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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와 무슬림이 위험한 이유

雲靜, 仰天 2018. 7. 15. 21:11

이슬람교와 무슬림이 위험한 이유

 

현재 제주도에 체류하고 있는 예멘인들의 난민지위 부여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확산되고 청와대에 반대 청원을 신청한 민원인들이 70만 명을 넘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우려와 반대는 근거가 충분해서 쉽게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다.

 

반면, 예멘인들을 인도주의적 취지에서 난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소수 난민센터 종사자나 일부 교회 목사들 그리고 진보적이라고 자임하는 일부 정치권 인사들 및 그들에게 동조하는 국민들이다.

 

예멘인들에 대해 우호적이어야 하고 인도주의 차원에서 난민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세 가지 이유로 집약된다. 과거 한국전쟁시 우리 국민이 난민으로 다른 나라로 나간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국제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점, 우리 정부가 1992년 난민조약에 가입한 바 있으니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 예멘인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온 위장 난민이 아니고 범죄자가 아니라 순수한 난민들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찬성자들의 호소에 가까운 주장은 인도주의의 가치만 알지 종교와 정치가 하나인 신정체제의 이슬람교가 어떤 종교이며, 무슬림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하는 주장일까? 반대자들은 세계시민의 의식이 없어서, 또 인도주의를 몰라서 반대할까?
 
난민은 여러 종류가 있듯이 우리 국민의 일부가 난민이었던 것은 한국전쟁 시절이었는데 그 땐 그야말로 전쟁난민이었다. 휴대폰을 사고, 인터넷에다 페이스북까지 하며, 비행기를 타고 온 전체 500여명 중 90%가 20대의 건장한 청년들인 그들은 과연 “전원”이 전쟁난민일까?

 

아직도 말레이시아에는 적지 않은 중동출신의 무슬림들이 한국에 오려고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왜 그들은 인근 국가로 가지 않고 한국으로 몰려오려고 할까? 그들은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온 경제난민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게다가 그들 가운데 한국을 이슬람화하려는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온 이들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종교가 정치 영역을 넘어 모든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는 신정일치체제에서 정치적 목적은 곧 종교적 목적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또 문화와 가치관이 판이하게 다른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테러를 저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는가? FBI도 난민들 중 테러리스트를 색출하기가 어렵다고 실토한 바 있다.

 

지금 우리가 주저 없이 내려야 할 결론은 이렇게 귀결된다. 즉 과거 우리 국민이 난민으로 다른 나라로 나간 적이 있다고 해서, 또 우리 정부가 1992년 난민조약에 가입한 바 있다고 해서 무관용적으로 입국을 원하는 자들을 모두 다 난민으로 받아들일 순 없다. 우리가 국제사회에 진 빚이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갚고 인도주의의 실천과 증장에 공헌하면 된다. 상황도 지금은 70여년 전 우리 국민이 난민으로 나간 그때와 많이 다르다.
 
비이슬람권 세계로 이슬람교와 교도들을 확산시킬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이슬람세계의 총본부 메카가 전세계를 알라신의 지배하게 두도록 이슬람화 하려고 동시 다발적으로 무슬림을 다른 나라에 들여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이슬람교가 발붙이지 못한 청정 국가들에 무슬림을 다수로 만들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전세계의 이슬람화를 위해선 분별없는 사랑과 자비까지도 악용하는 게 무슬림이다.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는 범죄를 유발시킨다. 인권과 인도주의를 숭상하는 독일과 영국이 그랬듯이 유럽나라들 중엔 이미 각종 성범죄, 유야 납치 살해, 테러, 공포분위기 조성, 도시 슬럼화 등으로 무슬림들에게 호되게 당한 나라도 있다.
 
그러한 사건들은 과연 배후의 조직적인 정치세력과의 연계 없이 개인이 저지른 개인범죄에 지나지 않았을까? 미국, 일본, 중국은 이를 간파하고 무슬림들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거나 자국 내 무슬림에 대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 당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찰조직을 갖고 있는 공산정권임에도 신장(新疆)성의 무슬림들이 터키의 경제 지원을 받고 중국 국경 바깥의 이슬람 민족들과 연계해서 중국에서 분리 독립하기 위해 저항하고 있어 그들과 수 십 년 동안이나 체제싸움을 벌이고 있다. 중국 정부가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신장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만이 일부 정치권의 정치인들과 종교계에서 그들의 정체와 위험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설픈 인도주의만 외치고 있다. 어설픈 인도주의라고 한 건 소수인의 관념적인 만족을 대다수 국민의 안전과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그들이 안착하고자 하는 국가의 근간마저 흔들 수 있다. 그들은 이슬람교와 알라신을 절대적, 초월적인 존재로 보는 이상, 신정체제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무슬림은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신을 향한 길’이며, 궁극적인 목표는 신의 의지에 대한 귀의와 복종이라는 의미에서 ‘길’을 뜻하는 율법인 이른바 샤리아(Shari'ah, 아랍어로는 شَرِيعَة)를 생명처럼 여기는데, 과연 그들이 다른 종교를 자신들이 믿는 종교 및 알라신과 같이 동등하게 볼 수 있을까?
 
답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다른 종교로 개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샤리아가 엄격한 이슬람교에서 개종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로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제각기 사랑의 하느님, 사랑의 알라라고 내세우면서도, 더군다나 유대교라는 같은 종교의 뿌리에서 나온 두 종교이면서도 불공대천의 원수처럼 서로를 적대시한다.


샤리아란 이슬람의 법체계다. 종교생활에서부터 가족·사회·경제·정치·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세계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포괄적인 체계로서 민주국가의 일반적인 법체계와는 많이 다르다. 샤리아는 서방 사회의 법 개념보다 포괄적이며, 국가와 사회에 우선하고, 종교와 세속의 차이를 두지 않으며, 시공을 초월하여 ‘신의 뜻에 따른 올바른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법이 아니라 신의 계시에 의해 만들어진 절대적이자 변하지 않는 법이라고 선전한다.
 

 

무슬림은 샤리아를 이해하고 실제적인 인간 행위에 적용하기 위하여 법원을 채택·논의·분류하여 체계적인 적용 기준을 마련하는 등 법 이론으로 발전된 형태인 피크흐라는 것이 있다. 샤리아의 가장 우선적인 법원은『꾸란』이지만, 꾸란의 내용이 모호하거나 꾸란에 언급되지 않은 사안에 관해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수나, 즉 하디스를 법원으로 삼는다.
 
그 뒤를 이어 이즈마가 제3의 법원이며, 마지막으로 꾸란과 수나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확실한 법적 결정들 속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내어 적용하는 키야스(Qiyas, 유추)가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판례와 유사해 보인다. 키야스는 반드시 앞의 세 법원에 의하여 확립된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고 한다.

 

이러한 신정체제를 고수하는 무슬림이 과연 한국에서 알라신과 이슬람교를 버리고 타종교로 개종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믿음과 관습을 버리고 탈종교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극성을 부리는 한국의 기독교와 화합이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문명간의 충돌을 예고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이 강조한 바 있듯이 이슬람교와 기독교 간의 충돌은 불보는 듯하다. 이래저래 ‘열린사회의 적’(open society and it's enemy)들이다. 게다가 무슬림은 알라신과 그를 대변하는 샤리아를 버리고 민주주의체제에 순응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역시 대단히 회의적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가 17세기에 계몽주의를 통해 제정일치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 유럽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그런 노력을 기울인 바 없고 지금도 신정일치를 고수하고 있다. 예컨대 무슬림은 민주주의체제까지 이슬람의 법체제인 샤리아 밑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이념과 민주주의체제와는 적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슬람세계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맹신하는 이상, 무슬림들에게 세계시민은 무슬림이 되는 것뿐이다. 아니면 충돌이다. 타협은 없다. 자유민주주의 사상 및 체제와 양립 내지 공존이 어렵다는 소리다.

 

우리에게는 무슬림들이 ‘신의 뜻에 따른 올바른 삶의 방식’을 주권재민, 평등과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가치 보다 위에 두는 상위의 가치라고 절대시, 신성시하는 점이 우려되는 것이다. 샤리아는 여성무시, 일부다처제 관습의 용인 내지 잔재(대부분의 이슬람국가들은 현재 일부다처를 금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전체의 5% 정도는 남아 있음), 보편화된 남성우월주의, 아동 성학대, 폭력과 이교도에 대한 징벌 장려 등의 반문명적인 교리를 담고 있는 꾸란과 함께 충돌의 잠재적 요인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무슬림이 소수이고 자신들이 필요하니까 교회나 한국인들에게 고분고분 순종하는 척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세력이 커지면 바로 본성을 드러낸다. 일부일처제가 정착된 여타 문명국가들과 달리 무슬림들은 최소 4명의 부인들을 둘 수 있고, 그들을 통해 자식을 여럿 낳아서 인구 면에서 다수가 되도록 만들어 그 나라의 실권을 장악해버린다.
 
실제로 그렇게 된 레바논이 살아 있는 증거다. 지난 세기 기독교들이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었던 레바논도 처음엔 다문화 다종교라는 선한 취지에서 무슬림들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레바논에 들어온 소수의 무슬림들이 자신의 처자식과 친지를 불러들이고 자식을 많이 낳아 결국 다수가 되자 이슬람 국가가 돼버렸다. 아래 동영상에 그 실증적인 경험을 한 레바논 여성의 증언이 담겨 있으니 직접 들어 보라!
 
https://www.youtube.com/watch?v=TXUtoz6UcaE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5&aid=0000656293
 
2018. 7. 14. 23:18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