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少奇의 여섯 차례 결혼
劉少奇(1898~1969)는 모택동에 버금가는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제5국가부주석을 지냈었고, 중공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1954~59년까지)을 지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직에 9년간(1959~1968)이나 있었던 인물이다.
우리에게 유소기는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이 1950년대 중반부터 모택동의 노선에 문제를 제기하고 등소평과 함께 소위 ‘자본주의 노선’을 걸은 走資派로서 문혁 중에 모택동의 의중을 받든 4인방 세력과 홍위병들에게 핍박을 받아 사망한 공산주의 정치가로만 알려져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주된 이미지다. 중공의 지도자급 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여성편력이 심했는데 유소기도 결혼을 여섯 번이나 했다. 총 6명의 여자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으니 그 역시 대다수 중공 조기의 고위 지도자들처럼 혼인관계가 대단히 복잡했다. 그러나 다른 지도자들이 즐기고 농락하기 위해 여성을 만난 것과 달리 유소기가 이처럼 결혼을 여러 번 한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을까? 공산혁명 과정에서나 그 후 건국에서나 그는 상당히 절제된 언행을 보여줬다. 또 모진 박해를 받아서 그런지 여타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여자에 얽힌 추문이나 스캔들도 들리지 않았다.
유소기가 1920~40년대 공산주의혁명운동에서 모택동에 필적하는 리더로서 국민당이 지배한 白區에서 지하공작을 주도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단순하지 않은 유소기의 여자관계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받은 정치적 박해만큼이나 혼인문제에서도 뼈아픈 우여곡절을 겪었다.
중국혁명 시기 중공의 지도적 인물들. 뒷줄 왼쪽부터 陳雲, 博古, 彭德懷, 劉少奇, 周恩來, 張聞天이고, 앞줄 왼쪽부터 康生, 毛澤東, 王稼祥, 朱德, 項英, 王明이다. 이들은 모두 1938년 중공 제6계 제6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주석단의 일원이다. 유소기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1898년 11월 24일 부친 劉壽生과 魯씨 성을 가진 모친 사이에서 출생한 유소기는 이 부부의 4남 2녀 중 막내였다. 유소기의 첫 번째 처는 청소년 시절 고향 호남성 寧鄕 花明樓鄕 炭子冲에서 그의 부모가 이웃 마을의 한 농가에서 골라준 周씨 성을 가진 여자였지만 사실상 결혼식을 올린 뒤 만 하루도 되지 않아 파경을 맞았다. 유소기가 호남성 성도 長沙의 陸軍講武學堂에 다니던 18세 때였다. 여기에는 전근대 사회의 구습, 예와 신시대의 새로운 사조간의 갈등이 얽혀 있었다. 그 곡절은 이러했다.
1917년 10월 북평(북경의 전신) 군벌정부의 수장 段祺瑞가 보낸 수하의 譚延闓군과 북벌을 하려는 손중산군과 호남성의 장사에서 전투가 벌어져 유소기가 다니던 육군강무학당이 파괴돼 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이 학교에서 문화과정을 마치고 계속된 군사교육과정을 다 마칠 수 없게 된 유소기에게 타격이 컸다. 그러면서도 유소기는 여러 번이나 호남성 군벌들에 대해 저항한 장사지역의 민주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잡히면 참수당할 수 있어 목숨을 내놓고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 요즘의 우리말로 하면 "운동권학생"이었다. 그의 모친, 형과 누나들이 안심할 수가 없었다. 장사에서 혹여 나쁜 소식이 들려올까봐 이제나 저제나 늘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나온 게 유소기를 결혼시켜 가장으로 만들어 집에 붙들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유소기의 모친은 자신의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를 들어 아들을 집으로 돌아오도록 속였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연락을 받고 고향집에 도착한 유소기는 부모의 강권에 따라 하는 수 없이 혼례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전통시대에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교체기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모택동이 그랬던 것처럼 신부는 자신의 의사를 묻지 않고 부모가 골라 준 촌구석의 시골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던 유소기는 이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하지만 유소기는 얼떨결에 식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혼례식이 끝난 뒤 맞이한 첫날밤의 신혼방(洞房)에서 유소기는 신부와 밤을 새워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자신은 가야 할 길이 있어 가정생활을 할 수 없으니 신부에게 이 결혼을 단념하고 귀가하라는 설득이었다. 유소기가 가려고 하는 길은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유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평생 동안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생각한 유소기였으니 젊은 혈기에 찬 10대 후반의 그가 자유를 얘기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군가? 호남성의 시골 ‘깡촌’에서 나고 자라 교육을 받지 못한 전형적인 시골 여인이 아닌가? 그녀가 알아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도 유소기는 혼자서 자신의 신념과 정의감에 충만한 의지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유소기가 늘어놓는 자유의 의미가 뭔지는 몰라도 周씨 처자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유소기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유소기가 장래 아들이 생기면 그녀에게 하나 보내주면 키워줄테니 노후를 돌보도록 하라고 간청했다. 즉 유소기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도 좋고, 자신은 정실이 아니라도 좋으니 처로 남겠다는 소리였다. 유소기는 전통적인 예교에 길들여져 있는 이 여성을 깊이 동정했다.
유소기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무정하다고 할 정도로 매몰차게 다음날 새벽 일찍 집을 떠나 다시 장사로 가버렸다. 인물이 수려하다든가, 학식이 있다든가 이성적으로 조금이라도 끌리는 면이 있었다면 아마도 미련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유소기가 단호하게 떠난 것을 보면 그 여성에게는 마음에 든 점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 유소기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 혼인 관계를 계속 할 수 없다고 알렸으며, 사촌 형을 통해 주씨 처자에게 혼인 관계를 단절 한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개가해서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유소기는 나중에 1923년 두 번째로 何寶珍과 결혼한 뒤 맏아들 劉允斌이 태어나자 하보진을 설득해서 아이를 周씨에게 보내 기르도록 했다. 그리고 유소기는 자기 이름으로 돼 있던 30무(畝)의 땅을 그녀에게 줬다.
周씨는 일방적으로 劉少奇에게 이별 당했지만, 그 뒤 나머지 여생은 혼자 살았다. 유소기는 원하지 않았는데도 주씨가 찰나 같은 하룻밤이었지만 한 때의 지아비를 위해 여생을 과부로 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30년 유소기가 태어난 湖南 寧鄉에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그 사이 유소기는 바깥에서 공부하면서 혁명에 종사하느라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뒤 유소기가 새로 아내로 맞아들인 이는 총 다섯 명이나 됐다. 이 때문에 그는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유소기는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시 광란의 홍위병들에게 수난을 당했을 때 이 다섯 차례의 혼인은 모두 정상적인 혼인이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자신은 문란한 혼외성관계를 가진 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중공 중앙당사연구실에서 펴낸 『劉少奇年譜』에 버젓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유소기의 말이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해명했음에도 사람들은 중공 延安시대의 혼외 연애를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즉 중공 지도층의 혼외관계는 한 시기 자유연애의 바람이 불었던 연안 시절 모택동이 네 번째로 맞이한 처 강청과의 관계에서 시작됐는데 유소기도 도매금으로 그런 부류가 아니냐는 것이다.
애정으로가 아니라 조건으로 만난 부부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거나 사라지면 쉽게 헤어지지만, 정신적으로나 이념으로 만난 부부는 여간해서 관계가 흔들리지 않는다. 劉少奇가 만난 두 번째 처가 그런 경우였다. 그의 두 번째 배우자는 何寶珍(다른 이름은 保貞, 葆珍)이었는데, 유소기와 湖南 동향이었다. 누가 봐도 何寶珍은 용모가 수려하고 단정한데다 생기 있는 여자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유소기의 두 번째 배우자 하보진. 사진으로만 봐도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이 큰 미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보진이 32세로 요절하자 유소기는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보진은 현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여성공산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여자들 가운데 공산주의에 심취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운동에 뛰어든 이는 중국 전국적으로는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유소기가 중공의 초대 당서기 陳獨秀의 지시를 받고 호남성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1922년 공산주의에 경도돼 신념화 하고 있던 스물 네 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 유소기와 하보진이 처음 봤을 때 서로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탄광지로 유명한 歡慶安源에서 벌인 대규모 노동자파업이 승리하던 시절, 이듬해 1923년 4월 중순, 두 청년 혁명가는 백년가약을 맺었다. 가정을 가진 뒤에도 하보진은 유소기를 따라 바삐 동분서주하는 가운데서도 劉允斌, 劉愛琴, 劉允若(아명은 毛毛) 등 2남 1녀의 자녀를 낳아 길렀다.
더 큰 불행이 유소기와 하보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3년 3월, 유소기가 장정 중에 있을 때 하보진이 상해에 남아 체포된 중화해운노동자회(中華海運工會)의 당서기 廖承志를 구하려다 국민당 특무요원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체포된 그녀는 남경의 老虎감옥으로 이송돼 15년형을 언도 받고 형을 살던 중 배신자의 밀고로 그녀가 유소기의 부인이라는 것이 탄로 나자 1934년 가을 감옥에서 사망했다. 32세였다. 하보진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유소기는 침통한 어조로 이렇게 애도했다. “영웅 견결(堅決), 여당원의 걸출한 자!” 훗날 유소기는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아이들에게도 "어머니의 희생을 결코 잊지 말라"고 하면서 모친의 정신을 배우라고 가르쳤다.
劉少奇와 하보진 사이에 태어난 3남매는 모두 부모가 국민당 치하의 위험한 적지에서 공산주의 지하공작을 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부모 곁이 아닌 타지에서 어린 시절을 극히 불우하고 비참하게 보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남 劉允斌은 첫 번째 부인 주씨에게 보내져 고향에서 자랐다. 둘째 딸 愛琴은 유소기가 1927년 장개석의 4.12정변으로 시작된 국민당의 대중공 토벌 시 중공과 국민당 좌파들의 근거지였던 무한을 떠나면서 漢口의 한 노동자에게 맡겨졌다가 다시 당의 지원금이 중단돼 7~8세의 어린 나이에 어느 집의 며느리로 팔려갔다가 노비처럼 살았다.
1932년 겨울, 유소기가 상해를 빠져나가면서 엄마에게 맡겨진 막내 允若(毛毛)은 아버지를 알까 말까한 겨우 1살 남짓한 아기였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 하보진은 국민당 특무요원들의 정보망에 걸려 탈출이 늦었다는 것을 알고 세 살 박이의 劉允若을 이웃에게 맡겼다. 允若은 하보진이 감옥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웃에 의해 다시 빈농 가정의 양자로 입양됐다.
10여년 간 소식이 없던 劉愛琴은 11세가 되던 1938년 4월에 중공이 보낸 사람들에게 발견돼 연안의 유소기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얼마 후 아들 劉允斌도 유소기의 형 劉云庭에게 찾아져 유소기에게 보내졌다. 윤빈은 소학교에 다녔지만 애금은 연안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이 두 아이는 다른 중공 고위 간부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보내져 그곳에서 공부하게 됐는데, 애금은 모스크바에서 국제아동원에 입학했다가 나중에 통신기술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8월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1930년대는 스탈린의 배려와 지원으로 중공 지도부에서 인재교육이나 간부들의 병 치료를 위해 중공 당원들을 선발해 소련으로 많이 보내던 시절이었다. 막내 允若은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다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46년 중공 지하당 조직에 의해 蘇北의 한 농촌에서 발견됐다.
중국에서 하보진의 경력, 불처럼 선명하게 순수했던 성격, 공산주의혁명에 대한 열정과 대담성 등은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중공 지도자의 부인들 중에 또 다른 비극적인 생을 마친 이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보진의 운명은 모택동의 처 楊開慧와 많이 닮았다. 유소기가 그녀에 대해 보여준 감정도 모택동이 양개혜에게 대한 것과 유사하다. 중국수립 후, 유소기는 처음으로 부인 王光美를 데리고 하보진이 죽은 南京의 雨花台를 찾아가 혁명적 반려자의 죽음을 진정으로 깊이 애도했다.
유소기의 세 번째 처는 何寶珍이 사망한 후 약 1년이 되던 1935년 10월에 맞이하게 된 22세의 중공 중앙 정치보위국 기밀요원(機要員) 謝飛였다. 37세의 유소기 보다 15살 아래였다. 유소기와 謝飛는 어떻게 부부의 인연이 됐을까?
유소기의 세 번째 배우자 謝飛. 그녀는 유소기와 헤어진 후 2013년 101세로 사망할 때까지 혼자 살았다.
謝飛는 1913년 광동성 海南의 文昌현 어촌의 노무자 딸로 태어났으니 장개석의 부인 宋美齡과 동향이었다. 원래 이름은 琼香이었고, 謝明月이라고도 불렸다. 謝飛는 12살이 되던 해 海南 제6사범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중공의 조직활동에 참여했다가 1927년 14세 때 중공에 입당했다. 그녀는 부모를 따라 이주해가서 살던 싱가포르의 중공 남양임시공작위원회에서 지하공작을 했다. 사비는 유소기에 대해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즉 이 조직의 선전부장 徐大紅이 그녀에게 중국농민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는 모택동이고, 노동자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는 李立三과 유소기라고 얘기해준 것이다.
21세의 나이였을 때였던 1934년 10월 謝飛는 중공 중앙홍군의 장정에 따라나섰다. 험난한 장정 도중에 그녀는 유소기가 회의에서 발언한 것을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중년의 홀아비에게 특별한 감정도 없었고, 깊은 인상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홍군 행렬이 와요보(瓦窯堡)에 도착한 이후로 사비가 담당한 工農檢査部가 유소기의 노동자회 일과 관련이 많다 보니 두 사람은 업무일로 자연스레 만남이 잦았다. 당연이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일천한 사비는 경험 많은 연장자이자 상관인 유소기에게 많은 것을 묻게 되고, 경우에 따라 의견이 맞지 않아 논쟁도 했다. 1932년 2월 소련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謝飛는 당시 중공 福州, 厦門시 위원회 비서처의 기요 업무를 거쳐 1934년 5월에는 江西성 瑞金의 중공 중앙소비에트구로 전근해 와서 국가 정치보위국의 機要비서를 맡고 있었다.
와요보회의 후 중공 중앙은 사비를 화북에 보내 유소기를 보좌하게 해서 중공 북방국의 지도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중공 중앙북방국은 사무실이 天津의 프랑스조계 내 惠興德成衣鋪라는 건물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부인 하보진이 감옥에서 옥사한 이후 혼자 지내던 유소기는 시원시원하게 답하고 말하는 이 여성 전사에 호감을 가지게 됐다. 장정 후에도 유소기는 중공의 노동운동이자 지하공작의 하나로 중화전국총공회 서북집행국 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사비는 일이 비슷한 중공의 노동자농민(工農)檢察部에서 일했다.
두 사람이 사귀는데 측면 지원을 하면서 관계를 맺는데 역할을 해준 것은 주은래의 처 鄧潁超였다. 결국 결혼하기로 한 유소기와 사비는 등영초의 주관하에 약간의 술과 땅콩 등 음식이 준비 된 간단한 혼례식의 주인공이 됐다. 주례는 등영초가 섰다. 주은래 부부는 물론이고 모택동, 李維漢 등 10여 명의 중공 중앙 지도자들이 와서 두 사람의 화촉을 축하해줬다. 두 사람이 결혼한 뒤에 그 때까지 불리던 琼香이라는 이름을 사비로 개명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습관적으로 그녀를 阿香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사람 이름 앞에 阿를 붙여 부르는 것은 친밀하고 친숙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魯迅의 대표작 중의 주인공 阿Q처럼 말이다. 사비는 모택동의 세 번째 처 하자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두 여인은 큰물에서 놀아서 그랬는지 서로 거의 닮듯이 일을 잘 했고, 성격도 시원시원했으며 직선적(直性子)이었다.
사비는 자주 유소기를 따라 공장들을 시찰하기도 했다. 그런데 축하 속에 맺어진 두 사람의 혼인이었지만 사는 것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국민당 통치 지역인 백구에서의 지하공작은 위험했다. 수시로 생명의 위협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유소기는 “周 교수”로, 사비는 “周太太”로 알려졌다. 太太는 중국어에서 부인을 뜻한다. 유소기는 北平, 天津, 山西, 山東, 河北, 熱河, 察哈爾 등 黄河 이북의 각 성시의 당무를 관할했는데, 이 시기 사비는 가정 생활면에서도, 업무 면에서도 유소기를 많이 보좌했다.
사비는 결혼 2년차에 중공 北方局의 『江南大衆報』의 편집장(總編輯) 직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가 얼마 후 다시 河南, 安徽, 江蘇, 山東 등지로 전근됐다. 이처럼 각지로 떠돌아다니다 보니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같이 지내는 날이 적으니 아이도 낳지 못했다. 친구든, 부부든, 친척이든 모름지기 자주 봐야 정이 드는 법이다. 1940년 가을, 사비는 유소기의 부탁을 받고 양자강을 건너 皖南지역 주둔군에 도착해 중공 군사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項英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그런데 원위치로 돌아가려는 사비는 만주군이 교통요로를 봉쇄하고 통제했기 때문에 양자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여기서 유소기와 연락이 끊어지게 됐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제각기 전쟁통에, 혹은 혁명임무를 수행하는 긴박한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고 소식이 없는 아내를 기다린다는 것은 죽은 고목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자연스레 그나마 있던 애정이 묽어지고 더 이상 부부간의 애틋한 정이 쌓일 리 없었다. 결국 만난 지 6년 만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다.
1942년 말, 사비 등 몇몇 우수한 간부들이 浙東지방으로 파견됐는데, 사비는 중공 余上현 위원회 서기와 浙東縱隊 余上特務 대대 정치위원을 맡았다. 사비는 汪精衛 괴뢰정부군과의 작전 중 과단성 있는 지휘를 했으며, 용감했고 지략도 발휘했다. 그 중 어떤 전투에서는 적군 100여명을 섬멸하고 대대장 등을 포함한 30여명을 포로로 잡고 각종 무기 등을 노획한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그녀는 적에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謝 연대장”으로 소문이 났다. 특무대대도 원래 200명에서 600여명으로 늘어나 국민당 신사군 절동종대(新四軍 浙東縱隊) 중 가장 실력 있는 부대가 됐다.
그 뒤 사비는 路東特委 선전부장 겸 江南社 부사장, 『大衆報』의 책임자 자리에 앉았다. 사비는 江南社의 동지들을 데리고 업무상 강과 호수의 지류 지대를 오갔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조사연구에 종사했고, 직접 시사 관련 논평 글도 썼으며, 중공 중앙의 대일항전 방침을 선전하고 항일전과를 보도하기도 했다. 사비가 관여한 江南社에서 간행한 『大衆報』와 『江南』 순간지는 蘇南 지구의 항일운동에 나름대로 도움이 됐다.
사비도 유소기의 첫째 처 주씨처럼 유소기와 이별한 뒤 평생을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중공이 국가권력을 잡은 뒤 사비는 우여곡절 끝에 1950년 1월 북경의 人民大學에서 專修科 부주임, 주임으로 안배됐다. 그 뒤 그녀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53년 9월, 이 대학의 법률기초이론과 헌법학 전공 석사반 연구생 시험에 합격했다. 불혹의 나이가 넘었을 때였다. 그녀는 30여 과목을 힘겹게 수강해서 3년여 만에 인민대학을 졸업하고 1956년 12월, 중공 中央政法간부학교의 부교장(부총장) 직에 올랐다.
사비에게 인생 최대의 수난의 시기가 다가왔다. 문혁기간 중 사비는 과거 유소기의 처였다는 사실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즉 남편 모택동의 정치노선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는 이유로 유소기에게 극도의 반감을 품은 江青이 사비를 반당분자로 낙인을 찍는 바람에 체포돼 옥살이를 한 것이다. 사비는 문혁 전안조(專案組)로부터 유소기가 변절했다고 말하라고 압력을 받았으나 끝끝내 그들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6년간이나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6’은 그녀에게 좋지 않은 숫자였다. 과거 劉少奇와 함께 부부로 지낸 시간이 6년이었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뒤 과거의 이 사실 때문에 옥살이를 한 기간도 6년이었으니 말이다.
1973년 7월, 사비는 중공 중앙의 승인으로 석방됐다가 나중에 중앙인민公安學院 부원장, 중국 인민公安대학 고문 등의 직을 맡았다. 퇴임 전 그녀는 중공 전국정치협상위원회 위원, 公安部 자문위원과 北京의 法學學會 회장을 역임한 뒤 2013년 2월 14일 숙환으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향년 101세였다.
劉少奇의 네 번째 처는 王前이라는 여자였다. 건축노동자 가정과 판매원 가정의 배경을 가진 이 혼인은 유소기에게 기구하고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상처를 남기고 비극으로 끝났다. 王前은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돼 1937년 중공군이 국민당으로 개편된 신사군의 간호사 출신이었다. 1941년 3월 30일, 그녀가 劉少奇와 혼인을 했을 때는 꽃다운 나이 16세 때였다. 그런데 그녀는 방탕한 여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소기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 애매모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알게 된 劉少奇는 그녀와의 부부관계를 지속하기가 어려워 결국 1946년 길지 않은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王前과 劉少奇 사이에는 1남 1녀가 있었다. 남자 아이는 濤濤였고, 여자 아이는 丁丁(允眞)이었다.
1945년 중공 본거지 延安에서의 유소기. 그는 여타의 중공 지도자들과 다른 품성을 보여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정말 유소기를 곤경에 빠뜨린 시련은 이혼 뒤 20년 가까이 지난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때에 발생했다. 한 때나마 배우자였던 왕전이 성년이 된 그 딸과 작당을 해서 조악한 대자보로 보복을 당한 것이다. 王前은 유소기와 이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혁 중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聶元梓의 오빠 聶直과 결혼했다. 그런데 왕전과 유소기가 혼인한 사실은 유소기를 눈엣가시처럼 봐오던 江青에게 악용된 것이다. 강청과 왕전은 각기 다른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었다.
유소기를 엄청난 곤경에 빠뜨린 그의 네번째 처 王前. 유소기와 왕전이 함께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는 장면.
문혁 기간 중, 유소기를 비판하는 대자보 중에 王前이 언급됐다. 즉 유소기가 그녀와 결혼했을 때 43세인 것을 나이를 속여 32세라고 했다고 까발렸다. 王前은 자기는 1945년에 가서야 劉少奇가 자기보다 열 몇 살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하면서 “劉少奇는 비겁하기 이를 데 없다”(卑鄙到了極點)고 비난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劉少奇에 대한 비판의 소리로 오르내리던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유소기는 작은 손해를 보고 큰 이득을 얻는 자)라는 말도 王前이 만들어 낸 것이다. 실제는 어떠했을까?
문제의 그 대자보가 붙여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왕전은 재차 음모를 꾸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문혁의 비극이 유소기의 딸과 그의 생모에게 다가갔다. 모녀는 유소기가의 친지들 사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와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유소기는 王前과의 사이에 난 두 남매를 오랫동안 엄마에게 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王前은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劉少奇 몰래 아들딸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사전에 劉少奇에게 가로채졌고, 이로 인해 王前은 劉少奇로부터 엄청난 비난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이 더욱 깊어진 것은 이 일이 계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劉濤와 劉允眞 남매가 처음으로 직접 생모인 왕전을 찾아가는 일이 일어났다. 문혁이 개시돼 전국 각지에서 홍위병들이 날뛰던 1967년 신년 정월 초하루였다. 유소기가 어찌 했기에 그렇게 됐을까? 두 사람은 생모 왕전이 얘기해준 것을 듣고 부친인 유소기를 비판하고 흠을 들춰내는 大字報를 썼다. 그것은 劉少奇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불러일으킬 의도로 군중들의 자극을 극대화하려는 선동적인 대자보였다. 지금도 중국대륙에서는 대략 60세 중반 이상의 장년들은 대부분 문혁 중 이들이 유소기의 ‘죄상’을 까발린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까발린 ‘죄상’들 중에는 유소기가 중공의 지하공작 시에 이 조직의 운영경비로 금제 구두주걱을 만들었다는 것도 있었다. 이는 유소기의 의도를 고의로 곡해한 것이었다. 당시 중공 지하당을 이끌던 유소기가 조직의 경비를 보존과 이전을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劉濤와 劉允眞이 내건 대자보 중에는 또 劉少奇가 이 물건을 자기 것인양 사유화하려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 대자보를 보고 분노한 홍위병들이 유소기에게 중공 당에 이 금제 구두주걱을 반납하라고 압박했다.
劉少奇는 王前과 이혼하기 전후 제법 긴 기간 동안 자녀를 데리고 살았다. 주변 사람들 눈에도 자주 식사 때나 유소기가 큰 그릇을 들고 다니면서 음식을 얻어 자녀들에게 직접 밥을 떠먹여 주던 장면이 보였다. 이렇게 자란 딸이 자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유소기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식에게서 없던 죄행이 들춰지고 그로 인해 보복을 당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유소기는 전처에게 교사를 받은 딸에게 자신이 내동댕이쳐지자 극도로 분개했다. 국가 원수 신분인 자신의 인격이 인민들 앞에서 난자당한 셈이다. 그의 일생 중 몸과 마음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것이었다.
王前이 원한에 맺혀 벌인 이 공작은 사실 누워서 침 뱉기이기도 했다. 즉 자신이 낳은 자식이자 유소기의 자식이기도 한 두 아이들을 생부를 음해한 인간성 파탄자로 만든 것이었으니까! 이 대자보 사건으로 인해 劉濤는 劉少奇의 다른 자녀처럼 더 큰 고통을 받지는 않았지만 평생에 씻지 못할 치욕을 당해야 했다.
劉少奇의 다섯 번째 처는 王健이었다. 성과 이름은 같지만 고려 태조 왕건과는 전혀 피가 섞인 것은 아니다. 유소기가 왕건을 만나게 된 데도 사연이 없지 않았다. 유소기에게 그녀를 소개해준 것은 중공 당내에서 가장 연장자로서 당내에서 덕망이 높았던 朱德 부부였다. 당시 朱德은 유소기 보다 12살 많은 띠 동갑 고참 선배였다. 주덕의 부인 康克清은 특히 유소기를 애처롭게 봐서 동정을 많이 했고, 유소기 자녀들의 의지처도 돼줬다. 주덕 부부는 유소기가 王前과의 결혼생활이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픈 비극으로 치닫자 유소기를 위해 인품이 현숙하고 품성도 文静한 반려자를 찾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그들이 찾던 품성 고운 여성이 그들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있었다. 그게 바로 왕건이었다.
흔히 여자가 같은 여자를 보는 눈은 남자가 여자를 보는 눈과 다르다고 한다. 강극청은 왕건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들었을까? 王健의 성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말수가 적어 남들과 얘기를 나누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과 얼굴 붉히며 다툴 일이 없었다. 朱德 부부는 이러한 성정이 유소기의 성격에도 어울릴 것이라고 보고 그녀가 유소기와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왕건은 王前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숙한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남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약간의 정신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소기는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산 기간은 반년에 불과했다. 왕건의 처지를 이해한 유소기는 그녀를 자기의 오래된 부하이자 노전우인 林楓, 郭明秋 부부에게 맡겨 그녀를 東北지역의 이름난 요양지로 보냈는데 王健 언니에게 돌보아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완전히 미쳤다고 한다.
반면, 이와 전혀 다른 설도 존재한다. 최근 중공 黨史 연구자들 사이에는 王健이 정신병을 얻은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기자로서 王健을 방문한 戴晴도 王健이 병이 전혀 없었다고 한 바 있다. 정말 정신병이 없었다고 한다면 유소기는 왜 그녀와 이혼하고 멀리 동북지역에까지 보냈을까? 풀어야 할 의문이 아닐 수 없다.
劉少奇는 마지막 배우자를 잘 만났다. 앞선 다섯 명의 전처들 중 하보진과 사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국가 지도자급 인물인 유소기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헤어진 전처로 인해 삶이 극도로 불행하게 전개되던 시절, 유소기가 최후에 만난 배우자는 누가 봐도 훌륭한 여성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격조 있는 여성이었다. 이 여인은 유소기의 퍼스트레이디로 알려진 王光美였다.
유소기의 마지막 배우자 왕광미. 그녀는 유소기를 남편으로 만나면서부터 굴곡진 중국 현대사의 한 가운데에서 희노애락을 다 맛보면서 격동의 한 시대를 살다 간 풍운의 여인이었다.
1921년생인 王光美는 劉少奇 보다 23세나 적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부모 뻘 되는 나이차였다. 유소기가 어떻게 했기에 젊디젊은, 게다가 유복한 집안 출신에다 미모에 신식 대학교육까지 받은 규수와 인연이 닿았을까? 반대로 왕광미는 내세울 건 혁명의 열정과 공산주의 신념뿐인, 다섯 번의 결혼경력까지 가진 쉰 줄에 들어선 늙수그레한 이 사내를 무엇이 좋아 남편으로 받아들였을까?
사실 王光美는 그녀에 대해 전기를 써도 한 권의 두툼한 책이 나올 수 있는 비범한 여성이다. 결코 유소기에 뒤처진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가정사와 그녀의 재능, 곡절 많았던 삶의 역정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王光美에 대해서 별도의 공간을 할애해 좀 더 자세하게 논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 글에선 격동의 삶을 살다 간 왕광미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2019. 4. 1 초고, 5. 9, 18:15 가필
臺灣 中央硏究院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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