부당한 권력을 휘둘러도 교회가 나서서 저항한 일이 있는가? 그렇기는커녕 정말 눈 뜨고는 못 볼 희극적인 풍경은 한국 개신교의 적지 않은 목사들이 성속을 넘나들면서 반공(반공이 나쁘다는 게 아님)이나 신정통치를 들먹이면서 세속권력을 추구하는 등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정치목사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매 선거 때마다 교묘하게, 때로는 대놓고 깊이 관여한다.
하기야 정치인부터가 오직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교회로, 절로, 성당으로 달려가고, 성직자들은 그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무시당했다거나 섭섭해 하거나 표를 주지 않으니 정치인만 탓할 게 못된다. 이 나라 최고 국법인 헌법에서 명명백백하게 정교분리 원칙이 성문화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몰상식한 시장, 도지사가, 심지어 대통령부터가 이 나라를 “하나님의 성전에 봉헌하겠다”고 선언하는 무지의 극치 혹은 헌법을 어기는 행위가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렇게 해도 그냥 에피소드 정도로 넘어가고 만다. 헌법을 어기는 중대한 범법을 저질러도 탄핵을 받기는커녕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불감증에 걸려 있다. 법 집행이 이토록 무르니 나라가 이토록 혼란하다. 권력을 얻고자 종교를 이용하고, 금력을 쥐고자 권력을 부리고 있으니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정치인과 사이비 종교인이 서로 같이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주범이요, 공범자들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목사가 예배시 교인들에게 특정 후보를 거론하면 신도들도 일제히 일사천리로 그를 찍는다. 아예 목사로부터 특정된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원까지 자임한다. 그래서 선거에 당선되려면 비기독교도는 기독교로 개종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실제로 정치에 뜻을 둔 내 친한 친구도 일찍부터 그렇게 했다.
기독교 신도 후보라도 신도수가 많고 정치적으로 유력한 목사가 있는 교회에 나가는 게 당선 확률을 높인다. 그렇지 못하면 안심이 안 된다. 한국의 교회가 현실정치에 참견하고 개입하는 권력화 된 신적 존재라고 비난 받는 이유다. 사람들을 비굴하게 살게 만드는 데 오히려 교회가 앞장서고 있는 셈이다. 정치인들이 자신이 믿는 종교 이외 다른 종교행사에는 찾아 가지 않는 구미인의 눈으로 보면 조금 기형적인 광경들이다.
타종교와의 공존 및 상생을 하려는 의지를 가지기는커녕 극도로 배타적으로 전도를 하는 교회와 신도들도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팻말을 들고 대중 장소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하느님을 속 좁은 존재로 만드는 일부 광적인 신도들은 도처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 시대에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전도로 양식 있는 기독교도들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떨어져 나가게 만든 요인이 되거나 최소한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신도수가 거의 늘지 않게 된 요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 또한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가르치는 한국기독교의 자의적인 성경해석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한국 교회가 한 마디로 이다지도 세속화, 권력화, 물신화, 자본주의화 된 데는 세속의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지 못하고 정치권력과 가까이 해온 한국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와 목회자들이 권력 그 자체라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닐 지경이다.
개신교는 한국현대사에서 전교의 한 수단으로서 반공주의와 결탁해 이승만, 박정희로 상징되는 반공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결합된 보수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 기둥역할을 해왔다. 교회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는 정권을 창출하거나 그 반대의 정치적 의지나 정책지향을 지닌 정권을 갈아치우는 데에 깊이 개입해왔다. 그때마다 반공은 개신교가 즐겨 찾는 명분이자 젖줄이다.
이번 대통령 탄핵정국에서도 개신교는 반공을 명분으로 어김없이 꼭 성조기를 들고 소리치는 ‘태극기 시위대’에 합류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교인들 간의 활동은 물론, 신앙적 소통과 참여를 불필요한 것으로 깎아 내리기 일쑤다. 해방 후 이러한 과정을 거친 지 어언 70년이 넘으면서 목회자는 언필칭 하느님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왕이 군림하는 듯한 위치에 서 있다. 마치 중세 교황이 각 교회를 통어하면서 절대 권력을 행사한 것을 연상시킨다. 한국엔 교회 마다 교황을 한 명씩 두고 있다는 비판이 잘못된 비판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한국 교회는 특히 대형 교회 위주로 교회 창립자가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상속시켜 대를 잇게 하는, 소가 봐도 웃을 희극까지 연출하고 있다. 담임목사와 교회 내 기득권 그룹도 마찬가지로 세습된다. 교회 내 기득권 세력들이 주도권을 건네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영성이 자산인 교회에서 영성 이외에 물려줄게 뭐가 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작태다. 이렇다 보니 교회가 지탄 받고 있는 한국의 재벌 기업과 다른 게 뭐냐는 비난이 나오지 않는가? 이는 정치화 된 몇몇 수구 꼴통 목사가 집전하는 대형 교회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내려오는 3대 세습을 비판하는 북한 사회와 뭐가 다른가?
지금 어느 때 보다 한국 교회는 참으로 새로운 종교개혁이 절실한 때다. 루터가 중세 신 중심의 도덕적 신앙형태에 저항해 프로테스탄트를 만들었듯이 지금 한국 교회는 세속화, 정치권력화, 물신화, 자본주의화 된 개신교의 폐단과 신앙형태를 뛰어 넘어야 할 위기이자 중대한 기로에 처해 있다.
이런 모습들이 정녕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세상과 교회가 아니지 않는가? 이러려고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세상을 만들도록 역사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게 정녕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의지인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언제까지 침묵하고 계실 겁니까? 예수님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시나요?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의 부활도 없다”고 한 바울이 주장한 대로 교회가 선량한 약자들을 부활시키지 못하면 예수의 부활은 없다. 이정배 원장의 말대로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지만, 우리도 하느님의 희망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 교회가 기존에 바벨탑처럼 높게 쌓아올린 허망한 권세와 재부를 스스로 허물어 없는 이들에게 나줘주고 낮은 곳으로 임하면 좋겠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자신에게는 안정감을, 남에게는 편안함을 선사하듯이 교회의 첨탑도 낮추고 심기일전의 대오각성과 대각실천에 나서주기를 바란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지듯이 땅에서도 이뤄짐을 믿기 때문이다.
2017. 4. 1. 19:27,
고향에서 초고,
4. 24. 08:45
구파발에서 퇴고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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