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가 깨달았다는 내용과 경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석가모니(B.C562~482)가 29세에 일국의 왕세자 신분을 버리고 출가한 뒤 6년이라는 긴 수행 끝에 부처가 된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출가초기엔 숙명론, 회의론(=不可知論), 유물론, 불멸론, 심지어 이원론의 바탕 위에 극단적인 고행을 통해 득도하겠다는, 인도 고대 우파니샤드사상 계열의 사상가들과 수행자들(소위 六師外道로 대표되는 푸라나카사파, 마칼리고살라, 산자야벨라지푸타, 아지타케사캄발라, 파구타카자야나, 니간타나타푸타)을 찾아가 당시 인도사회에서 유행해오던 온갖 수행방법을 직접 시도해봤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수행법은 정각을 이루려는 석가모니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가 35세 때 마지막으로 인도 동부지역 우루벨라 마을의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서 시도한 삼매에서 無上의 正覺을 이뤘죠. 그런데 석가모니가 이때 얻은 최상의 정각이라는 깨달음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경지였을까요? 또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엔 무엇을 어떻게 하기로 했을까요?
먼저 여러 경전에서 석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게 된 성도 관련 내용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석가가 부처가 된 뒤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 교설로 고정시켜 설하지 않고 청중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과 비유들을 달리 했기 때문에 동일한 깨달음의 내용이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졌던 게 주된 이유였죠. 후대 동서고금의 수많은 승려와 불교학자들이 저마다 석가의 성도과정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내놓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여기엔 대략 15종류의 이설이 있는데, 이는 크게 4가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1. 四諦, 12연기와 같은 理法에 따른 증득. 2. 37菩提分法과 같은 수행도를 완성함으로써 얻었다는 설. 3. 五蘊, 12處, 四界 같은 제법의 통찰에 의했다는 설. 4. 四禪과 三明을 체득함으로써 증득했다는 설입니다.
석가모니가 이러한 성도과정을 거쳐 증득한 깨달음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 실려 있는데, 각기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나는 팔리어는 모르지만 한 연구에 의하면, 팔리어로 된 『아리야빠리예사나 숫타』(한역명 『聖求經』)라는 경엔 석가가 자신이 깨달은 경지가 어떠하다는 걸 표현한 대목이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즉 “내게 지혜와 통찰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더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육도만행의 생사윤회의 고리에서 탈각하게 돼 불생불사의 니르바나에 도달했음을 선언한 것이죠.
이 때 석가모니가 깨달은 내용의 핵심은 연기법이었다는 것이 불교학계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사실상 연기법은 우주와 대자연은 당연하고 인간사에서도 연기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는 생멸은 단 한 가지도 없는 최상의 진리입니다. 이는 현대과학이 논증하고 있는 실제입니다.
연기법을 깨친 석가모니의 경지는 대략 3가지로 정의되는데, 첫째, 깨친 지혜가 理와 일치된 상태, 즉 理智不二의 세계, 둘째, 부처와 부처가 서로 생각하는 상태인 佛佛相念, 그리고 셋째, 법의 희열을 스스로 받아 누린다는 自受用法樂의 경계였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사에서도 아는 만큼 보이고, 느끼는 만큼 언어를 넘어선 경계를 맛 볼 수 있고, 추체험하는 만큼 깨달을 수 있듯이 부처가 깨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 같은 범인들이 석가가 증득한 경지가 무엇인지를 언급하기란 실로 言外의 영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석가모니 역시 정각을 이룬 뒤 한 동안은 自受用法樂의 경계, 즉 정각의 완전무결성이 주는 희열감에 젖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깨달은 심오한 진리의 세계는 언어로는 정확하게 전달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 가르침을 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어란 게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언어의 불확실성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비트겐슈타인 등과 같은 언어철학자들이 강조한 바 있는 경험적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석가모니는 고심 끝에 결국 불확실한 언어이긴 하지만 중생의 無明을 제거해주고자 역설적이지만 언어의 힘을 빌어 자신의 깨달음을 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쿠시나가라에서 세수 80세로 열반에 들기 전까지 45년간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각종 비유와 방편을 들어 설했습니다. 그것이 훗날 석가 입멸 후 100년 뒤부터 시작된 총 네 차례의 결집(제1~제4차의 結集, 즉 상기티 saṃgīti)에서 제자들이 모여 스승 석가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들은 이야기를 문자로 옮김에 따라 생겨난 각종 경전입니다.
우리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봉행하고 따르지만 종국에는 부처를 버리고 부처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한 선행 단계가 먼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언어화 된 부처님의 말씀(Sutra)들을 섭렵하면서, 동시에 그 언어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경지와 세계를 증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선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추구돼야 할 것입니다.
첫째, 교학차원에선 고대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창시한 불교가 중국인의 사유체계를 거쳐 중국화된 불교(이른바 ‘格義佛敎’), 즉 한문경전의 한계를 넘어 살아 있는 석가모니의 원의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경전을 통한 원시불교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둘째, 바라밀의 궁행 차원에선 理와 行의 계합도 함께 뒤따라야 되겠지만 동시에 개인의 수행차원을 넘어 연기법에 따른 共業의 無明 제거, 이를 위한 破邪顯正에도 힘을 보태야겠죠?
2014. 9. 10
雲靜
위 글은 2014년 9월 10일 서울, 인천, 경지 지역 불교밴드에 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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