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刹那)와 겁(劫)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일상 언어생활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 중에는 불교용어가 상당히 많다. 예컨대 ‘유야무야’(有耶無耶), ‘야단법석’(野檀法席), '이판사판'(理判事判), 현관, 지옥, 극락, 찰나, 겁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외에도 수십 가지가 더 있다. 그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일상 언어생활에서 자주 쓰이고 있는 ‘찰나’(刹那)와 ‘겁’(劫)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불교철학과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찰나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감지하지 못할 만큼 극도로 짧은 시간이라면, 겁은 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인간이 경험할 수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무한대적 시간 개념이다.
먼저 찰나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자. 찰나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크사나(kşaṇa)라고 한다. 고대 구마라지바(Kumārajīva, 鳩摩羅什, 344~413), 구라나타(Kulanātha, 拘羅那陀, 499~569), 현장(玄奘)법사(600~664) 같은 중국의 불교 譯經家들이 불교를 처음 인도에서 받아들일 때 이를 한자어로 ‘刹那’ 또는 ‘叉拏’라고 음역했는데, 실제로 이 두 한자는 모두 중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산스크리트의 원음과 비슷한 차나가 된다. 한글 음으로는 각기 ‘찰나’와 ‘차나’가 된다. 의역으로는 한 생각, 즉 ‘一念’으로 쓰이고 있다.
불교에서는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정도의 지극히 짧고 빠른 시간을 ‘彈指’에 비유한다. 그런데 통상 사람들은 막연히 이 탄지 보다는 찰나가 더 짧은 시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듯하다.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 찰나는 과연 불교에서 어느 정도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먼저 경전에 인용돼 있는 전거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서력기원 2세기 중엽 인도 카니슈카 왕의 보호 아래 500명의 아라한(阿羅漢)들이 모여 편찬('結集'이라고 함)한 책으로 알려진 불교경전『阿毘達磨大毘婆沙論』(원어는 Abhidharma-mahāvibhāsā-śāstra)에 의하면, “가는 명주 한 올을 젊은 두 사람이 각기 양쪽 끝을 당기고 단도로 단숨에 명주실을 끊으니 명주실이 끊어지는 시간이 64찰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찰나가 얼마나 짧은 시간인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감지할 수 있는 찰나는 얼마가 되는 시간의 길이일까?
먼저 미얀마의 주석서에는 찰나가 “손가락을 팍 하고 울리는 시간의 一兆(일조)분의 1”이라고 설명돼 있다고 한다. 1조분의 1이라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일까? 즉 그 정도로 짧은 시간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찰나를 현대적 시간단위로 환산해 75분의 1초, 즉 0.013초가 된다고 한다. 이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관념에서는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찰나라는 시간을 1초의 몇 분의 1인가로 계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찰나 같은 시간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물질이 고정 불변의 실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물질이 움직이는 중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인식이 닿아야 한다. 즉 눈으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물질의 덩어리는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소인 色(루파)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일체의 루파가 순간순간 생멸 변화하는 물결로 움직이고 있다. 물체는 고정된 실체로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 자체가 항상 순간순간 생멸 변화하는 운동이다.
인간에게는 멈추어 있는 듯이 보이는 물질들도 예외 없이 역동적(dynamism)으로 변화를 계속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밝혀졌듯이 물리학적 개념으로 말하면, 물질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들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 활동하면서 변화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정적(static)이나 정지가 아닌 다이내믹한 변화라는 것을 석가모니께서는 ‘無常’이라는 아름다운 말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비달마에서는 그것을 더 분석해서 ‘生, 住, 滅’로 설명하고 있다. 물질은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체에 접촉한다. 물질이 無常이기 때문에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물질이 흐르면서 진동하고 변화하는 속도를 찰나라는 시간의 단위로 생각하고 있다. 보통 대략 120찰나쯤 돼야 감각 기관에 포착돼 소위 “감이 온다”고 한다. 120찰나는 단찰나라고도 하는데 약 1과 5분의 3초 쯤 된다.
찰나 단위로 계산하면 삼라만상 중에 가장 빨리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 한 번 회전 하는 시간, 즉 생겨났다 거하고 사라지는 것(生→住→滅)을 一心刹那, 즉 치타 크사나(citta-kşaṇa)라고 일컫는다. 이에 비해 물질의 변화와 움직임은 마음 보다 훨씬 늦다. 물질이 한 번 회전(生→住→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7(心)찰나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눈에 어떤 빛, 色, 形이 접촉했다고 치자. 눈에 부딪힌 루파는 17찰나의 시간 동안 살아 있다. 아비달마에서는 이 17찰나를 차트(chart)로 해서 물질의 1회 생멸을 17로 나누어 생각한다. 어떤 물질이 최초의 찰나에 생겨났다가 최후의 제17찰나에 가서 죽는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마음의 수명은 눈 깜박할 사이 보다 더 짧다. 인간이 하나의 마음을 내서 없어질 때까지는 1찰나 밖에 없다고 한다. 17찰나 동안 살아 있는 물질과 1찰나에 지나지 않는 마음을 비교하면 마음의 수명 쪽이 압도적으로 짧은 것이다. 마음의 찰나로 계산하면, 사람이 꽃을 보려고 할 때 꽃을 본 그 순간에 꽃이라는 물질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그 물질은 이후 16찰나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 사이에 마음은 죽어서는 생겨나고, 죽어서는 생겨나서 17번이나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음으로 劫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겁은 한자 ‘劫波’, ‘劫跛’, ‘羯臘波’의 준말인데, 원래는 산스크리트어 Kalpa라는 단어를 중국 역경가들이 소리에 따라 한자로 음역한 것을 단음절인 1자로 줄여 부르는 것이다. 뜻을 새긴 훈역으로는 Kalpa가 長時라고 번역돼 있다. 이 長時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겁이 긴 시간을 뜻한다는 것임은 알 수 있지만 과연 어느 만큼 긴 시간인지는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불교에서나 고대 인도인들에게 겁은 한 마디로 년, 월, 일 등의 인습적 시간(conventional time)의 단위로는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의미했다. ‘인습적 시간’이란 연속적인 시간을 초, 분, 시간, 일, 월, 년 등 분리된 시간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1시간을 60분, 하루를 24시간, 1년을 365일로 정한 게 그런 예다. 이는 자연계의 현상적, 물리적 시간과 별개로 인간이 고안해낸 발명품으로서 인식의 틀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사회적 장치다. 이는 시간을 외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내부의 형식(혹은 개념)으로 보는 베르그송, 칸트, 헤겔 등의 서양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불교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의 3세, 찰나, 겁처럼 편의적으로 설정된 인간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아무튼 불교에서는 긴 시간을 ‘永劫’, ‘曠劫’이라 하고 ‘兆載永劫’이라고도 하는데, 兆나 載는 모두 지극히 많은 수를 가리키는 한자식 단어다. 통상 불교에서는 ‘겁’은『大智度論』卷5에 나오는데, 겨자겁과 반석겁에다 다른 두 종류의 진점겁(塵點劫)을 더해 크게 총 네 가지 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겨자겁은 둘레가 “사방 40리 크기의 성안에 겨자를 가득 채우고 백년 마다 한 알씩 집어내어 그 겨자가 다 없어져도 겁은 다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여기엔 조금씩 다른 이설이 있기도 한데, 예를 들어 성의 크기가 사방 80리라는 것인데 백년에 한 번 하늘에서 천녀가 내려와 겨자 한 알씩 가져가 성안의 겨자가 다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1겁이라고 했다.
반석겁은 “사방 40리 되는 바위를 백년마다 한 번씩 엷은 옷으로 스쳐서 마침내 그 바위가 닳아 없어져도 겁은 다하지 않는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여기에도 이설이 있다. 즉 사방 80리 크기의 큰 바위를 하늘에서 천녀가 백년에 한 번씩 내려와 천녀가 입고 있는 얇고 부드러운 비단옷자락으로 한 번 스쳐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1겁이라는 설이다.
진점겁에는 두 설이 있다. 첫째는 三千大千世界와 같은 크기의 먹이 다 닳도록 갈아서 만든 먹물로 1천 국토(세계)를 지날 때마다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먹물이 다 없어질 때까지 지나온 모든 세계를 부숴 만든 수 없는 먼지 하나하나가 1겁이라는 것이다. 또 五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아주 많은 수를 가리키는 단위인데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하겠음)의 三千大千世界(이 세계가 과연 어디만큼 큰 규모인지에 대해서도 다른 기회에 소개할 것임)를 부숴 먼지를 만들어 五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 국토(세계)를 지날 때마다 그 먼지를 하나씩 떨어뜨려 그 먼지가 다 없어질 때까지 지나온 모든 세계를 다시 먼지로 부숴 그 중 한 먼지를 1겁이라는 설도 있다. 이 밖에도 겁의 크기나 겁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을 설명한 一住中劫, 二住中劫 등등 많은 설들이 있는데 그에 대한 소개는 생략하기로 한다.
찰나와 겁은 불교의 시간관, 우주관을 나타내면서 인식론, 심리학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空, 인연법과 연기법과도 연결돼 있다. 이 같은 불교의 시간관을 상징하는 찰나와 겁은 우주의 광대무변함을 공간개념으로 설명하는 三千大千世界 개념과 함께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다. 찰나와 겁에 대한 현대적 의미는 석가모니가 설한 이 모든 시간적 무한성이 광대무변한 우주 속의 한 티끌 보다 못한 삼라만상의 일체 존재가 유한하다는 점, 그 속에 한 점으로 살다가는 인간의 존재 또한 무상하다는 연기법과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게 하려는 시청각적 교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은 짧다면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고, 길다면 긴 겁에 해당된다. 달리 표현하면, 과거 시간의 장단은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곧 자신이 인식하는 주관적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 찰나와 겁이 설해진 의도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것은 시간의 주관성을 통해 삶을 주관적, 주체적으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시청각적 교재로 제시된 게 아닐까?
2015. 12. 12. 10:55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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