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사상 철학 종교

부처님 오신 날 현실과 미래를 생각해본다

雲靜, 仰天 2016. 12. 25. 08:32

부처님 오신 날 현실과 미래를 생각해본다

 

부처님 오신 날, 부처의 가르침을 되돌아보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우리의 역사,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본다.

 

 

 

우리는 언필칭 한민족의 발자취를 반만년 역사라고 한다. 그리고 역사의 장구함을 자랑하거나 긍지로 삼는다. 신라 천년, 고려조 500년, 조선조 600년 동안 지속된 왕조가 만들어낸 문화민족의 후예임이 자랑스럽다고 얘기한다. 맞다. 되돌아보면 우리역사에는 분명 자랑할만한 것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우리의 삶을 조건지우고 있는 역사 動因 가운데 하나인 기득권층의 역사적 책임 방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이 압도적인 역사동인이 돼 있어 모든 악과 비정의의 근원임과 동시에 역으로 역사의 순류를 가로 막는 비정상적인 역사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문제를 천착하지 않으면 새로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유구한 반만년이라는 역사를 가졌다고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역사, 역사적 책임을 지우게 하는데 실패한 역사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시간의 집적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형태로 오늘 여기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내재돼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조건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짜는데 동력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그것은 과거에 죽어 멈쳐 버린 사화산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활화산이다.

 

역사란 단선적인 하나의 시각과 평가를 거부한다. 역사에서 史實의 통일을 강제하는 건 파쇼나 독재자들이나 자주 찾는 단골 메뉴일뿐, 과거사의 다양한 면을 봐야 한다. 집합으로서의 인간의 삶이란 복잡다기한 것이고, 모노크롬처럼 단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장구한 세월 동안, 특히 민족사적 외침과 환란이 빈발했던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 21세기에 이르는 1200년 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외침을 겪었다. 집권층의 부정부패에 따른 혼란, 당파싸움의 붕당정치, 세도정치의 농단으로 급기야 나라가 패망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까지 했다. 광복이 됐지만 이어서 한국전쟁, 군사독재, 疑似文民者의 신군부가 또 다시 군사독재를 자행했다.

 

이처럼 시대는 다르지만 하나 같이 부패한 권력층이 불러일으킨 숱한 시행착오, 실수, 오류와 오도, 국민에 대한 기만과 능욕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없는 슬프고도 비탄스런 역사가 있었다. 오늘날 현재까지도 우리는 그런 혼용무도의 지도자를 받들고 있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임진왜란시 그 이전까지 “왜놈”이라고 멸시해오던 일본의 침략을 받아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이 유린되고 약탈을 당해 유사 이래 최악의 도탄에 빠졌지만 왕이 책임지기는커녕 백성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진정성 있는 사과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한 적이 있었는가? 아니면 권력을 잡아 온갖 호사를 누려온 기득권층의 사대부들이 반성했는가?(조금이라고 반성의 태도를 보인 이로는 후대에 교훈이 되게 할 요량으로『懲毖錄』을 남김으로써 간접적으로 책임을 통감한 유성룡 정도의 극소수뿐이었음).

   

병자호란 시 청나라에 패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도 왕이나 사대부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백성들이 당한 피침의 고통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한 자가 있었는가? 탐욕과 부패와 안일에 젖은 사대부들과 탐관오리의 학정과 가렴주구로 폭발한 동학기의가 외세의 총칼에 진압당하고도 누구 한 사람 책임을 지며 물러나기는커녕 사과 한 마디 한 적이 있었는가?

   

조선조 후반기 수대에 걸쳐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유교적인 명분의 독점과 권력욕이 내재된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당파싸움을 일삼다가 鮮末 무능한 왕의 외척들과 결탁돼 세도정치, 족벌정치로 나라를 거덜 내고 만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거도 모자라 결국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사대부들 중에 반성하고 책임을 진 자가 있었는가?

   

안으로 백성들이 가렴주구를 당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밖으로는 강폭한 西勢가 東漸하던 문명사적 위기시였음에도 불구하고 허구한 날 主理論이 어떻고 主氣論이 어떻고 하는 탁상공론으로 날을 지새다시피 해놓고도 누구 한 사람 책임을 지고 반성한 자가 있었는가?

   

오직 일신의 영달과 족친의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협조하거나 그들과 조건부적으로 결탁해 결국 나라를 저들의 손에 넘겨준 친일파들이 해방이 돼도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 또 다시 권력을 잡아 호사와 전횡을 일삼아도 새로운 국가권력을 잡은 자들 중에 누가 이들에 대한 역사적 심판과 함께 그들을 도려내고자 한 자가 있었는가?

   

김일성, 박헌영이라는 민족사적 침략원흉의 도당들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의 지원과 지지를 등에 업고 우리 남한을 침공한지 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하고 이곳에 살고 있던 150만 명의 무고한 일반시민들이 수 없이 재판도 없이 처단돼 죽어가거나 재산이 약탈당했어도 이를 외면하고 한강철교를 끊어버리고 자신들만 도피한 권력자들 중에 사후에라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진 자가 있었는가?

   

3선개헌’으로 헌법을 유린하고 독재를 저지르고도, 또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민간정부를 무너뜨리고 국가권력을 잡고선 군사독재를 저질러도, 대저 민주주의란 게 민이 주인임을 말하는 것임에도 이런 기본을 모르면서 오직 “구국”으로 치장한 탐욕과 의욕만 앞선 신군부세력이 장기간 군사 파쇼독재를 일삼아도, 누구 하나 역사적 책임을 진 이가 없었다.

   

사후에라도 누구 하나 늦었지만 국민 앞에 참회의 글 한 줄 남기는 자가 없었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진 21세기에도 과거 일부 기득권층 자신들만 좋았던 시절의 향수를 못 잊어 역사의 시계바늘을 1960~70년대로 돌리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걸 부처의 자비심으로 보면 한편으로는 일말의 측은지심도 없지 않다.

   

하지만 종교의 사랑과 자비개념으로 역사를 봐선 안 된다. 국가권력의 작동문제와 그로 인한 역사적인 문제는 종교의 영역과 혼동해선 안 된다. 종교가나 종교는 살인마 전두환을 용서하고 넉넉히 품어 줄 수 있어도, 또 그걸 탓할 수도 없고 탓해서도 안 되지만, 세속의 질서와 정의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서 법과 역사에 의해 심판되고 懲治를 당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사건, 사단에 대해 정당하고 공정한 역사평가를 단 한 번이라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민족사적, 역사적 죄를 짓고도 그 후손들이 되려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온갖 호사와 부귀영달을 누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나라를 위해 산화하신 독립운동가, 호국선열들의 후손들은 비참한 삶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이 살고 있다.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전도된 권력의 문제와 역사평가는 다른 많은 문제들을 새로 만들어 내고 있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 가치와 인식이라는 덧에 걸려 많은 것을 침탈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스며들어 현재 진행형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소리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고, 또 최고 지도자라면 응당 해야 할 부패척결과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혁파하지 못함으로써 400명이 넘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수장되는 정권의 원죄가 있어 장기적으로 권력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자신도 쇠고랑을 찰 것을 알기에 온갖 무리수를 두고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도 그것은 소귀에 경읽기나 다름없다. 기득권 정치세력도 반대하는 시늉만 할 뿐 역사의 소명의식이 결여된 자들의 기득집단의 포장에 지나지 않고 있어 그들에게 기대를 걸 게 못 된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언제부터인가 기존의 혼란이 끝간데 없이 증폭돼 혼란스러움이 혼란의 정도를 넘어 이제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서도 짐승의 행위를 하는 후안무치, 자가당착, 혹세무민의 지도자와 그 운명공동체적 협력자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는 구조가 된지 오래다.

 

탐욕, 邪術과 인면수심, 혼돈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우리 사회, 그 원인의 밑바닥에는 탐욕과 권력의 사유화, 무지와 무능, 독선과 오만, 위선과 협잡이 칡넝쿨처럼 덕지덕지 얽혀 있다. 그 질기디 질긴 칡넝쿨을 잘라 없애는 데는 기득권층이 된 정치지도자나 기존 정치권에 맡겨둬선 백년하청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든 종교는 백성의 삶, 인간의 삶을 최우선적 가치로 지향하면서 민초들을 억압하고 질곡 하는 기득권세력에 저항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수, 고타마 싯타르타, 수운, 해월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하나 같이 공통적으로 기존의 억압구조를 혁파하기 위해 기득권층에 동조하거나 결탁하지 않고 오직 민중의 性善性에 의지해 밑으로부터 사회변혁을 꾀한 사회혁명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자비심으로 충만한 如來의 法音으로 조금이라도 이 사회가 맑아지기를 마음 모아 기원한다. 동시에 기원과 염원으로만 이룰 수 없는 게 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문제, 정치문제라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삶을 잘 산다고 하는 것, 그것은 종교적인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사회적인 문제이자 지극히,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부처의 圓融無涯, 大慈大悲 정신을 다시 되새기면서 언제, 어디서고 늘 자신을 바로 보라고 가르치신 “깨어있음”(이성이 작동되어 본질을 직각하는 맑은 정신의 상태)이 탐욕과 거짓으로 아수라장이자 혼돈의 도가니가 돼버린 이 사회의 심연에 깊이 침전되어 밑으로부터의 강고한 연대로 용솟음치는데 기본 무기가 되길 앙망한다. 

 

2016. 5. 14. 부처님 오신 날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