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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와 해탈(解脫)

雲靜, 仰天 2016. 5. 14. 23:04

윤회(輪廻)와 해탈(解脫)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恒河沙(불교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설법시 엄청나게 많음을 비유하실 때 자주 인용한 단어로서 인도 갠지스 강의 모래를 가리킴)만큼이나 많은 불교용어들 중에 비불교도를 포함한 일반인들에게 평소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용어를 들라면 단연 輪廻와 解脫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용어의 개념은 각기 어떤 의미를 지녔고, 불교사상 혹은 종교로서의 불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또 양자의 관계는 어떠할까?

  

먼저 윤회는 싼스끄리뜨의 삼사라(saṃsāra)를 한자로 번역한 말로서 轉生, 再生, 流轉이라는 뜻이다. saṃsāra의 출전은 기원전 600년경 인도 바라문교의 경전인 우빠니샤드(Upaniṣhad) 문헌이라고 한다. 바라문교도들 사이에 사용되던 이 말이 후에 불교에 도입되었고, 다시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요청으로 규정하고 전생의 업에 따라 현생의 과보를 만들고, 현생의 업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는 윤회전생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원래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의 초기 윤회설은 五火二道說이었다. ‘오화이도’란 오화설과 이도설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화설은 사람이 죽어 시신을 화장하면 육체가 재로 변해도 그 종자(ātman)가 달에 가서 비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 곡식이 되고, 이 곡식을 섭취함으로써 남자의 육체에 들어가 정자가 되고 모태에 들어가 재생한다고 한 주장이다.

 

돌고 돈다는 의미의 유전현상은 인류문명사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원리다. 당시 인도, 네팔, 티베트 등 힌두교 혹은 본교(Bon, 불교 이전의 티베트인들이 신앙하던 원시적인 종교)가 태동된 지역에서도 나타났으며, 그 지역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이곳 사람들도 농경, 수렵, 채집생활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동된 순환적 자연현상에 주목했던 것이다. 예컨대 구름이 비가 돼 내리면 물이 되고, 그것이 다시 증발해 구름이 되는 순환체계 속에서 농경이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자연 현상계의 강우현상과 화장관습이 결합한 것인데, 화장된 사자의 아트만(ātman)은 연기를 타고 천계에 오르면 그것은 비가 되어 다시 지상에 내려온다고 한다. 오화이도설은 순환에 의거해 윤회를 설명하는 소박한 사상이었다. 이도설은 神道와 祖道를 말한다. 신도란 수행자가 오화설을 알고 산림 속에서 고행한 결과 범계에 태어나 다시는 이 지상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조도란 제사와 보시를 행하는 사람은 오화설에 의거해 윤회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도의 소위 業說과 결합되어 고대 우빠니샤드시대로부터 중세 베단타(Vedānta)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왔다. 業은 인간이 행하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因果의 법칙이 절대적으로 적용되어 善業인지 惡業인지에 따라 樂果와 苦果가 따른다. 즉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설은 우리말에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는 말처럼 명징한 자연과학적 근거를 지닌다. 지은 업이 소멸하지 않고 일종의 씨앗이 돼 유전, 즉 돌고 돈다는 생각은 힌두교에 전해져 보편화된 하나의 사상으로 자리 잡았는데, 나중에 불교에서도 이를 받아 들여 輪廻轉生이라 부르며 불교사상의 주요한 축을 이루게 됐다.

  

돌고 도는 틀로는 육도윤회로 지옥, 餓鬼, 畜生, 阿修羅, 人道, 天道가 설정돼 있다.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어떤 경우든 모든 생명체는 이 틀 속에서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석가는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자체를 苦, 즉 괴로운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육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인 업에 따라 결정되며, 선업을 지으면 선의 세계에, 악업을 지으면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B.C. 5세기경 고대 인도사회의 六師外道(석가도 초기엔 이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로 불리는 여러 자유사상가들도 대부분 윤회설을 주장했으며, 六派哲學에서는 비정세간(非情世間)에까지 윤회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해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면 이 업은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유전,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상이 제시됐다. 업이 소멸되면 더 이상 어디서든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상태(不生不滅), 즉 열반(涅槃, nirvana)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해탈이라는 이상이다.

 

이것을 두고 이상이라고 한 것은 살아 생전에 업을 소멸시키지 못하고 죽으면 그 업은 그대로 남아 업의 성분대로 다른 몸(짐승일수도 있고, 혹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음)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좀처럼 업을 없애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우리가 윤회를 알면 ‘바늘 가는데 실이 가듯이’ 필히 해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의 唯識學에서는 생명체가 죽으면 업에 따라 위에서 열거한 여섯 가지 세계 중의 한 몸으로 나투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이 최고 길 경우가 49일이다. 이 기간 안에는 반드시 다른 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에 존재하는 상태가 ‘中陰神’이라고 하고 빠르면 3일, 5일, 7일 안으로도 다른 인연을 만나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돼 있다. 중음 상태의 기간이 100일이라든가, 1년, 3년이라고 한 것은 나중에 중국불교(十王經)에서 유교와 도교의 의례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이다.

 

 

윤회와 해탈을 도식화 한 위 그림을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어쨌든 亡者가 中陰神의 상태에서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울지 않고 정성껏 독경을 하거나 조용히 예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죽었다고 슬퍼서 울고 떠들면 중음신이 다음 생의 인연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먼저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해탈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해탈은 싼스끄리뜨어로 ‘vimokşa’라고 하고 한역으로는 ‘毘木叉’, ‘毘目叉’라고 음역한다. 한역의 毘木叉와 毘目叉는 모두 중국음으로는 ‘피무차’로 발음한다. 또 싼스끄리뜨어로 vimukti라고 하기도 하는데, 한역음은 毘木底, 중국어음으로는 피무띠라고 읽는다.

 

고대 중국의 역경가들이 vimokşa와 vimukti를 ‘해탈’로 번역한 까닭은 그들이 싼스끄리뜨어 vimokşa와 vimukti가 둘 다 “풀려오다”는 의미가 있음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풀려오다는 어떤 것에 결박되거나 포박된 상태가 전제된 것이다. 여기에서 포박,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 자유 등을 의미하고, 그것이 다시 추상적인 영역에서 번뇌(이런 저런 망상)에 묶인 상태에서 풀려나와 미혹의 괴로움(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로 뜻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모든 업을 짓는 원동력은 탐(貪)ㆍ진(瞋)ㆍ치(癡) 같은 무명과 번뇌이기 때문에 이에 연유해 이루어지는 업력은 돌고 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자료를 컴퓨터에 저장해놓으면 사라지지 않고 각 폴더나 파일에 존재하듯이 인간도 여섯 가지 인식기능(六識)인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意)로 한 번 접한 여섯 가지 경계(六處,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몸으로 감응하고, 뜻으로 인식하는 것)가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로 제8識인 아라야(ālaya)(중국불교 역경가들은 阿賴耶識, 藏識으로 번역했다)에 보존, 갈무리 되는데, 그 업은 과거, 현재, 미래의 三世로 윤회하면서 과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모든 유정(有情)은 각자 미래의 자신을 만들 독자적인 업인 불공업(不共業)을 지어 자신의 과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그 所依處인 器世間을 마련할 공통적인 업(즉 共業)을 지어 이 공업에 의해 우주는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의 과정에 따라서 무한한 緣起를 계속하게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실체 혹은 실재가 없는 無我(anātman)를 말하는데 무엇이 돌고 돈다는 윤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돌고 돈다는 말인가? 도대체 윤회의 주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분명히 논리의 모순처럼 보인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서 우선 불교에서는 윤회를 주장하면서도 생명에서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음을 부정하는 無我說을 같이 내세우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무아는 空 혹은 緣起로 존재한다. 대승불교, 특히 유식불교에서 윤회가 되는 주체는 자신이 과거와 현재에 지은 업인데, 이 업은 제8식인 아라야識에 저장된 상태로 돌고 돈다. 아라야식은 한 두 줄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중에 별도의 독립된 주제로 논하겠다.

 

다음으로 해탈과 관련해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불교에서 해탈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이 부여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 즉 반야(般若)를 證得함으로써 스스로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수행의 결과로서 도달하는 궁극적인 경지가 바로 업과 윤회를 벗어난 상태다. 윤회는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서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이 번뇌와 업에 따라 生死를 거듭하며 그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해탈은 이러한 유전상태에서 벗어나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상태’ 즉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불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듯이 열반은 원래 ‘불어서 끈다’는 뜻을 가진 말로, 불교에서는 탐(貪), 진(瞋), 치(痴)의 세 가지 毒心을 끊고 고요해진 평정의 경지를 가리킨다. 깨달음을 얻어 해탈한 마음은 번뇌의 불꽃이 모두 사그라진 재와 같아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어떨까? 고대 인도의 바이셰시까(Vaiśeṣika) 같은 학파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가행(yoga行)의 수행을 강조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교리체계가 아주 정치하기도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각종 수행법도 대단히 발달돼 있다. 불교에서 진리 중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四聖諦(苦諦, 集諦, 滅諦, 道諦)설에 의하면,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인간에게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곧 無知)을 뜻하는 無明을 멸하는 것이다. 즉 무명을 멸하면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때 해탈이란 벗어난다고 이해하면 된다. 한국인들의 언어 감각으로는 ‘벗어나다’라는 일반 행위를 ‘해탈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에 대만에서 공부할 때 어느 교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이번 주만 수업하면 드디어 우리는 해탈한다”고 하시는 표현을 듣고 ‘수업을 받는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구나 하고 알아차린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때 한국인들은 한자의 의미를 판에 박은 듯이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남는 질문이 또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법으로 三十七助道品을 제시한다. 도품은 실천하는 방법의 종류를 뜻하고, 37은 四念處, 四正勤, 四如意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 등의 일곱 가지 수행 방법을 합친 것이다. 이러한 수행으로 번뇌의 속박을 떠나 三界(欲界, 色界, 無色界)를 벗어나(즉 脫却) 걸림 없는 자유의 상태(無碍自在)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며 이것이 곧 해탈의 경지이다.

  

해탈은 본래 열반처럼 실천도의 구극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런데 후세에 여러 가지로 분류돼 고찰됐다. 예컨대 有爲解脫(아라한, 즉 해탈한 자가 확실히 이해해 인정하는 마음의 작용, 곧 勝解), 無爲解脫(열반), 性淨解脫(중생이 본래의 모습에서 번뇌의 오염에서 벗어나서 청정한 것), 障盡解脫(현실에서 번뇌 때문에 그 본래의 청정이 오염돼 있어 번뇌를 끊고 해탈할 수 있는 것), 心解脫(마음에 탐애를 없애는 것), 慧解脫(지혜로 무명, 즉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 慧解脫(아라한이나 아직도 滅盡定이 아닌 것), 俱解脫(아라한이나 滅盡定을 얻은 것) 등이다. 또 時解脫과 不時解脫로 나누어 이를 2해탈이라고 한다.

  

또 다른 뜻으로는 귀로 불법을 듣고 해탈하므로 “귀를 기울여 불법을 듣는다”라고도 한다. 해탈의 경지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一味라고도 한다. 소승불교에서는 해탈하는데 아주 빠르면 3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를 3년 해탈이라고 한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聲聞緣覺, 즉 진리를 들어서 깨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阿羅漢이 이루는 해탈은 진실한 해탈이 아니라 일부분만 해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비해 부처의 해탈은 眞解脫(진정한 해탈)이라고 일컫는다. 아라한의 해탈은 해탈을 하여도 그것에 집착해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해탈의 깊은 구렁에 떨어진 자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윤회와 해탈의 관계는 어떨까?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둘은 서로를 전제하고 있는 가상적 세계다. 자연과학적 세계나 진리와는 일정 부분 거리가 있는 것이다. 윤회는 한 마디로 그 과정을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힌두교의 교리이자 논리다. 힌두교에서는 지금도 업과 윤회설을 받들고 있다. 수년 전 인도를 여행하면서 직감한 것인데, 내가 보기에 힌두교는 현재의 기득권을 영속화 시키려는 의도에서 업과 윤회설을 강조하면서 신도들에게 현재의 처지를 숙명적인 것으로 긍정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힌두교의 사제나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나 그 계층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 지위를 존속 혹은 영속시키려는 세속적 의도를 종교로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수직적 계급의 높낮이가 엄격하게 존재했던 고대 인도사회에서 천민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그런 신분으로 태어난 것은 모두 과거의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이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지 말고 현실과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걸 주입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윤회를 객관적 사실과 진리로 보지 않는다. 단지 불교에서 윤회를 얘기하는 것은 원인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점(業說)을 강조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한 시청각적 교재일 뿐이다.

 

2016. 5. 14 부처님 오신날 22:53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