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세계 동서 언어의 뿌리라고?
: 한국 내 꿈틀대는 근거 없는 국수주의를 경계한다!
과거 일본과 중국의 국수주의(ultranationalism 혹은 chauvinism)와 패권적 침략을 비난하면서도 우리 자신들 안에 근거 없는 국수주의가 생겨나고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국수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교묘한 수단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지만, 대체로 먼저 언어와 역사서술에서 드러난다. 이에 관해 긴급히 생각나는 대로 짚어봤다. 다 같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중국의 한자는 한국인이 만들었으며, 산스크리트어(Sanskrit language)는 고대 한국의 영호남 방언이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언어학자"라는 강 모 박사라는 이가 있다. 또 한자는 산스크리트어의 음과 뜻을 넣은 문자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한글이 세계 동서 언어의 뿌리이며, 한자는 현 한국인의 조상인 동이족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강 모 박사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럿이 되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미 상당 부분 세력이 형성돼 있는 상태로 보인다. 그들의 서면 주장이나 인터넷 강연을 들어보면 근거 없는 주장들이 호혜적인 열린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는 게 아니라 일방적이고 과도한 국수주의적 민족우월의식을 자극하고 있어 우려가 된다. 이러한 의식은 민주화를 가로 막는 저해요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고대 한국인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언어학적 예증들의 구축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언제, 누가, 어떻게 한자를 만들었는지 그에 관한 실증적이고 치밀한 학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동이족이 서쪽 중국으로 들어가서 만들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는 또 산스크리트와 한국어의 언어적 특성, 즉 고립어(孤立語, isolating language)인지, 굴절어(屈折語, inflected language, inflectional language)인지, 교착어(膠着語, agglutinative language)인지, 또 소리글자인지 뜻글자인지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다. 단지 우리말과 유사한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이 곧 고대 한국의 호남과 영남 사투리였다고 하고, 한자도 산스크리트의 발음 및 의미와 유사한 예들을 들어 산스크리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주장할 뿐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그 ‘언어학자’란 분은 불교학을 전공하면서 언어학을 정상적으로 학습한 것은 아니면서도 언어학에서 정설인 것처럼, 혹은 자신만이 무슨 특별한 비밀이라도 알아낸 것처럼 큰 소리 치는 것(실제로 그는 강의 중에 자신만 아는 비법을 터득했다고 자랑함)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강 모 박사는 강연 중에 자주 중국어와 한국어의 유사성, 산스크리트어의 뿌리를 얘기하는 중에 흑판에 산스크리트어를 쓰고 있는데, 산스크리트어의 자형쯤은 알고 있는 필자가 보기에 잘못 쓰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한 그는 어떤 단어들의 의미나 어원을 얘기하면서도 그것의 근거를 제시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예를 들면, 그는 중국인을 폄칭하는 호칭인 ‘짱꼴라’를 ‘jhang-kohola’라고 쓰면서 ‘jhang’은 "양철 지붕에 비가 내릴 때 빗소리로 시끄러운 상태"를 말하며, ‘kohola’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음운학적으로, 어원적으로 "분명히 잘 알아듣기 힘든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그는 ‘jhang’과 ‘kohola’가 어느 나라 말인지, 또 왜 각기 그런 의미가 있는지 근거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학계의 일설에 ‘짱꼴라’는 “뼈 속까지도 더러운 놈”이라는 의미로 19세기 말에 일본인이 청일전쟁에 패한 중국인을 조롱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다는 '髒骨奴'(짱꼬로)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현대의 우리들은 고대인들이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민족 간의 왕래나 교류가 드물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타민족과의 접촉이 잦았고 그 범위도 넓었다. 그래서 언어도 자연히 민족 간, 종족 간에 서로 주고받고 영향을 미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대 산스크리트어가 주변과 인근의 팔리어(산스크리트어의 방언), 힌두어, 티베트어, 네팔어 나아가 유럽언어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듯이 티베트어, 몽골어, 만주어(여진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도 그러하고, 13세기 몽골어도 고려어에 많은 영향을 줬다.
러시아어도 16~17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세기 산업화를 추동하면서 독일어의 영향도 받았다. 고대 한국어는 일본어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 일본어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20세기에는 역으로 중국어와 한국어에 일본어의 새로운 한자어가 대량으로 이입됐는데, 이것도 동일한 현상이다.
따라서 어떤 두 언어 사이에 단어의 발음과 뜻이 유사하다는 것만으로는 두 언어 중 한 언어가 다른 하나의 언어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할 수 있을 지라도 그 언어의 뿌리라거나 동일한 언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란 언어적 특성, 즉 구조나 문법적 성격이 달라도 충분히 단어라든가 표현 방법은 그대로 이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래된 적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해도 두 언어에는 유사하거나 똑 같이 사용되고 있는 표현이나 어법이 적지 않다. 비근한 예로 중국어와 한국어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언어임에도 중국어의 표현 중에 ‘沒事’(일 없다, 괜찮다)가 그대로 북한에 ‘일 없다’, ‘괜찮다’로 직역돼 널리 사용되고 있다.
어휘 생성의 선후와 상관없이 유사한 표현을 동시에 쓰는 예로 영어와 한국어가 전혀 이질적인 언어임에도 양쪽에서 다 같이 ‘그녀를 보고 싶어 죽겠다’는 식의 표현은 1대 1 대응이 될 정도로 완전히 동일하다. 영어에서도 ‘I am dying to see her’라고 한다. 즉 ‘~하고 싶어 죽겠다’라는 표현은 ‘be dying to~’ 형태로 곧잘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단어나 표현 방법의 유사성과 동일성만으로는 한 언어가 다른 한 언어의 뿌리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이 보다는 두 언어의 언어적 특성을 살펴 유사성과 공통성 그리고 영향 등을 가늠하는 게 낫다고 본다.
설령 한국인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쳐도, 또 한국의 고대 방언들이 산스크리트어의 뿌리가 됐다고 쳐도 그것은 학문적인 의미 이상을 넘지 않는다. 고대에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현재의 그 나라나 그 후손들 보다 더 우수하다고 볼 수도 없거니와 그들을 무시하거나 낮춰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 한국인이 일본에 고등문화를 전해줬다면서 오늘날 일본의 발전이 모두 우리 조상 덕분이었다고 하면서 일본과 일본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동일한 인식 구조다.
그럼에도 강 박사를 추종하는 어떤 이들 가운데는 단군의 후손으로서 한국인과 한글의 우수성, 한민족의 독보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여타 민족을 폄시하거나 무시하면서 현 중국 산동지역까지의 일부가 고대 한국영토였다거나 심지어 현재의 미국 인디언들이 쓰는 말에 우리말과 유사한 어휘들이 있다는 이유로 미국 땅까지도 우리 땅이었다면서 미국땅을 회복해야 한다고 큰소리치는 이들도 있고, 이들을 추종하는 일반인도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무지와 독단으로 가득 찬 이들의 주장에서 벌써부터 광기를 느낀다. 아직까지는 섬뜩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러나 유럽의 네오나치주의자나 스킨헤드 같은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들처럼 이들도 장차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국내 일자리가 줄어들거나 하면 그들에 대한 혐오감과 결합해 그들에 대한 민족적 우월의 근거가 돼 결국 그들에 대해 폭력적, 비인격적으로 그들을 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로선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곤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다시 언어 얘기로 돌아오자. 강 박사는 어순, 격의 존재, 동사나 형용사(혹은 현대 러시아어처럼 명사도)의 어미변화, 조사, 성조의 유무 등등의 언어학적 동일성(혹은 유사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발음 혹은 뜻이 유사한 단어를 예로 들어 그러한 주장을 펴고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유사한 발음과 비슷한 뜻이 있는 어휘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두 언어의 同根性이나 母胎性을 입증할 수 없다. 또 특히나 농경문화가 주종을 이뤘던 고대엔 농기구나 농사와 관련된 어휘들이 멀리 다른 민족에까지 전파됐다. 그런데 쌀 찧는 절구, 연자방아, 가래, 호미, 맷돌 등이 어떤 민족에게도 있다고 해서, 또 그런 것들에게서 비롯된 단어들이 우리말과 비슷하다고 해서 두 민족의 언어가 같은 뿌리이거나 동일 어족이라고 주장해선 안 된다.
현재 인도 동남부 지역과 일부 스리랑카에서 쓰이고 있는 타밀어에는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어와 완전히 같거나 엇비슷하게 발음되는 단어들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빠(한국어)=압빠(타밀어), 엄마=암마, 나=나, 너를 뜻하는 니=니, 언니=안니, 마누라=마내비, 궁둥이=궁디, 아파=아파, 싸우다=싸우다, 이리 와=울래 와, 반갑다=마나깜, 도리도리=도리도리, 곤지곤지=곤지곤지, 까꿍=까꿈 등등 제법 된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는 한국의 김치, 깍두기, 막걸리와 거의 유사한 것들도 있다고 한다.
이런 단어들과 물건들은 한국어가 타밀어에서 들어왔거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가 됐는지는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조사를 해보지 못한 나로선 판단할 수 없다. 자칭 언어학자 강 박사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해석할지 궁금하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어가 타밀어의 모태가 됐다고 해야 되지 않을까? 내기 보기에 타밀어의 이러한 말과 음식들은 아마도 고대 타밀지역으로까지 전파된 소승불교가 여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지로 전래되면서 한국에까지 같이 따라 들어온 게 아닐까 추측이 된다.
이쯤에서 언어의 일반적인 특성을 살펴보고 논의를 이어가자. 앞서 언급된 고립어, 굴절어, 교착어는 각기 언어를 구조적, 형태적 관점에서 본 언어의 한 유형들이다.
한국어는 교착어임에 반해 산스크리트어는 굴절어다. 교착어는 첨가어(添加語, affixing language)라고도 한다. 교착어는 고립어와 굴절어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어근에 접사가 결합되어 문장 내에서 각 단어의 문법적 기능을 나타낸다. 즉 자신을 뜻하는 ‘나’라는 단어는 그 뒤에 조사 ‘는’이나 ‘가’가 붙으면 주어가 되지만 조사 ‘를’이 붙으면 부림말(=목적어=대상어)이 되는 것이다. 또 교착어는 굴절어와 달리 어간에서는 어형교체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어순이 주어+부림말+동사 순으로 돼 있고 조사도 있다. 알타이어 계통의 모든 언어들이 대표적인 교착어인데, 한국어, 터키어, 몽골어, 만주어(여진어), 일본어 등이 이에 속한다.
굴절어는 언어의 유형에서 종합언어적 성격을 띤다. 문장 속의 문법적 기능에 따라 단어의 형태가 변화하는 언어다. 가령 예를 들면, 굴절어로는 인도유럽어족의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러시아어, 독일어, 폴란드어, 슬로바키아어, 체코어와 셈어 계통의 아랍어 등이 있다. 한국어가 속해 있는 교착어와는 달리 굴절어는 어근과 접사(接辭)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면, 라틴어 bonus(영어 good의 의미임)에서 접사 –us는 남성, 주격, 단수를 의미하며, 이런 특성 중에 하나를 바꾸려면 접사를 다른 접사로 대체해야 하는데, -um로 대체한다면 bonum은 남성 직접목적격 단수나 중성 직접목적격 단수 또는 중성 주격 단수를 나타낸다.
독일어의 경우 명사에는 성(남성, 여성, 중성)이 정해져 있고, 이 명사가 문장에서의 문법적 기능(주격, 목적격, 소유격)에 따라 명사 자체는 어미변화가 없고 다음 예문처럼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정관사(der, die, das)가 바뀔 뿐이다. Sie mag den Autor dieses Buches. (그녀는 그 책의 저자를 좋아한다.), Das(혹은 Dies) ist meines Vaters.(이것은 내 아버지의 책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명사의 격이 바뀌는 게 아니라 명사 자체가 어미변화를 하는 러시아와는 이 점이 다르다.
러시아어는 명사라도 주격이 되느냐, 목적격이 되느냐에 따라 단어 자체의 어미가 변화한다. 예컨대 1인칭 주어인 경우와 2인칭과 3인칭 주어인 경우 목적어인 명사가 각기 어미가 바뀌는데, ‘나는 책을 읽는다’(Я читаю книга)에서 명사인 책에 해당되는 크니가(книга)는 각기 주어의 성에 따라 크니기(книги), 크니구(книгу) 등으로 바뀐다. 동시에 동사도 격과 성에 따라 어미가 변화한다.
고립어는 형태론적 특징에서 본 언어 유형이다. 단어에 語形變化나 접사도 없으며, 문법적 기능을 그 단어가 문장 속에 놓이는 어순이나 다른 단어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언어를 말한다. 고립어는 굴절어 및 교착어와 대응이 되는데, 중국어가 대표적인 고립어다. 타이어와 베트남어 등도 여기에 속한다. 중국어의 예를 통해서 고립어의 특징을 살펴보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의미의 ‘我愛你(wǒăini)’와 ‘너는 나를 사랑한다’라는 의미의 ‘你愛我(ni ăi wǒ)’와 같이 되어 문법적 관계가 格의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어가 놓이는 어순에 따라 나타난다.
베트남어를 학습해본 결과, 베트남어도 중국어와 완전히 동일하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Tôi yêu bạn에서 주어와 목적어를 서로 바꿔 ‘너는 나를 사랑한다’로 하면 Bạn yêu tôi가 되는데 중국어처럼 ‘나’ Tôi와 ‘너’ bạn의 어미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고립어는 문장에서 각 단어들의 어미변화가 없다. 한국어처럼 ‘밥을 먹다’에서 동사 ‘먹다’가 ‘먹었다’, ‘먹을’로 변하는 식으로 각기 과거와 미래시제를 나타내지도 못하고, ‘먹어’, ‘먹게’, ‘먹지’, ‘먹고’ 등으로 변화해 부사형으로도 어미변화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어근으로 보이며, 단어가 하나의 음절로 이루어지는 單音節語的 특징도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영어처럼 多音節語的 특징이 있는 언어에도 고립어적 특징을 나타내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The man like the women이나 The women likes the man을 분석해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는데, man과 women은 위치, 즉 문법적 기능이 어떻든간에 변화가 없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하여 캄보디아어, 사모아어 등도 고립어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는 한국어도 그런 성분이 있는데, ‘남자는 여자를 좋아한다’를 ‘여자는 남자를 좋아한다’로 주어와 목적어를 서로 바꾸어도 각 단어의 격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는 각기 고립어와 굴절어로서 언어의 계통이 완전히 다르다. 또 한국어는 교착어다. 그런데 어떻게 산스크리트어가 중국어의 바탕이 될 수 있으며, 한국어는 또 어떻게 산스크리트어의 뿌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산스크리트어가 중국어의 토대가 됐다면, 그리고 한국어가 산스크리트어의 뿌리가 됐다면 일부 어휘는 상호 교섭이 있어서 영향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언어구조 면에서는 결코 그렇게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내리자.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적 측면의 사실(fact)에 관해서다. 한자어가 고대 한민족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를 증명하려면 언어학적(음운학, 음성학, 문자학 포함), 고고학적, 역사학적, 서지학적, 문화인류학적, 군사학적, 정치학적 증거들이 퍼즐처럼 서로 맞아떨어지는 정도가 돼야 된다. 또 산스크리트어가 중국 한자어의 모태가 됐고, 한국의 고대 방언들이 산스크리트어의 어원적 뿌리가 됐다는 주장도 성급하고 섣부른 주장이 아닐까 한다. 이에 관한 학계의 공동연구도 있어야 하겠지만, 학자들도 연구에 임하는 자세를 엄격하고 균형감 있게 가다듬고, 학문적 양심 회복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결론으로서 언어문제는 권력이 내재돼 있는 문제임을 깨달아야 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언어적,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것 보다 정말 놓쳐선 안 될 중요한 것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일본이 과거 침략을 일삼은 것은 일본국민들이 자국 내 꿈틀 거린 폐쇄적 일본민족주의, 배타적인 국수주의자들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국민들이 나치즘의 발흥을 방조하거나 지지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이 대외 팽창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도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중국중심주의(Sino-Centralism)인 중화주의자들이 국가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일반 중국인들도 근거 없이 중국공산당이 선전하고 있는 이 주장들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역내 정부들 간에도 그래야겠지만, 각국 시민들도 서로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평화를 지향해 평화체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도 경제적으로 살만하게 되자 어느덧 사회 내부에 독버섯처럼 타민족을 억압하고 침략하는 배타적이고 근거 박약한 온갖 류의 한민족 우월적 주장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국수주의가 꿈틀대고 있는데, 이를 경계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학술연구나 학술적 주장에 임할 때는 지성적으로 사유하고 균형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학자적 양심을 버려선 안 된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2018. 9. 18. 11 : 1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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