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朝聯合司令部’ 再論 : 설립배경과 과정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Ⅰ. 문제 제기
Ⅱ. 기억과 문헌에 나타난 ‘中朝聯合司令部’ 설립과정
Ⅲ. 쟁점 1 : 중국군의 파병은 조건이 없었던 것인가?
Ⅳ. 쟁점 2 : 설립을 둘러싼 스탈린, 毛澤東, 김일성의 입장
Ⅴ. 맺는 말
Ⅰ. 문제 제기
국내외 6․25전쟁 학계에서 1980~90년대에 공개되기 시작한 러시아와 중국의 관련 사료들에 힘입어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 연합사령부’(이하 ‘중조사’로 약칭)의 존재를 밝힌 연구가 나온 게 2000년대 초였다. 毛澤東과 김일성의 합의로 1950년 12월 초순에 창설된 뒤 실로 반세기 만에 세상에 그 실체가 드러난 셈이다.
그 후 10여년이 지나고 있지만 중조사를 주제로 한 논저(단행본 가운데서 최소한 하나의 독립된 장절로 편성된 연구 포함)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 뒤로 더 이상 진전된 연구가 나오지 않고 있는 가운데 대표적인 연구성과를 꼽는다면 중국학계의 沈志華의 논저와 한국학계의 이종석과 최태현의 논저를 들 수 있다.
沈志華는 작전통수권을 둘러싼 중북 지도부 간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중조사의 설립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중조사의 존재를 최초로 소개한 이종석이 중조사의 설립과 그것이 6․25전쟁의 전개양상과 북한정치에 미친 영향을 논급하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최태현은 이 기구의 존재를 밝혀낸 기존 연구성과를 토대로 한 발 더 나아가 이 기구가 김일성 개인의 북한 조선노동당(이하 ‘노동당’으로 약함) 내 권력 장악과의 관련성 그리고 북한군의 재편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바 있다.
이 논저들은 각기 논구하고자 한 주제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한 가지 전제하고 있는 게 있다. 즉 중조사의 실체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중국지도부가 중국군이 입북한 후에야 비로소 중조사 설립의 필요성을 깨닫고 북한 측에게 설립을 제의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환언하면 논의를 중국군 참전 후에 작전지휘권 통합과 연합사령부 창설을 논의했다는 것을 전제로 이 기구의 실체를 밝히려는 것이거나 혹은 여기서 파생된 주제들, 즉 중조사 설립에 반대해오던 김일성이 왜 찬성하게 됐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 논의를 전개하는 형식이다.
과연 기존 연구처럼 중조사의 창설논의가 정말 중국군이 입북한 뒤에 시작된 것이었을까? 이 의문이 사실이라면 중국수뇌부는 참전 전 북한 측과 아무런 군사협조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성을 알지 못한 채 중국군을 입북시켰다는 의미와 같다. 1차에만 약 26만 명이라는 대군을 타국에 내보낸다면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사적, 정치적 의견조율과 관련해 현지 당사국과 어떤 식이든 합의를 거치는 게 상식이지 않을까? 예컨대 당시 중국과 북한 간 군사적 측면에서의 협력에만 국한시키더라도 협력의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만일 중국수뇌부가 북한군과의 아무런 협조관계의 필요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파병했다면 그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본고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기존 연구들이 착안하지 못한 곳으로 들어가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시계가 흐린 불투명한 그 지대에는 크게 두 가지가 상정돼 있다. 하나는 중국지도부가 파병에 즈음해 중국군의 북한 체류기간 동안 지위 보장과 전투지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었는가 하는 거다. 다른 하나는 스탈린의 압력이 주된 요인이 된 결과 중조사는 김일성과 중국수뇌부 사이에 만들어진 타협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상식적인 세 가지 의문에 토대를 두고 있다.
첫째, 중국군의 전투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명분으로 참전 전에 이미 중국수뇌부가 전쟁수행의 원활성 보장 차원에서 북한 측에게 중국군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주도록 요청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 김일성은 개전 초기부터 중북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을 강하게 거부해 왔었는데, 왜 중도에서 느닷없이 찬성하게 됐을까 하는 점이다. 셋째는 김일성이 돌연 찬성으로 선회한 것은 필시 자신이 피치 못할 정치적, 군사적 사정 혹은 국익을 우선시 한 고려나 스탈린, 毛澤東 등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아 자신의 의지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종의 타협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본고는 위 주장의 타당성을 실증하기 위해 먼저 현재 수집 가능한 중북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과 중조사 관련 ‘기억’들과 ‘해석’들을 종합해 이 기구의 설립과정을 재구성할 것이다. ‘기억’은 주로 중국 측 회고록들에서 취해질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지도부가 그러한 요구조건을 제시했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하는데 유용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 논저들과 달리 중조사 창설논의는 이미 중국군의 입북 전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기존 연구에서 중조사의 창설배경과 과정을 다루면서도 파악하지 못한 쟁점들, 예컨대 처음부터 중북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을 묵살해오던 김일성이 하루 이틀 사이로 돌연 찬성으로 돌아서게 된 것에 대한 배경을 미세하게 들여다보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거나 간과된 사실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중조사 창설이 가능했던 것은 스탈린, 毛澤東, 김일성의 타협의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쟁점들 외에 중조사가 창설되고 난 뒤에 새로 설립된 ‘중조공군연합사령부’를 포함해 전체 중조사의 구성원, 편성, 임무, 지휘, 운용 그리고 중조사가 중북, 혹은 중국-북한-소련 간의 관계, 김일성의 위상을 포함한 노동당 내부의 권력 변화와 북한군에 미친 영향 등은 서술의 범위 안에 두지 않는다. 이에 관한 온전한 전모는「‘中朝聯合司令部’ 再論 : 운용과 영향」이라는 주제로 별도의 후속 논문에서 논할 것이다.
Ⅱ. 기억과 문헌에 나타난 ‘中朝聯合司令部’ 설립과정
彭德懷가 북한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난 북한 측 고위 인사로는 중국군의 압록강 도강 개시 직전 1950년 10월 19일 安東으로 자신을 찾아온 박일우가 최초였다. 安東에서 신의주로 압록강을 건넌 후에는 彭德懷를 영접하러 나온 ‘이씨’ 성을 가진 어떤 ‘위원장’과 부수상 박헌영이 처음이었다. 彭德懷가 이들과 나눈 대화에는 전황, 환영 인사말과 김일성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얘기가 전부였지 중북 양군의 작전협조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彭德懷와 김일성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은 중국군 입북 3일째인 10월 21일 오전 9시 평안북도 삭주군 소재 동창과 북진 사이의 대동(大洞)에서 가진 첫 회담에서였다. 이 회담에 북한 측에서는 박헌영이 동석했으며, 중국 측에서는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의 참찬 柴成文이 배석했다. 중국 측 회고록들에는 이날 회의 내용이 자세히 소개돼 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날 10월 22일 오전 중에 속개돼 최소 2시간 이상이 지나 대략 오후 2시 경에 끝난 두 번째 회의에서는 분명 彭德懷가 중조사를 설립하자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중북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문제는 거론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이 회의에서 보인 김일성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만일 彭德懷가 작전권 통합문제를 거론했다면 아마도 김일성은 이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중국군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이상 그들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柴成文의 진술과 김일성의 거동이 서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거동은 논의가 전개되면서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다.
洪學智 회고록에는 10월 22일 이전까지의 회의에서 김일성은 전황만 설명했고, 彭德懷는 향후 중국군이 처할 세 가지 가능성만을 언급하는데 그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내용 외에 작전협조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언급돼 있지 않다. 彭德懷의 표현대로라면 “김일성 동지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회의는 결국 彭德懷와 김일성이 쌍방의 군사협조를 긴밀히 할 필요가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구체적인 것은 나중에 재논의하자는 선에서 끝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는 패주하면서 흩어진 북한군 부대들의 수습과 전력이 회복되기까지 당분간 중국군 단독으로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달은 彭德懷와 김일성 사이에는 중국군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쌍방의 연락을 원활히 하기 위해 박일우를 중국군사령부에 보내 연락임무를 맡기기로 결정됐을 뿐이다. 중북 양군의 연합사령부 창설이나 작전협조에 관한 문제까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洪學智 회고록에 김일성과의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서전을 하루 앞둔 10월 24일 彭德懷가 급히 군사지휘부를 중국군만으로 구성했다고 언급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군사령부의 설립이 늦은 것은 10월부터 본격화된 파병준비에서부터 북한 잠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입북 전 毛澤東의 지시를 즉각 이행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어쩌면 중국 측은 양군 연합사령부를 창설하기 위해 김일성의 승낙을 기다렸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彭德懷는 鄧華와 洪學智에게 중국군 단독으로 출전하겠다고 하면서 毛澤東의 지시에 의거해 중국군사령부(‘志願軍’사령부)의 주요 보직과 임무를 전달했다. 彭德懷 자신이 중국군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鄧華가 제1부사령관 겸 부정치위원으로서 간부관리와 정치공작을 담당하고, 洪學智는 제2부사령관으로서 사령부 관련 업무와 특과병, 후방보급을 맡게 됐다. 특이하게 박일우는 중국군부사령관 겸 부정치위원 자격으로 중국군사령부에 파견돼 중조사가 설립되기까지 줄곧 중북 양군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彭德懷와 김일성은 그 뒤로 서로 자주 왕래하면서 회의를 가졌는데, 김일성-彭德懷가 상호 방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박일우를 통해 부대배치 등을 포함한 중국군의 작전계획이 김일성에게 전달됐으며, 김일성의 의견도 중국지휘부에 전해졌다.
그런데 제1차 전역이 치러지면서 중북 양군간 협력체계가 미비된 탓에 상호 약정 등의 통일적인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북한군이 중국군에 대해 오인 공격한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다. 예컨대 11월 4일, 중국군 제39군단의 한 예하부대가 박천 동남쪽에서 미 제24사단을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순천을 향해 전진하던 북한군 전차사단이 제39군단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한 결과 포위된 미 제24사단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든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물자공급, 교통과 수송분야에서도 지휘통일의 협조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혼란스런 상황이 초래됐다.
야전에서 직접 전쟁지도를 총괄하는 彭德懷로서는 협조 미흡으로 발생하는 오인사건을 막고 후방지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도 작전지휘권을 일원화 시킬 필요가 절실해졌다. 그래서 彭德懷는 11월 7일 먼저 박일우와 중북 양군의 지휘통일 문제, 남한지역에 잔류하고 있는 북한군에게 적 후방에 전장을 열도록 하고, 중국군이 이 작전에 어떻게 협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어서 이날 彭德懷는 박일우를 평안북도 만포의 김일성에게 보내 자신과 논의한 내용을 보고하게 하면서 적 후방에서 전장을 여는 문제, 중북 양군의 작전협조, 포로정책 등에 대해 협의케 했다.
이 자리에는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Terenty F. Shtykov)와 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Nicolay A. Vasilyev)도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적 후방에서의 전장개설에 대해 김일성과 슈티코프는 동의했지만, 바실리예프는 동의하지 않았다. 중북 양군의 이른바 ‘작전협조문제’에 대해선 김일성은 양측이 각기 참모를 파견해 통신연락과 정보교환 역할을 하도록 하면서 양군 사령부가 통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일성은 중북군의 두 사령부가 가까이 있는 것도 좋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회의 후 중국군사령부로 돌아온 박일우는 彭德懷에게 김일성과 소련군사고문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한편, 북경의 周恩來는 북한수뇌부와의 군사협조 문제는 단순히 중북 양군 사이만이 아니라 양당, 양국 관계와도 관련돼 있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박일우를 매개자로 한 간접 대화가 아니라 중북 양군의 최고지휘부가 나서서 협의할 사안이라고 보고 彭德懷에게 직접 김일성과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周恩來는 11월 8일 毛澤東, 劉少奇, 朱德과 聶榮臻이 검토한 전문을 북한 주재 柴成文에게 보냄과 동시에 彭德懷와 高崗에게도 김일성의 의향을 타진하게 했다.
즉 “毛澤東 주석은 김 수상에게 현재 차기 전역 직전까지의 틈을 이용해 이 달 10일 전후 彭德懷 동지가 있는 곳으로 가서 高崗, 彭德懷 두 동지를 만나 한반도에서의 작전과 보급, 북한군과 그 기관들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입한 후의 훈련 안배 및 기타 모든 문제에 대해 의논하라고 건의하는데, (이에 대해) 김 수상의 의견이 어떤지 高崗 동지가 알고 북한에 갈 수 있도록 신속하게 알려주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지시를 받은 柴成文은 직접 김일성에게 이 의사를 전했고, 김일성은 彭德懷, 高崗과 이 문제들을 상의하겠다고 답했다. 11월 10일 11시, 柴成文은 周恩來에게 전보로 김일성이 회담에 응하겠다고 한 사실을 보고했다. 김일성이 柴成文에게 彭德懷, 高崗과 협의하겠다고 응답한 시점은 彭德懷가 제안한 ‘3자 회담’에 대한 毛澤東의 지원요청이 스탈린에게 전달되고, 이에 대한 스탈린의 의사가 결정되기 전이었다.
11월 11일, 彭德懷는 박일우로부터 보고 받은 내용을 전보로 毛澤東과 高崗에게 보고했다. 중북군 사이에 전투 중 오인공격이 빈발해 작전지휘권 통합이 시급함에도 김일성과 소련군사고문들은 연락장교만 중국군사령부에 보내 정보교환만 하길 원하고, 중조사 설립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심지어 두 사령부가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까지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전문에서 彭德懷는 자신과 김일성, 슈티코프가 참여하는 ‘3인위원회’를 조직해 작전과 관련된 지휘협조와 군사정책 등을 책임지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彭德懷가 김일성, 소련군사고문들과 격론을 벌였지만 그들의 반대에 부딪쳐 중조사 창설이 결정되지 못했다는 보고를 접한 毛澤東은 북한 측과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 원인이 김일성의 반대와 배후에서 그를 지도하는 소련군사고문들의 반대 혹은 입장 차이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김일성을 설득하고 소련군사고문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스탈린의 지원과 압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1월 12일, 毛澤東은 彭德懷에게 “북한과의 협력에 관련된 각 항목은 모두 타당한 것”이지만 북한지도부와의 논쟁과 의견대립은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중국군이 전투에서의 승전이 쌓이지 않는 한 상당기간 존재할 것이니 완곡한 어법과 부드러운 태도로 협상에 임하라고 당부했다. 이는 강인하고 충직하며 전쟁경험이 풍부한 군사전략가로서 원칙문제에서는 좀처럼 양보하지 않은 彭德懷의 성격을 감안한 지시였다. 여기서 毛澤東이 彭德懷에게 말한 “북한과의 협력에 관련된 각 항목은 모두 타당한 것”은 무얼 가리킬까? 이에 대해서는 제3장에 가서 논의를 이어가겠다.
당시 毛澤東은 彭德懷 이외 정무원 정무위원 李富春이 중국 동북지역을 보름 간 시찰하고 돌아와 올린 보고내용까지 종합적으로 참고했다. 李富春의 보고서는 북한군이 전쟁 방침, 정책과 조직 면에서 독자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소련, 중국, 북한 3자가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들 것을 소련에 건의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였다. 또한 11월 13일 동북군구 당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제1차 전역을 총결산함과 동시에 제2차 전역에 대한 작전방침, 중북 쌍방의 작전협조 등을 연구한 결과를 북경에 보고함에 따라 북한과의 후방지원 문제는 협의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같은 날, 毛澤東은 스탈린에게 중국군이 북한군을 포함해 단일화 된 지휘권을 가지도록 슈티코프를 움직이게 하고, 김일성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毛澤東은 이렇게 언급했다.
“彭德懷 동지는 김일성 동지와 슈티코프 동지가 전방에 상주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는 김일성, 슈티코프, 彭德懷가 3인위원회를 조직해 건군, 작전, 정면전장과 적 후방전장 그리고 작전 관련 많은 현행 정책들을 포함한 군사정책을 결정함에 서로 의견일치를 구해 전쟁진행이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책임을 지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우리는 이 제의에 동의했는데, 지금 특별히 전문을 보내 당신의 지시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만약 동의하면 귀측에서 슈티코프 동지와 김일성 동지에게 타당하다는 의사를 밝혀주길 바랍니다.”
덧붙여 毛澤東은 전보 말미에 승리는 자신하고 있지만, “현재 중요한 문제는 북, 소, 중 3국의 지도자 동지들이 잘 단결하여 각종 군사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견일치를 볼 수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북한군과 중국군이 작전에서 보조를 맞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즉 毛澤東은 스탈린에게 소․ 중․ 북의 공동결정으로 통합 지휘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전보를 받은 스탈린은 당시 남진 일변도의 전쟁지도를 해온 북한 주재 소련군사고문들에게 작전지휘에 참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1월 15일 중국, 소련, 북한 대표가 함께 하는 3자 회담이 평북 동창군의 대유동 소재 중국군사령부에서 열렸다. 毛澤東의 장남 毛岸英이 중국어-소련어 통역을 맡은 이 회의에 북한 측에서 김일성과 박일우가, 중국측에선 彭德懷와 高崗이, 소련측에선 ‘3인위원회’회의에 참석하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슈티코프가 참석했다. 이 회의는 기본적으로 제2차 전역의 작전방침을 논의하고자 한 자리였는데, 중북군의 작전지휘 통일문제와 군수지원 문제가 핵심의제였다.
무려 6시간이나 지속된 이 회의에서 전황과 작전결과를 간략하게 보고한 彭德懷에 이어 高崗, 김일성, 彭德懷, 高崗, 슈티코프 순으로 발언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에 향후 조치들에 대해 각자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분위기를 유도한 高崗에 이어 발언에 나선 김일성은 전쟁 경과를 서두로 장시간 언급했지만 중국군 파병에 대한 사의 표명 이외에 중북 양군의 작전조정 문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어진 그의 발언은 북한정부와 북한군 지휘부가 취하고 있는 조치들, 즉 퇴각한 사단들의 정비, 9개 예비사단 편성과 훈련, 조종사 양성, 유격투쟁 전개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뤘다. 유격투쟁을 위해선 북한군 제2군단 참모부를 철원에 남겨 뒀고, 3∼4개 사단을 적 후방지역에 내려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또 “소련은 북한의 지원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다”고 밝히면서 기왕에 파병을 결정한 이상 평양이 점령당하기 전에 군대를 보내 평양을 지켜줬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한 데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향후 반전을 위해 북한군을 재편, 양성하고 유격전과 적 후방 전투를 계획하고 있지만 “주요 산업 지역들과 비상식량의 손실로 현재 심한 물질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일성의 발언은 彭德懷의 작전지휘 단일화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북한군의 단독 작전을 시도하려는 속내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는 북한군의 독자적인 전황반전을 도모하려고 했지 중국 측에서 제기한 중북군의 연합작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대해 彭德懷는 2시간에 걸쳐 김일성의 발언을 간접적으로 에둘러 반박하면서 제2차 전역의 작전계획과 목표 및 고충을 밝혔다.
예컨대 중국군은 적절한 시기에 참전해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지만 11월 하순에 착수하기로 계획돼 있는 제2차 전역에서는 중국군이 탄약과 비상식량 마련이 어렵고, 차량운송이 부족한데다 북한의 도로상태가 좋지 못하며, 철도운송도 부진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북한의 지방당국 기관들이 중국으로 피신해 있기 때문에 유사시에 중국군에게 협조해줄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 그는 중북 양군이 “더욱 긴밀하고 일치된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하면서 전쟁수행 관련 논의를 위해 자신과 김일성, 슈티코프가 더 자주 만나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즉 간접적으로 작전지휘권 통합을 요청한 것이다.
彭德懷의 발언에 이어 또 다시 발언에 나선 高崗은 彭德懷의 권위에 무게를 실어주면서 김일성에게 중국군의 군수문제 해결에 협조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중국군에게 보급품을 원활하게 수송해줄 수 있도록 북한 내 대형 도로를 확충시켜 주고, 중국군사령부와 북한철도관리 간의 관계가 긴밀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이 요청은 한반도가 지역이 협소하기 때문에 전투에서 통일된 지휘를 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서 彭德懷의 간접 요청에 대한 부연설명이었다. 계속해서 高崗은 중북 양군의 작전문제와 관련해 연안파에게 군사지휘권을 놓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의 의심과 불안을 의식한 듯 노동당은 毛澤東이 당내 의견을 일치시키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당과 인민을 결속시켜야 한다”고 언급한 사실을 강조했다. 요컨대 김일성을 중심으로 노동당의 정치사업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毛澤東의 의중을 전달한 것이다.
중국 측이 바랐던 중조사 창설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된 것은 이 회의에서 끝 차례로 발언한 슈티코프의 입을 통해서였다. 슈티코프는 유격투쟁의 확장과 노동당이 정치사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중국 측의 입장에 대해 옳은 판단이라고 긍정하고, 개인적 소견이라고 하면서 양군의 작전조정을 위해선 “통일된 작전군사령부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통일된 작전군사령부가 필요하다”는 언급은 이 시점부터 작전지휘권 통합 주장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슈티코프가 스탈린의 의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 회합에서 기본적으로 중북 쌍방이 군사작전과 군수문제에 대해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소련-중국-북한 3자 사이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중북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 건에 대해선 슈티코프가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김일성이 여전히 양군의 “작전 조정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바람에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회의 끝 무렵에 高崗과 彭德懷는 제2차 전역 후에 다시 중조사 창설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처럼 彭德懷와 소련 측이 작심하고 김일성에게 “통일된 작전군사령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이번에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 세 번째 협상도 결렬되고 말았다.
회의 내용과 결과는 모두 모택동과 스탈린에게 전해졌다. 스탈린에게는 중국 측의 전술전략에 관해서도 보고됐다. 중국 측의 작전방침이 옳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중국이 중북 양군의 작전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것을 동의해주고 이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들의 생각을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한 毛澤東의 건의를 받아들여 11월 16일 毛澤東에게 중국 측의 통합적 작전지휘에 찬성한다고 통보했다. 동시에 그는 김일성, 슈티코프와 중국 주재 소련군사고문들에게도 이 뜻을 알렸다.
그러나 김일성에게는 이 전보가 슈티코프의 실수로 “7일” 늦은 11월 23일(혹은 24일)에야 전달됐다. 그 사이 김일성은 11월 20일과 21일 연이어 사단장, 군단장, 군사회의 위원, 정치기관 책임자들을 소집해 회의를 주재해 전투 평가, 몇몇 군지휘자들과 사단장들의 과오에 대한 비판과 함께 향후 북한군의 재조직과 편성, 남한에서의 유격활동을 벌일 계획을 밝히면서도 중국군과의 작전지휘권 통합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중국의 전시 군사지휘권 행사를 지지한 스탈린의 전보를 접수한 毛澤東은 이 사실을 彭德懷와 高崗에게 알렸다. 이 시기 毛澤東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투입한 지난 제1차 전역 때와는 달리 이번 제2차 전역에서는 동부전선에도 병력을 증강시켜 원산까지 밀어붙이기로 하고, 북한군을 동부전선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당시 3개 군단 14개 사단 7만5,000명 정도로 수습돼 전투에 참가할 수 있게 된 북한군 병력에 대한 지휘여부가 제2차 전역의 승패에 미칠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毛澤東은 제2차 전역을 개시하기 직전 또 한 번 작전지휘권 통합을 재촉하기 위해 전역 개시 이틀 전인 11월 23일 전선의 병참공급 상황을 파악할 겸 瀋陽의 高崗을 재차 중국군사령부로 보내 김일성, 彭德懷와 중조사의 수립과 지휘계통 통합문제를 상의하게 했다. 이는 洪學智 회고록에 근거한 내용인데, 현존 ‘毛澤東文稿’에는 없는 내용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일우-彭德懷, 김일성-彭德懷의 최초 회담을 제외하더라도 이번 중북지도부 간 회의는 네 번째였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김일성과 중조사 설립을 논의한 이 협상에서도 쌍방은 합의를 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작전지휘권 통합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북한군과의 연합작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사자인 김일성의 의심과 불안을 해소하지 않고선 동의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한 북경은 그의 의심과 불안을 해소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毛澤東은 김일성을 직접 북경으로 불러들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그 이전에 김일성은 11월 29일에 소집된 노동당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중조사에 관한 스탈린의 전문에 대해 당내 토론에 부쳐 스탈린의 “연합사령부에 대한 문제제기를 올바르고 시기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중조사 “사령관도 말할 필요 없이 중국인이 돼야 하고, 부사령관은 조선인이 맡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스탈린의 지시를 “지도적 지시”로 받아들인 김일성은 毛澤東의 방중 초청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2차 전역의 서부전선 전투가 끝난 12월 3일, 예정 보다 하루 늦게 김일성은 동북의 高崗과 함께 북경 中南海의 毛澤東을 찾아가 周恩來, 劉少奇 등이 배석한 자리에서 중조사 설립문제와 중북 양군의 작전권 통합문제를 다시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高崗이 양국군 간에 작전지휘가 통일되지 않아 서로 총격전을 벌인 사례를 들면서 재차 지휘권 통합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毛澤東도 이에 찬의를 표시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예전과 달리 중국 측에게 북한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의 입장변화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임은 불문가지다. 그는 스탈린이 전보로 중북 양군이 지휘를 통일해야 한다고 전해왔다고 하면서, 중국군은 전쟁경험이 있기 때문에 중국 동지가 정(正), 북한 동지가 부(副)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점은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도 동의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김일성은 자신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퇴각을 잘못 이끈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지휘를 맡기 어렵고, 박일우와 김웅을 북한측 지휘관으로 내세우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김일성이 병사들의 휴식과 부대 정비 후에 공격을 재개하려고 한 彭德懷와 달리 공격을 38도선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毛澤東의 의사를 확인한 점이다. 이는 곧 그간 계속 공격이냐 휴식 후 공격이냐를 두고 의견대립을 보여 온 彭德懷의 의사를 철회하게 만든 수확이었다.
회담 결과 김일성과 毛澤東은 중조사 창설과 양측의 고위 지휘관이 참여하는 연합참모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중국군사령부와 북한군참모부는 중조사에 소속되며, 업무는 중국군사령부에서 보기로 했다. 북한군 가운데 고위급 인사를 중국군 사령부의 부사령관 겸 부정치위원 자격으로 상주시키기로 합의했다.
중조연합사령관 겸 정치위원은 중국군 측이 맡기로 했고, 부사령관은 중북 양군에서 각기 1명씩을 선출하기로 원칙을 정했다. 그러나 누구를 인선할 것인지, 또 이 기구의 운영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마련하지 못했다. 작전방침과 관련해서는 북한군이 38도선 이남에서 유격투쟁을 담당하기로 합의가 됐다.
북경을 떠난 김일성은 중국군이 평양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12월 5일 밤 9시 북한에 귀환했다. 그는 도착 즉시 북한 주재 소련대사 겸 군사고문단장으로 새로 부임해온 라주바예프(V. N. Razuvaev)에게 북경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을 알렸다. 위 내용과 함께 중조사 및 연합참모부 설립과 군사작전방침에 대해 쌍방의 합의가 있었으며, 毛澤東이 북한군 패퇴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는데, 자신이 이에 동의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12월 6일, 彭德懷는 다음 날 김일성이 중국군사령부로 와서 중조사 간부 선임문제를 논의하기로 약속한 사실을 毛澤東에게 긴급 전문으로 보고했다. 이에 毛澤東은 그날 밤 10시 彭德懷에게 신속히 김일성과 함께 중조사, 중국군 사령부를 덕천 이남의 적당한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강계, 정주 지역에 모여 있는 북한군 2개 군단에게는 彭德懷, 김웅과 박일우의 지휘를 받아 중국군을 따라 평양 이남으로 출동해 중국군의 작전에 보조를 맞추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12월 7일, 김일성과 彭德懷는 중조사 지휘부 구성에 필요한 구체적인 세부내용을 협의한 결과 의견 일치를 봤다. 彭德懷는 북한군에 대해 “금후로 더 이상 지휘에 직접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그 때까지 彭德懷가 북한군에 대해 지휘 간섭을 해왔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지휘부 구성면에서 중조사 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彭德懷, 중국측 부사령관에는 鄧華, 북한측 부사령관에는 연안파인 김웅을 임명했고, 박일우에게는 부정치위원을 맡겼다. 연안파의 약진이 돋보이는 인선이었다.
12월 8일, 彭德懷와 김일성은 중조사 설립을 세부적으로 규정한 합의문을 도출했다. 합의문은 周恩來가 중공중앙을 대표해 작성했다. 같은 내용을 담은 한글합의문도 작성됐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지금까지는 공개된 바 없다. 합의문의 전문은 다음 장의 관련 논의에서 자세하게 거론될 것이다. 합의문에는 명기돼 있지 않지만, 이 회담에서 쌍방은 원활한 작전협조를 위해 북한군 측에서 3~4명으로 구성된 연락조를 중조사에 상주시켜 중국군 작전처와의 업무연락에 원활을 기하기로 했다. 북한군 지휘부는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부 부부장 왕송운 대좌를 조장으로 한 군사연락조를 중조사에 상주시켰다. 또한 쌍방의 합의에 의거해 중국군 사령부와 북한군 참모부 등 2개 기구가 한 곳에 같이 있게 됐다.
이날, 毛澤東이 彭德懷에게 중조사를 밖으로 공개하지 말고 실제 조직만 하자는 지시를 내렸다. 이 조직의 창설을 대외에 공개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중조사의 존재는 대외적으로 비밀이 됐다. 중조사라는 존재는 대외에 공개하지 않고, 대내적으로 문서상으로만 사용하기로 했다. 중조사가 명령을 내릴 경우 중국군 부대에게는 중국군사령부 명의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고, 북한군에게는 중조사 명의를 사용하기로 했다. 중북 양군 간에는 중조사를 ‘聯司’라고 간략히 칭하기로 약정했다.
따라서 중조사가 彭德懷, 김웅, 박일우 3인 연명으로 명령을 내리는 대내적인 명령도 군단 지휘부와 독립사단 사령부까지로 제한했으며, 관련 작전만 통일적으로 지휘하기로 했다. 작전범위와 전쟁지도 같은 전선의 모든 활동은 중조사가 관할하도록 했는데, 양측의 작전과 전선에서의 모든 전투는 중조사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북한정부는 후방동원, 훈련, 군정, 경비 등을 관장하기로 했다. 후방문제 가운데 중조사가 필요한 게 있을 경우 북한군 측에 요구 내지 건의하고, 철도수송 및 수리는 중조사가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중조사가 중국군사령부와 북한군 참모부를 지휘하기로 함에 따라 제3차 전역부터는 중국군이 중조사를 통해 중북 양군을 모두 일원적으로 지휘하게 됐다. 북한군은 단지 적 후방에서의 유격전 수행, 후방경비, 군사훈련, 해안방어 및 치안유지만 맡게 됐다. 북한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중국 측으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김일성은 전방 전투지휘권이 대폭 축소돼 군권이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조사가 정식으로 창설됐지만 그 정확한 설립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자료 마다 날짜가 다르기 때문이다. 洪學智는 12월 4일 중국군 지휘부가 중조사의 설립사실을 전체 각 부대에 통보했다고 했는데, 이에 근거하면 12월 3일이거나 4일에 설립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彭德懷 전기에는 12월 7일 김일성이 대유동에 와서 彭德懷와 중조사 설립에 관해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의견일치를 본 이 날 정식으로 설립된 것으로 돼 있다. 나는 毛澤東이 彭德懷에게 북한군 2개 군단에 대한 작전명령을 지시하게 한 12월 6일이었거나 그 하루 전인 5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Ⅲ. 쟁점 1 : 중국군의 파병은 조건이 없었던 것인가?
12월 3일 김일성-毛澤東의 북경회담에서 전격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북중 양측이 총 최소 다섯 차례 이상이나 접촉 내지 회담을 거듭하면서 신경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조사를 즉각 설립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김일성의 반대가 주된 원인이었다. 그의 반대는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입지와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예를 들면, 양군의 군사지휘권을 어떤 형식으로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약정에 어떤 내용을 담는가에 따라 북한의 주권 일부가 침해될 수 있는 권리를 중국 측에 이양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합의하기 어려웠던 중대한 문제들이었다.
현재까지 공개된 각종 문헌자료들에는 중북 양군의 작전협조 문제가 10월 21~23일의 彭德懷-김일성 회동시 논의된 것으로 돼 있다. 말하자면 중국군이 북한으로 전개된 뒤에 논의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전지휘권 통합문제는 앞뒤 상황을 짚어 봤을 때 중국군 참전 전에 이미 중북 양국의 지도부 수준에서 거론됐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하는 나의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증과 방증 혹은 추론이다.
먼저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1950년 10월 1일 스탈린이 毛澤東에게 중국의 참전을 요청하면서 군사지휘는 일원적으로 중국 측이 맡아야 한다는 의사를 밝힌 사실이다.
둘째는 10월 8일 모스크바로 향발한 周恩來가 중국의 참전문제를 두고 스탈린과 벌인 협상에서 대북 군사지원 문제와 관련해 8개 항을 제기하면서 중국군이 참전 후 북한군과 연합작전을 펼칠 경우 쌍방의 군사지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지시해주기를 요청했지만 스탈린이 이 문제제기에 대해 이렇다 할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의 제안과 周恩來의 질의는 중국 측이 군사개입 이전에 이미 작전지휘권 단일화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일설에 의하면, 毛澤東은 북한 측으로부터 중국군 파병요청을 받았을 때 기본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면서 중국군 파병 전 먼저 사전에 북한 주둔에 필요한 중국군의 우월적 특권을 요구했다고 한다. 명분은 중국군의 “법적 지위, 권한, 즉 행정협정 및 북한군과의 연합작전 문제 등 세부 협정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것도 周恩來가 스탈린에게 요청한 내용과 논리적 궤를 같이 하는 사례인데, 중국 측이 제시한 요구사항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제1항 연합사령부 및 참모부 구성에서 장은 중국 측이 맡고, 북한 측은 부를 맡는다.
제2항 동 구성원은 중국 측이 과반수를 가지고, 의견이 다를 때는 중국 측의 의견에 따른다.
제3항 동 기관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어로 한다.
제4항 북한 측은 중국군의 동의 없이 화전과 관련해 어떠한 국가와도 협정을 맺지 않는다.
제5항 북한 내에서 중국군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우선적으로 북한 측이 무료로 보장한다.
제6항 북한 내에서 중국군은 북한법률에 복종하지 않는다.
제7항 북한의 철도, 도로 및 항만 시설은 중국군의 관할 아래에 둔다.
제8항 필요할 경우 중국군은 북한주민에 대해 검색 및 체포, 취조를 할 권한을 가진다.
중국 측이 정말로 이런 요구를 했었는지는 현재 결정적 사료가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위 요구는 毛澤東이 참전 전에 한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과연 그것이 참전 전 일이었는지 아니면 참전 후의 일이었는지 정확한 시점을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만약 毛澤東이 요구한 게 사실일 경우 조건은 상기 내용이었는지, 또 과연 북한 측이 이를 받아들였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내용으로 봐서 통상 군대파병 전에 점검하는 요구조건이라는 점은 단박에 알 수 있다. 먼저 중국 측이 이런 요구를 했었는지 여부를 추론하면, 주둔군으로든 참전군으로든, 어떤 국가에 외국군이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전쟁경비를 비롯해 병참해결 문제와 함께 주재국 군대와의 군사협조, 특히 양군의 상호 관계와 전쟁지휘권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논의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임을 감안하면 중국이 이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요구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이 상기 요구사항을 제시했었다면 그 시점은 언제였을까?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크게 입북 전과 입북 후 가운데 하나였을 것인데, 그 시점은 다섯 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1950년 5월 15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극비리에 북경을 방문해 중국수뇌부와 행한 회담에서 毛澤東이 김일성의 전쟁 동의요청을 받아들였을 때다. 둘째는 10월 2일 김일성이 북경에 급파한 박일우로부터 파병요청을 받았을 때 그를 통해 제시했을 수 있다. 셋째는 10월 8일 毛澤東의 요청으로 북경에 급파된 박일우를 통해서다. 넷째는 중국군이 입북한 이후, 즉 대동과 대유동에서 김일성과 彭德懷이 빈번하게 만난 10월 21~23일 시점이다. 다섯째는 彭德懷가 박일우와 만나 중북 양군의 지휘권 통일문제를 논한 11월 7일이다.
이 다섯 가지 가능성 가운데 첫 번째였거나 세 번째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나 두 번째와 네 번째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다섯 번째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상기 가능성을 순서대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의 경우, 이 북경회담에서 毛澤東은 미국이 군대를 보내 한반도 적화통일전쟁을 간섭할 경우 중국군을 파병해서 지원하겠다고 제의한 바 있지만 김일성은 사양했다. 毛澤東의 이 제의는 반대급부가 전혀 없는 무조건적이었던 것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다.
김일성이 사양한 이유는 毛澤東이 파병지원에 대해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 김일성과 박헌영이 노동당 정치국 요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북경을 방문했기 때문에 毛澤東으로부터 그러한 요구조건을 들었다고 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한 당시는 이를 공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김일성과 박헌영 두 사람만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 도발 후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반격으로 정권붕괴 직전의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몰린 1950년 9월 하순 중국군 참전을 요청해야 할 것인지를 당 지도부에서 결정해야 했을 때는 중국 측의 요구조건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배경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남침전쟁을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동의 없이 결정한 사정과 맞물려 있다. 즉 남침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 등 당내 극소수 인물이 극비리에 모의해 일으킨 것이었지만, 일단 도발과 함께 즉각 북침으로 사실을 날조하고 호도함으로써 노동당 내 토론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전쟁을 결정한 데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엔의 신속한 개입으로 전황이 역전되고, 기대했던 스탈린마저 소련군 파병을 거부하기에 이르자 김일성은 하는 수 없이 중국에 지원을 요청해야 했는데, 중국군 파병요청은 김일성 개인이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실제 9월 20일 전후 긴급히 소집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석상에서 중국의 군사지원을 요청하자는 제의가 나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중국군의 참전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김일성의 입장에선 중국군의 파병을 막기 위해서 회의 참석자들에게 중국측의 지나친 요구조건을 밝힐 필요가 있었을 수 있다. 이 요구조건이 앞서 열거한 8개항이 아니었을까?
둘째의 경우는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김일성은 정권이 붕괴될 수 있는 상황에서 스탈린이 소련군 병력지원을 거부하자 중국군의 파병이 절실하게 된, 촌각을 다투는 절체절명의 화급 상황에서 박일우를 북경에 보내 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毛澤東은 소련의 공군 지원 보장 없이 단독으로 파병을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의 공군지원 의사를 타진하는 한편, 참전여부를 수차례 중공 당내 토론에 부쳤다. 따라서 파병이 당론으로 확정되기 전이었으며, 박일우의 북경체류 시간도 촉박했던 상황이라 毛澤東이 북한 측에게 참전조건을 제시하기는 여의치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세 번째의 경우는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10월 8일 毛澤東은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이 군대파병을 결정했음을 알리면서 박일우를 瀋陽에 보내 彭德懷, 高崗과 중국군의 북한진입 후 수행할 작전에 필요한 제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현존 자료들에 의하면, 그날 저녁 瀋陽에 도착한 박일우는 중국군의 한반도 진입 후의 구체적 요구조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미국이 지금 한반도에 계속 병력을 증강하고 있으니 중국은 군대를 즉각 출동시켜 함흥과 신안주를 통제해 달라는 김일성의 요청을 전달했을 뿐이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파병을 결정했음을 알리는 毛澤東은 입장이 달랐는데, 이때 그가 박일우에게 파병조건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적시해주는 사료는 현재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중국 측이 공개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박일우는 즉답할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중국 측과 후방지원 문제에 대해서만 초보적 수준에서 합의를 보았을 뿐이다. 입북 전에 벌써 중국 측의 요구가 김일성에게 전달된 상황이라면 김일성이 그에 관한 재거론이나 결정을 회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중국군이 한반도에 진입한 이후 일률적으로 북한의 화폐를 사용하되 나중에 상환하고, 필요한 땔감과 건초는 북한 현지 지방정부를 통해 구매하며, 시장가격에 따라 제공한다는 방침만을 정했을 뿐이다. 또 소련에서 周恩來가 스탈린과 무기 장비 및 공군지원 문제를 논의하고 있을 즈음 중국과 북한은 이미 중국군의 파병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沈志華는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에 쌍방은 중국군의 파병 이후 직면하게 될 지휘, 통신, 보급, 운수 등 일련의 문제에 대해선 그 어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네 번째 가능성을 검토하면 이렇다. 제2장에서 밝혔듯이 10월 21~22일 사이 김일성-彭德懷 회담시 彭德懷가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을 요청한 것은 분명한데, 이 때 8개항을 다시 끄집어냈을 수 있다고 본다. 그 근거로는 앞 장에서 11월 12일 毛澤東이 彭德懷에게 보낸 전보 내용 중 “북한과의 협력에 관련된 각 항목은 모두 타당한 것”이라고 한 대목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이전부터 북한에 작전지휘권 통합과 관련해 여러 “항목”을 제시한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毛澤東의 요구조건에 관해 洪學智, 彭德懷 등의 회고록에는 모두 언급이 없다. 이는 중공지도부가 이 사실을 금기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 가능성인 11월 7일은 앞서 살펴봤듯이 彭德懷로부터 작전지휘권 통합 등의 요구가 있은 날인데, 그 요구는 최초가 아니었기 때문에 논의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종합하면, 10월 21~22일과 11월 7일의 요구는 처음이 아닐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판단된다. 이 추론을 근거로 나는 중국군 파병 전에 이미 중국지도부의 군사적 요구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지금부터 검토할 중북 간의 합의사항 중에는 북한주권을 침해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데, 과연 김일성이 그런 요구를 쉬이 받아들였을까? 김일성이 선뜻 동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문제와 관련해 이제 중국군 파병 전 毛澤東이 요구한 조건들이 사실이었는지 판단하기 위해 사료비판을 가해볼 차례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상기 8개항의 조건들은 일부내용만 완화된 형태로 큰 틀에서 북중 간의 합의문으로 보장 받았기 때문에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먼저 1950년 12월 초순 彭德懷와 김일성이 합의한 내용을 보자.
제1항 공동의 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치기 위해 중북 쌍방은 즉각 연합지휘부 설치에 동의하고, 한반도 국경안의 모든 작전과 이에 관계되는 업무를 통일 지휘한다.
제2항 중북 쌍방은 彭德懷를 연합지휘부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김웅을 연합지휘부 부사령관으로, 박일우를 연합지휘부 부정치위원으로 임명하는데 동의한다.
제3항 북한인민군 및 모든 유격부대와 중국인민지원군은 연합지휘부의 통일된 지휘를 받는다. 연합지휘부가 그들에게 내리는 일체의 명령은 모두 북한인민군총사령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부를 경유하여 하달한다.
제4항 연합지휘부는 작전과 관계되는 모든 교통 수송(도로, 철도, 항구, 비행장, 유선, 무선 전화와 전보 등), 식량조달, 인적, 물적 동원 등의 업무를 지휘할 권한을 가진다. 연합지휘부의 이러한 모든 명령은 그 관할 관계를 보고 북한인민군 총사령부 혹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를 거쳐 하달한다.
제5항 전방지원을 위한 동원, 보충훈련 그리고 지방행정 회복 등, 북한의 후방지원업무에 속하는 모든 일은 연합지휘부가 실제 상황과 전쟁 수요에 따라 북한정부에 보고하고 건의할 수 있다.
제6항 작전과 관계되는 모든 신문보도는 연합지휘부가 지정한 기관이 통일하여 책임지고 편집 심사한 후 북한 신문기관으로 보내 북한인민군총사령부 명의로 통일적으로 배포한다.
비교분석의 편의를 위해 위 합의문을 ‘12월합의문’이라 부르고, 군대파병 전 毛澤東이 제시했을 것이라는 내용을 ‘1차요구’라고 명명하겠다. 앞서 제시된 ‘1차요구’ 8개 항목의 조건들은 사실상 제5항, 제6항, 제8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12월합의문’에 반영돼 실효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연합사령부 및 참모부 구성에서 장은 중국 측이 맡고, 북한 측은 부를 맡는다”는 ‘1차요구’의 제1항은 ‘12월합의문’의 제1항과 제2항에 그대로 반영됐다. ‘1차요구’시에는 “연합사령부 및 참모부 구성”을 전제하고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대한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12월합의문’에는 중조사의 구성원과 지휘경로가 구체적으로 명기된 게 다를 뿐이다.
중조사의 “구성원은 중국측이 과반수를 가지고, 의견이 다를 때는 중국 측의 의견에 따른다”는 ‘1차요구’의 제2항과 “동 기관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어로 한다”는 제3항은 북한 측에서 연락조장으로 중국어 실력이 뛰어난 대좌급 장교를 선발해 중조사에 보냈듯이 실제로 그렇게 실행된 셈이다. “북한 측은 중국군의 동의 없이 화전과 관련해 어떠한 국가와도 협정을 맺지 않는다”는 ‘1차요구’의 제4항은 나중에 그대로 휴전협상 과정에서 실제로 지켜졌다.
“북한 내에서 중국군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우선적으로 북한 측이 무료로 보장한다”는 ‘1차요구’의 제5항은 ‘12월합의문’의 제5항에 완화된 형태로 반영돼 있다. 즉 북한당국이 “중국군이 필요로 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우선적으로” 제공한다는 어구 는 중국 측이 북한 측에 중국군이 필요로 하는 수요를 “보고하고 건의할 수 있다”라는 말로 대체돼 쌍방 합의를 유도하는 형식으로 수정됐다. “북한 내에서 중국군은 북한법률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1차요구’의 제6항은 ‘12월합의문’에는 없다. 아마도 이 조항은 북한주권에 저촉되는 치외법권 문제였기 때문에 제외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의 모든 철도, 도로 및 항만 시설을 중국군이 관할하도록 요구한 ‘1차요구’의 제7항도 ‘12월합의문’ 제4항에 “비행장, 유선, 무선 전화와 전보”까지 명기돼 관할 범위가 확장된 형태로 반영됐다. 단, “필요할 경우 중국군은 북한주민에 대해 검색 및 체포, 취조를 할 권한을 가진다”는 ‘1차요구’의 마지막 제8항은 ‘12월합의문’에 명기되지 않았다. 이 점 또한 주권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배제된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 측이 제8항의 요구대로 중국군의 “북한주민에 대해 검색 및 체포, 취조를 할 권한”을 허락했는지는 현재로선 좀 더 신중히 검토해봐야 할 과제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로 볼 때 毛澤東이 사전 북한 측에 이러한 요구조건을 제시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먼저 흔히 타국의 전쟁에 참전한 국가와 파병지원을 요청한 국가들 사이에 문제시될 수 있는 사안인 ‘1차요구’의 제5․ 제6․ 제7항이 모두 당시 중국지도부에게 북한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불가피하게 필요한 양해사항으로 인식됐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중국 측은 “북한 내에서 중국군이 필요로 하는 것”이 전쟁수행상 필요한 군수, 보급품 및 수송이라면 “북한 측이 무료로 보증”할 수도 있고, “북한의 철도, 도로 및 항만 시설”도 “중국군의 관할 아래에” 둘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 민사작전 수행시나 혹은 적이 북한주민들 속으로 잠입할 경우를 상정해 “필요할 경우 중국군은 북한주민에 대해 검색 및 체포 취조를 할 권한”도 잠정적으로는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국제법적으로 보면 이 요구들은 북한의 주권을 제한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김일성으로선 아무리 전시중이었고, 중국 측의 요구조건이 북한정권을 구원해주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해도 ‘1차요구’ 중 제1․ 제2․ 제4․ 제5․ 제6․ 제7․ 제8항의 내용은 모두 자신의 군사대권 혹은 북한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과연 주권침해를 표상하는 毛澤東의 ‘1차요구’를 받아들였을까? 김일성은 애초부터 줄곧 이 요구를 거부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11월 15일 高崗이 김일성에게 毛澤東이 향후 김일성 중심으로 노동당의 규율을 일신하도록 김일성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려줬지만 김일성은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11월 24일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다시금 보장된 스탈린의 의향이 담긴 전문을 받기 전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요컨대 스탈린의 지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다.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나자 그제서야 김일성은 중국 측의 ‘1차요구’를 약간 완화시킨 형태로 받아들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북한 측은 제6항에서만큼은 중국 측의 요구대로 허여하지 않았다. 또 제6항에 대해서도 “중국군이 필요로 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우선적으로” 제공하지 않고, 중국 측이 필요로 하는 수요를 북한 측에 “보고하고 건의”하는 절차를 거치게 해서 획득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중국군은 보급품 중 수요량이 비교적 많았던 채소, 말 먹이 풀, 연료, 땔감, 목탄, 야채 등 부피가 큰 물건들은 중국내에 물량이 부족한데다 수송력도 절약하기 위해 북한 현지의 물자를 이용했는데, 보통 연대별로 구역을 나눠 해당 지역의 북한정부기관과 협의해 통일적으로 구매하거나 생산해서 해결하게 했던 것이다.
또 식량을 차용할 경우에도 현지 북한 지방정부의 식량을 차용하고, 그것이 부족할 때에만 민간인에게서 식량을 차용한다는 원칙하에 차용 후에 보급품이 보충되면 차용분을 모두 갚게 만들었다. 이는 북한정권이 중국 측의 요구를 다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다.
전체적으로 보면, 파병 전 중국지도부가 제시한 요구조건이 합의됨에 따라 중국 측은 파병 전의 요구조건을 대부분 반영시켰거나 관철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중국 측은 군사작전과 관계되는 신문보도에 대해서도 모두 중조사가 지정한 기관이 통일적으로 책임지고 편집, 심사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전시 언론까지 장악했다. 이것이 나중에『志願軍新聞』을 설립한 배경의 하나다.
만약 중국군의 파병이 이러한 요구조건들을 북한지도부가 받아들인 결과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본고에서 이른바 중국 측의 ‘사전 제안설’을 제기한 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게다가 앞서 제시된 다섯 가지 가능성 가운데 1950년 5월이었든, 아니면 10월 8일이었든, 그것은 모두 중국군의 파병 전이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또 ‘사전 제안설’을 뒷받침하는 선행연구도 없지 않다. 이 연구는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기 전에 먼저 북한군의 지휘권과 북한에서의 우월적 특권을 손 안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12월합의문’ 제1항의 내용대로 중조사를 설립해 작전지휘권을 단일화 한다는 것은 그 시점까지 김일성이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행사해오던 군권을 중국군지휘부에 이양해주는 것을 의미했다. 더군다나 나머지 5개 항의 내용도 북한주권을 일정 부분 제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내 권력 장악을 둘러싼 김일성의 권력투쟁과 깊숙이 결부돼 있었다. 다음 장은 이에 관한 세세한 논구로 채워질 것이다.
Ⅳ. 쟁점 2 : 설립을 둘러싼 스탈린, 毛澤東, 김일성의 입장
중국군의 북한 진입 후 10월 21일의 최초 대면에서 彭德懷와 김일성은 중북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과 중조사 설립을 거론했는가? 이 점에 관한 당사자들의 ‘기억’과 훗날 연구자들의 ‘해석’은 긍정과 부정 두 가지로 나눠져 있다. 즉 작전지휘권 통합문제는 거론되지 않았고, 단지 북한군과의 협조문제를 논하면서 김일성이 彭德懷에게 당분간 중국군 단독으로 전투에 나서줄 것을 요구했는데, 彭德懷가 이를 받아들인 결과 더 이상 직접적인 논의가 없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양분된다.
중국학계의 沈志華는 柴成文의 회고와 彭德懷의 기억에 의거해 작전지휘권 통합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렇게 된 이유로 이종석은 당시 북한군이 심각한 손실을 입어 주력부대는 38도선 이남에서 북으로 철수 중이었고, 신편부대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훈련, 정비 중이었기 때문에 미처 중국군과 북한군과의 통일적인 지휘기구 설립문제가 의제로 상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종석은 또 중국군의 참전이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를 두고 중소 간에 난항을 겪다가 급히 이루어졌는데다 작전지휘권 문제를 두고 북-중-소가 협의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중국 측은 내심 처음부터 통일적인 지휘체계가 형성되길 원하기는 했지만, 일단 박일우를 북한 측의 전권대표로 중국군사령부에 파견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마무리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洪學智의 회고록에는 彭德懷가 처음에 작전지휘권 단일화 문제를 거론했지만 중조사 설립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기술돼 있다. 10월 22일 김일성과 毛澤東이 중북 양군의 협조문제, 양군의 지휘계통의 통일문제를 논했다고 기록돼 있다. 彭德懷가 김일성에게 중국수뇌부의 전략방침과 배치를 알려줌과 동시에 북한군의 현황을 물으면서 중조사를 설립해 대유동에 두기로 결정했다는 다른 주장도 있다.
중국 측 자료에는 대부분 중국 측이 중조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한 것은 11월 7∼8일부터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제1장에서 세밀하게 고찰한 결과 중국군의 입북 전에 이미 북한 측에 작전지휘권 단일화의 필요성과 요구조건들이 전달됐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확인됐다. 이는 중국 측이 처음부터 김일성에게 강력하게 통일적인 지휘체계 구성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는 주장과 배치된다.
나는 김일성-彭德懷 두 사람 사이에 만나자마자 중북 양군의 작전지휘권 통합 내지 단일화 문제가 거론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당시 거론된 내용 중에는 중국군에 대해 북한군이 어떻게 후방보급을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게 될 북한당국과 북한군의 거취와 훈련 등 화급을 요하는 현안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작전지휘권 통합문제가 거론됐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물론 김일성은 두 가지 사안 모두에 호응하지 않았고, 단지 중국군만 전투에 나서주길 요청했을 뿐이다.
김일성이 그렇게 대응한 까닭은 작전지휘권 통합문제를 피해가려는 심사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혹은 김일성이 내면적으로 중국군의 파병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점으로 보아 그는 이때 彭德懷에게 이 문제를 북중 양국의 외교적 경로를 통해 처리하자고 제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제2장에서 살펴본 대로 周恩來가 彭德懷에게 작전지휘권 통합문제를 군과 군 차원이 아니라 당 대 당, 국가 대 국가 간의 문제로 접근하라고 한 것에 대한 호응일 수 있다.
彭德懷가 작전지휘권 단일화를 거론한 것은 毛澤東의 파병방침 내지 조건 가운데 하나였을 수 있다. 작전지휘권 통합 없이 수행된 중국군의 제1차 전역 시 중북 양군간의 협력 미비, 상호 약정 등의 협조체제가 이뤄져 있지 않아 양군이 서로 오인 공격하는 사건이 빈발했다는 점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상황에서 중국군이 북한군과의 연합작전을 펼쳐야 할 경우 작전상 어떻게 지휘계통을 통일하고 유지 및 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던 것이다. 야전에서 전쟁지도를 총괄하는 彭德懷로선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긴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전역에서 생포한 유엔군포로 처리문제도 공동으로 긴급히 해결해야 될 협의의 안건에 포함돼 있었다. 이 같은 폐단의 재발방지와 북한군 전투능력의 회복에 따른 전투참여의 필요성과 포로처리문제 등은 중국지도부에게 양군의 통일된 작전지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 사안이었다.
중국 측이 작전지휘권 단일화를 제의한 이면에는 전쟁수행의 효율성 제고, 중국군의 인명피해 최소화라는 원론적 동기가 내재돼 있을 수 있다. 그 만큼 북한지도부에 제기한 중국 측의 사전 요구가 절실하고 적실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양한 전쟁경험이 축적된 데서 비롯된 예견이었다. 제1차 전역 후 북한군을 작전운용 대상에 포함해 통일적으로 지휘할 필요성을 체감한 중국군지도부 측이 주도적으로 작전지휘권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김일성에게 의사를 타진하면서 설립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그런 배경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건 김일성이 초기 한동안 이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북한군 제6사단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주둔지에서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고 해당 병력을 모두 철수시켜 버렸다.
그 후 북한군 제7사단이 중국군 제125사단과 마주쳤을 때도 彭德懷가 재차 북한군의 해당 사단 병력을 이동시키지 말고 연합작전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김일성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이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사령부가 중국군사령부 부근에 있기 어렵다는 구실로 곧 彭德懷와 만나 작전문제를 의논하겠다고 하면서 소극적 자세로 일관했다.
그러면 김일성은 왜 작전지휘권 단일화 문제를 회피했을까? 혹은 김일성은 왜 통일적인 지휘체계 수립에 미온적이었을까? 10월 21일부터 11월 하순까지 그가 중국 측과 접촉한 기간 북한정권이 곧 붕괴될 듯한 위기상황에서도 작전지휘권의 통합을 반대한 내면에는 몇 가지 복합적 이유가 존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먼저 중국의 군사지원이 절실했음에도 내심으로는 중국세력을 배제하고 전쟁을 이끌려고 한 김일성의 이율배반적 심리를 지적할 수 있다. 김일성은 애초부터 중국이 참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중국의 도움 없이 남침전쟁을 치르려고 했었다.
이 때문에 그는 6․25전쟁 도발 전과 전쟁 초기 毛澤東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한국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기 직전인 1950년 9월 하순까지 줄곧 毛澤東의 지원의사를 외면했다. 이는 북한 측이 중국지도부에 전쟁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전황을 파악하려는 중국군사관찰단의 입북을 거부한 사실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김일성이 전쟁초기부터 적의 후방상륙을 경계해야 한다는 毛澤東의 조언을 묵살한 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전쟁 전 김일성이 毛澤東의 군사지원 의사를 외면한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는 중공과 중국인을 불신하였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소련의 지원만으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만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일찍이 만주에서의 항일 빨치산 시절 자신이 중국인 무장단체에 가담했던 1930년대 초반부터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인 유격대원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같은 진영의 동지적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소속의 한인들에 대해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에 따른 차별대우도 심했다. 이로 인해 중국인과 한인 사이의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심지어 한국인 빨치산 대원들 중 일부는 중국인 동료의 누명과 모함으로 처형당하거나 일본인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아 고문에 처해지기도 했다.
결국 적지 않은 한인들이 이에 실망하거나 분격한 나머지 항일연군을 떠나기까지 했다. 1930년대 중반 중공 동만주 항일유격대 내부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모략공작에 말려 ‘반민생단 투쟁’이 일어났을 때도 중국인들이 “반일유격대의 금싸라기”라고 추켜세웠던 조선인 중견 간부들이 모조리 피의 숙청을 당했는데, 이때 친일반동, 일제의 고정간첩 등의 죄명으로 살해된 수가 무려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살아남아 나중에 항일연군의 지도급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그러한 사건들의 와중에서 직접 중국인들의 비열한 행위들을 목도한 기억이 있던 그로서는 중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일찍부터 소련경사 정책을 추구하면서 전적으로 스탈린을 추종했던 김일성에게 스탈린은 6․25전쟁의 절대적 후원자였다. 毛澤東이 보기에 스탈린은 북한을 소련의 식민지이거나 혹은 속국으로 보고 동구권 국가들을 대하듯이 대했으며, 김일성에 대해서는 태상황으로 군림했다. 1950년 5월 중순 북경 방문시 毛澤東이 제시한 군사지원 의사를 김일성이 사양한 것도,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북으로 퇴각하고 유엔군의 북진이 임박해진 동년 9월 21일의 노동당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김일성이 중국군의 파병을 반대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북한지도부가 정치국 회의를 열어 중국에 파병을 요청할 것인지를 논의한 이 날, 스탈린의 개인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자하로프(Matvei V. Zakharove) 장군도 김일성에게 중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내 여타 박헌영, 김두봉과 같은 지도적 인물들이 중국 측에 지원을 요청하자는 제안에 즉각 찬성한 것과 달리 김일성은 중국 측에 파병을 요청할 것인지에 대해 며칠 간 고심했다.
그러다가 결국 9월 말에 가서야 소련과 중국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9월 28일 긴급히 소집된 노동당 중앙정치국에서 소련과 중국에 군대파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먼저 9월 30일 스탈린에게 긴급 지원 요청 서한을 보내놓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는 이 서한에서 북한군 자체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면서 스탈린에게 미군이 38도선을 돌파할 경우 소련군을 직접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의 군대로 구성된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북한을 지원해주도록 간청했다.
김일성이 중국의 군사개입을 반대한 것은 중국 보다 강자이자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스탈린을 추종하겠다는 이념적, 군사적, 외교적 이유 외에 대략 서로 맞물려 있는 두 가지 현실적 동기가 작용된 듯하다.
하나는 긍정적으로 평가해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김일성이 임진왜란 시 한반도로 들어온 명나라군대 때문에 조선이 갖가지 곤란을 겪었던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설령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중국군을 철수시키기가 쉽지 않고, 그로 인한 정치적, 군사적 종속과 폐해를 우려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군을 불러들이면 위기를 극복하고 승전한다고 해도 한반도적화에 대한 자신의 공이 삭감될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패했을 경우는 중국 측으로부터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할 가능성을 직감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군권을 놓치면 김일성 자신의 권력유지가 보장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던 정치권력문제와 맞물려 있었던 점도 그가 작전지취권 통합을 반대한 주요 이유였다. 김일성은 중국군이 북한에 들어온 이상 국가주권을 의식해 내심 자신이 중북연합군을 지휘하기를 희망했으며, 적어도 북한군만이라도 계속해서 자신이 지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彭德懷는 북한지도부의 군사지휘 능력을 의심한 나머지 중국군 지휘부가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0월 1일 스탈린이 毛澤東에게 중국의 참전을 요청하면서 군사지휘는 중국 측이 맡아야 한다고 한 것은 彭德懷가 중북연합군 통합지휘부 창설을 제의하고 중북 양군의 통합지휘를 요구한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중국군의 개입은 친중적인 ‘연안파’들이 득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그것은 바로 권력장악 문제와 직결되는 바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의 당내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북한엘리트 집단 내 연안파의 세력 판도를 잘 알고 있었던 김일성은 이 점을 우려했을 수 있다.
더군다나 연안파 내지 반김일성파는 이미 한 차례 중국을 끌어 들여 김일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바 있기 때문에 김일성에겐 단순한 기우가 아닐 수 있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노동당 내 반김일성파들이 자파 인물들을 북경에 보내 중국지도부에게 중국군의 파병을 요청함고 동시에 패퇴에 대한 책임을 지워 김일성을 제거하려고 한다면서 지원해주기를 요청한 바 있다. ‘패퇴’란 김일성이 부대를 너무 늦게 인천지역에 투입한 결과 서울방어에 실패한 것을 가리켰다.
김일성 제거에 나선 반김일성파의 주모자는 박헌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 북한내부 권력사정에 정통한 북경의 한 북한소식통에 의하면, 박헌영은 1950년 9월말 경 박일우를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지원을 받아 반김일성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친중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헌영의 이 계획은 毛澤東의 지원 반대와 적극 만류로 무산됐고, 박헌영은 毛澤東의 군사지원만 약속 받은 채 귀국했다고 한다. 毛澤東이 박헌영의 쿠데타 계획에 반대한 이유는 전쟁 중이라 그것이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북한정권에는 김일성 외에는 대안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북한소식통은 당시 毛澤東과 박헌영이 나눈 대화록이 중국외교부 檔案館(문서보존서)에 비밀해제가 되지 않은 채 1급 비밀로 보관돼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의 사실 여부와 별개로 당시 북한권력층 내부에는 반김일성 인물들이 적지 않게 존재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종석이 지적했듯이 김일성으로선 이들이 중국을 등에 업고 독자적인 세력화로 나아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박일우를 중국군사령부에 보내 중국군과 연락장교, 정보교환 역할만 유지하게 하고, 심지어 중북군의 두 최고 사령부가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마저 원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의구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김일성 자신의 부대가 괴멸되다시피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수십만 명의 중국군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작전지휘권 통합은 곧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중국군지휘부에게 넘겨주게 됨을 의미했다. 더군다나 10월 들어서부터 노동당 내에서 남침실패와 패퇴에 대한 책임과 전쟁수행방식을 놓고 표출된 책임공방이 권력투쟁의 형태로 가열화 되던 상황에서 군사지휘권을 중국 측에 내주면 그것은 곧 중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연안파에게 정치권력을 내주게 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으로 들어간 연안파가 국가 권력을 잡도록 毛澤東이 지원하고자 했었는지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 획득은 쉽지 않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중국지도부에게는 연안파가 북한권력을 장악한다면 나쁠 건 없다. 이런 大局的 견지에서 중국지도부는 먼저 김일성의 비호세력이 돼준 북한의 소련군사고문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작전지휘권 통합과 작전방침 관철에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지도부는 그들이 중국 측의 작전지휘권 통합과 지연전술을 반대하기도 하는 등 김일성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봤다.
彭德懷가 11월 11일 毛澤東의 승낙 하에 ‘3인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작전지휘권 상실을 우려해 양군의 작전지휘 통합을 반대하는 김일성과 소련군사고문들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또 彭德懷가 소련 측 대표로 슈티코프만 참석시킨 것도 먼저 군사작전에 무조건 계속 남진공격만 주장하는 바실리예프를 작전지휘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중국 측에 찬성의사를 밝히지 않은 뒤 11월 23일까지도 작전지휘권 통합과 중조사 설립에 묵묵부답해오던 김일성이 하루 이틀 사이인 11월 24일부터 돌연 중조사 설립을 동의하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자발적 의지의 변화였을까? 아니면 모종의 외압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스탈린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던 김일성이 일련의 새로운 상황에 대응해 중국 측과 타협점을 찾으려고 한 결과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새로운 상황’이란 스탈린이 북한 내 소련군사고문들을 경질하면서 김일성에게도 중국군의 통합지휘권을 인정하라고 권고했는데, 김일성은 스탈린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실패에 대한 죄과를 추궁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는 상황을 말한다. 그 내막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크게 스탈린의 압력과 毛澤東의 김일성에 대한 배려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구체적인 맥락은 다음과 같다.
스탈린의 압력과 관련해 먼저 彭德懷와 김일성 및 바실리예프 사이에 작전방침을 둘러싸고 자주 극명하게 표출되던 의견대립이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일로에 있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전방침에 관한 견해 차이와 작전계획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한 상호 마찰과 충돌은 중국군 지휘관들과 소련고문들 사이의 의사소통 부정확에서 초래된 오해로 더욱 증폭되기도 했다. 소련어 통역을 맡은 毛岸英이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한 뒤 적절한 통역자가 없어 의사가 잘못 전달되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다. 언어소통 문제는 소련어가 유창했던 徐介潘이 중국군 사령부의 판공실 주임 겸 통역으로 전입되고 난 후 해결됐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전쟁수행방침이 달랐기 때문에 양자 간의 충돌은 불가피했으며, 그로 인한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예컨대 속전속결을 강조한 김일성과 바실리예프는 중국군이 제1차 전역의 승기를 몰아 휴식과 부대정비 없이 남진을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중국군이 적을 추격하기 위해서 즉각 제2차 전역을 발동해 청천강 이남으로 계속 전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후방으로 몇 십 km를 퇴각해 휴식과 부대정비 후에 제2차 전역을 개시할 생각이었던 彭德懷의 작전방침과 중북연합작전에 반대한 것이다.
彭德懷는 11월 4일 이 내용을 북경에 보고했다. 상호 의견 대립으로 인해 공산진영 지도부 내 김일성-소련고문관 측과 중국지휘부가 서로 적지 않은 마찰을 빚고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진 것이다.
한편, 스탈린은 무조건 남진 강행을 부르짖는 저돌적인 소련군사고문관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불만은 소련군사고문들이 ‘무능하다’는 비난으로 표현됐다. 스탈린에게 소련군사고문들과 소련대사는 중국지도부의 작전방침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간주됐다. 그는 한반도 주둔 공산진영 내 군사 지휘부의 분열을 막고, 중국군으로 하여금 계속 미군에 대항케 하려면 장기전으로 가려고자 한 중국 측의 손을 들어줘야 했기 때문에 ‘무능력자’들을 경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전쟁은 불가피하고, 소련이 중심이 돼 자본주의진영에 대항해야 한다는 자신의 세계전략이 소련공산당 내에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중국을 활용해야 한다는 게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스탈린이 김일성과 소련고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한 毛澤東의 11월 13일자 전보를 받은 시점은 그런 상황이었다.
스탈린이 북한 주재 소련군사고문들에게 작전지휘에 참여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도 그런 배경이 작용한 결과다. 그는 11월 6일 바실리예프와 슈티코프를 남한에서의 전쟁지도의 실패, 서울 및 평양 상실 등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교체했다. 바실리예프를 대신할 인물로 라주바예프 중장을 북한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 군사고문단장, 소련대사관의 무관 등 세 가지 직책을 겸임케 해 북한에 들여보냈다.
새로 부임한 라주바예프는 11월 18일부터 대사 겸 군사고문 직무를 시작했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전장의 자국 대사와 군사고문단장을 교체한다는 것은 용단을 내려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스탈린의 경질 단행은 중국군 지휘부와 소련군사고문들 사이에 존재한 작전방침상의 견해 차이와 이로 인한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걸림돌을 제거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내재돼 있었다.
11월 21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의 조치로 소련 육군성의 명령을 통해 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가 곧 소환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자 김일성은 “어쩌겠습니까. 아마 나도 총사령관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은데요”라고 동석한 슈티코프와 박헌영에게 말했다. 이 발언은 자신도 경질될 수 있다는 점을 감지한 위기의식으로 해석된다. 스탈린은 슈티코프에게 보낸 전보와 비슷한 내용의 전문을 바실리예프에게도 보내 김일성에게 통지했다. 그러나 김일성에게는 내용 중 일부만 전달됐다.
전문내용이 온전하게 전달된 시점은 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김일성을 중심으로 노동당 내 규율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11월 15일이었지만, 슈티코프는 이 전문(N0. 5583)을 “7일”이나 늦게 김일성에게 전했다. 뒤늦게 이 전문을 받아든 김일성은 내심 자신도 경질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문서가 매우 중요한 것”이라면서 정치위원들에게 스탈린의 지시사항을 읽어줄 요량으로 내용을 옮겨 적었다. 슈티코프는 이 전문이 김일성에게 노동당 내 규율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과 전문내용을 종합하면, 이 시기 김일성 자신도 권좌에서 물러날 뻔했으나 스탈린의 재신임으로 구제된 셈이었다.
전문은 한 마디로 작전지휘권을 통합하라는 스탈린의 권고였다. 권고를 받자 김일성은 11월 24일 슈티코프에게 “중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중조사 창설을 반대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그는 박일우에게 彭德懷와 연합사령부를 조직하는 문제를 논의하라고 지시했었다고 한다. 또 彭德懷가 구체적인 문제는 전혀 얘기하지 않았고, 高崗과의 회의에서 중조사 창설은 중국군의 제2차 전역 후에 가능하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중조사 설립이 지연되고 있는 책임을 彭德懷와 박일우에게 돌린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스탈린의 권위를 이용했으며, ‘스탈린의 전보’를 등에 없고 중국의 강요에 따르지 않고 스탈린의 중재 하에 지휘권 단일화에 임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세세하게 논구한대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중재를 요청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중재가 된 스탈린의 압력도 毛澤東의 요청 그리고 중국을 대미 견제에 이용하려는 스탈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毛澤東의 김일성 배려와 관련해서 작전권통합을 기피하는 김일성의 우려와 불만이 무엇인지 간파한 중국지도부가 먼저 그의 우려를 덜어준 것도 김일성의 변화를 이끌어낸 요인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毛澤東의 그런 의지는 11월 15일 彭德懷, 김일성, 슈티코프가 자리를 같이 한 ‘3인위원회’ 회의석상에서 高崗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노동당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당과 인민을 결속시켜야 한다”고 한 毛澤東의 말이 그것이다. 毛澤東이 김일성을 노동당 정치사업 강화의 주도자로 추켜세운 건 김일성의 우려를 의식한 대응으로 해석된다. 노동당 고위층 내에 남침결정과 패퇴에 대한 책임공방이 벌어지고 있던 민감한 시점에 김일성에게 당내 규율과 기강확립을 주도하도록 했다는 것은 곧 그에게 당권을 재확인해준 조치와 다를 바 없다.
실제로 김일성은 이 시기 스탈린과 毛澤東으로부터 인정받은 재신임에 힘입어 11월 20일과 21일 이틀 연속 군사회의를 열어 몇몇 사단장과 군사령관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져야 할 남침실패의 책임을 당내 정적들에게 덮어씌워 그들을 제거했다. 또 11월 24일 이전, 김일성은 노동당 정치위원회의 석상에서 중국군사령부의 북한군 부사령관 직에는 연안파를 빼고 빨치산파 동료인 김책을 앉히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슈티코프는 김책이 전선사령관으로서 남진시 북한군 3개 사단에 대한 명령을 집행하지 않은 전술상의 과오를 범한 사실을 이유로 그가 부사령관 직위에 임명되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슈티코프는 박일우와 김웅 모두 중조사 부사령관으로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했고, 김일성도 부사령관으로 나서면 당과 정부의 지도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라는 이유로 적절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슈티코프의 조언을 접하자 김일성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소집해 적합한 인물을 선정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의가 원래 계획보다 앞당겨져 11월 29일에 소집됐다. 회의 주제는 당규율 강화, 북경에 보낼 대표선정, 중국군사령부의 북한 측 부사령관의 확정, 북한군지휘부 재심의, 중조사 창설문제, 남한지역 적후방에서의 유격투쟁 강화 등이었다.
이 대회에서 당 지도부는 김일성의 북경방문을 승인했는데, 환언하면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와 毛澤東이 자신을 북경으로 초청한 사실을 당 내외에 현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데 활용했다. 특히 중국지도부가 김일성의 당내 규율을 주도할 기회를 마련해줌과 동시에 김일성에게 북경방문을 요청한 것은 그의 당내 권위를 인정하고 정치권력을 보장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돼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毛澤東은 중국에 대한 김일성의 불만과 의심을 가라앉히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중국군에게도 그에 대한 신뢰를 높이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두 차례의 전역에서 승리한 뒤 북한군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하는 오만함을 보인 중국군 지휘관들을 자숙시키고 그러한 태도를 시정하라고 한 지시가 그것이다. 당시 북한군과 김일성은 중국군 지휘관들에 대해 불만이 작지 않았다. 그러한 반감이 바로 북한당국이 우군으로서 중국군의 군사지원 사실과 활약에 대해 아무런 선전도 하지 않은 이유였다. 중국군의 지원과 활약을 치켜 세울만 했음에도 아무런 선전을 하지 않은 것은 그 후에도 지속된 북한 당국의 일관된 특징이었다.
毛澤東이 북한주둔 중국군 지휘부에게 중국군의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라고 한 지시가 김일성과 북한군의 반감을 얼마만큼 누그러뜨렸는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지시에 의거해 12월 14일 彭德懷가 중국군 정치부의 “정치훈령”을 예하 부대들에게 하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군은 북한을 애호하고, 북한주민들의 식량을 마음대로 차용하지 말고 반드시 규정된 절차를 밟도록 하는 등 기율교육을 강화했다. 그리고 기율을 어겼을 경우 적시에 혁명기율로 제재를 가하기로 했다. 각 군단, 사단, 연대 당위원회별로 각기 군중기율 조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해 북한주민들과 단결하고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중국수뇌부로부터 지지를 약속 받음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한 김일성은 남한에서 올라온 북한군 패잔병이 3개 군단에 이르고, 어느 정도 전투력이 회복돼가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12월 초 이제는 오히려 洪學智에게 애원하다시피 중국군지도부에게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시켜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북한군 지휘부는 패잔병으로 남한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북한군 9개 사단 9만 명 중 대부분이 북한으로 올라와 원대 복귀하기 시작한 12월 초 이전까지는 북한지역에서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했다. 10월 중순부터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 결과 이 시기는 북한군 제4사단을 주축으로 재편된 제1군단과 중국군의 제2차 전역 중 남한에서 북으로 올라와 북한군 주력군에 합류한 제2군단과 제5군단을 더해 북한군은 제1선의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병력이 총 3개 군단 14개 사단 7만5,000명을 넘게 될 즈음이었다. 이 전에 비해 김일성 자신이 확실하게 운용할 수 있는 3개 사단 병력에 비하면 2.5배가 증가된 셈이다.
김일성의 참전요청은 전투력이 회복되고 있던 북한군의 전력이 중국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이 된 상황에 즉응하는 조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김일성이 중국수뇌부의 지지를 받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Ⅴ. 맺는 말
본 연구로 중국수뇌부가 중국군파병 전에 이미 파병에 필요한 각종 군사적, 정치적 조건을 북한 측에 제시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사실이었을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사실 대규모 병력을 타국에 주둔시켜 전쟁을 수행하게 할 경우 국가 차원에서 파병 전에 미리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하는 건 상식에 속한다. 당시 중국지도부도 그런 상식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측에서 요구한 조건은 승전을 보장하는 불가피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북한의 주권과 김일성의 군권은 물론, 나아가 정치권력까지 적지 않게 제한한 내용이었다. 이는 주권과 군권이 침해당할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김일성 개인의 정치적 몰락 가능성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거부하거나 묵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군 입북 후에도 毛澤東은 彭德懷를 통해 김일성에게 10월 하순에서 11월 하순에 이르는 달포 사이에 최소 5회(10월 21~22일, 11월 7일, 11월 15일, 11월 16일, 11월 23일)나 중북 양군의 군사작전권을 통합하자고 요구했다. 이것은 곧 파병 전에 요구한 조건을 받아들이라는 압박에 다름 아니었다.
입북 초기 중국군지도부는 이 문제를 김일성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작전권통합 거부는 지속됐다. 중국 측의 사전 요구사항을 용인했을 경우 북한의 주권이 심각하게 침해될 수 있었고, 자신에게도 기존에 행사해오던 군권이 박탈당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노동당 내에는 남침실패에 대한 책임공방이 불거져 나온 상황에서 군권이 박탈되고 스탈린의 지지를 잃게 되면 자칫 상당한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있었다. 김일성에게 그것은 양날의 칼이자 양립불가의 모순이었다.
따라서 김일성으로선 애초부터 작전지휘권 통합과 이를 현실화 시킬 중조사를 만들 생각이 없었고, 단지 양군이 각기 독립적인 형태로 작전을 수행하고 필요에 따라 작전협조를 행하겠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 주장은 중북 양군이 각기 참모를 파견해 통신연락, 정보교환 역할을 하도록 하면서 양군 사령부가 통합하는 형식에는 김일성이 동의하지 않은 사실에서 입증됐다. 또한 그는 彭德懷에게 중국군 단독 전투를 요청했고, 실제로 중국군은 제1∼2차 전역을 단독으로 치렀다.
문제는 제1차 전역 후 제2차 전역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는 전쟁지도에서 나타났다. 즉 여세를 몰아 계속 남진공격을 가하자는 김일성-소련군사고문들과 부대정비와 휴식을 취한 후 남진하자는 彭德懷의 의견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중국군이 두 차례의 전역에서 모두 승리함에 따라 미군과 한국군의 북진이 저지되고 청천강 이남으로 밀려나자 속전속결을 바랐던 김일성은 중국군이 서전의 승세를 몰아 휴식 없이 계속 남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주재 소련군사고문들이 김일성의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반면 彭德懷는 김일성과 毛澤東의 강공 지시와 달리 장기전을 예상하면서 병사들의 휴식과 부대정비 후 재공격 하자는 입장에서 지연전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이처럼 전쟁방침의 상이가 중국군과 김일성 및 소련군사고문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김일성은 완고하게 기존 입장을 견지했다. 전쟁을 통괄하는 彭德懷의 눈에는 그들이 실제 병사들과 보급상태를 무시하고 무턱대고 공격만 하자는 성급하고 저돌적인 주장으로 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그로서는 제거되지 않으면 전쟁지도와 수행이 난관에 봉착할 수 있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毛澤東은 스탈린의 힘을 빌려 김일성, 슈티코프와 소련군사고문들에게 중국군과의 작전지휘권 일원화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소련 측 인사들의 ‘전향’에는 얼마간의 시간차가 존재했다. 즉 슈티코프는 11월 15일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즉시 彭德懷에게 양군 작전통합사령부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의사를 피력했지만, 김일성은 그 전문을 받기 전까지는 여전히 가타부타 입장을 밝히지 않았는데, 그것은 곧 부정한다는 의미였다.
김일성이 찬성으로 돌아선 것은 “7일” 뒤인 11월 23일 혹은 24일 이후부터였다. 毛澤東이 高崗을 보내 김일성이 우려하는 바를 해소해주겠다고 해도 김일성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일성에 대한 재신임을 전제로 한 스탈린의 지지가 毛澤東의 지지 보다 더 우선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마음을 바꾸게 만든 최대 동인으로서 김일성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우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중미 대결이라는 소모전을 지속시키겠다는 자신의 전략적 목적을 지속시키고자 중국 측의 장기전 전쟁방침이 옳은 것이라고 인정했다. 동시에 김일성과 소련군사고문들이 작전지휘권 통합을 찬성하도록 해주라는 毛澤東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침실패와 평양 일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북한의 소련대사와 군사고문들을 철직시켰다.
스탈린은 이 때 김일성도 함께 제거의 대상으로 고려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성 역시 스탈린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직감했을 것이지만 스탈린은 소련인들만 소환하고, 김일성은 대안 인물 부재를 이유로 재신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전지휘권의 통합을 요청한 毛澤東의 의지를 담은 스탈린의 지시는 김일성에게 바로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스탈린의 지시 외에 김일성의 찬성을 이끌어낸 간접적인 요인은 또 있었다. 김일성이 군권을 중국군지휘부에 양보하면 생겨날 수 있는 상황, 즉 김일성의 권력이 박헌영이나 혹은 중국의 비호 속에 있는 연안파 등 이른바 반김일성파 세력에게 탈취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毛澤東이 불식시켜 준 사실이다.
이 점은 멀리 중국군 파병 전 김일성이 두 차례나 중국 측에 대한 지원요청을 강력하게 반대한 까닭을 설명할 수 있다. 즉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데다 중국의 의도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김일성은 이러한 중국 측의 파병과 파병조건의 요구로 인해 권력 상실이 현실화될 것을 크게 우려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으로선 당내 권력을 확실하게 보장 받기 전에 군권을 이양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연안파 등 반김일성파에 밀려 유엔군과 한국군의 인천상륙에 대한 저지 실패와 38도선 이북으로의 퇴각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권좌에서 밀려나야 할 위험천만한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김일성과 彭德懷 두 사람이 합의를 보지 못한 이면의 원인이 존재했었다면 그것은 바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전쟁의 패배 책임공방과 얽힌 권력투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사이 중국수뇌부가 高崗을 통해 김일성에게 남침실패에 대한 책임을 규명할 당과 군내 규율 내지 기강정립을 빙자해 반김일성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보장해줌으로써 그의 우려를 제거해줌과 동시에 그의 노동당 내 정치적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해준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이 권력에서 배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완전히 불식되기 전에는 북경 측의 그런 배려를 믿지 않다가 스탈린의 재신임과 지시가 있자 비로소 중국군과의 작전협조에 적극 나섰고, 그것이 중조사 설립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조사 창설시 중북지도부 간에 조율된 약정과 파병 전 중국 측의 요구조건과의 비교분석에서 밝혀졌듯이 중국은 김일성이 처한 약점을 활용해 약간의 변경을 거치긴 했지만 처음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킨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군사작전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중국군이 가지고, 북한군지휘부는 후방지원업무를 전담하게 된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
한편, 우리는 휴식 후 공격을 재개하겠다고 한 彭德懷의 의사가 철회되고 남진공격이 계속된 사실과 김일성이 스탈린의 재신임과 지시를 자신의 당내 정치적 입지 유지와 정적들의 비난에 대한 반전에 교묘하게 활용한 민첩성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총괄하면, 중조사는 스탈린의 압력이 매개가 돼 김일성과 毛澤東이 각기 자신의 입장과 목적에 따라 공동의 접점을 찾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이 북한군 지휘권을 중국군지휘부에게 넘겨줌으로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사지휘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단지 북한군 최고사령관이라는 명목상의 직위를 가지고 당내 정치권력만을 행사하는데 만족해야 했던 것도 이 시기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열쇠말 : 한국전쟁, 6․25전쟁, 중조연합사령부, 중국군의 한국전쟁 파병, 중북연합군
Abstract
Reargument of Sino-North Korea Combined Forces Command :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Establishment
This research has found that it is probable that Beijing had demanded Pyong-Yang to meet the military and political terms which were necessary to serve the war before sending its troops. Although the terms which Bejing suggested to Pyong-yang before dispatching troops are inevitable requirements to ensure its victory, the terms contained some factors that would limit military and political power of Kim Il-sung, and eventually sovereignty of North Korea. The response of Kim Il-Sung at first was refusal. It was not surprising to see him refusing because accepting the terms meant the higher possibility of political downfall of Kim Il-Sung himself and infringement of national sovereignty and military control.
Despite Pyong-Yang refusing to accept the terms, Mao Zedong(毛澤東) constantly had suggested to Pyong-Yang, at least five times, to ally with Chines military commands through various communication routes, after the People's Liberation Army entered North Korea from late October to late November. Mao's suggestion meant coercive pressure imposed on Kim to accept the terms. However, Kim had no intention to build an alliance between the troops. As such, Kim merely responded to Mao that the two troops will conduct operations under each command and will cooperate with each other if needed.
Because Kim constantly denied the alliance, Mao tactically used Stalin's authority to make Kim, Shtikov, a Soviet ambassador to North Korea, and Soviet military advisers agree on the alliance of between China and North Korea. Stalin recognized China’s long-term war strategy for his strategic intention which contains a goal of continual power consumption of China and U.S. in Korean peninsula. At the same time, Stalin accepted Mao’s request which was to make Kim and Soviet advisers agree on the alliance and then he summoned the ambassador and military advisers to North Korea to make them take the responsibility of the failure of North Korea's invasion to South Korea. Kim, who had not even moved by Gao Gang(高崗) sent by Mao, agreed on the alliance because of the supports and pressure from Stalin who had started to trust Kim just then. Kim finally begun to cooperate to Mao after achieving supports from Stalin, which led to found the Sino-North Korea combined forces command; before then, Kim had distrusted Beijing due to his fear to be deprived of his power. It means that Stalin’s support was prior to that of Mao for Kim.
Meanwhile, it can be evaluated that China accomplished its original purpose by strategically using Kim's weakness, although the original terms had to go through a few modifications. In conclusion, the Sino-North Korea combined forces command was a result of political compromise between Kim Il-sung and Mao Zedong to achieve their own interests.
Key word :
Korean War, Sino-North Korea Combined Forces Command, Dispatching China troops to Korean War, Sino-North Korea Combined Forces
위 논문은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인『軍史』, 제95호(2015년 6월 15일)에 게재된 것입니다. 이 논문을 블로그에 올리니 원래 있던 각주가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軍史』, 제95호에 실린 논문에는 각주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갈고 닦음 > 주요 논문 및 서평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진핑 집권기 한중관계의 위기와 기회 (0) | 2017.12.27 |
---|---|
남․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초중고 역사교과서의 6·25전쟁 기술내용 분석과 전쟁기념관의 6·25전쟁 전시방향 (0) | 2016.05.22 |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지속과 변화 : 역사와 현실 (0) | 2015.04.06 |
해병대와 포항시의 相生的 협력발전 방향 연구 (0) | 2015.01.13 |
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참전 得失평가 : 一國史를 넘어 보편사로 (0) | 2014.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