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종교가 없으면 살 수 없을까? 한국교회의 시급한 과제 : 이성력과 저항력의 회복

雲靜, 仰天 2020. 3. 16. 15:12

종교가 없으면 살 수 없을까? 한국교회의 시급한 과제 : 이성력과 저항력의 회복


인간은 종교가 없으면 살아 갈 수 없을까? 종교란 인간의 삶에 도움이 더 큰 것일까, 아니면 해악이 더 큰 것일까? 종교는 이성적으로 믿으면 안 되는가? 여기서 “종교”라고 하지만 그 범주는 이성을 배제한 채 의심 없이 무조건 믿을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유일신의 배타성이 사회문제의 근원적 원인이 되고 있는 개신교, 천주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이른바 “범기독교”만이다.
 

교리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하되 믿고 안 믿고는 각자에게 맡기는 불교는 이 논의에서 제외한다. 불교는 어느 정도 교리를 이해하게 될 때면, 혹은 근기에 따라 빠르면 처음부터, 늦으면 믿음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교조인 석가모니까지 부정하고, 그에게 빠지지 말고 진정한 자아확립과 독립적인 인격체를 이룰 것을 권하는 종교다. 그렇다고 불교가 사회적 문제 없는 종교라고 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논리비약이지만.

 

코로나19의 무차별 확산으로 전세계인들에게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요즘 상황은 과연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있는지 의심한 기존의 의구심을 더욱 심화시킨다. 정말 신이 존재하기나 할까? 사실, 325년 기독교가 공인된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s of Nicaea) 이전부터 기독교의 본향이랄 수 있는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신의 존재와 종교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하면서 논란이 많았었다.
 
 

기독교역사에서 몇 번의 질적, 위상의 전화가 일어난 주요 계기 가운데 하나였던 니케아 종교회의. 이 회의에서 예수가 신이라고 주장한 아타나시우스 신부와 예수는 선지자일 뿐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 등 두 파가 대립하면서 500명의 주교들이 참여한 가운데 6개월 간이나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결과는 정치권력에 이익이 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희대의 망나니 왕 콘스탄티누스가 313년에 기독교를 승인한 것에 이어 12년이 지난 이 종교회의에서 기독교 역사상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 근거,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소위 삼위일체설이 인정됨과 동시에 그 전까지 유대교에서 한 것처럼 한 사람의 선지자로 인식돼 오던 예수를 비로소 신으로 인정한 것이다.

 
특히 그런 사조는 서구 2500년의 철학과 정신을 지배하고 기독교에도 사상적 토대가 돼온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부정하기 위해 니체(F. W. Nietzsche)가 “신은 죽었다”(God is dead)고 선언한 19세기에 와선 꼭지점을 찍었다. 그런 전통은 1960년대 지구상에 반전사상과 히피를 유행시킨 영국 가수 존 레논(John Lennon)의 “상상해 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이라는 노랫말에도 나타났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전경이 펼쳐지는 곳에 걸려 있는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는 문구가 상징하듯이 21세기의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양사회에서 신에 저항하는 인물로는 최초의 전면적인 도전을 감행한 니체. 내게는 청년 시절 그의 관점이 좋아서 가까이 한 적이 있지만 어떤 인간이든 완벽하고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그는 여성의 존재를 지독히도 악의적으로 혐오한 생각을 공공연히 표출한 자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으니까! 여성은 신의 두 번째 실수였다.(Woman was god's second mistake)고! 그런데 그건 자신이 루 살로메라는 러시아 장군의 딸이자 명석한 두뇌에다 미모의 여성을 줗아해 쫓아 다녔지만 자기 친구 레라는 의사에게 선수를 빼았긴 뒤 심한 좌절감과 모멸감을 갖게 되면서 발전하게 된 혐오감이었다.
신은 인간이 만든 인식상의 관념이라고 한 존 레논. 나는 그의 말대로 신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도 동시에 반드시 인식상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고 믿지만 기독교도들에게는 그 이상, 아니 절대적인 존재로 기능해왔다. 암튼 존 레논의 반기독교, 아니 반종교적인 인식과 발언은 서양사회에서 한 켠에서 내려온 반기독교 사상이 냉전과 함께 반전 평화주의라는 시대상황과 결부되면서 발화하게 됐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무신론적 종교인 불교를 제외하고 유대교, 이슬람교, 카톨릭, 시크교, 조로아스터교 등 여타 세계의 주요 종교는 모두 창조주로서의 유일신, 절대신이 상정돼 있다. 그런데 교파, 종파 간의 갈등과 반목, 나아가 전쟁까지 치르게 된 것은 각 지역의 사정과 가치관에 따라서 인간들이 신을 제각기 다르게 인지해 오면서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신을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 신적 존재는 전지전능하다는 믿음을 얘기한다.

 

그런데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신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인류 역사에서 실존적 역사인물인 예수 이외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이 스스로 신이라고 하거나 혹은 예수라고 하거나 혹은 예수와 형제라고 하는 존재들이 적지 않았다. 19세기 중엽 중국에서 자신이 구세주라면서 종말과 내세를 내세워 태평천국을 세운 홍수전(洪秀全), 통일교 교조 문선명, 영생교 교주 조희성이 이에 속하며, 기독교 구원파의 유병언과 신천지교회의 이만희도 약간 닮은 부분이 있다. 하느님도 까불면 자기한테 죽는다고 큰 소리 친 전광훈은 하느님 위에 군림하는 듯하다.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켜 중국 전역의 절반 가까이 손에 놓은 바 있는 홍수전. 그 이전 명대의 여러 종교민란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종교(기독교)를 매개로 기존 국가권력을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그와 태평천국의 난에 대해선 별도의 긴 소개가 필요할 듯하다.

 

신을 빙자하거나 혹은 빙의해서 혹세무민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과 권세만 추구하는 이런 인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혼탁하고, 그 국가는 부정부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살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상황과 겹쳐 꿈과 희망이 사라지고 굉장히 불안정했으며, 많은 민란들이 일어났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교주가 외치는 종말, 말세관념과 구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신도들과 일반인들은 이성이 거세돼 완전히 작동이 마비된 비이성적 사회임을 말해준다. 아직도 한국사회는 드러난 합법적인 권력인 정치의 이면에서 신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는 종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일도양단의 결론을 내릴 입장이 아니다. 그럴 만큼 종교나 신학과 종교학에 정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분간” 나는 여타 이 분야에 괄목할 만한 세계적으로 뛰어난 연구업적을 낸 신학자이자 과학자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세계의 종교계와 과학자들 사이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면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간의 능력에 주목하라고 힘주어 강조한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1605년 영국 가톨릭교회가 계획한 제임스 1세 암살미수 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신은 당신이 거덜 날 때까지 기부하기를 원합니다”)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고대 석상을 폭파하는 탈레반도, 신성 모독자에 대한 공개처형도, 속살을 살짝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신의 부재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는 저명한 신학자 리처드 도킨스. 진리추구를 본향으로 하는 같은 학자(물론 종교학자는 아님)로서 그의 그러한 문제제기를 높이 평가한다.

 

지구적 차원의 사건들 가운데는 위 사건들 외에 내가 더 보태도 될 사건들도 적지 않다. 기독교의 동양 전파시대의 초기인 16세기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이 아프리카, 아시아인들에게 행한 수많은 만행은 거론하기조차 힘들 만큼 많다. 또한 14세기 이슬람교도들의 이베리아반도 및 유럽 침입, 16세기 인도 무굴제국의 종교전쟁, 16세기 일본 토쿠가와 막부시대 천주교도들의 탄압, 17세기 30년대 약 3만 7,000명의 천주교도들이 대부분 살육되고 천주교 세력이 절멸된 근세 일본사상 최대의 천주교 금압 사건인 이른바 ‘시마바라(島原)의 난’도 그 한 예다.

 

또한 神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중국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에 자존심을 건 한 판 싸움으로 많은 중국 내 천주교 신부들이 추방되고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기 시작해 살해당한 康熙년간의 이른바 “예의 논쟁”(禮義之爭, Rites Controversy, 즉 “전례문제”―중국 기독교사학계에서는 “禮儀問題”라고 칭함)이나,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 그리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살해 사건(중국사학계에선 이를 “敎案”이라고 부름)도 마찬 가지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던 다른 나라 일만이 아니다. 19세기 초 조선의 천주교도들을 박해한 신유사옥과 그 뒤의 기해사옥도 그런 사건이다. 현대에서도 사건의 규모나 잔인성과 끔찍함에선 위 사건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가 된 사건, 특히나 개인과 가정사의 테두리에 갖혀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묻혀버린 사건들은 일일이 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1994년 종교연구가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피살사건, 1999년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의 MBC 습격사건, 일부 목사 아닌 목사들의 가정주부, 청소년 및 미혼 여성에 대한 성유린, 성추행 사건, 근년에 발생한 기성 기독교계의 위기의식이 부른 전남대 여대생 납치사건들은 모두 빙산의 일각들이다.
 
 

한국의 종교는 배후에서 무엇이 신의 의미인지, 무엇이 신의 역할인지, 다원적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와 종교지도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광신적인 끄나풀을 앞세워서 세속권력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탁명환은 한국사회에 깊이, 그러나 일반인들이 피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종교의 독성과 해악을 감지한 잠수함 속의 토끼였었다.

 

한국사회에서 최근의 사건 중엔 단연 신천지교회와 그 교주 이만희가 행한 언행들도 동일한 범주에 있다. 어제부로 8,000명으로 넘어선 코로나19가 증폭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이만희의 신천지교회가 주요 원인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 코로나19 확진자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 대구 신천지 교회 확진자만 하루에 400~500명씩 쏟아졌으며, 그들을 대부분 찾아내자 대구 경북 지역의 신규 확진자가 눈에 띄게 줄고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투명하지 않는 폐쇄적이고 계급적인 교회운영 그리고 무슨 첩보요원들의 조직을 방불케 하는 극비리의 밀폐된 전도로 인해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신천지 대구교회가 코로나19의 확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든 게 정당하고 떳떳하다면 왜 자신이 신천지교회의 신도라는 사실을 애써 감출까? 그럼에도 이만희는 박근혜 전대통령의 관계를 과시라도 하듯이 그에게서 받은 손목시계를 차고 나와서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를 보면 그 조직에게서 반성을 기대하기란 연목구어라는 걸 느낀다.

 

착실하던 아들딸들이 알고 보니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미쳐 가정을 뛰쳐나간 경우, 교회에 미쳐 집을 나가 소식도 없고 생사도 알 수 없는 처자식들, 단란하고 금슬이 좋았던 부부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버리고 자기가 믿는 교주와 결혼을 함에 따라 파탄 나게 된 가정, 잘 다니던 직장도 갑자기 그만두고 부모 형제 몰래 교회에 미친 자식들이 넘쳐 나고 있다.

 

신구약을 통 털어 전체 성경 66권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대부분 하느님과 가족관계에 집약돼 있다고 봐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성경은 가정의 중요성을 언급한 구절이 많이 나와 있다.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한 가정이라면, 가정은 하느님의 나라, 즉 신국에 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시험을 받아야 하는 시험의 장이다.
 
이 장이 무너지면 기독교도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시험은 어디에서 진행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장이 존속되도록 하는 질서유지가 대단히 중요하지 않는가? 도덕, 윤리, 법과 상식과 제도가 인간세상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근간이라면 그러한 가치와 규범들을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그것이 싫다면 먼저 이 땅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종말과 구원을 들먹이면서 가정 보다 교회 일에 더 우선하라거나 아예 교회에 “올인”하듯 사역할 것을 부추기고 설교하는 교회의 목사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예수의 성령을 받았다고 큰 소리 치는 사이비 교주의 은혜를 받았다거나 구원받았다면서 자신의 보금자리인 가정, 직장, 학교를 버리고 심지어 자기 몸까지 내팽개치고 모든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이 다니는 교회 일에 ‘올 인’하는 이들도 있다.
 
한재일 목사는 이미 약 10년 전부터 한국사회는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삐꺽거리고, 기독교가 망해가고 있다는 경고음을 보냈다. “이미 한국에서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망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향해 ‘개독교’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우리사회도 서구에서 기독교가 원인이 돼 일어난 사건들과 동일한 구조 혹은 환경 속에 살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국민 대다수가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교인이 된다고 상상하니 갑자기 현기증이 난다. 로버트 퍼시거가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는 말이나 숀 오케이시가 “정치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종교는 그보다 열 배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는 말은 꼭 현하 한국사회의 현실에 적확하게 적용되는 금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 자생한 사이비 종파들은 비상식적, 비정상적인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이비종파들이 사회를 비상식적, 비정상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들은 “해 돋는 곳”을 동방의 한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하지를 않나, 성경 요한계시록에 구원 받을 사람의 수로 나와 있는 14만 4,000명을 자기 교회의 신도들만 구원받을 숫자라고 하질 않나, 미국의 “여호와증인”들은 자기 신도들의 구원 받을 숫자라고 한다. 구원 받을 사람이 이 숫자 밖에 되지 않는다면 최소 20억 이상이 되는 전 세계 수많은 기독교도들에겐 천국의 문이 너무나 좁다.
 
이렇듯 경쟁률이 치열한데,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구원자의 수를 한정한 이것을 절대적으로 믿으니 문제가 발생한다. 한편에선 말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도 구원 받을 수를 한정시켜 놓은 그런 편협한 신을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전체 기독교 신자 중에서 약 10% 밖에 되지 않지만, 근본주의 교파들의 성경해석과 신앙행태를 넘어서 다양한 종교가 함께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21세기에 걸맞게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열린 시각과 관용적 자세가 더욱 확대돼야 한다. 미국의 침례교파와, 남장로교파의 영향을 받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대표되는 한국의 개신교 주류교단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드러낸 목회자들은 도태돼야 한다.
 
반면, 구원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도 있다고 이해하고, 다원성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만 절대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배타적 관점을 배격하는 다원주의자들의 진보적 자세야말로 2000년이 넘는 기독교역사에서 기독교를 그나마 비교적 열린 포용적인 종교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현재 80% 이상 대부분의 기독교 세력이 속해있는 포용주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구원의 우선 대상이라고 정의하면서도, 타종교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보는, 어느 정도 열린 관점을 견지한다. 이 입장에 선 기독교도들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자로서 주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지키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만, 주님의 성령이 타 종교 안에서도 구원 사역을 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럼으로써 기독교와 타 종교의 간의 교리적 접합점을 찾아내고 타 종교인으로서 그 접합점에 있는 일련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자에게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정의한다.

 

근본주의 계열의 기독교인들이 문제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과학적, 역사적 이해, 즉 이성적 해석과 분석을 거부한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성서 자체는 오류가 없다는 성서의 무오류성이 떠나지 않고 있는데, 중세 가톨릭 사제계급에서 그랬듯이 구원은 기독교 울타리 밖에는 없다고 단정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한 수구적인 생각에 붙박여 사회나 국가가 아무리 변해도 그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해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엔 문제들을 해소하고 정신적 평안과 위안을 얻기 위해 다니는 교회가 오히려 개인과 가정과 사회 문제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종교가 없으면 살아 갈 수 없을까? 필자는 종교 없이도 너끈히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일개 개인이 혼자서만 바란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 게 종교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성적으로 종교를 믿을 순 없을까 하는 점이다. 중세를 지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천주교 내에서도 이성의 힘과 빛을 긍정하고 신앙에서 이성적인 사유를 허락해주기를 요청하게 된 계몽주의(enlightenment) 사조로 인해 신구교가 모두 공히 이성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돼 기독교의 발전을 가져다 준 역사적 사실을 자기 성찰적으로 되새겨야 한다.

 

혹시 환난과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신국에 가까이 다가설 확률이 크다고 생각하는 기독교도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사회적이고, 혼자만 천국에 가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행태임을 깨달아야 한다. 무엇보다 신도 개개인들이 깨어나야 한다. 기존 목사들이 독점해온 성서의 해석과 설교를 의심하라! 비상식적, 몰지성적이며, 반사회적인 언행을 일삼는 목회자들에게 저항하라!

 

2020. 3. 16. 15:0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