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자작시 207

신발

신발 하나는 외로워 둘이라네 하나로는 하나만도 못하지 값어치가 2할이나 될까나? 앞뒤가 아니다 위아래도 아니다 나란히 서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멈춰 설 땐 한 줄이라네. 걸을 때나 설 때나 하나는 늘 둘임을 믿고 둘은 언제나 하나임을 안다 둘 일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 2021. 5. 8. 15:56 고향에서 친구로부터 신 한 켤레를 선물 받고서 雲靜

복어

복어 평시엔 그저 오동통한 것이 위협을 느끼면 배를 풍선처럼 부풀리고 화나면 가시도 핏발 세우듯 곧추 세운다 무시무시한 독은 비수처럼 늘 품고 산다. 위험에 처하거나 홧기를 내뿜을 때 비로소 복어는 복어가 되지만 제 명을 생각하면 복어 아니란 소릴 듣더라도 터질 듯한 풍선 배는 싫다 싫어 가시도 뾰쪽 뾰쪽 치뻗고 싶지가 않아 그게 아녀 제 몸 지키려 용쓸 때 배가 뽀르록 뽈록 포동포동 ‘즈~엉말’ 귀엽잖아!? 본능인 걸 어떡해! 그게 복어인걸 2021. 5. 1. 19:19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草稿

숫돌

숫돌 헛기침 한 번 없다 같이 있어도 있는 둥 없는 둥 다만 단단하고 조금 길고 묵직할 뿐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라!” 천고의 부나방 으뜸 처세들 속에 연옥색 살로 무뎌진 날만 세운다 창호지도 베일만큼 예리하게 날이 서야만 서는 세상 세워도 세워도 무뎌지기만 할 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봐주지 않는다고 불평도 없다. 살점이 뜯겨나가도 신음 한 마디 없고 육신이 닳도록 갈려도 결코 헷갑지 않는 숫돌 인간들 보다 낫다 멀대 보다 훨씬 낫다. 2021. 4. 29. 07:47 북한산 淸勝齋에서 숫돌에 칼을 갈던 중 초고 雲靜

봄앓이

봄앓이 해마다 봄이면 봄앓이를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천지에 흩날리면 눈물도 후두둑 떨어진다 지는 꽃잎이 서럽게 아프듯 가슴이 따가워 펑펑 운다. 아름다운 이 별을 떠날 걸 생각하니 가는 세월 못내 아쉬워서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어서 알아주는 이 없는 세상이 야속해서 꽃이 지니 내가 지고 만다 미련 없는 無化에 미련이 남아 달구똥 같은 눈물을 떨군다. 더러운 세상이 날 찾지 않는 게 아니다 시드럭시드럭 꽃이 져버리듯이 순정한 내가 더러운 세상을 버리는 거다 꽃으로 폈다가 눈물로 버리는 것이다. 2021. 4. 21. 10:5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반성

반성 나는 늘 깨끗하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평생 비리 없고 남을 속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속으로 으쓱했다 부정 한 번 저지르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하다. 허나, 나는 때가 엄청 많은 몸이다 평소 자주 씻지 않으니 어찌 더럽지 않겠는가? 깨끗해봐야 얼마나 깨끗하겠는가? 몸뚱이 자체가 썩어 없어질 오물 덩어리인데! 2021. 4. 5. 23:1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동대산의 봄

동대산의 봄 동대산자락 마디마디에 스며드는 봄 꽃을 피우려고 저토록 바쁘구나 님아 그렇게 허겁지겁 가지 말게 꽃인들 지고 싶어하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세월이 流水라네. 혼자서라도 느릿느릿 뒤로 걷는다 눈이 초롱초롱하던 시절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시절 어느덧 한 갑자도 더 돌았구나 뒤로 걸어도 닿지 않는 곳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왔다네. 꽃이여 지려거든 피지 마소 피려거든 느린 걸음으로 피소 세월아 가려거든 오지 마소 오려거든 소걸음으로 오소. 2021. 3. 23. 15:31 영덕 東大山 爭岩堂에서 雲靜 草稿

고 손동우 형 추모

追慕故孫東佑兄 登金仙寺億昔起 兄靜養而弟斷食 生者必滅爲必然 似笑似哭獨眠着 生死刹那也春靄 竚如淋春花碑峯 耳邊盤旋豪笑聽 回路雨絲紛紛久 고 손동우 형 추모 金仙寺에 오르니 지난 날 함께 한 기억이 되살아나네 형은 요양하고 나는 단식했었지 무릇 산 자는 모두 다 한 번은 가게 돼 있지만 넋은 어데 가고 웃는 듯 우는 듯 홀로 잠들어 있구나. 생과 사는 찰나요 봄날의 아지랑이라 비 맞아 피다만 봄꽃에 碑峯처럼 말없이 서있네 살아생전 호방한 웃음소리 귓전을 맴도는데 돌아서는 길엔 내내 빗발만 어지러이 뿌리는구나. 2021. 3. 21. 10:5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進兄酒 進兄酒一杯 冥土不無酒 但豈知音酒 然兄何所居 형에게 술 한 잔 올립니다 생전에 형이 좋아한 술을 한 잔 올립니다 저승에도 술이 없진 않겠지요 그..

둥지

둥지 산중턱 높은 나무 위 둥근 집 한 채 쌔근쌔근 아기가 잠들어 있는 해먹마냥 실바람에도 드레드레 너울대는 전매 없고 전세도 없는 단독주택이다. 아파트 한 채가 싼 것도 수억 넘는 ‘셔플’땅 분양권 딱지 한 장 없이도 혼자서 한입 두입 꿈으로 쌓아올린 집 온 나라가 땅으로 돈 놓고 돈 먹는 야바위판에서 땡전 한 닢 안 들여 지은 보금자리 구파발 57-37번지 텃새네 둥지 내 오랜 이웃에는 친환경 목조 가옥 한 채가 감바리들 보란 듯 나볏이 서 있다 닮고 싶어도 이승엔 안 보이는 스승의 자태 의연히 살라는 말 없는 웅변이다. 2021. 2. 15. 16:32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한시 義弟的問候便條

義弟的問候便條 桃結未忘義弟問 獨吃麵閱請兄鑑 沒問歉速蘇生見 俄吃麵吞淚不分 義弟의 문안쪽지 도원결의를 잊지 않고 사는데 義弟가 묻는다 혼자 국수를 먹으면서 본다 "형님 보세요" 오래 안부 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빨리 회복해서 뵐게요 돌연 국수를 먹는지 눈물을 삼키는지 분간이 안 되는구나! 2021. 2. 23. 12:4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어무이의 靈

어무이의 靈 쌀쌀한 이른 봄 토요일 귀가길 전철역 입구 시장어귀 좌판에 푸성귀 늘어놓은 여든 남짓한 할머니 백발이 한 올 두 올 바람에 일고 음달에서 족히 한나절은 떨었던지 앙상한 미라 손으로 눈물 훔친다. 값은 묻지도 않고 몽땅 다 샀다 "할머니 이제 떨이 했으니 빨리 들어가 쉬세요!" 숨이 반쯤 죽은 봄나물 가득 든 봉다릴 손에 들고 모처럼 어무이말씀 받든 양 새털 걸음 걷는다. 평생 시장에서 장사하시느라 듬성하게 쉰 머리카락 트고 갈라진 거친 손 가신지 10년이 넘은 울어무이가 시장 입새 한 데에서 떨고 앉아 있었다. 2018. 3. 17 초고 2021. 2. 22. 18:05 구파발역에서 부분 수정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