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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의 대화 :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실재하는 것인가?

雲靜, 仰天 2017. 7. 1. 23:25

친구와의 대화 :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실재하는 것인가?

 
좋은 아침!

 

어제 보낸 “시 ‘가장 외로운 날엔’을 읽고”를 본 한 친구가 깨달음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듯한 답과 함께 깨달음에 관한 질의를 보내와서 그에 대해 답을 써 보낸 대화내용을 보냅니다. 불교얘기는 쉽게 얘기할 기회가 없어 이참에 공유하면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지인들에게 어제 보냈다는 “시 ‘가장 외로운 날엔’을 읽고”라는 글은 본 블로그에 올려놨습니다. 아래 글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단락은 친구가 雲靜에게 보낸 질문입니다. 그 아래는 그에 대한 雲靜의 답변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니 굳이 사람을 만나야 답을 찾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어쩜 편안하고 깃털처럼 가볍지 않을까요? 소생도 집사람과 8년째 떨어져 살고 있는데 익숙해져서 그런지 오히려 편한 것 같네요. 퇴직하면 집사람한테 가겠지만 가도 특히 나아질 것도 없을 거 같고 인생길은 결국 혼자이고 가족, 친구, 동료는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 뿐 누가 내 인생을 대신해줄 수 없으니 자기 자신이 스스로 도울 수밖에 그래서 고통의 사바세계에서 잠시나마 자유롭거나 편할 수 있겠죠.
 
雲靜의 시평 잘 봤네. 그 사람 나름대로 고뇌가 있겠죠. 다만 풀이하는 방법이 이 사람은 만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거 같음. 내 개인적 견해는 그 누구도 내 자신을 위로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 사료됨. 운정에게 부탁 하나 하겠네. 즉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실체하는지, 그럼 그것을 판별해내는 선지식도 과연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상태에서 판독하는지 동양문화를 전공한 운정의 견해를 듣고 싶네.

 

꿀모닝!

 

좋은 견해라고 생각하네. 두 가지를 질의했구먼.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실재 여부, 그걸 어떻게 판별하는가 하는 것이네. 질의한 두 가지에다 돈오와 점수 등 깨달음과 수행문제를 결부시켜 내가 아는 대로 답하면 이러하네.
 
깨달음은 실재한다. 부처의 가르침 중에 핵심인 인연법과 연기법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이해가 되고 실제로 그것이 바르게 실천될 때의 경지에 이르면 깨쳤다고 한다네.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사의 일체가 인연법과 연기법에 의해 존재하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존재하는 거지.
 
예컨대 자연계의 물을 예로 들면 물은 우리 눈에 보이고 마실 수도 있는 실체지만 기온이 섭씨 0도로 떨어지면 얼게 되고 그 기온이 올라가 100도가 되면 수증기로 증발하는데, 물이란 영원히 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온도라는 조건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지.  
 
인간사에서도 기쁨, 슬픔, 행복, 고통, 성냄, 화남, 분노, 가난, 고생, 부귀, 영화, 권력, 지위, 명예 등과 같은 현상도 영원히 영속적으로 존재하거나 지속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든, 물질적 혹은 정신적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그 조건이 해소되면 사라지게 된다. 인과 연이라는 조건의 결합으로 잠시 相을 이루는 건데, 각각의 상은 모두 각기 다른 조건에 의해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즉 연기하는 거라고 한다.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힌두교에서는 이러한 상을 영원한 것으로 보는 것(그래서 한 번 불가촉 천민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평생은 물론, 죽어서도 다른 존재로 태어나지 못한다고 설함)에 반해 석가는 그것을 인간 위에 인간 있고, 인간 아래 인간이 있는, 즉 불평등을 고착화 하는 기득권층의 계급적 논리라고 보고 단호하게 부정했잖아.
 

암튼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諸相)은 한 가지도 예외 없이 因과 緣이라는 조건의 결합으로 잠시 상을 이루는 건데, 임시로 잠시 동안 조건의 결합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因緣假合이라고 해. 그리고 각각의 상은 모두 각기 다른 조건에 의해 존재하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도 또 다른 조건에 연해서 다시 존재하는 것, 연하여 일어나는 것, 즉 緣起하는 거라고 한다.
 
조용필의 여와 남이라는 노래 가사 중에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네가 있네”와 같은 대목이 서로 간의 상관성과 相依性을 표현한 것이지. 제상과 일체가 공이라고 하는 건 무상, 즉 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은 대승불교 쪽의 관법이네. 그러니 그러한 제상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것들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만드는 인자, 즉 아트만(산스크리트어로 atman)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니라고 하네.
 
석가모니는 자연계와 세상만사 및 만물은 단 한 가지라도 이 같은 이치, 원리, 법칙에서 벗어나는 건 없다고 했고, 이를 法(산스크리트어로 dharma)이라고 했다. 이 법을 깨치면 깨닫는 것이고, 이걸 깨치면 곧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설했다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렇다고 당장 눈에 보이는 제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부정해선 안 된다고 가르쳤지. 마치 우리가 지금 어릴 적 모습과 달리 변해 있다고 해서 그 때의 모습이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고, 지금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듯이 말이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아무리 얘기해도 부처가 될 순 없고 부처의 흉내만 내는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네. 누구든 세상은 모두 연기법 및 인연법과 일체개공(一切皆空)으로 이뤄져 있고 그렇게 굴러간다는 점을 깨치면 바로 부처가 된다네. 부처라고 한 게 바로 보디사트바(Bohdi Sattva), 즉 '깨달은 자'(覺者)라는 말이 아닌가?
 
문제는 깨달음인데, 석가모니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모두 이 법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고(一切衆生 悉有佛性), 그렇게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불성이라면서 이 법을 깨치기에는 동물이나 식물 보다는 인간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존재라고 했다.
 
아무튼 인연법과 연기법을 깨치는 방법, 과정이나 속도에선 여러 가지로 얘기되고 있어. 문자로 부처의 교의를 전하는 경전에 의지해 경전공부를 중시하는 敎學이 있는가 하면, 참선수행에 의지하거나 강조하는 禪學이 있고, 사람의 근기에 따라 누구는 천천히 깨닫게 되기도 하고 누구는 한순간에 깨닫기도 한다네. 전자는 점수이고, 후자는 돈오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을 우선시 하는 가에 따라 수행의 입장이 달라 불교 역사적으로 오랜 논쟁이 있었지요. 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해야 한다고 하는 정혜쌍수가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어. 또 깨닫기만 한 채 행하지 않으면, 즉 그 깨달음(득도)은 가만히 놔두면 퇴보한다고 해서 바른 계와 율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돈오점수도 있다네.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분명 존재한다. 내 경험으로는 그 정도의 차이도 존재하는 것 같네. 깨달음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하는 게 자네의 마지막 의문이었제? 이에 대해선 이해하기 쉽게 바둑을 예로 들어 보겠네.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바둑 두는 걸 봐도 뭐가 뭔지 몰라요. 근데 바둑도 수준이 여러 단계가 있지. 여러 급수에서 단으로 올라가고 단도 9단까지 있잖아. 굳이 단이 아니라도 내가 그렇듯이 한 4~5급 정도만 돼도 벌써 상대의 기력을 간파할 수 있잖아요?
 
암튼 몇 급이 됐든, 몇 단이 됐든 바둑은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들끼리는 상대의 기력이 어느 정도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지. 객관식 시험 채점을 할 때 답안지를 기계에 넣어 채점하듯이 상대의 바둑실력을 기계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최소한 단 이상이 되면 상대가 두는 수를 보면 자기보다 수준이 낮고 높은 걸 알 수 있고, 자신 보다 고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는 거와 비슷하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비정형, 비고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묘하게 존재한다. 妙有라고 하는 이유다. 깨닫기 전에는 알지 못해도 깨닫게 되면 형태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 것들이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깨친 자에겐 간단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겐 무지하게 복잡다단한 이론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라네. 또 법을 깨치는 것도 사람의 영적 능력, 즉 타고난 수준(이를 근기라고 함)에 따라 어떤 이는 단박에 깨치는 이도 있는 반면, 평생을 공부하고 수행해도 깨치지 못하는 이도 있어. 또 깨쳤다고 방심하고 방만하게 살면 깨닫기 전의 상태로 떨어지기도 한다네. 즉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거지. 이 땐 수행이 중요하다. 불교에서 계와 율을 정해두고 이를 실천하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네.
 
돈오의 기준이 있는가, 그것이 어떤 상태인가라는 질문도 예를 들어 답하는 게 좋겠다. 내 경우의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네. 역사연구를 하다가 역사적 인물인 어떤 연구대상자가 과거에 했던 말, 글이나 지시 혹은 명령 등등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마음속에서 의도한 그가 한 말의 의도, 목적이나 진정한 동기나 맥락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들을 해석할 때 그것들이 손에 잘 안 잡힐 때가 많다네.
 
그래서 여러 날, 몇 날 며칠을 계속 생각을 해도 풀리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럴 땐 나는 가끔씩 책상을 박차고 나가 산책을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아니면 친구를 만나서 술이나 차를 마시기도 하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갑자기 뜻하지 않게 산책을 하다가,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심지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다가도 풀리지 않던 그 문제가 갑자기 답으로 떠오르는 순간이 있어요. "앗! 바로 그거다", "그렇다 맞다"라고 생각되는 상황이죠. 그동안 풀리지 않던 해석이 그렇게 해석하면 되겠구나라는 상황이 오는 거죠.
 
살면서 꼭 공부라든가 연구가 아니라도 이와 유사한 사례들, 의혹이 홀연히 풀리는 마음 상태,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로 생각된다네. 그런데 돈오라는 것도 내가 보기에 돈오상태가 오기 전에 이미 안, 이, 비, 설, 신, 이, 마나스, 아뢰야 등 인간의 여덟 가지 識을 통해서 이미 각종 지식, 정보나 지혜 등이 자신 속에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면 돈오의 대상은 뭔가하면 수행자들이 깨치고자 하는 것, 답을 얻고자 하는 문제, 즉 화두입니다. 불교의 경우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처님이 깨친 내용들이 되겠죠. 예를 들어 사성제, 연기, 인연법, 空, 自性이나 佛性의 유무라든가 등등 화두의 방점을 어느 곳에 두느냐에 따라 적지 않습니다.

 

답이 충분히 됐을지는 모르겠네만, 아침 출근길 전철 안이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세. 못 다한 얘기나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또 기회를 보고 얘기하세. 법음이 충만한 주말이 되면 좋겠네.

 

2015. 10. 30
출근길 전철 안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