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과 김일성 : 대비되는 민족주의 의식의 진정성 혹은 실행의지
장개석과 김일성,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이다. 이념과 체제는 달랐지만 둘 다 동시대를 산 국가 최고 정치지도자였다는 점에서는 공산주의관(장개석은 1923년 9월 소련을 시찰한 방문여행에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뒤부터 공산주의자를 대하는 생각이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이나 군사적 리더십 등 비교가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막상 이들을 서로 비교하려면 그다지 의미 있는 비교의 잣대를 찾기란 쉽지 않다.
두 사람 사이엔 일치 되는 게 거의 없다. 나이도, 성격도, 인성도, 가문도, 교육의 정도도, 인생관과 국가관 및 세계관도, 활동무대도, 지도자로서의 리더십도 다 다르다. 굳이 비교하고자 한다면,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러시아측 사료와 중국측 사료에 나타나듯이 두 사람 모두 강렬하게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 의식이 대비가 된다. 이 글에서는 두 사람의 민족주의의식의 내함 및 성격을 논하기보다 그것의 진정성 혹은 의지의 실행 정도가 어떠했는지 비교되는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헌자료와 중국 문헌자료에 근거한 내용이다.
장개석은 모택동의 중공군에게 밀려 대만으로 후퇴해온 뒤 절치부심하면서 중국 대륙에 대한 군사적 반격, 즉 “반공대륙”을 여러 차례 시도해왔다. 물밑에선 밀사를 보내 중공지도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뜻밖에 기회가 오자 물밑 협상을 모두 중단하고 군사적 대응에 나섰다. 그 기회는 한반도에서 온 것이었다. 장개석은 1950년 6월 김일성이 침략한 한국전쟁의 발발을 대륙 탈환의 호기로 보고 당시 국민당군 중 최고 정예군이던 제52군단을 한반도에 보내 압록강 너머 중국동북지역으로 반격을 가하려고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그의 염원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로도 장개석은 대륙수복의 의지를 한시도 단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개석에게는 경제적인 면에서나 군사적인 면에서나 모두 역부족이었다. 장개석이 대만 퇴거 초기의 1950년대와 60년대에 반공대륙의 희망을 미국에 기대어 실현시키려고 한 배경이었다.
대만에 온 이래 새로 총통에 취임한 장개석은 워싱턴에 서한을 보내 반공대륙을 하고자 한다면서 중국국민당을 지원해주길 요청했다. 그의 시도는 여러번 좌절을 겪고도 단념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미국이 무기와 자금을 내어 국민당의 반공대륙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중공이 참전해 전쟁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응은 끝까지 미지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개석은 미국이 한국전쟁의 여파로 1954년 12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와 ‘중(화민국)미 공동방어조약’까지 체결했으면서도 예전 수준으로는 국민당을 도와 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상 당시 미국은 중국국민당을 문 앞의 개로 생각하고, 미국을 도와서 태평양의 문 앞 개가 되어주기를 원한다고 봤다. 이를 알게 된 장개석은 미국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장개석이 미국에게 실망하고 있을 때, 마침 중공과 소련 사이에 이념논쟁이 불붙었다. 공산진영의 두 대국에게 장차 자본주의 자유진영과의 세계전쟁이 발발할 것인지 아닌지 그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였다. 모택동은 “미 제국주의”와의 한판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반면,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세계전쟁은 언젠가는 피할 수 없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고 당분간은 미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세계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단정함으로써 세계 공산주의운동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마르크스의 예견에 의하면, 소련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고, 중공은 미소간의 정세변화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마르크스의 주장을 시간이 지나도 언제 어디서든 실현 가능한 절대적 진리라고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다. 그래서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자”라고 비아냥 거렸고,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자”, “사회제국주의”라고 비난했다.
중소 양당 간의 이념분쟁은 두 공산주의자들 간에 누가 공산주의의 본산이자 최고 지도자인가 하는 자존심과 서로에 대한 과거사의 악감정이 얽혀서 양국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급기야 두 나라는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일촉즉발의 험악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1969년에 들어와 소련은 중국북방의 중소국경지대에다 소련군 100만 명의 대군을 배치했다.
그 전에 이미 소련의 전쟁도발 의도를 파악한 모택동은 소련의 공격에 대항해 전쟁을 칠 준비에 착수한 상태였다. 모택동은 소련이 북방에서 중국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에 대비해 전군에 동굴을 깊게 파고 군량미를 널리 비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중공에서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른 이러한 대소 전쟁 준비를 암호명으로 “131지하 工程”이라고 불렀다.
소련에 대한 적의가 극에 달한 모택동은 내부적으로 대소 공격준비를 지시하는 한편, 1969년 2월 말 소련 측에다 앞으로 소련군이 우수리 강상의 珍寶島(소련명 Даманский, Damansky) 지역에 재침입을 하고, 그에 대해 경고를 해도 듣지 않을 경우 중국은 자위를 위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음을 통보했다. 또한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이른바 林彪副統帥의 제1호 명령을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 林彪의 명의로 공표했다. 북경의 중공 고급간부들에게도 모두 내지로 피하도록 했다.
한편, 대중공 군사공격 의도를 가진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중소관계가 최악으로 가기 약 1년 전쯤인 1968년 빅토르 루이스(Victor Louis)라고 불린 영국 런던 소재 석간신문의 기자를 대만으로 보냈다. 겉으로는 기자 신분이었지만 사실 그는 소련공산당 중앙국제부의 공작원으로서 소련의 특무요원이자 국가안전위원회, 즉 KGB요원이었다.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 들어간 빅토르 루이스는 즉각 장개석의 장자인 장경국을 찾아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중국대륙에 대한 반격(반공대륙)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당신들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닙니까? 만약 돈이 부족하다면 우리 소련이 돈을 드리겠습니다. 당신들은 무기가 부족한 게 아닌가요? 당신들이 무기 명세서를 제시하면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로 하는 무엇이든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중국 변강에 있는 우리 소련의 기지를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까? 당신이 제의만 한다면 우리의 그 기지를 모두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소련측에서 자금과 중소 국경지대의 소련 군사기지를 국민당에게 제공해 장개석의 “반공대륙” 꿈을 실현시키는데 도와 줄 수 있으니 받아들이는 게 어떠한가라는 제의였다.
장경국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소련과 중국국민당 쌍방은 대만에서 논의를 시작해 나중에는 유럽의 비엔나로까지 장소를 옮겨가면서 비밀회담을 계속했다. 처음에 장개석은 대단히 기뻐했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는데 “소련 친구들이 나를 도와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를 넘긴 1969년 장개석은 반공대륙을 도와주겠다는 소련 측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소련의 원조는 타당성이 없는 데다 다른 속셈이 있음을 간파한 장개석은 자신의 일기에 이에 관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소련이 우리 국민당을 원조하는 것은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며, 나는 吳三桂와 洪承疇의 교훈을 기억한다. 그들의 전철을 다시 밟아선 안 된다. 모두 吳三桂, 洪承疇를 알고 있을 것이다. 清兵이 관내로 들어오던 그 해 吳三桂, 洪承疇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말이다.”(『蔣介石日記』)
그래서 장개석은 자신이 吳三桂, 洪承疇가 돼선 안 되며, 소련인들을 중국 영토 안으로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吳三桂와 洪承疇는 명말 청초에 청군이 만주로부터 입관하려고 했을 때 그들과 내통하고 빗장을 열어준 명나라 군대의 장수였다.
시간이 지나 중소 간 일촉즉발의 초긴장의 상황이 됐어도 장개석은 또 한 번 자신이 소련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일기에 남겼다. “나는 결코 이 때 대륙에 대한 반격(반공대륙)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이 때 반공대륙을 하면 소련은 이 기회를 이용해 우리의 화북을 침략할 것이다.” (『蔣介石日記』)
한시도 잊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반공대륙”을 오매불망하던 장개석은 거대한 중국대륙을 뼈아프게 내준 불구대천의 적 중공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중화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소련이 중국에 대한 영토욕심이 과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결과 소련인들에게는 중국으로 들어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정치적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중화민족 전체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장개석이 소련의 제의를 받아들여 광동성, 복건성, 산동성 연안으로 다시 한 번 일대 반격을 가했다면 소련군도 분명 이를 기회로 중국 북방의 국경지대에서 중국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했을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면 그 뒤 국공 간의 판세는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1969년 당시 브레즈네프의 대중국 개전의지와 모택동의 대소련 일전불사 의지 그리고 그 준비상황을 봤을 때 양국간의 전쟁이 전면전이 됐을지 아니면 국지전으로 끝났을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제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세계인들에게 전쟁의 불안으로 몰아넣었을 것임은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장개석은 경솔하게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 중화민족의 전체 이익을 개인의 정치적 야망 보다 더 우선시 한 통 큰 민족주의자로 볼 수 있다.
김일성도 이 보다 조금 이른 시기 외국군을 북한 땅으로 불러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장개석과 달랐다. 그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개시되고 약 3개월이 경과된 1950년 9월 20~9월 30일 사이 미국의 북진이 결정되고 먼저 한국군 제3사단이 동해안에서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함과 동시에 미군도 곧 북진을 개시하기 직전 상황이었다. 박헌영과 함께 남침전쟁을 주도한 김일성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직면한 시점이었다.
맥아더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완전히 탈환되자 크게 당황한 김일성은 임진강 너머 38도선 이북 일대에 몇 겹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취하는 한편, 즉각 북한노동당 주최로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했다. 9월 21일 개최된 이 회의에 참석한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 박일우 등등의 조선노동당 수뇌부 요인들은 북경의 모택동에게 중공군 파병을 요청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긴급히 토의했다. 이 긴급회의는 미리 소련군의 파병은 절대 기대하지 말라고 한 스탈린에게는 애초부터 파병 지원을 요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군이 개입할 경우 “모택동 동지”에게 중공군의 파병을 요청해보라고 한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 회의 석상에서 먼저 김일성은 초기 모택동의 지시를 받들어 한국전쟁에 군사개입 할 준비를 주도한 주은래와 회담을 가진 뒤 김일성에게 보낸 북경 주재 북한 대사 이주연의 보고서를 읽고 나서 정치위원회 위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박헌영, 김두봉, 박일우가 이구동성으로 “상황은 심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미군과 대항하기 힘들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에 대해 김일성은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까? 무기는 우리가 요청하는 만큼 소련에서 주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할까요?” 이어서 김일성은 “이것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나 않을지”라고 하면서 중국인들을 전쟁에 끌어들인 후 초래할 수 있는 결과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김일성은 모택동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중국은 국제협약과 관계가 없고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도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당분간 중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류하고 “스탈린 동지”에게 서한을 보내서 중국군의 파병 요청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이는 소련이 마치 군사고문단과 무기 원조가 불충분하다는 것으로 느껴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계속해서 김일성은 “만약 시간이 있다면, 새로운 부대의 창설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김일성의 제안에 따라 박헌영 등 북한수뇌부는 우선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스탈린에게 보낼 서한을 작성해 정치국에서 검토를 마쳤다. 김일성의 중국군 파병요청 반대는 단호했다. 북한지도부가 정치국 회의를 열어 중국에 파병을 요청할 것인지를 논의한 이날, 스탈린의 개인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자하로프(Matvei V. Zakharove) 장군도 김일성에게 중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노동당 내 여타 박헌영, 김두봉 같은 지도적 인물들은 중국 측에 지원을 요청하자는 제안에 즉각 찬성했지만, 김일성은 중국 측에 파병을 요청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며칠 간 고심했다.
더군다나 모택동을 위시한 중국지도부 측이 김일성의 남침전쟁 초기 북한에 군대를 파병할 의향을 표시한 바 있었음에도 김일성은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기 직전인 9월 하순까지 중국의 지원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28일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북한 주재 소련대사 쉬티코프(Shtikov)를 만나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통일할 것이며, 15개 사단을 창설해 전투를 계속할 것이라는 자신의 이전 생각”을 말하면서 자유진영군이 38도선을 넘어 공격해올 경우 북한은 반격을 가할 군부대를 창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스탈린과 상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러다가 결국 백악관이 미군의 북진을 결정한 뒤인 9월 말에 가서야 김일성은 비로소 소련과 중국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9월 28일 긴급히 소집된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에서 소련과 중국에 군대파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더 지체했다가는 미군의 북진공격에 북한정권이 괴멸될 절박한 상황에서 더 이상 자기 혼자만 중국군의 파병지원 요청을 끝까지 반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중국수뇌부의 파병의사를 외면하고 중국에 파병 요청을 반대한 이유를 분석해보면, 당시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저의와 심리상태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성이 중국의 군사개입을 반대해온 것은 중국 보다 강국이자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스탈린을 추종하겠다는 이념적, 군사적, 외교적 이유 외에 대략 서로 맞물려 있는 두 가지 현실적 동기 및 배경이 작용된 듯하다.
첫째, 긍정적으로 평가해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김일성이 임진왜란 시 한반도로 들어온 명나라군대 때문에 조선이 갖가지 곤란을 겪었던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설령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중공군을 철수시키기가 쉽지 않고, 그로 인한 정치적, 군사적 종속과 그에 따른 폐해를 우려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중공군을 불러들이면 위기를 극복하고 승전한다고 해도 한반도적화에 대한 자신의 공이 삭감될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패했을 경우는 중국 측이나 박헌영 등의 남로당파와 박일우를 위시한 연안파 등의 반김일성세력으로부터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할 가능성을 직감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상문, 「‘중조연합사령부’ 再論 : 창설과정과 배경」 『軍史』, 제95호(2015년 6월) ; 서상문, 「미니전사(17) : 중공군 참전」 『朝鮮日報』, 2010년 5월 17일〕
둘째, 중공군의 군사개입은 친중적인 ‘연안파’들이 득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그것은 바로 권력장악 문제와 직결되는 바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의 당내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 수 있다. 북한엘리트 집단 내 연안파의 세력 판도를 잘 알고 있었던 김일성은 이 점을 우려했을 수 있다. 더군다나 연안파 내지 반김일성파는 이미 한 차례 중국세력을 끌어 들여 김일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바 있기 때문에 김일성에겐 단순한 기우가 아닐 수 있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조선노동당 내 반김일성파들이 자파 인물들을 북경의 중국지도부에게 보내 중공군의 파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북한인민군의 패퇴에 대한 책임을 지워 김일성을 제거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지원해주기를 요청한 바 있다. 그들은 김일성이 북한인민군 병력을 너무 늦게 인천지역에 투입했기 때문에 서울방어에 실패했다며 김일성의 책임을 거론한 바 있다.
김일성이 초기 중공군의 북한 진입을 반대한 것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나이도 12세나 많았고, 공산주의 투쟁경험에서나 공산주의이론 면에서나 모두 김일성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훨씬 풍부한 경험을 가진 박헌영 보다 김일성이 더 민족의식이 있어 보인다. 그 점에서는 김일성이 박헌영과 여타 지도자급 인물들 보다 한 수 위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민족의식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모순적인 허구였다. 결국엔 바로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그가 중국의 대군을 한반도로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끝까지 대국적 견지에서 소련의 지원을 거절한 장개석과 크게 비교가 된다.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혹은 신변의 안전을 우선시 하다가 중공군을 불러들이는 것을 반대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결국 자신의 권력 혹은 신변의 안전을 우선시해서 중공군의 한반도 진출을 허용함으로써 당시 북진을 개시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압록강어구까지 진격해놓고도 극비리에 들어와 매복하고 있던 최초 25만여 명의 중공군 기습공격(제1~2차 전역)에 부딪쳐 종국적으로 한민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의 하나로, 만약 김일성이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 권력문제를 더 우선시한 것을 정당하다고 평가한다면, 나중에 그가 자유진영군의 북진에 쫓겨 패퇴하게 됐을 때 중국이나 소련으로 망명이 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중공군을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도 그 자신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소리다.
백범 김구 선생의 말처럼, 국가지도자란 자기 권력욕 때문에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를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김일성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주의의 진정성은 철저하지 못했으며, 장개석과 비교해볼 때 소아적, 개인주의적 민족주의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소아적인 인식이 그 뒤 수십 년간의 김일성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북한이 3대 세습 타파와 함께 대외개방의 빗장을 쉽게 열어 제치지 못하는 역사의 유산으로 내려온 게 아닐까?
2019. 7. 7. 22:41
臺北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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