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야생화들의 ‘사회적 거리’와 자기소외

雲靜, 仰天 2020. 3. 29. 19:09

야생화들의 사회적 거리와 자기소외

 

사회적 거리!’ 나라 전체가, 아니 온 지구촌이 들썩거릴 정도로 초미의 과제다. 유감이지만 '사회적 거리'는 잘못된 명명이다. '물리적 거리'라고 해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 하지만 이 졸고에서는 비상시국임을 감안해 군소리 없이 '국가'의 어법을 그대로 따르겠다. 아무튼 사회적 거리는 진작부터 평소 삶의 주된 형식이 됐어야 할 당위였었다. 이제라도 그리 해야 한다. 덜 만나고, 덜 쓰고······. 만나더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얘기하잖다. 그렇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게 무엇 보다 요긴한 시점이다. 난국이 극복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다

 

이참에 사회적 거리가 떨어지는 만큼 자연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연 자체로 환원되면 좋겠다. 단, 자연은 자연답도록 놔두고 말이다. 그러지 못해 지금 우리는 초유의 엄청난 과보를 받고 있지 않는가? 사회적 거리는 평소처럼 물리적 거리가 아닌 비물질적 인식이어야 한다. 그건 무시로 시공을 넘나든다.

 

그랬더니 오늘 오전에 갑자기 자연이 내게 안겼다. 그래서 뒷산도 오르게 한다. 친구가 청계산 국사봉을 오르다가 우연히 발견한 야생화 군락지에서 사진 찍어 단톡방에 올린 야생화들이다. 식물에 밝은 그 친구의 소개에 따르면, 산괴불주머니, 개암나무 수꽃, 노루귀 자주색 꽃, 현호색, 할미꽃, 노루귀 잎, 노루귀 흰 꽃이다. 노루귀꽃은 자주색, 분홍색, 흰색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들을 보라. 소담스럽다. 너무 사랑스럽지 않는가?

 

 

산괴불주머니(촬영 김대성, 청계산 국사봉 부근에서, 이하 동일)
개암나무 수꽃
노루귀꽃(자주색꽃)
현호색
할미꽃
노루귀잎
노루귀꽃(흰꽃)

 

야생화들의 자태는 내게 늘 오래된 친숙한 여인이다. 하이힐에다 양장을 입고 서있는 다른 꽃들 보다 옥고무신에 때때옷 차림으로 다가온다. 장미, 백합, 목단, 튤립, 알리움 기간티움, 서양난 등등의 꽃들이 도회의 세련된 부유층 레이디나 귀부인을 연상시킨다면, 이런 종류의 야생화들은 더벅머리 총각 앞에서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한촌의 처자나 과부가 된 아낙을 연상시킨다.

 

처자들을 보고 즉시 친구들에게 보낸 멘트도 그런 류의 느낌들이었다. “첫사랑의 자태 같다느니, “부끄러운지 고개 숙이면서도 노란 눈썹인지 입술인지는 내놓은 할미꽃은 꼭 잊고 산 옛 연인 같다느니, “가지와 줄기에 나 있는 솜털은 흡사 갓난아기의 보송보송 솜털 같아서 앙증맞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야생화들이 언제 어디서든 소박한 미감을 느끼게 하는 건 군락지에서 볼 수 있는 야생화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와 자기소외 때문일 터다. 사회적 거리와 자기소외는 서로 안으로 잡는 손길이다. 씨앗이 바람에 실리든, 동물에 업히든 피어서 서로 부대끼지 않도록 알맞은 거리에 떨어져서 피게 된다. 군락을 이룬 꽃들은 서로 자태를 뽐내는 듯해서 보기 좋지만 홀로 떨어져 피어있는 꽃은 홀로여서 고상하다.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이 말했던가? 꽃은 저만치 홀로 떨어져 있어 아름답다고······. 야생화가 아름다운 까닭은 스스로 소외돼 있어 굳이 애써서 자신을 위해 향기를 뿜거나 색을 드러내려는 인위와 작위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른 나뭇잎 사이로 드문 드문 난 야생화, 식물계의 '사회적 거리'로 봐도 될 것이다.(촬영 서상문, 북한산 자락에서)

 

자연이나 인간이나 매 한가지다. 꽃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색깔이 있듯이 자신만의 솟도가 확보되는 한 공간적 이격의 거리는 얼마가 되든 본질이 아니다. 공산주의자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 소외를 객체와 주체의 전도라고 보면서 뒤엎어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설정했지만, 그건 그만의 아집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사실, 소외는 마르크스가 우려한 물질문제만 해결된 상태라면 그가 보지 못한 망외의 순기능이 있다. 마르크스는 과연 물질을 우선시 하지 않는 여타 정신세계, 이를테면 명상, 불교의 禪定이나 좌선 등에서는 에너지의 응축이자 주체를 주체답게 만드는 자기장임을 알고도 외면했을까?

 

자기를 전체로부터 이격시키는 자기소외는 자신을 침잠케 해 내면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힘을 건져 올리게 함은 물론, 타인과의 밀착도 헐겁게 해 타인에게도 자기성찰의 폭을 넓혀준다. 야생화들이 그렇듯이 인간 역시 지나치게 가까워도 안 좋고 지나치게 멀어도 안 좋다. 이른바 불가근불가원인데, 사실 그것도 그다지 좋은 건 아니다. 색과 맛을 증발시킨 무념무취로 살게 하기 때문이다. 좋기로는 여백 없는 완전 밀착이 아닐 정도의 지근거리가 좋다.

 

어느새 3월의 끝자락이다. 새해 벽두가 열린 게 엊그제 같았는데 온데간데없다는 느낌이다. 영국 속담처럼 “3월은 사자처럼 다가와 양처럼 지나간다”(March comes in like a lion and out like a lamb)면 좋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 잔인한 4월 그리고 여느 때 같으면 화려한 5월은 노루 가슴이 되게 하지만, 이번 봄은 코로나19쯔나미에 휘말려 의식불명으로 시작한 듯싶더니 공포, 불안, 분노, 소원, 안타까움이 교직된 악몽으로 치닫는다. 정말이지 “2020년의 봄은 낮잠처럼 다가와 악몽처럼 지나간다.”(The spring of 2020 comes in like a nap and out like a nightmare.)

 

악몽, 팬데믹(pandemic)?! 인류가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공전의 미답지가 펼쳐진단다. 인간과 자연을 서로 소외시키지 못한 결과다. 젠장!!! 아, 현호색이여! 아, 할미꽃이여!

 

2020. 3. 29. 17:5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