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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초중고 역사교과서의 6·25전쟁 기술내용 분석과 전쟁기념관의 6·25전쟁 전시방향

雲靜, 仰天 2016. 5. 22. 07:06

남․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초중고 역사교과서의 6·25전쟁 기술내용 분석과 전쟁기념관의 6·25전쟁 전시방향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관)


목차


1. 머리말
2. 남한
3. 미국
4. 북한
5. 중국
6. 러시아
7. 일본
8. 결론에 대신해―전쟁기념관의 6·25전쟁 내용 전시방향


1. 머리말

본고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6·25전쟁에 참전한 남북한, 미국, 중국 등의 당사국과 간접 관련국인 러시아, 일본 등 6개국의 초중고 역사 및 세계사 교과서에 기술된 6·25전쟁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분석내용과 최근 6·25전쟁 학계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향후 전쟁기념관의 6·25전쟁 관련 전시방향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고는 하나의 논리적 등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특정사물과 사안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이해는 인간의 감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특정 목적을 가지고, 특정 대상에게, 특정 내용을 주입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체계적이고 계획된 행위와 그를 뒷받침하는 제도를 ‘교육’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한 특정사안에 대한 이해와 가치판단은 양자의 매개물인 각종 교재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사용 지도서, 괘도, 도책, 지도 등 각종 교육용 자료를 의미하는 교재 가운데 학교 교과서는 가장 핵심적인 도구다. 교과서를 통해 교육내용이 전달되고, 교육목표가 달성된다. 교육과정이 교육내용과 목표 또는 성취기준을 축약하여 제시하고 있다면, 교과서는 그러한 내용 또는 성취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교과서는 집필자가 교육과정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주제들을 다룰 때 양적 배분과 난이도의 배분, 설명방식들을 결정하게 된다. 즉 교과서는 “대리적 교육과정”인 것이다. 대리적 교육과정으로서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교육과정”(latent or hidden curriculum)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 표면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내용 이면에 은연중에 깔려있는 세계관, 사회관, 교육관 등 일련의 관점과 교육과정이나 혹은 교과서의 지식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문화, 이데올로기 등을 포함한다.

특히, 집필자가 국가(검정)인 경우 의도적이든 의도적이 아니든 국가가 지향하고자 한 교육목표의 제시를 통해 특정의 가치관 혹은 이데올로기가 주입되도록 편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역으로 특정 교과서상의 특정내용을 분석하면 특정 사안에 대한 인간 혹은 피교육자의 이해의 정도와 그에 수반한 가치관을 간취할 수 있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피교육자는 교과서를 통해 교육자가 인도하는 교육목적상 소기의 상태로 도달된다는 이유에서다.

상기 등식을 6·25전쟁이라는 특정사안에 적용하면, 피교육자로 하여금 6·25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하게 만드는가는 이를 기술한 관련 교과서가 어떻게 쓰여 있고, 어떻게 교육되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6·25전쟁에 대한 역사인식과 가치관이 교과서를 통해 재생산되는 것이다. 각국의 6·25전쟁에 대한 입장과 해석도 자국의 역사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 미국, 중국과 간접 관련국인 러시아와 일본의 청소년들과 나아가 일반 국민들은 6·25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을까?

한국인의 경우 6·25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정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국민 3명 중 1명은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6·25전쟁이 한국현대사뿐만 아니라 전체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민족적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발발년도를 묻는 질문에 “1950년”이라고 정확하게 답한 비율은 전체의 66%에 불과했다.

특히 20대 중 전쟁 발발년도를 아는 응답자는 46%뿐이었다. 28%는 “1945년”으로, 7%는 “1948년”으로, 12%는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있다. 또 “6·25는 누가 일으켰는가”라는 질의에 대해서는 66%가 “북한”, 14%가 “북한과 소련”, 11%가 “미국과 소련”, 7%가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미국과 남한”과 “남한”이라는 응답은 0%였다.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 것”이라는 답변은 나이가 적을수록 적게 나왔다. 20대가 45%, 30대 61%, 40대 74%였으며, 50대 이상이 82%로 가장 높았다.

이렇듯 자신의 비극적 역사에 눈이 감긴 우민이 국민의 다수가 된 이유는 이들이 받은 6·25전쟁 관련 교육의 비중저하와 시대적, 사회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최근 세기말부터 불기 시작한 남북화해 분위기에 호응해 제7차 교육과정(1997년~현재)편성 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뀌고,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과목이 선택과목이 됨으로써 6·25전쟁 관련 교육비중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은 것이 일차적 요인이다.

역사, 특히 근현대사 교육 비중의 저하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소치로서 현재 한국인의 20~40대에서는 전반적으로 ‘6·25전쟁 불감증’이 팽배해 있다.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나가서 싸울 의향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한 응답자가 41%나 됐고, “싸울 의향이 있다”고 답한 자는 58%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안보불감증’은 ‘안보기피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의 6·25전쟁 이해가 이 정도라면 미국,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그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 역시 각기 자국의 합목적적인 역사교육을 받은 결과 전쟁의 실상에서 일정 부분 동떨어져 있다. 예컨대 각국의 교과서를 분석해본 결과 미국인들은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것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세계경찰”, “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강조한 자국의 교육 내용 이외에 전쟁의 한국적 상황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금도 ‘북침’으로 이해하고 있는 북한주민들은 전체가 적반하장의 입장에 있다. 그들은 북한의 무력남침이 가져다준 동족상잔의 상처가 어느 정도로 깊은지 알지 못한 채 미국과 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향후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로 남을 것이다. 중국인들도 상당부분의 사람들이 북침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들은 과거 毛澤東이 김일성의 남침도발을 동의해준 사실을 모르고 중국의 참전을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정의의 전쟁으로만 알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아예 구소련이 6·25전쟁에 관여한 바가 없으며, 아시아변방의 조그만 국지전으로 이해하는 무관심을 드러낸다. 일본인들은 과거 일본의 한반도 식민통치와 6·25전쟁발발과의 관련성을 인식하려고 하지 않고, 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내외국인들의 6·25전쟁에 대한 이해부족을 일깨우고, 그들을 전쟁의 실상에 다가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역사, 세계사 교과서의 내용적, 서술적 결함을 찾아내고, 이에 대한 시정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정부와 교육계에게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각종 박물관, 기념관 등의 사회 교육기관들도 제도교육이 가지고 있는 부족분을 일정부분 메워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본고는 1차적으로 남북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초중고 역사, 세계사 및 사회교과서에 수록된 6·25전쟁 관련 기술내용을 분석하려고 한다. 이 1차적 목적은 6·25전쟁에 대한 내외국인들의 그릇된 이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역사교과서의 내용 수정 및 보완에 참고가 될 것이며, 동시에 전쟁기념관이 나아가야 할 6·25전쟁 전시방향에 가늠자가 될 것이다.

내용분석이 입체적이 되기 위해서는 각국에서 현재 사용중인 역사, 세계사 교과서 자체에 대한 수평적 분석뿐만 아니라 현재의 교과서와 과거 사용했던 교과서들을 상호 비교하는 수직적 분석은 물론 교과서의 내용분량과 비중까지 계량해봐야 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주어진 시간 및 자료상의 제한으로 인해 6개국의 과거와 현재의 초중고 역사 및 세계사 교과서를 모두 점검하지는 않고, 분석대상을 현재 유통중인 역사 및 세계사 교과서로 국한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의 경우는 한두 가지의 교과서만 분석하게 돼 그 나라 교과서의 표본이라고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초등학교 역사교과서까지 분석 범위에 넣은 이유는 사물과 사안에 대한 인식력이 발달 중에 있는 초등학생들이 최초 어떤 이미지로 6·25전쟁과 조우하게 되고, 그 이미지가 감수성과 학습능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인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어떤 이미지로 바뀌게 될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다.

논의는 먼저 상기 매 국가 마다 교과서의 구성과 비중을 간단하게 짚어본 후 크게 1. 전쟁발발 배경, 2. 전쟁도발 주체, 2. 경과, 3. 중국군의 개입, 4. 휴전, 5. 영향, 6. 각 교과서의 교육목표 혹은 강조점 정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도록 하겠다.

2. 남한

한국학생들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바른생활 과목에서 ‘한반도분단’과 ‘민족통일’을 배우면서 민족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사들의 설명을 듣게 된다. 이 교육과정은 5학년 때까지 줄곧 지속된다. 학생들은 한반도가 왜 분단됐는지 이유도 모른 채, 또 분단의 골을 깊게 판 6·25전쟁을 배우기도 전에 ‘우리민족은 통일이 돼야 한다’는 인식이 만들어지도록 주입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계통성이 결여된 본말전도다. ‘한민족 통일’이라는 단원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고학년이 되어서야 사회교과서에서 6·25전쟁 내용을 들을 수 있고, 또 민족분단을 얘기하고 민족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왜 남북이 분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어떤 이미지이든 ‘6·25전쟁’과 최초로 만나게 되는 것은 교육외적 상황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교사의 교과과정을 뛰어넘은 설명을 제외하면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과목에서다. 학생들은 이 사회교과서에서 비로소 북한이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과 남북분단의 연원을 알게 된다. 즉 6·25전쟁의 배경으로서 해방 후 한반도의 분단과정을 먼저 소개한 뒤 이어서 북한의 남침 유엔군의 파견,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국군의 압록강까지의 진격,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한 후퇴, 남북간의 일진일퇴와 휴전, 그리고 오늘날까지 분단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쟁발발 배경을 제외하면 순수하게 6·25전쟁 관련 서술은 사진을 곁들여서 교과서 전체 130쪽수 중 1쪽에 불과하다.

6학년 2학기 사회과목에서는 더 이상 6·25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남북 분단 이후 남북한 관계의 변화와 남북한 통일을 위한 노력을 포함하여 통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할 뿐이다. 학생들은 분단의 연원이라는 근본문제를 이해하기보다는 기대치로서의 ‘통일’의 당위성만 배우기 때문에 6·25전쟁으로 남북 쌍방이 맺힌 심리적 장애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졸업하게 된다.

학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무적으로” 중학교에 진학하면, 2학년부터 3학년까지 학습하는 국사와 2학년 과정 사회과목에서 6·25전쟁을 다시 접하게 된다. 국사교과서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총 10개 단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6·25전쟁은 마지막 10번째 대단원 중의 소절로 구성돼 있다. 서술비중은 전체 329쪽 중 3쪽이다. 내용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를 좀더 자세하게 부연 설명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광복 후부터 전쟁발발 전까지 5년 동안의 해방, 대한민국정부의 수립 등을 8쪽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했고, 전쟁배경으로서 소련군의 북한 진주, 북한의 공산화 및 북한정권의 수립, 소련의 군사지원과 북한의 도발준비, 남한사회의 불안정 등을 들었다.

전쟁도발 주체로는 북한의 기습남침을 기술했고, 국군의 용감한 저항 및 일시적 후퇴, 정부의 천도, 학도병의 분전, 유엔군의 파병,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서울수복과 북진 및 압록강까지의 진격, 중국군의 개입, 국군의 후퇴 및 서울재탈환, 남북 쌍방간의 치열한 공방전, 휴전성립 순으로 경과를 정리했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핵심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될만 하다. 즉 북한의 남침전쟁을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이자 동복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것으로 평가하고, 남침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의 상실,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의 발생, 국토황폐, 경제시설의 파괴를 초래했으며, 이 뿐만 아니라 남북한간 적대감정의 팽배, 평화적인 통일보다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만든 정신적 피해와 민족의 비극을 확대케 만든 요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회 교과서는 여러 종류가 발행돼 있지만 모두 전후 미소냉전의 구도에서 한국을 설명하면서 부수적으로 6·25전쟁을 언급했는데, 모두 6·25전쟁으로 한국은 극심한 피해와 고통을 당했지만 성공적으로 극복하여 경제성장과 민주와를 이루었다는 내용이 주된 관점이다. 그리고 6·25전쟁의 성격과 관련해 “북한이 도발한 6·25침략전쟁으로 피해를 봤다”는 식으로 전쟁도발의 주체를 명시한 교과서가 있는 반면에 “6·25전쟁이 발발했다”고 객관화해서 기술한 교과서도 없지 않다. 이 점은 역사과목에서 6·25전쟁을 자세하게 다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중학생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필수과목으로서 2년 과정의 역사과목에서 6·25전쟁을 다시 배운다. 현재 사용중에 있는 제7차 교육과정인 2004년판 역사교과서는 과거의 1981년판, 1988년판, 1996년판 교과서들이 모두 6·25전쟁을 독립적인 장으로 편성한 후 소절을 달아 상세하게 기술한데 비해 분량이나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즉 소절로 편성하고, 지도를 포함하여 약 1쪽 정도로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전쟁발발 배경, 도발주체, 경과, 중국군 개입, 휴전, 결과 및 영향 순으로 내용은 이렇다.

“이승만 정부 초기 좌익세력의 게릴라 활동 및 실업과 물가폭등 등으로 사회가 불안정했고, 미군철수와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이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되는 등 국제정세가 불리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 정권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감행하였다. 유엔은 북한의 남침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을 파견했다.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계속 38도선을 넘어 북진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바뀌어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갔다가 휴전회담이 시작돼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3년간 지속된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살상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와 동시에 남북 간에는 적대 감정과 불신감이 팽배하게 되어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국사교과서가 이렇게 소략하게 기술한 이유는 근현대사 과목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편성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6·25전쟁은 인문계열의 선택과목 중의 하나로서 ‘한국근현대사’에 가서야 교사로부터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총 6종이다. 6종의 6·25전쟁 서술비중은 평균 1.86쪽에 불과하다. 이를 다시 주제별 비율로 정산하면 총 256단원 중 1개 단원의 평균서술 분량인 12.2쪽과 비교해 평균 2.344쪽이 할애된 6·25전쟁은 서술비중이 턱 없잋 부족한 셈이다. 6종의 교과서를 모두 전쟁발발배경, 도발주체, 경과, 중국군 개입, 휴전, 결과 및 영향 순으로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쟁의 기원 혹은 발발 배경과 관련해서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을 모두 중시했다. 전자로는 크게 전후 미소냉전의 심화, 국제정세(중국의 공산화, ‘애치슨라인’ 발표로 인해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됨으로써 북한의 남침의지를 자극)의 불리, 외세의 지원유무(미군의 남한 철수에 따른 남한 군사력의 공백, 소련 및 중국의 대북 지원에 따라 남한에 대비되는 북한의 군사력 우위) 등에 두고 있다.

후자로는 민족통일국가 수립의 실패에 따른 남북분단, 북한의 무력남침 통일의지와 사전준비, 북한의 지원하에 벌어진 좌익세력의 반정부 활동으로 인한 남한사회의 불안정, 남북민중의 정권지지 정도(북한은 토지개혁의 실시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남한은 그렇지 못했음), 남북한 간에 38도선상에서 벌어진 빈번한 무력충돌 등이 해당된다.

이 중 국제정세가 북한에 유리했다는 대목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북한, 중국, 소련의 삼각동맹이 강화되면서 북한군의 군사력은 계속 강화하고 있었다”고 서술한 경우가 있고, 또 북한이 “중국과 군사비밀협정을 맺어 4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 동북의용군을 인민군에 편입시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고 기술한 교과서도 있고, “조선의용군 2~3만 명”으로 기술한 경우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 착오다. 북한, 중국, 소련의 삼각동맹은 형성된 바 없고 단지 삼국 공조정도로 봐야하며, 북한 송환 인원은 4만 명이 아니라 최소 5만 명 이상이었다. 중소의 대북군사지원은 북한이 남침을 결행하는데 선결조건이 된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소련의 군사지원 내용을 수치로 구체적으로 밝힌 교과서가 있는 반면에 아예 소련의 지원사실 자체를 누락시킨 경우도 있다.

또 남북한 민중들의 정권지지 정도와 관련해 북한은 친일파 제거, 각종 개혁 실시, 토지개혁, 중요 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의 노동법 제정 등으로 “북한주민의 민심을 얻는 계기”가 된 반면, 남한은 “친일파 문제의 미해결, 재정적자, 물가불안 등의 요인으로 이승만 지지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고 기술한 경우도 있다. 이는 자칫 북한의 남침이 정당했다고 인식케 할 소지가 있는 서술이다. 이러한 오인을 예방하려면 북한의 거둔 정치, 사회적 성과가 달성된 이유로 북한의 체제가 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요인이 작용한 데 반해 남한이 거둔 성과가 미미했던 까닭은 정책 추진에 있어 민의를 거쳐야 하는 민주적 체제였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전쟁도발 주체에 대해서는 6종의 교과서가 모두 북한의 남침임을 분명히 기술했다. 그러나 북한이 전쟁개시 직전 남한에 남북한 국회의 통합을 위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한 사실에 대해서 “이것은 전쟁 직전에 남한 민족주의자들을 동요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평화공세였다”고 본질을 밝히면서도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북한의 제의를 거부하였고, 결국 북한은 전쟁을 개시하였다”고 기술한 경우도 있다. 이 표현은 자칫 북한이 사전 남침준비를 해온 사실이 은폐되고, 남한의 제의거부가 마치 북한의 전쟁도발을 정당화 시켜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다음으로 전쟁경과와 관련해서는 6종의 교과서가 모두 대략 사건의 발생순서에 입각해 서술했다. 그러나 6종의 교과서 중 북한군이 남침한 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그들이 낙동강까지 남진한 사실을 기술하면서 초기 국군이 방어전투에서 벌인 사투에 대해서는 사실만 언급한 경우가 1종, 다부동 전투 등 국군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경우가 1종 있고, 아예 완전히 누락시킨 경우는 4종이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해서는 “자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개입”했고, “전쟁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대결하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만든 원인으로, 또한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통일이 저지되고,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만든 원인으로 서술했다. 중국은 지금도 전쟁개입을 자국의 안전이 위협 당했다고 판단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사실여부를 떠나서 중국의 입장을 드러내주는 문제이고 상대를 이해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기술해줄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즉 한반도를 자국안보를 보장해주는 입술로 보아온 중국의 전통적인 안보관 혹은 한반도관인 ‘脣亡齒寒’ 개념을 가리키는데, 이 개념을 언급한 경우는 두 교과서뿐이다.

또 중국군의 공세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됐다고 한 기술은 착오임과 동시에 당시 미국 내 정치상황과 연계시키지 못한 결과다. 이것은 맥아더가 해임된 이유를 그가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원자폭탄의 사용을 건의함으로써 전쟁을 확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이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이 군대에 대한 문민통제의 전통을 견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미국 교과서의 기술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휴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과서가 모두 소련의 제의를 미국 혹은 “유엔군과 공산군”이 받아들여 회담을 개시한 것으로 서술했다. 또 휴전협상이 시작됐지만 지루하게 2년 이상이나 끌다가 1953년 7월에야 조인된 이유로 군사분계선의 설정, 휴전감시기관 구성문제 및 포로송환을 둘러싼 쌍방간의 견해차이와 이승만 대통령 및 한국민이 휴전을 반대한 사실을 꼽았다.

이승만의 정전회담 반대는 그간 전쟁 과정에서 한국정부가 소외된 것을 만회하고, 향후 미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한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부 교과서는 그가 반대한 이유를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이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기술해 민족적 이해만을 부각시켰다. 또 정전협정이 재개되고 성사된 것은 스탈린의 사망과 아이젠하워의 휴전의지가 맞물려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기술함으로써 휴전협상의 주도권이 미소에 있었다고 인정했다.

전쟁의 결과 및 영향에 대해서는 “휴전”이 체결됐지만 남북한이 모두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기술했다. 또 막대한 인명피해와 물질적 피해상황도 구체적 수치를 밝혀 제시하기도 했다. 인명피해와 물질적 피해 못지않게 정신적 피해도 심각하다고 기술했다. 특히 교과서는 북한군과 남한군이 각기 남진과 북진을 하는 과정에서 민간인과 부역자를 처형한 사실을 기술했다. 또 이것이 원인이 돼 민족간의 원한과 상호불신의 골이 길어졌고, 남북한이 각기 독재체제와 반공체제가 공고화됨으로써 분단이 고착화 됐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기술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변화를 반영한 커다란 진전으로 보인다. 특히 전쟁의 영향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전통문화와 권위 질서의 붕괴, 촌락 공동체 의식의 약화, 무질서와 가치관의 혼란 등을 초래했으며, 또한 유엔군의 참전, 미국의 경제 원조로 인한 무분별한 서구문화가 도래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문화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에 대한 폄시와 미국문화에 대한 맹목적 숭상을 초래하는 등 한국사회의 가치관과 생활풍속을 크게 바꾸었다고 평가했다.

3. 미국

미국의 초등학생들은 5학년이 되면 비로소 “한국전쟁”(Korean war, 6·25전쟁)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 5학년~7학년 용 사회과목 시간에서다. 사회교과서는 독립된 단원으로 나오지 않고 “냉전시대”라는 대단원 안에 “한국전쟁”이라는 소단원으로 한반도 남북분단 지도와 6·25전쟁시 미군 행군 사진을 포함해 1쪽 분량으로 설명돼 있다.

전쟁의 배경으로는 전후 한반도의 남북 분단과 미소가 각기 남북을 지원해 북한은 공산국가를 수립했고, 남한은 공화국을 수립한 사실을 들었다. 전쟁발발의 원인은 1949년 공산화된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1950년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남한을 침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쟁경과와 관련해서 전쟁 발발 후 트루먼 대통령이 즉각 미군을 보내 한국을 지원했으며, 미국 외에 유엔도 15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을 보냈으며,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사실과 많은 미군들이 전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휴전과 관련해서는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휴전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의 지원으로 독립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인상을 주도록 기술돼 있다. 이러한 기술은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이 철저하게 배제돼 있는데, 결국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미국우월주의를 심어줄 가능성이 높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교육은 중학교 과정에서도 되풀이 된다. 차이라면 단지 초등학교 교과서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6·25전쟁은 1학년 과정인 “미국 현대사” 과목에서 다시 한 번 소개되는데, 초등학교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에서의 냉전”이라는 대단원 안에 지도를 포함해 약 2쪽의 미미한 분량으로 구성돼 있다.

6·25전쟁의 발발배경으로서 먼저 일본 항복 후 미소가 각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정권을 설립을 지원한 사실, 전후 미국의 일본점령, 중국내전과 공산화가 소개됐다. 또 미군이 6·25전쟁 발발 전 미국의 남한 철수 사실이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어서 바로 다음 단락에서 북한군의 남한 침략을 언급함으로써 마치 미군의 남한 철수가 북한의 남한 침공의 한 배경이 된 듯한 인상을 주게 만든다.

경과와 관련해서 북한의 남한 침공에 대해 미국 행정부가 취한 미군의 급파과정, 트루먼대통령이 맥아더장군을 유엔사령관으로 임명한 사실, 북한군의 남진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같은 해 11월까지 압록강의 한중 국경선까지 도달한 미군의 진격, 이에 “공산중국”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 명의 중국군을 국경을 넘어 한반도로 보낸 사실을 기술했다.

계속해서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요점적으로 언급하면서 트루먼대통령이 군에 대한 문민통제라는 원칙을 견지하는 입장에서 맥아더장군을 해임한 사실과 맥아더를 청문회에 참석시킨 점 등을 기술했다. 여기에는 전쟁의 전투상황이나 전략 혹은 소련 및 중국의 동향 등이 소개될 여지가 없는 구성이다.

동 교과서는 휴전이 성사된 이유로 아이젠하워대통령의 선거공략을 연관지어 설명했다. 또 한반도는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전쟁 발생 전처럼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남북한의 투쟁은 5만 4,000명 이상의 미군을 살상케 한 결과를 초래했고, 전쟁의 결과 비공산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자국의 방어를 위해 무장하기 시작한 점을 언급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미국이 다대하게 희생하고 공헌한 점을 부각시켰다.

미국 고등학생들은 미국사와 세계사 교과목에서 다시 한번 ‘6·25전쟁’과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지금까지보다 좀 길고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된다. 미국은 약 7년에서 10년 만에 교과서를 개정하기 때문에 교과서 교체기간이 비교적 긴 대신에 각 주들이 독자적으로 교과서를 채택하기 때문에 종류와 수는 다양하지만 본고에서 분석하지 못한 교과서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결과를 활용하겠다.

미국사 교과서는 제9단원 제25장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소단원으로 나오고, 분량은 전체 870쪽 중 7쪽이 할애됐다.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6·25전쟁이 ‘제한전’이며,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억제 내지 봉쇄하기 위해 6·25전쟁에 참여했지만 전쟁은 예기치 않게 미국인들에게 혼란스럽고, 환멸을 느끼게 만든 어려움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설명을 듣는다. 교사의 설명을 들은 후 학생들은 스스로에게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으며, 1950년 6월 남한의 서울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트루먼 대통령은 왜 맥아더 장군을 해고 했는가 하는 세 가지는 이해했는지 자문하게 된다.

동 교과서는 6·25전쟁을 전후 미소냉전의 산물로 보면서 미소의 남북한 분할 동의와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한 군사적 점령,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와 이승만과 김일성을 영도자로 한 남북정권의 수립, 그리고 미국이 아시아 방어선에 남한을 제외한 사실들을 전쟁 발발 배경에 관련짓고 있다.

전쟁도발 주체와 관련해서는 북한의 남침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기술하면서 이승만과 김일성을 다같이 공격적이라고 묘사하면서 각기 무력통일을 추구해왔다고 기술했다. 즉 이승만은 북한의 군사력에 열세에 있었지만 빈번하게 북한을 대규모로 공격했다는 것이다. 또 북한도 1950년 38도선을 따라 군사행위를 한 사실을 미국 정보당국이 본국에 보고했고, 그러던 중 6월 25일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공격했다고 기술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일성은 다같이 공격적이며 각기 무력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공격을 가했다”는 서술에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남북한 쌍방은 각기 한반도 무력통일을 지향했고, 38도선을 마주하면서 상호 무력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625전쟁이었다는 인식이 깔려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런 식의 기술은 북한의 기습남침이 사전 공산권 국가들간의 치밀한 전쟁계획에 따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남북한 간의 군사충돌이 격화돼 발생한 사건쯤으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에는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사전에 전쟁도발에 대해 깊숙이 논의하고,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고 동의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교과서는 단지 훗날 남한을 아시아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선언이 북한의 침공을 부추겼다고 비판한 비평자들의 입장을 언급하면서 간접적으로 이 점을 시인했을 뿐이다. 또한 애치슨뿐만 아니라 맥아더와 여타 다른 군사지도자들도 한국이 미국의 사활적인 이익이 아니라고 여겼다고 했다. 이것은 미국의 6·25전쟁연구가 주로 미소 냉전대결이라는 국제정치적 관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돼 있다. 즉 교과서는 전쟁 발발 후 미국 정부관리들은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위협하지나 않을 것인가 하는 점을 우려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지상군 파견, 공군의 북한공격 명령,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 요청 등 미국 지도자가 취한 신속한 대응 및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공산중국정부에 대한 승인을 소련이 거부한 사실과 한국문제 해결에 대한 거부사실을 기술했다.

또 트루먼이 미군을 한반도에 파견한 것을 “경찰행위"(Police action)로 규정함과 동시에 미군이 유엔군의 90%를 차지했다고 언급했다. 이 주장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소련의 도발이 계속됐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군사개입은 정당한 행위였다는 전통주의 시각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 자국의 참전이 북한공산집단의 불법 기습남침을 제압하는 정당한 행위임을 강조하고,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권위를 빌어 자국의 무력개입을 정당화화고 그 책임을 희석하려는 의도로 판단된다.

또 동 교과서는 북한군의 남진과 이에 대한 반격으로 한미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했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트루먼이 생각을 바꿔 38도선을 넘어 북한정권을 궤멸하여 한반도 통일을 추진했다는 점을 기술했다. 이것은 한국의 교과서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교과서들도 한미군의 38도선 월경 북진이 최초 “전쟁이전 상태로의 회복”이라는 유엔군의 참전목적을 뛰어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통일을 위한 정당한 군사적 조치로 파악케 하고자 한 의도로 감지된다.

이어서 교과서는 1950년 11월 미군이 압록강변의 한중국경까지 진격한 사실과, 중국정부가 미군이 계속 폭격을 가한다면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위협한 점, 이에 대해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중국이 개입하면 패배할 것이기 때문에 이 위협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보고한 사실을 기술했다. 그리고 교과서는 맥아더의 판단이 착오였음이 판명됐고, 심지어 1950년 겨울에서 이듬해 겨울 사이 중국군의 공세로 발생한 이른바 1.4후퇴 이후 전쟁이 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중국대륙에 원자폭탄을 사용하자고 건의했으며, 트루먼은 이를 거부했다고 기술했다.

상기 기술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38도선 북진돌파와 북중국경선까지의 진격에 대해 맥아더 개인의 의지와 행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 의도로 파악된다. 이는 곧 피교육자들에게 한국과 미국이 소외되고 6·25전쟁의 후반부가 마치 일개 야전군 사령관의 의지로 전개됐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당시 미국행정부와 대통령이 파병 당시 최초의 전략목표를 수정한 뒤 북진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38도선 돌파와 북진이 결과적으로 중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게 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맥아더의 판단착오 및 호전성으로 돌리려고 한 의도로 판단된다.

그래서 동 교과서는 뒤이은 단락에 군에 대한 문민통제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가 보이는 내용들을 언급하면서 확전을 주장한 맥아더를 해임한 과정과 의미를 자세하게 서술했다. 또 미국민들이 중국을 핵 공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맥아더의 행위는 명백하게 불복종 행위였기 때문에 맥아더의 건의를 따랐다면 미국은 “잘못된 전쟁에서,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the wrong war, the wrong place, the wrong enemy)과 싸울 것이라고 경고한 오마 드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의 언급을 빌어 미국은 궁극적으로 중국과의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휴전이 성립된 과정에 대해서는 경과가 거의 기술돼 있지 않고, 단지 미국 대통령선거의 결과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돼 있다. 즉 휴전이 성사된 주요한 배경 내지 요인이었던 스탈린의 사망과 공산측의 요망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 미국민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켜주겠다고 공약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휴전이 성사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역으로 스탈린이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에 정전협정이 지연됐다는 점을 말해주는데, 이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이다.

여타 미국의 역사교과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교과서 가운데는 휴전협정이 지체된 이유로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3년간 지속되다가 38도선을 중심으로 북한과 남한이 분단된 채 휴전협정이 맺어졌다”고 기술한 것도 있다고 한다. 동시에 전쟁의 영향으로 이 교과서는 6·25전쟁에서 중국군이 현대화된 미군과 전투를 벌인 경험을 통해 가지게 된 인식, 즉 “서구에 대한 중국의 두려움이 (오랫동안) 중국을 서구의 주요 세력으로부터 고립시켰다”고 기술했다.

미국사 외에 중학교 고학년, 고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세계사교과서에서도 6·25전쟁이 소개돼 있다. 분량은 전체 981쪽 가운데 지도를 포함해 채 1쪽도 넘지 못하고 있고, 이 역시 미소냉전을 설명하면서 부차적으로 한국 관련 내용을 다루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내용 역시 6·25전쟁을 독립된 단원으로 편성한 것이 아니라 싱가폴, 대만, 홍콩 및 한국을 소개하는 “아시아의 호랑이들”이라는 제목하에 남북한을 비교하는 가운데 극히 간략하게 북한의 남침, 유엔군의 한국 지원, 한국군과 미군이 주가 된 유엔군이 맥아더의 지휘하에 있었다는 점, 38도선 월경 반격, 압록강까지의 진격, “미국의 침공을 두려워 한” 毛澤東의 개입 및 38도선 이남까지의 반격, 휴전, 100만 명 이상의 남북한 군인이 사망했다는 사실, 미군이 평화수호의 담보물로 남한에 남겨졌다는 점을 기술했다.

미국사교과서의 6·25전쟁 관련 기술의 일반적 특징은 미국의 역사를 민주주의의 역사로 설정하면서 미국이 개입했던 거의 모든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미국사 교과서에는 전쟁에 관한 미국의 경험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데 반해 6·25전쟁에 대해서는 서술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 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관련 서술은 대부분 미소대결의 구도아래 맥아더의 전쟁수행과 트루먼의 정책에 관한 상호 관계에 대한 설명에 치중돼 있다.

이런 식의 서술구도와 해석은 한반도분단과 6·25전쟁이 한국문제 임에도 한국전문가에게 집필을 의뢰하지 않고 중국전문가나 일본전문가들이 중국과 동아시아를 다루면서 부수적으로 다루도록 하거나, 혹은 구미문제 전문가들이나 서구 근현대사 역사가들에게 제국주의와 미수냉전을 일본이나 미국 및 소련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하부 차원의 관련국가로서 한국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발전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접근하기보다는 미국의 시각에서,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의 시각에서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교과서들은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영웅적인 전투행위와 처참한 희생, 민간인 살해와 희생의 경험을 다루지도 않고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6·25전쟁은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고 인명을 살상했지만, 결국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현상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끝난 하나의 에피소드라는 것이다.

6·25전쟁이 미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서술에서는 전쟁의 상흔은 드러나지도 않고 치유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역사교사가 6·25전쟁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미국사 수업시간에 한국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배운다고 하더라도 6·25전쟁과 한국은 냉전의 이미지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것이다.

4. 북한

북한은 주민들에 대한 사상통제로 연명되고 있는 정권이다. 사상통제는 북한노동당이 주관하는 각종 집회, 학교교육, 언론검열 및 보도통제를 통해 부단히 이루어진다. 모든 선전, 통제의 모든 수단은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당의 지침을 파악하면 특정사안에 대한 입장이나 해석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6·25전쟁에 대한 교육내용도 당의 지침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체 주민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북한의 6·25 전쟁 교육은 철두철미하게 반제 반미의 계급교육이다. 평양출신 한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당국은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7월 27일까지를 ‘미제 반대투쟁의 날’을 제정하고, 노동당, 군대, 주민들이 모여 복수모임을 다지도록 한다고 한다. 또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대표들이 차례로 나서 목이 쉬도록 ‘미제 타도’의 구호를 외치는가하면, 거리마다 반미를 선동하는 대형 포스터와 구호들이 내걸린다.

이러한 선전 및 통제를 통해 북한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6·25전쟁이 미제의 사주에 의한 ‘북침전쟁’이었다는 반미선전을 지겹게 들어온다. 북한의 소학교 교과서에는 “6·25전쟁은 미제의 사주를 받는 남조선 괴뢰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못 박고 있다.

북한주민들에게 ‘북침’으로 세뇌시킨 북한당국의 최상위 지침서 역할을 하는 ‘교과서’는 북한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가 편한 『조선전사』다.『조선전사』는 학교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한마디로 노동당과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방의 선전서적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은 학술이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예속돼 학문적 표현이 박탈돼 있는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각급 교과서는 모두 예외 없이 공산당의 역사해석을 반영하게 돼 있다―오히려 교육과정에 교조적으로 반영되도록 강제하는 게 아니라 당의 역사해석을 그대로 역사교과서로 발간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상기 사실을 실증하는 차원에서 본고에서는『조선전사』와 북한의 고등중학교 역사교과서인『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혁명력사』와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죄행』의 내용을 상호 비교하는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북한의 모든 교과서를 손쉽게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국내에서 입수 가능한 자료만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각 교재는 6·25전쟁 기술이 절대적으로 비중이 높기 때문에 비중을 논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용어도 북한에서는 6·25전쟁 대신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6·25전쟁을 교육하는 기본적 틀은 남한의 ‘북침’과 ‘미 제국주의와 이승만 괴뢰도당에 맞선 조국해방 전쟁’이다.

먼저 전쟁발발의 배경과 기원에 대해서는 전쟁발발의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을 모두 중시하는 한국 교과서와 달리 북한교과서는 미 제국주의의 침략음모와 그 사주를 받은 남한의 이승만 정권의 북침이라는 외재적 요인만을 강요한다. 한반도 분단의 기원인 미소군의 남북분할 점령이 양측에게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책임만을 강조한다. 또한 남북 두 정권의 수립과 관련해서는 남한은 미국의 괴뢰에 불과하고 그래서 무너져야 하며, 북한은 인민에 의한 합법적 정권임을 강조함으로써 북한공산체제의 정통성과 우위를 주장했다.

“미제와 리승만 괴뢰도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공화국정부의 합리 적인 방안들을 거부하고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 시하여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날 이른 새벽 38도선 일대에 집중전개하고 있던 남조선 괴뢰군은 미리 준비된 침 략전쟁 도발계획에 따라 미제침략군 고문단 놈들의 직접적 지휘 밑에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반부에 대한 불의의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상기 내용은 국제적으로 상식화 된 북한의 남침사실을 “북침”으로 뒤집어씌우려는 명백한 사실날조이자 선동이다. 이 인용문 내용은 바로 당시 북한최고 지휘부가 행한 행위에 들어맞는 얘기다. 즉 인용문 중 “미제”, “이승만”, “공화국정부”, “공화국북반부”, “조선인민”, “남조선 괴뢰군”, “침략전쟁도발계획”, “미제 침략군 고문단”, “북반부”를 각기 차례로 “소제”, “김일성”, “남한정부”, “한국남반부”, “한국국민”, “북한 괴뢰군”, “선제타격작전계획”, “소제 침략군 고문단”, “남한”으로 치환해 북한당국에 되돌려주면 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은 북한의 주장이 허구라는 점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연구 성과를 참조하라는 제의로 대신하겠다.

위 내용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혁명력사’와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죄행’ 등 두 역사교과서에 그대로 반복된다. 즉 “오래 동안 침략전쟁을 준비하여온 미제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 놈들은 주체39(1950)년 6월 25일 드디어 조선전쟁을 일으켰다. 이날 이른 새벽 적들은 38도선을 넘어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불의의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제는 1950년 6월 25일에 남조선 괴로군을 무력침공에 내몬 후……”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도 상기 서적들은 공통적으로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9월 중순 북한군의 남진시기, 1950년 9월 중순 북한군의 전략적 후퇴~10월 하순 중국군의 참전으로 반격, 1950년 10월 중순~1951년 6월 전투교착 시기, 1951년 6월~1953년 7월 휴전성립 시기다. 교과서는 매시기마다 김일성은 뛰어난 전략지시로 위기상황을 이겨냈다고 강조하고, 이 가운데 두 번째 단계인 전략적 후퇴기를 유달리 강조한다.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첫째, 승승장구하던 북한군의 패주를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과서는 당시 북한군의 괴멸과 패주를 반격을 위해 일시적으로 후퇴하라는 김일성의 “전략적 후퇴”로 미화했다. 승리만을 강조하고 패주마저도 ‘전략적 후퇴’라고 미화, 분식하는 이런 식의 서술방식은 훗날 ‘패배를 모르는 김일성의 뛰어난 영도력’을 강조한 1970년대에 확립된 주체사상과 관련된 승리사관의 영향을 미친 흔적으로 보인다.

이 점은 북한교고서가 김일성이 친히 중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결과적으로 중국이 군대를 보내어 북한정권을 기사회생시켜 놓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중국군의 역할을 단지 형식적으로 다룬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점은 대북지원을 강조한 중국교과서와 상치되는 부분이다.

둘째는 미군이 북진하면서 무고한 북한주민들을 학살했다고 날조한 “신천 학살사건”을 거론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에서다. 북한당국은 지금도 여전히 “신천 학살사건”을 선전한다. 당시 신천봉기 출신 가담자와 뉴욕의 미국국립문서보관소의 24사단 19연대의 전쟁 일지를 통해 북한이 선전하는 “신천 학살사건”이 허구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여전히 허위선전만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전승기념관(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과 함께 신천박물관을 반미선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전승기념관이 ‘북침전쟁’의 역사를 가르치는 곳이라면 신천박물관은 반미, 계급교육의 거점지로 유명한 곳으로서 평양시민은 물론 지방에서 올라온 평양 견학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르게 되는 곳이다. 이 두 곳을 통해 북한이 어떻게 6·25를 반미 선전교육으로 활용하는지를 알 수 있다.

북한 교과서의 6·25전쟁 기술에 또 다른 특징은 중국의 개입에 관해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북중관계가 어떠한지를 추론하게 하는 간과해선 안 될 중요한 사실이다.


6·25전쟁의 휴전과 결과 및 영향에 관련해 북한학계는 널리 휴전을 ‘북침에 대한 승리’로 왜곡하고 있다. 이 영향을 받아 북한 교과서도 6·25전쟁의 결과 북한은 열악한 무기 장비로 싸웠지만 최신 무기장비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미국을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남한의 교과서가 전쟁의 영향을 비교적 부정적으로 기술한 반면, 북한교과서는 긍정적 평가로 일관했다. 구체적으로 안으로는 노동당의 사상 단결과 군사력의 강화를 꾀할 수 있었고, 밖으로는 “미 제국주의”의 세계전쟁 도발책동을 저지시켜 세계평화에 이바지 한 것으로 평가했다.

5. 중국

중국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에 이르는 9년간이 의무교육이고, 고등학교 과정은 3년이다. 학생들은 초중등 9년 과정 중에 중국역사, 세계역사, ‘역사와 사회’ 과목을 배운다. 중국의 역사, 세계사 교과서는 미국, 일본만큼 다양하고 종류가 많다.

중국의 중등학교 교과서 발행제도가 과거 오랫동안 국가가 관여해온 국정제(통편제)에서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점차 검정제로 전환되고 있는 가운데 歷史敎學大綱, 歷史課程標準 등 교과서 집필지침이 다양해지고, “역사교육대강‘에 의거한 교과서에서 ‘역사과정표준’에 의거한 교과서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과정은 전국적으로 사용되는 국가과정, 일정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지방과정, 특정학교용 교과과정이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교과서는 2001년부터 시작된 제8차 교육과정개혁에 따른 것이다.

2006년 6월 현재 전국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역사교학대강’에 의거한 중앙정부급 중학교 과정 역사교과서는 5개 출판사의 6종이 있고,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1종이 있다. ‘역사과정표준’에 의거한 중앙정부급 실험 역사교과서는 중학교 11종(중국역사, 세계역사 8종, 역사와 사회 3종)과 고등학교 4종을 합해 총 15종이 있다. ‘역사교학대강’은 한마디로 국가가 학과의 목적, 임무에 따라 학과별 교육목표와 지식, 기능의 범위, 심도 및 체계와 구조를 규정한 요강(지침)이다. 또 교육 ‘역사과정표준’은 학생들이 학년별, 학과별로 획득해야할 성적 및 개인발전에 관한 규정이다.

현재는 역사교학대강에 의거한 기존 교과서와 역사과정표준에 의거한 실험교과서가 병용되고 있지만 실험이 끝나는 대로 후자의 체제로 이행하고, 기존의 교학대강 체제하의 교과서는 완전히 폐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처럼 중국도 기본적으로 사상과 교육을 국가가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는 일당독재국가다. 따라서 초, 중, 고등학교 과정의 중국역사 및 세계사 교과서는 모두 국가가 제정한 ‘역사과정표준’ 지침에 의거해 집필된다. 이 교과서들에 기술돼 있는 6·25전쟁은 약간의 어구만 바뀔 뿐 내용과 교육목표는 천편일률적으로 같다. 먼저 초등학생들은 북침인지, 남침인지 모호한 전쟁에 중국이 참전해 ‘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무찔러 북한을 위기에서 구하고 중국의 안전을 지킨 자국의 위대성이 부각된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중학교 과정에서는 2학년 2학기 과정의 중국역사와 세계역사, 그리고 중학교 3학년 과정의 ‘역사와 사회’에서 6·25전쟁이 언급돼 있지만, 서술구조는 동일하고 구체적인 사실만 약간 대동소이할 뿐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전쟁의 배경과 관련해서 중국역사교과서는 전쟁 전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준비한 사실뿐만 아니라 스탈린과 毛澤東의 전쟁동의 및 지원에 관한 사실을 누락시켰다. 이것은 북한을 의식한 중립적 표현을 쓴 것이고, 역사교과서 편찬에서 “국제관계상 특별히 민감한 문제가 있다면 회피하거나 비교적 개괄적으로 서술”할 수 있도록 한 규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6·25전쟁을 도발한 사실과 침략 주체를 밝히지 않고 단지 “1950년 6월 조선내전이 폭발했다고”만 기술하면서 6·25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했다. 여기서 내전이라고 규정한 것은 미국이 군대를 보내 중국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에 중국은 한반도전쟁에 간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부득불 참전하게 됐다는 논리를 펴는 중국관방학계의 통설을 반영한 결과다. 이점은 지금도 중국이 6·25전쟁을 미군의 38도선 월경북진 전과 그 후 단계를 구분해 전자를 “조선전쟁”으로, 후자를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지원한 전쟁”, 즉 “抗美援朝戰爭”으로 부르는 것과 연관이 있다.

전쟁경과 부분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즉각 한반도내전에 무력간섭을 했는데, 미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급파함과 동시에 유엔군을 조직해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침략함으로써 전화를 북중 국경지역으로까지 확대해 중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했다고 기술했다. 즉 미국의 한반도 군대파병과 미 7함대의 대만해협 급파를 한반도 및 중국침략으로 규정한 것이다.

또 중국의 개입과 관련해서는 미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변까지 북진한 것을 중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행위였고, 따라서 국가안보의 심각한 위협 상황에서 중국은 북한의 지원요청에 응해 파병했다고 서술함으로써 1950년 10월 중국의 전쟁개입을 정당화했다. 이어서 중국군이 진입한 후 북한과 같이 미국에 대항해 미군을 38도선 이남으로 패주시켰다고 강조함으로써 은연 중 중국은 희생을 무릅쓰고 북한을 구원한 구원자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동시에 각종 전투, 특히 중국군이 거둔 가장 큰 승리로 평가하는 “上甘嶺”전투에서 공이 컸던 병사들의 활약상을 소개해 그들을 영웅시함으로써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할 수 있는 애국적 인간으로 육성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또 북한의 출병지원 요청에 중국이 응해 북한을 지원한 것은 바로 중국의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고 인식하도록 기술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제8차 교육과정개혁 시 설정한 다섯 가지 교육과정목표 가운데 한가지인 애국주의, 집체주의 정신을 갖추도록 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고,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과 혁명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도록 한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쟁영웅들의 희생적 활약이 미국으로 하여금 휴전협정에 서명하게 만들었으며, 중국은 미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중학교 과정의 ‘세계역사’ 교과서는 6·25전쟁 기술 분량이 지도와 사진을 곁들어 1쪽에 불과했다. 내용도 6·25전쟁은 “미국의 패권정책과 미소의 패권경쟁” 단원 중 “미국의 조선 및 베트남침략”이라는 소단원에서 거의 같은 맥락으로 기술했다. 두 교과서가 다른 것이 있다면 중국역사 교과서에서는 전쟁영웅들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데 비해 후자에서는 미국이 한반도에 파병한 병력 규모, 군비 지출규모, 원자탄 등 현대화된 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중학교 ‘역사와 사회’ 교과서도 상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역사, 세계역사 두 교과서와 비교해 볼 때, 이 교과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질의를 통해 교과목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념으로 유도하고 있는 학습의 기술적인 면이 다를 뿐이다. 즉 앞에서 인용한 것과 유사한 내용을 본문으로 소개한 후 미국이 북진하기 직전인 1950년 9월 30일 周恩來가 미국정부에 경고한 사실과 그 내용, 1950년 10월 15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중국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맥아더 장군에 질의한 사실, 그리고 맥아더가 중국군의 개입가능성이 아주 낮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군은 공군이 없는 반면 미국은 공군을 지원할 수 있다고 보고한 내용을 기술했다.

또한 중국군의 북한 진입 후 수 차례에 걸친 반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동시에 6·25전쟁은 “잘못된 시각에,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적과 싸운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회고를 소개하면서 결국 미국의 ‘침략전쟁’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인식이 심어지도록 교육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6·25전쟁을 가르치고 있는 교과목은 필수과목인 ‘중국근대현대사’와 선택과목인 ‘역사’ 두 과목이다. 기술 맥락은 모두 상기의 틀과 유사하고, 단지 좀더 자세하게 서술돼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먼저 역사 교과서는 전체 6개 대단원으로 구성돼 있고, 그 가운데 6·25전쟁은 제5단원 중 독립된 7개의 중단원 중 하나로서 베트남전쟁, 걸프전 등 현대에 발발한 주요 전쟁과 같이 국부전쟁으로 다루고 있다. 6·25전쟁 관련 기술 분량은 전체 161쪽 중 사진 및 지도를 포함해 4쪽에 걸쳐 있다.

서술은 “6·25전쟁의 발발”, “抗美援朝 保家衛國”, “6·25전쟁의 영향” 등 3개의 소단원으로 나눠 진행하면서 한반도에 투입된 미군의 병력, 무기, 장비의 규모가 상세하게 소개돼 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직접 중국의 毛澤東에게 구원을 요청한 사실까지 싣고 있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서술상의 미묘한 변화는 6·25전쟁을 독립된 단원으로 구성하고 이 단원의 교과목표를 6·25전쟁의 발생과 영향에 대한 이해에 두면서 “1950년 6월 25일 조선내전이 발발했다. 조선인민군은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한국군은 절절히 패퇴했다”고 기술함으로써 남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점이다. 또한 소련의 미그기와 미국의 F-86전투기 사진을 나란히 실어 소련의 참전을 간접적으로 암시했고, 6·25전쟁은 미소의 대결이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또 1951년 1.4후퇴 시 중국군이 서울 이남까지 밀고 내려온 사실이 누락돼 있는 점이 특이하다.

6·25전쟁의 결과 혹은 영향면에서 중국은 자국의 국가안전을 위협한 미국의 침략에 대응해 북한이 수행한 정의의 전쟁을 지원했고, 결과적으로 미군을 물리침으로써 미군을 이길 수 없다는 “신화”를 깨트렸으며, 또한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였지만, 동시에 이로 말미암아 장기간 미국의 봉쇄에 직면해 중미관계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상하 두 권으로 돼 있는 고등학교 중국근대현대사 교과서에서는 6·25전쟁이 하권에 총 11개 장 가운데 제5장의 소절 중의 일부분으로 기술돼 있다. 단원명은 ‘抗美援朝 保家衛國’이다. 분량은 교과서 전체 166쪽 중 사진 및 지도를 포함해 2쪽 반이다. 내용은 전쟁배경, 도발주체, 경과 등은 여타 교과서들과 거의 같다.

이 교과서는 중국의 안전을 위협한 증거로 미공군이 중국의 영공을 침범해 동북지역을 폭격했다는 주장을 펴면서 피폭으로 무너진 민가 모습이 담긴 사진을 실었다―이 사진으로는 폭격자가 미군인지 알 수 없다. 이 점은 미국과 한국의 교과서들이 인정하지 않는 부분으로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중국경선인 압록강중상류와 하류유역의 한 두 곳까지 진격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직접적인 공군폭격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모든 국가는 스스로 자국민을 통치하며, 아시아 민중도 스스로 그렇게 할 것이며 이에 대해 미국이 관여할 것이 아니라는 당시 毛澤東의 말을 실어 평화를 희구하는 중국과 침략자로서의 미국을 대비시킴과 동시에 중국의 6·25전쟁 개입은 “미국의 침략”에 대한 정당한 방어적 행위였다는 인식으로 유도하고 있다. 즉 북중 양국은 지리적, 정치적으로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북한정권의 붕괴위험은 곧 중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으로 보고 군사개입을 결정했다는 논리다.

그리고 중국은 중국인민들의 막대한 희생을 감수한 결과 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쳐 승리했다고 강조했다. 이 대목 중에 “북중 양국은 지리적, 정치적으로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북한정권의 붕괴위험은 곧 중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고 군사개입을 결정했다”고 한 서술은 중국의 군사개입을 합리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를 입술과 이의 관계로 보아온 중국인들의 집단적 인식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다. 환언하면, 만약 한반도에 6·25전쟁과 같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중국은 과거와 같은 유사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종합하면,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6·25전쟁의 발발에 전혀 책임이 없으며,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으며,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역사교과서가 종전이 불가능하게 된 책임을 중국의 개입에 전가했듯이 중국교과서는 휴전회담이 지연된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고 강조한다.

6. 러시아

러시아의 초, 중등학생은 역사를 일찍부터 접하고 있음에도 6·25전쟁은 만나지 못한다. 그들은 고등학교에 가서야 겨우 모호하고, 타자화된 이미지로 6·25전쟁을 만난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계속해서 대체로 성인이 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초중고등 교육 기간이 11년인 현 러시아 학제의 교과 과정 중 역사는 5학년부터 11학년에 걸쳐 7년간 배우지만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되는 9학년에 가서야 6·25전쟁과 관련한 내용을 처음으로 배우고, 한 학년을 건너 뛴 뒤 11학년 역사교과서에서 다시 한번 더 학습하게 되지만 남북한의 실체가 실종된 서술로 일관하는 내용을 반복 학습할 뿐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나 심화된 내용을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러시아 교과서제도가 그렇게 만든 결과다. 러시아는 역사과목과 세계사과목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것 같고, 교과서는 출판사가 제작한 뒤 교육의 승인을 받아 제작 배포하는 시스템을 거친다. 역사 교육과정은 시대별로 되어 있으며, 출판사 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학생들은 5학년부터 고대사를 배우기 시작해 9학년에 이르러 현대시기를 모두 배우게 되고, 10, 11학년에 가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체 역사를 다시 한번 더 배운다. 10, 11학년 교과서는 5~9학년 교과서과 내용은 같고, 단지 저학년보다 축약되고 어렵게 표현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덧붙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6·25전쟁 관련 내용은 9학년이나 11학년 교과서가 별반 차이가 없다. 9학년 교과서에는 총 9개 장 가운데 제5장 “스탈리니즘의 말기”에 6·25전쟁이 기술돼 있다. 이를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체제의 충돌은 50년대 한국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결국 냉전이 실제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당시 미국 측 군사령부는 핵폭탄의 사용가능성도 언급했지만 소련 측에서도 역시 핵으로 답할 것을 우려해 실현되진 않았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소련 측은 북한에 군사 기술력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소련 외에도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이 북한에 군사력을 지원했다. 1951년 중반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고,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어 결과적으로 1953년 7월 27일 평화협정서에 서명했다.”

상기 기술을 배우는 러시아 고등학생들은 6·25전쟁의 배경 및 기원이 되는 전후 한반도의 분단, 소련군의 북한 진주, 전쟁 전 소련의 대북 군사, 경제지원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이 교과서는 또 전쟁 배경뿐만 아니라 전쟁도발의 주체가 누구인지, 남침인지 북침인지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전쟁의 경과와 평가 및 영향에 대해서도 기술돼 있지 않고 단지 간접적으로 6·25전쟁이 냉전의 결과였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이것은 소련의 직간접적 개입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으로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동의해줬으며, 수차례에 걸쳐 북한에 무기 장비를 제공해준 사실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 서술이다. 단지 전쟁 중 소련이 단독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과 공동으로 북한을 군사 기술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상기 내용을 보면 6·25전쟁 중 미국의 핵폭탄 사용가능성에 대해 소련이 맞대응하겠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전쟁의 확대를 막았다는 식으로 기술돼 있다. 이러한 기술은 당시 미국이 전쟁을 확대해 세계대전으로 몰고 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 공헌이 소련에 있다는 의사표시로 판단된다.

또한 북한을 지원한 것은 소련만이 아니라 중국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함께 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소련의 전쟁개입을 최소화 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러한 기술은 현 러시아 관방 및 러시아 학계의 6·25전쟁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반영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소련 및 러시아는 지금까지 6·25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전쟁은 북한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수행했다는 것이 공식입장이었다.

휴전이 이루어진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인 스탈린의 사망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휴전에 대해서도 스탈린이 막후에서 깊게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는 한마디도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철저하게 6·25전쟁과 무관하다는 제3자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에게는 전쟁도발과 정전의 주체가 사라진 이상한 전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러시아학계가 오랫동안 자신들과 무관한 지역적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싶어 한 러시아 당국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7.일본

일본의 학제는 한국과 같이 6-3-3-4제다. 이 교육과정에서 6·25전쟁 발발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2학년 사회과목에서다. 내용은 1950년 남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국토가 분열됐고, 전쟁이 3년간 지속됐다는 사실을 전하는 정도로 간단한 수준이다.

이들이 중학교에 진급하면 1, 2학년에 걸친 2년 교육과정인 역사과목에서 다시 한번 6·25전쟁을 배우게 된다. 역사는 사회과목 안의 공민, 지리와 함께 필수과목이고, 교과서는 8종이며 4년마다 한번씩 검정한다. 이 교과서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중단원 속에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소단원을 구성하는 내용으로 소개돼 있다. 분량은 관련 지도와 사진을 곁들여 1쪽이다.

전쟁발발 배경으로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 후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한으로 나눠졌고, 각기 미국과 소련에 점령됐으며, 한반도는 동서 두 세계의 접점이 됐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북한이 “무력으로 통일하고자 남하했고, 마침내 내전은 한반도에서 열전이 됐다”고 언급했다. 북한의 무력남침에 유엔은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을 파견해 중국국경까지 반격을 가했고, 그 결과 북한에 의용군을 보냈으며, 한반도 전역으로 번진 전쟁은 38도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1953년에 휴정협정이 이루어졌다는 줄거리다.

상기 내용은 고등학교 과정의 일본사와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반복된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일본사와 세계사 중 하나를 선택하게 돼 있다. 교과서 종류는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인문계와 실업계가 채택하는 교과서가 다르고, 출판사가 많을 뿐만 아니라 2년마다 한번씩 검정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장 점유율이 높은 상위 4종은 實敎, 山川, 淸水, 東京 출판사가 발행하는 교과서다.

또한 일본사A는 일본근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있고, 농업, 상업, 공업고등학교 등 인문계 이외의 학교에서 배운다. 일본사B는 일본고대사에서 시작하여 에도시대까지 다루는 통사이다. 따라서 내용면에서는 일본사B가 조금 어려운 측면이 있고, 대부분의 사립대학입시와 우리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센타 시험’이 B교과서의 내용이 출제되기 때문에 문과계 학생들은 대부분 B과목을 이수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일본사 및 세계사 교과서의 종류가 많아도 6·25전쟁 관련 내용들은 대체로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일본사교과서는 예외 없이 모두 6·25전쟁 자체에 관한 소개보다는 그것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즉 “전후의 국제정세와 일본의 독립”, “미소2극 구조의 세계와 국내의 재편”, “복잡한 환경 중의 독립” 등, 대체적으로 일본의 정치흐름을 설명하는 대단원 중의 소절로서 6·25전쟁을 다루며, 그것이 일본과의 관계, 즉 일본의 독립 및 경제부흥 혹은 일본내 군사상황의 변화가 어떠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6·25전쟁발발의 배경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과서들이 미소 냉전, 아시아정세의 변화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교과서는 유럽에서의 미소냉전의 격화와 그것의 동아시아 파급, 그리고 신중국의 수립 등과 같은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한 교과서도 없지 않다. 다. 그러나 일본의 한반도 식민통치가 전쟁발발의 거시적 배경이 된 점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도록 구성돼 있고, 특히 북한의 남침 전 소련, 중공, 북한의 3각 관계 및 중소의 대북 남침 지원과 동의에 대해서는 전혀 소개돼 있지 않다.

전쟁의 도발 주체에 대해서는 모든 교과서가 남침으로 기술했다. 미소 냉전 아래 북한이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남침을 감행했고, 이에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군이 한국을 지원하려고 개입했다는 것이다. 전쟁경과에 대해서는 큰 흐름만 언급돼 있다.

중국의 개입에 대해서는 미국이 파병개입이 중국의 북한지원을 초래한 결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은 미중대결로 전화됐으며, 그 후 교착상태에서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져 정전했다고 기술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군이 한국을 지원해 북진하자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다고만 기술돼 있을 뿐 중국의 개입목적, 동기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휴전과 영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휴전성립만 간단하게 기술돼 있을 뿐 배경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일본사 교과서에서 6·25전쟁을 주로 일본사와의 관계에서 파악했다면, 세계사 교과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미소냉전의 전개 혹은 그것의 동아시아사와의 관계에서 6·25전쟁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사는 일본사처럼 A와 B 두 종류가 있다. 세계사A는 세계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있고, 기본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반해, 세계사B는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는 통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내용상 응용능력을 키우기 위한 발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 6·25전쟁은 대략 “전후세계의 형성”이라는 대단원과 “미소냉전 구조와 일본, 유럽의 부흥 및 아시아 분단국가들”이라는 중단원 중의 한 소단원으로 취급하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의 6·25전쟁 내용은 일본사 교과서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분량은 미미했던 일본사 보다 더 적다. 또 아예 전쟁 자체를 소개하지 않은 교과서도 없지 않다. 남북 정권의 수립, 북한의 도발 및 남진 사실, 유엔군의 파견, 중국국경까지의 진격, 중국군의 개입과 북한측 지원, 휴전 순으로 지극히 간단한 개요만 기술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발발의 배경과 관련해서는 전후 미소냉전을 꼽고 있으며, 한반도 분단과정에 대해서는 한 두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설명이 지극히 소략하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측은 미국이, 북측은 소련이 분할하여 점령했고, 1948년에는 남북이 각각 정부를 수립했다고 기술했을 뿐, 북한의 남침준비와 중소의 대북 군사지원 및 남침동의와 같은 중요한 사실을 건너뛰어 바로 1950년 6월 북한이 “무력에 의한 한반도통일을 노려 38도선을 넘어 군대를 침공시켰다”고 기술한 것이다.

남침전쟁 도발의 주체에 대해서는 미소냉전과 한반도 분단과정을 전제한 상태에서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고 있는데,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북통일을 위해 남북경계선을 넘어 침공해 한반도 남쪽의 부산까지 공격했다”는 설명이다. 전쟁경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서술돼 있다. 즉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이 사태를 북한의 침공행위로 규정하고 미군을 주력으로 한 미국을 파견하였으며, 이에 대항하여 중국이 북한측을 지원하여 의용군을 출동시키자 한반도의 거의 전역이 전란으로 뒤 덥혔다. 결국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38도선을 사이에 둔 정전라인이 그어지고 6·25전쟁은 끝났지만 그 후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고정화되었다.

이런 식의 기술은 북한군의 남진과정, 한국군의 필사적 저항이나,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반격과정과 중국군의 개입원인 등을 빠트리게 된다. 또 한반도의 비극, 전쟁의 참상 등에 대해서는 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교과서가 개념을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의 결과 혹은 영향면에서는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개입, 중소를 포위하는 국의 군사적 안전보장체제의 강화로 인해 냉전이 아시아로 확대된 계기로 파악한 교과서도 있다. 또 일본사 교과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요 논점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기술된 예들을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6·25전쟁 기간 주일 미군과 일본의 기지 및 시설이 6·25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 사용되는 한편, 미군의 한반도 전선이동에 따른 군사적 공백을 메우고 치안을 유지할 필요성에서 GHQ의 지시로 경찰예비대가 긴급히 창설됐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경제부흥의 결정자를 결한 상태에서 혼미상태에 있던 일본경제가 미군의 군수품 수주로 활기를 띄기 시작해 숨을 돌리게 됐는데, 말하자면 이웃나라의 전쟁으로 이른바 “조선특수”를 누리게 됐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시의 전쟁범죄자의 석방, 군국주의적 전범의 공직추방 해제, 공산당원의 색출과 국가 공기관 및 직장에서의 추방, 기지반대운동 등을 촉발시킨 6·25전쟁은 일본내 각종 정치, 군사, 경제, 사회의 변화를 일으킨 배경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비군사화를 추진하던 미국의 대일정책을 변화를 이끌어 내 결국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각종 조치와 미일동맹조약에 임한 일본정부의 능동성을 희석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8. 전쟁기념관의 6·25전쟁 내용 전시 방향

주지하다시피 전쟁기념관은 1994년 6월 “6·25전쟁의 역사적 사실과 그 실증자료들을 모아 후대에 전하는 일”을 “국가적 과제”를 안고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으로 개관한지 10여개 성상이 지난 지금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호국의 얼을 고취함으로써 국가관을 새롭게 정립하게 하는 국내 최고의 ‘전쟁박물관’이자 호국의 전당으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동시에 전쟁기념관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의 역대 전쟁, 해외 군사파병, 무기 장비 등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각종 지식 및 정보를 제공하는 박물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월 평균 5만 여명이 넘는 내외국인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관광 기능이 결합된 명소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의 전시물 가운데 6·25전쟁 부분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옥외에 전시된 6·25전쟁 당시의 각종 무기를 비롯해 실내의 6·25전쟁실은 누구나가 쉽게 6·25전쟁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구성돼 있고 내용도 풍부하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학계에서 축적된 새로운 연구성과들이 잘 반영돼 있지 않는 부분이 있어 내용이 누락되거나 성글게 전시되어 보완해야할 부분도 없지 않다. 이에 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토대로 본론에서 분석해본 국내외 주요 국가들의 역사교과서상의 6·25전쟁 기술 내용의 결함을 참고하여 몇 가지 전시방향을 제언하여 본고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중공군”이라는 표기와 영어로 표기한 "Chinese Army"와는 호응이 되지 않는데, 모든 국내외 교과서들이 “중국군”이라고 표기했듯이 마땅히 “중국군”으로 정정돼야 한다. “남북한 군사연표”에 소련이 수차례에 걸쳐 북한에 무기 장비를 지원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소련의 북한 무기지원 현황”에는 1949년 5월 1일 북한이 소련에 요청해서 동년 스탈린이 6월 4일 승인한 후 제공한 무기들만 열거돼 있는데, 여타 이 시기 이전에 지원된 무기장비들까지도 종합해서 기록해야 할 것이다.

둘째, 도입부인 전쟁발생 배경부분에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통치 사실과 미소냉전의 한반도 도래가 전쟁발발 기원이 됐다는 개념이 박약하다. 전자는 본문에서 고찰한 바 있듯이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한반도 식민통치가 6·25전쟁 발발의 연원이 됐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또한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사전에 전쟁도발 문제를 깊숙이 논의한 사실과, 소련 및 중국이 북한에 제공한 군사 지원, 김일성의 전쟁발동에 관한 승인요청에 대해 스탈린, 모택동이 동의한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돼 있지 않다. 단지 1949년 조소비밀회담에 북소 관계와 소련의 군사지원 정도만 언급돼 있을 뿐이다. 이 점은 미국,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모든 교과서가 공통적으로 누락하고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차후 김일성의 남침전쟁 승인 요청부분에서부터 스탈린과 모택동이 동의한 배경과 그 전략적 의도, 또는 중소의 입장 등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북한군 무력도발”과 “북한군 무력도발 상황도”에서 북한군의 도발사실만 전시돼 있는데, 한국의 교과서들이 서술하고 있듯이 당시 남북한이 38도선에서 상호 충돌한 사실도 추가할 필요가 있다. “북한 지상군 남침작전”부분에 북한이 줄기차게 교육, 선전해온 북침주장을 반박자료들을 전시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북한은 지금도 몇 가지 어불성설 격의 논리를 제시하면서 북침을 주장하고 있는데,『조선전사』에 수록된 한국군의 ‘북침’경로 지도를 제시하고, 그것이 조작된 지도이며 그러한 주장이 허구임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전시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또한 북한의 남침 개시 후 미국의 대응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의 움직임을 전시함으로써 당시 국제정세를 이해하게 해줄 필요도 있다. 이것은 동시에 자국 관람객으로 하여금 6·25전쟁에 자국이 연관돼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

넷째, 전시물 가운데 당시 생활상을 재현해놓아 관람객으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 ‘전시생활’ 코너에 서울함락 뒤의 수도 이전 경로, 피점령 지역에서 북한군이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 등을 추가한다면 사실감이 배가되고 더욱 입체감이 있을 것이다.

다섯째, 인천상륙작전의 의미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여기에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과 함께 개시된 한미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이 낙동강전선에서 북으로 패주한 사실과 관련해 내외 국가들의 모든 교과서가 북한군의 패주경로, 집결지 및 김일성의 지시를 누락했는데, 당시 북한군의 후퇴경로 및 집결지, 김일성의 지시 등을 전시한다면 적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어 균형잡힌 이해가 될 것이다. 또 “38도선 돌파”부분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경로를 시각화한 요도 전시와 함께 상황설명을 부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평양탈환작전”에서 김일성을 포함한 적 수뇌부의 도피 경로를 보여주면 피아의 움직임을 함께 포착할 수 있는 균형감이 생길 것이다.

여섯째, “중공군 참전배경”에 1950년 10월 초 김일성이 毛澤東에게 보낸 친필 지원요청 서한 혹은 그 내용, 그리고 중국수뇌부의 참전결정 배경과 동기 및 목적을 포함해 중국군의 각 부대별 투입경로, 병력규모, 지휘관, 무기 장비를 일별할 수 있는 자료 소개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다 아군이 조우하게 된 중국군과의 전투를 사건경과에 따라 중국군과의 최초전투→중국군의 주요 전투 순으로 부가해주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일곱째, 미국 교과서에서 언급된 내용, 즉 ‘1.4후퇴’ 이후 전쟁이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지자 맥아더 장군이 중국대륙에 원자폭탄을 사용하자고 건의했고, 이에 대해 트루먼이 거부한 사실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또 중국 교과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미군기의 “중국 영공을 침범과 동북지역 폭격”을 그대로 받아들기 어렵지만 최소한 현재 중국측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고 소개할 필요는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이 봤을 때 우리측의 역사왜곡이 아니냐는 주장과 시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국이 전쟁개입의 한 명분으로 내세운 북중 “脣亡齒寒 관계”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이 문제는 과거에 끝난 사실이 아니라 현재도 유효한 개념이기 때문에 이를 전시, 교육함으로써 우리가 한반도통일을 생각할 때 염두에 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서다.

여덟째, 휴전 부분에서 스탈린 사망이 정전회담이 재개된 주요 요인이라고 언급돼 있지만 무엇 때문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밝혀줄 필요가 있다. 즉 스탈린이 휴전을 반대했고, 이를 毛澤東과 김일성에게 압력을 가한 사실과 공산측의 휴전에 대한 의견불일치 등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남한의 교과서들에서 기술돼 있듯이 휴전협정을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이 협정체결 전 불시에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장기간의 경제원조, 한국군의 증강 등을 약속받은 사실을 전시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결과와 관련해서는 관람자로 하여금 6·25전쟁이 가져다준 피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남북한, 미군, 중국군의 피해를 동시에 비교하는 일람표가 필요하다. 아홉째, 모든 전시 내용이 결국 한반도 통일을 위한 가치관을 가지도록 귀결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6·25전쟁실의 전시 마지막 부분에 통일을 지향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자각하게 하는 내용의 전시물이 부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관리와 전시 구성면에서 국제화를 지향하고, 국제 소통의 확대와 전시물의 부단한 ‘리필’을 통해 사실 오류들을 정정, 보완해야 한다. 그것은 중국어의 간체자와 번체자의 표기 혼용, 명칭오류라는 세세한 문제에서부터, 내용 착오와 통일지향적인 비전제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과제는 학계와의 소통과 관련 사료 수집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데, 기존에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사실 오류를 광정하고 학계의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전문 학예사의 역할이 요망된다.

위 논문은 전쟁기념관에서 주최한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후 『전쟁과 유물』, 창간호(2009년 12월 30일)에 게재된 것입니다. 위 글에서 논문 중의 각주는 모두 생략됐지만, 원래 논문에서는 생략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