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사상 철학 종교

앎과 진리와 中庸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雲靜, 仰天 2015. 9. 9. 12:34

    앎과 진리와 中庸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인간사회에서 우리가 날마다 접하거나 만들어내는 정보, 지식과 지혜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이 공존합니다. 인간세상이 아닌 자연계에선 절대적인 진리만 존재합니다. 인간세상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세상도 자연의 일부이며, 궁극적으론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자연계의 진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상대적인 정보, 지식과 지혜는 모두 기준이 전제된 것들입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도, 수학의 공리(정리, theoram)도 모두 기준을 정해놓고 논리를 전개한 인간세상의 약속일뿐입니다. 즉 누구나 알고 있는 1+1=2는 수학, 즉 인간사회에서는 참이고 진리이지만 자연계의 진리는 아닌 것이죠. 자연계에서는 1+1=2일 수도 있고, 1이 되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정리가 인류 수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 정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자연계의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약속일뿐이다. 원주율도 마찬가지다.

인간들 가운데 이른바 깨친 자라고 하는 성인은 그런 자연계의 절대적 진리가 인간세상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 어떻게 작동돼야 하는지 그 양태, 속성과 당위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눈과 지혜를 가지게 됐기 때문입니다. 인간세상의 정보, 지식과 지혜가 아무리 가치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놓여 있는 기준을 알지 못하면 시시비비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기준이 본질이고, 본질이 기준이 됩니다. 그 기준이나 본질을 아는 게 지혜의 첫걸음입니다. 물론, 기준과 본질을 알아도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절제하게 할 것인가, 조화롭게 만들 것인가 하는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이 경계에 정치와 권력의 문제가 가로 놓여 있습니다. 
   
모든 고등종교의 창시자는 예외 없이 살생을 금지했습니다. 금지하는 것 중에도 가장 무거운 죄로 규정돼 있습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 가둬 억압하거나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는 인질범을 죽여 없애는 행위는 살인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의 살인행위는 죄없는 뭇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절대성은 상대화 됩니다. 따라서 살인은 범죄라는 생각을 절대시하고 끝까지 고집한 나머지 총 든 강도가 길 가는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있는데도 그를 죽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중용을 깨는 행위이자 집착입니다. 윤리와 도덕률로는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고 배우고 있지만 죽여야 할 때 죽이는 그 실천이 바로 중용입니다.
 
흔히 中庸을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게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건 ‘문자적 이해’(literalism)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만 알고 이해하면 깊이 있는 담론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朱子는 ‘中’을 치우치지 않고, 넘치지도 않으며,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했고, ‘庸’이란 꾸준히 계속한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宋明理學의 정초를 놓은 정명도, 정이천 형제는 중용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며, 우주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영원불변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넘치지도 않고 모자람도 없는 덕성의 근본적인 힘으로 봤습니다.
 
따라서『中庸』에서 말하는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딱 들어맞으면서 언제 어디에서나 변할 수 없는 이치나 원리 같은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이 경우 어떤 경우든 진리가 바뀌어선 안 된다고 볼 게 아니라 그런 이치나 원리도 경우에 따라선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그 사고가 바로 중용입니다. 한 마디로 어떤 문제에 대해 가장 적실성 있게 딱 들어맞는 최상의 대응책이나 해법이라는 것이죠.
 
실제 생활에서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를 예로 들면, 중용은 이쪽과 저쪽을 적당히 절충하는 게 아닙니다.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안 들면서 가만히 잠자코 있는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누구에게나 가장 적합하고 해당 사안에 들어맞는 도리인 것이죠. 다른 예를 하나 들면, 음 안에는 양이 존재하고 양 안에서도 음이 존재하는데, 음양이 조화가 깨지면 음도 살지 못하고 양도 살지 못하는 이치에 닿아 있습니다. 

영양의 밸런스, 기의 밸런스, 몸과 마음의 밸런스 등등이 무너지면 건강을 잃게 되듯이 사회적 측면에서도 중용을 잃게 되면 균형이 무너진다. 사람에게도 중용이 없으면 凡庸이 된다.

앎과 진리는 실천해보지 않고서는 정말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를 정당하게 내릴 수 없습니다. 실천해보지 않고도 본질을 아는 선험적, 추체험적 지혜를 가진 깨친 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옛부터 그런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탐욕의 절제가 어려운 보통사람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편 賢者와 覺者들은 앎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앎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하는 말 따라하기는 앵무새가 더 잘 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살아 있어야 하고, 그건 정당한 행위와 결합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중들을 억울하게, 혹은 고통 받으며 살도록 만드는 옳지 않은 법과 제도, 정책과 정치가 있는데도 나몰라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지식과 지혜가 아닙니다. 중용은 더 더욱 아닙니다. 실정에 맞지 않는 악법이어도 공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수정되기 전까지는 현행의 법과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도 맞지만, 불합리하고 잘못된 법과 제도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또한 틀린 게 아닙니다. 잘못된 법과 제도로 득을 보는 이들도 있지만 동시에 피해를 보는 피해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을 망각하면 인간사에서 발전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양쪽의 입장과 주장은 다 같이 존중돼야 한다는 생각이 옳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참지혜입니다.
 
참지혜는 없고 개인적 욕망과 탐욕이 많으면 정보와 지식을 알고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류는 이 상황을 이용해서 정당하지 못한 이익과 기득권을 영속화 시키려는 데 모든 관심을 집중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서, 어떤 삶을 살 것입니까?

2015. 9. 8 아침
출근길 전철 안에서
雲靜
"아는 게 뭔가"라고 묻는 친구에게 보낸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