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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참전 得失평가 : 一國史를 넘어 보편사로

雲靜, 仰天 2014. 12. 31. 12:58

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참전 得失평가 : 一國史를 넘어 보편사로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목 차

 
머리말
Ⅰ. 일본의 참전 목적과 주요 활동
Ⅱ. 得과 失에서 본 일본의 참전목적 달성 여부
Ⅲ. 일본이 거둔 得과 失의 의미와 평가
맺음 말
 
 
머리말
 
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이다. 1914년 6월 유럽에서 발생해 7월 경 유럽 전역으로 확장된 이 대전은 기본적으로 유럽 각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얽힌 전쟁이었다. 전장이 주로 유럽지역이었던 이 전쟁의 참전국은 도합 30여 개국이었다. 유럽 이외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초기부터 참전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중국은 중립을 선언했다가 나중에 미국이 참전하자 뒤늦게 1917년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발했다. 일본의 참전은 표면적으론 1911년에 체결된 ‘제3차 영일동맹’의 파트너인 영국의 요청을 수락하는 형식을 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일동맹은 공수동맹이긴 했지만 일본이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는 ‘자동참전의무’는 규정돼 있지 않았다. 실제로 영국정부도 8월 1일 이노우에 가츠스케(井上勝助) 런던 주재 일본대사를 불러 이번 사태에는 영일동맹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오히려 영국과 일본이 벌인 교섭의 이면을 보면 일본이 각의에서 참전론을 강경하게 주장한 일본외상 등의 강경파가 중심이 돼 영국에 참전을 요구해 이뤄졌던 것이다.
  
유럽이 주요 전장이었고, 또 반드시 참전해야 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이 전쟁에 참여한 일본은 유럽제국과 미국의 참전에 비해 주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유럽 국가들은 물론, 일본 내에서조차도 일본의 참전이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역할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일본의 참전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폭 넓게 이뤄졌다. 지역적으로는 중국 산둥(山東)반도, 남양군도, 유럽(지중해), 러시아(시베리아) 등 네 지역이었다. 그 역할은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지상군 군사활동, 태평양 지역, 특히 지중해와 인도양에서의 해군의 선단 호위작전, 연합국 측에 대한 무기와 탄약의 수출 등이었다.
  
근년 각종 사료와 회고록들이 대량으로 공개됨에 따라 몇몇 학자들이 일본의 참전 목표에 관심을 집중한 데에 힘입어 여러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 이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요약하면, 일본의 참전 목적은 강대국으로서의 도약과 국위선양, 중국과 서태평양상의 여러 군도 등의 해외영토 및 이권의 침탈에 있었다. 이 중 최대의 이권을 노린 지역은 단연 중국이었는데, 러일전쟁 이래 러시아와 양분해온 만저우(滿洲) 등 중국에 대한 기존 이익을 공고히 하고, 독일이 산둥에서 누려왔던 권익을 가로 채 이를 중국관내의 권익을 쟁취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면 일본은 최초 설정한 참전목적을 달성했던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치밀하게 천착한 연구는 눈에 띠지 않거나 부족하다. 내가 이 논문을 집필하게 된 동기다.
 
본고에서 나는 먼저 일본군의 참전활동을 밝힌 뒤 참전 목표의 달성 여부를 기준으로 일본이 거둔 득실을 살펴보고, 그것이 일본 국내외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에 포커스를 맞춰 논의하겠다. 일본이 거둔 득과 실은 참전 당사국인 일본정부 혹은 우익세력의 입장에서 본 것인데, 우선 그 내용들을 제시한 뒤에 이어서 이에 대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역사발전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새롭게 평가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보편적 가치’들이 기준이 되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역사를 ‘보편사’(universal history)로 정의한다. 우리가 지구를 전쟁이 종식되고 안전이 보장된 평화공동체로 만들고자 하는 인류 최후, 최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 보편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득실을 일본역사와 일본정부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사와 세계사라는 인류 보편사의 시각에서 재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본의 참전을 단순히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입장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열게 될 것이다.
 
Ⅰ. 일본의 참전 목적과 주요 활동
 
1914년 8월 1일 영국정부는 일본정부에 영일동맹조약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전했다. 하지만 독일 육군이 벨기에를 침입하자 영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 날 영국은 8월 4일 전화가 극동으로 옮겨 붙을 경우 홍콩과 웨이하이웨이(威海衛) 등지가 공격받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주영 일본대사를 통해 일본에게 참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같은 날 성명을 발표해 영국의 초청을 거절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의 참전요청이 영일동맹에 근거한 것이었긴 해도 이 동맹의 지리적 적용범위가 인도까지의 아시아 지역으로 정해져 있었고, 일본해군이 멀리 지중해까지 나가야 하는 것은 동맹의 적용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참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 예상되자 영국은 8월 7일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참전을 요청했다. 연합국 중 초기에는 영국만이 일본의 참전을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칭다오(靑島)에 주둔한 독일의 동양순양함대가 움직이는 것을 일본만이 제압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무역의 비중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전쟁이 극동으로 파급돼 영국세력 범위인 홍콩과 산둥의 웨이하이웨이가 공격을 받으면 일본이 지원해주길 바라는 입장이었다. 사실, 영국도 초기프랑스와 러시아처럼 일본의 참전을 반대하고 싶었지만 중국 부근 해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국 해군의 약화로 인해 부득이하게 일본의 참전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던 것이다.
  
영국의 제의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가토 다까아키(加藤高明) 외상이 참전 결정을 주도했다. 그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수상과 협의하고 이날 밤 소집된 임시각의에서도 참전을 주장했다. 이 회의 석상에서 찬반양론이 오고갔지만 결과적으로는 참전하기로 결론이 났다.
 

가토 다까아키 외무상

이렇게 결정된 참전의지를 가지고 다음 날 닛코(日光)에 있던 다이쇼(大正)천황에게 상주, 재가를 얻게 됨으로써 오쿠마 수상도 참전을 결정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가 어전회의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승인도 없었으며, 또 군 통수부와의 상의도 거치지 않고 임시각의에서 요청이 있고 36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사이 중국과 미국의 ‘극동중립화’ 의향을 인지한 영국정부는 8월 9일과 10일, 11일 연거푸 일본의 참전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하거나 참전의 일시 연기를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고, 심지어 참전요청을 철회까지 했지만 8월 11일, 일본은 영국에 기존 방침대로 참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영국의 의구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일본은 가토 외상이 칭다오를 점령한 후 이를 중국에게 반환하겠다는 약속으로 영국 외상 그레이를 설득했다.
  
극동지역의 현상 유지를 원했던 미국은 유럽에서의 전화가 극동으로 미치는 것을 피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또한 당시 자국내 반일 여론이 좋지 않았던 미국은 일본이 참전하면 괌 등 태평양상의 자국령 군도들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했다. 중립을 표방한 중국 그리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 교전을 벌여야 했던 독일도 일본의 참전을 막기 위해 막후에서 활발한 외교전을 벌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안전 확보를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는 일본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일본과 독일의 협공을 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는 영일동맹에 참가하기를 희망했다.
  
1914년 8월 15일, 가토 외상은 일본정부를 대표해 독일에 대해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용은 일본과 중국 해역에서 독일전함들을 즉각 철수시킬 것과 9월 15일까지 독일이 점령하고 있는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지 전부를 일본제국 관헌에게 건네 줄 것”이었다. 명분은 “극동의 평화를 문란하게 만드는 원천을 제거해 일영동맹 협약이 예기하는 전반적 이익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었다. 자오저우만은 청일전쟁 후 독일이 삼국간섭으로 99년간 조차할 권리를 가진 곳이었다. 일본은 1주간의 회답 기한을 정해 독일에게 이 통첩에 대해 8월 23일 정오까지 답하라고 압박했고, 독일이 이에 답하지 않자 선전포고는 8월 23일부로 발효됐다.
  
이로써 일본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돼 참전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군사행동의 범위에 대해서는 영국과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참전하게 됐다. 일본이 재중국 권익을 과도하게 확대시킬 것을 우려한 영국은 참전지역을 극동 및 서태평양에 한정하려고 했다. 영국은 또 영연방 국가인 호주와 뉴질랜드, 미국의 입장을 고려해 일본의 참전지역을 제한하려는 입장을 가지고 일본과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지만, 일단 참전하게 되면 전투에 참가하는 지역을 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일본과의 의견은 좁히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되는 사이 결과적으로는 ‘戰域제한문제’는 해소돼버렸다.
  
그러면 일본은 왜 참전했을까? 우선 동기와 배경부터 살펴보자. 일본은 러일전쟁 이래 누적된 과대한 군사비와 국채상환비용에다 식민지경영비가 더해져 재정이 심하게 압박을 받은 상황이었다. 1907년의 공황 이래 경제 불황은 만성화되고 영세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무역의 입초에서 비롯된 국제수지 역조를 외자도입으로 해결해온 일본은 1910년대에 들어와 국가재정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러일전쟁 후 외채는 급증해 1913년 말에 이르러 대외채무액은 이미 20억7,000만 엔이었는데, 이 가운데 대외 투자액 8억5,000만 엔을 제하고도 12억2,000만 엔의 채무액이 남아 있었다.
 
1913년 이 해 재정수입 결산은 7억2,000만 엔, 조세 수입이 3억7,000만 엔이었기 때문에 외채 부담이 극심했다. 1914년 7월말 현재 일본정부가 받을 대외채권은 4억5,000만 엔에 불과한 데 반해 갚아야 할 대외채무는 19억 6,000만 엔에 달한 대외 채무를 지고 있었다. 즉 채무와 채권을 상쇄하면 채무 잔액이 15억1,000만 엔에 달해 당시의 경제상황에서는 채무에 대한 원금상황은 고사하고 매년 이자마저도 갚지 못할 정도였으며, 새로운 외채도 모집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사회적으로도 농촌에서 증세와 불황으로 생활이 곤고해진 농민들이 경작지를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어와 도시 사정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악화된 경제사정은 군부가 강경하게 밀어붙인 조선에 주둔시킬 육군 2개 사단 증설문제가 계기가 돼 군비와 재정의 모순으로 표면화 돼 1912~13년의 ‘다이쇼(大正)정변’으로 폭발했다.
 
육군대신이 육군 2개 사단 증설을 강경하게 요구하고 혼자 각료직에서 사임함으로써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내각이 무너졌으며, 뒤이어 이를 기화로 민중들이 “족벌타도, 헌정옹호”운동을 전개해 카츠라 타로(桂太郞)내각을 무너뜨렸으며, 1914년 3월 야마모토 곤베(山本權兵衛) 내각도 ‘시멘스 사건’(해군의 수뢰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사직하는 등 극심한 혼조를 보이고 있었다.
 
원로회의에서 새로운 내각의 수상으로 발탁된 오쿠마에게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할 대임이 맡겨진 상황이었지만 일본이 맞고 있던 정치적 위기는 전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내의 각종 불만들을 바깥으로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정치지도자들은 대외팽창과 중국대륙의 각종 이권 획득으로 국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들에게 참전은 당시 정치적, 재정적, 사회적으로 막다른 길에 부닥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 밖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동기로서 독일에 대한 복수심도 없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청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얻은 랴오둥(遼東)반도와 타이완(臺灣)을 삼국간섭으로 중국에 되돌려 준 뼈아픈 기억이 남아 있었다. 삼국간섭의 주역 가운데 러시아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패배시켰고 복수할 건 독일과 프랑스가 남았는데, 독일이 러시아 다음으로 분쇄해야 할 두 번째 대상이었다. 당시 영국 외교부 장관 그레이가 베이징 주재 자국공사 조단(Sir John N. Jordan)에게 보낸 전문에 일본이 참전하려는 것은 청일전쟁 시기 독일이 행한 삼국간섭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고 한 대목이 이를 입증한다.
 
여기에다 일본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창한 이른바 황화론(Yellow Peril), 즉 황인종이 백인종에게 화를 입힐 것이라는 인종차별적 편견에 대한 분개심이 작지 않았으며, 그런 이유로 독일을 응징하겠다는 심리도 더해졌다. 주지하다시피 황화론이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두에 걸쳐 나타난 정치적 주장으로서 인류는 평등, 대등하지 않고 황인종은 백인종에게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특히 황인종인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백인종인 러시아제국과 싸워 이긴 것이 백인들의 황인종에 대한 경계를 심화시킨 계기가 됐는데, 일본군 병사들 중에는 황화론을 주창한 독일인을 패배시키려는 인종주의적 심리도 작용했다.
 

구미의 황화론을 상징하는 포스터다. 구미 열강이 한 나라로선 거대한 중국을 통치할 수 없으니 유럽 각국들이 분할해서 통치하자는 생각이었다. 이는 몽골제국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 당한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해 생겨난 아시아인들에게 대한 반감과 두려움의 소산이었다.

  
다음으로 일본의 참전목적은 크게 국가발전전략 측면과 지정학적 전략 혹은 전쟁전략, 그리고 전투 및 전술 수준 등 세 가지 수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목적과 관련해서는 유럽 국가들이 참전의 격랑에 말려들어 아시아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 국력을 신장하려는 것이었다. 국력신장은 다른 말로 하면 동아시아지역에서의 군사적 패권 확립과 경제적 대국건설이었다. 이 참전목적은 당시 정부 각료들과 국가 원로급 지도자들의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해 8월 참전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가토 외상이 개진한 참전이유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영국의 의뢰에 기반을 둔 동맹의 情誼”에 근거해 참전하는 것은 일본“제국이 이 기회에 독일의 근거지를 동양에서 일소해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도 8월 10일 오쿠마 수상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럽의 대혼란을 일본국운의 발전과 국익을 신장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거국적으로 일치단결해서 하늘이 도우는 것을 제대로 누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단결을 강화해 동양에서의 일본 이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 원로 중의 원로인 야마카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얘기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하늘과 신이 일본을 도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번 전쟁이 종료되면 백인종과 유색인종 간의 투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 유럽전쟁을 이용해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배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가토, 이노우에, 야마가타 등의 정치지도자들이 말하는 일본의 국제적 지위 향상이란 곧 중국을 둘러싼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각축에서 일본의 이권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중 중국에서의 이권은 중국 만주, 몽골, 화중, 화남 지역의 이권을 가리킨다. 일본은 한반도 병합 후 대외정책의 새로운 목표로 滿蒙(만주와 내몽골)에 대한 이익옹호를 내걸었다. 만몽이익의 수호는 군부는 물론, 정부와 정당을 막론한 정치권 전체에 절대적인 과제가 됐으며, 화중(華中), 화난(華南) 지역의 이권에 대해서는 영국과 협조해서 획득하려고 했다. 신해혁명 이래 역대 일본의 내각은 이 방침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일본의 실력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또 1913년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이 출자한 대중국 ‘국제차관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중국관내 지역에 대한 진출을 기도하려고 했지만 이권획득에는 실패했다. 일본 국내 정계 일각에는 중국 관내 지역에 대한 이권획득 실패를 두고 불만을 표출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치세력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남북 두 정권으로 분열된 중국의 정치상황을 이용해 군사적으로 중국을 제압하고 내정 간섭을 통해 중국에서의 이익을 획득하려고 한 일본의 국가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국운 상승, 해외에서의 이권 확립, 국제적 지위 향상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포착했다.
  
두 번째 목적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거론할 수 있다. 먼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이 일관되게 추구한 전쟁의 목적은 중국 산둥반도의 영토와 서태평양의 적도 남북해역에 위치한 독일령 제도를 탈취하고 이 두 지역들에 대한 독일의 권익을 가로채는 것이었다. 일본은 자오저우만 지역을 확보해 칭다오를 포함한 산둥반도 전체를 세력권으로 포섭함으로써 영토 확장과 중국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품고 있었다. 칭다오 요새를 점령하여 세계체제에서 일본의 지위를 높일 수 있으며, 동시에 국제적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도 목적의 하나였다. 이외에 산둥 지역 점령이 일본에 가져다 줄 국가안전보장 차원의 전략적, 지정학적 이점도 컸다. 당시 일본육군 지도부는 산둥지역 중에서 특히 膠州灣과 膠濟線 철도를 장악하려는 전략목표를 세웠다.
  
교제선은 교제만에 임한 중요도시인 칭다오에서 산둥성의 성도인 濟南을 동서로 관통하는 철도로서 독일이 지난 세기 말에 착공해 1904년에 전구간을 개통시킨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의 수중에 있는 이 철도를 탈취, 권리를 이관한 뒤 적당한 시기에 중국에게 돌려줄 복안이었다. 가토 외상은 膠州灣을 탈취한 뒤 남만주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이를 중국에 돌려줄 구상이었다. 일본이 이 철도를 획득하게 되면 러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수중에 넣은 랴오둥(遼東) 반도의 뤼순(旅順)항과 그 북쪽의 장춘(長春)을 남북으로 잇는 남만주 철도와 근접해진다.
  
일본은 이미 일본본토에서 배로 한반도로 건너가면, 그 다음 철도로 부산-경성-평양-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지나 안둥(安東)-장춘-뤼순항까지 갈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은 상태였다. 膠濟철도는 그 다음 목표였다. 만약 일본이 이 철도를 수중에 넣으면 중국을 바다와 육지 양측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중국의 남북 두 정부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내전에도 개입하기가 쉬워진다. 일본 육군 지도부 내에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또 식민지 경영면에서 교제선 철도를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독일 조차지인 칭다오 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남양군도의 탈취가 일본에 안겨줄 국가발전 혹은 국가안전보장 차원의 지정학적 이익도 작지 않았다. 남양군도란 태평양상의 마리아나제도, 마셜제도, 사이판, 파라오제도, 카로린제도를 포함하는 총칭이다. 일본에게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경제 및 재정적, 안보적 동기에서 남진정책을 추진하고자 한 일본에게 이 지역은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태평양 한 가운데 위치한 섬들은 해군의 전진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미국도 지난 세기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필리핀을 획득한데 이어 하와이와 사모아를 병합한 이상 태평양은 상당한 이해관계를 지닌 거대한 ‘호수’가 됐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각기 반대편에 있는 일본과 미국은 제각기 반대편 국가가 공격해올 것을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민에게 일본인들은 러시아를 패배시킨 호전적인 이미지가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통치하던 마리아나, 파라오, 카로린, 마셜 등의 미크로네시아는 미국이 태평양을 횡단해서 아시아로 건너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루트상에 있는 섬들이었다. 이 가운데 마셜제도의 자루트(Jalute), 카로린 제도의 포나페, 트랙크, 얍프,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등지에 독일 해군기지가 있었다. 특히 사이판 등지는 미국에게 이곳이 넘어가면 일본본토까지 날아 갈 수 있는 B29 같은 대형 폭격기의 발진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 모두에게 긴요한 지역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 전투 혹은 전술 수준의 목적으로는 당시 일본군 지도부 내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거론됐었다. 독일제국의 식민지였던 남양군도 가운데 적도 이북의 태평양 상 섬들, 즉 독일령 마리아나 군도, 동서 카로린 군도 유역의 수색 및 해상보안이었다. 또한 남양군도 지역의 일본인들이 겪고 있는 곤궁을 구제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참전목표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일본육군 참모본부 제2부장 후쿠다(福田雅太郞) 소장이 마련했는데, ‘日支協約安要綱’으로 정리했다. 주요 내용은 공산러시아에 대한 ‘일중공동방위’를 명분으로 만몽자치를 제기하고, 중국의 이권을 타국에 양도하지 말 것, 중국이 외국에 차관을 얻으려면 반드시 일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러일전쟁으로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한 일본은 침략의 촉수를 만주로 넓히기 시작해 결국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한 것에 대한 공동대응으로 1910년 러시아와 제2차 러일협상을 맺어 만주를 남북으로 반분해 각기 그 지역에 대한 특수권익을 서로 인정해왔다. 따라서 일본군부가 만몽자치를 제기하려는 것은 이 지역을 중국 관내와 분리해 기존 권익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였다.
 
육군 참모차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이를 더욱 구체화해 ‘滿蒙合倂’방침을 정했다. 오쿠마 내각은 후쿠다와 아카시 등의 방안을 토대로 중국정부로부터 획득하려고 한 각종 이권을 구체화 시켜 이른바 대중국 ‘21개조 요구’로 정리했다. 이는 열강의 중국공백 상황을 이용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중국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겠다는 군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참전 목적을 가다듬은 일본은 즉각 이를 실현시킬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이를 정리하면 전쟁 전 기간 동안 일본군이 활동한 지역과 임무는 다음과 같이 세 갈래로 가닥이 잡힌다.
  
첫째, 독일제국의 아시아 경영의 근거지이자 독일해군의 동양전대의 근거지였던 산둥의 칭다오에 대한 공략작전이었다. 대독일 선전포고 후 일본이 맨 먼저 결행한 것이었다. 칭다오는 이 도시가 피탈되면 특권이 상실될 것을 우려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최우선적으로 방어할 것을 지시한 요새였다. 9월 2일 칭다오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산둥반도의 북단 룽커우(龍口)로 상륙해 독일의 조차지 칭다오로 진격을 개시한 일본육군 약 3만 명이 9월 26일 독일군의 전진진지를 공격했다.
   
일본해군은 칭다오 항해 중 조우한 영국해군과 함께 해상봉쇄와 동시에 함포 지원사격을 했는데, 연합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해군의 함포지원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약 5,900명의 독일군을 포위, 격파한데 이어 계속해서 10월 6일 지난(濟南)을 점령하고 11월 7일 칭다오 공략에 성공한 뒤 11월 13일 작전을 종료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가 400명이었음에 반해 독일군은 200명뿐이었다. 나머지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군과 함께 항복한 독일군은 거의 다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칭다오 점령 후 일본은 산둥의 膠濟線 철도 서단을 통제하에 둔데 이어 만저우(滿洲)의 장춘(長春)과 양자강 유역의 거점 도시 한커우(漢口)에도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이어서 이듬해 1915년 1월 일본 오쿠마 내각은 ‘21개조 요구’의 내용을 일본 정부의 원로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주중 공사 히오키 에키(日置益)를 통해 위앤스카이(袁世凱) 총통에게 들이밀었다.
 

임시대총통 손문에 이어 정식으로 중화민국 초대 총통이 된 원세개

 
대중국 ‘21개조 요구’는 총 5개 호 21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내용은 이미 일본학계와 중국학계에 상식화되다시피 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21개조’의 골자와 의도는 남만주에서 보유한 기존의 권익을 공고히 하고, 독일을 산둥의 세력범위에서 내쫓아 일본이 이 지역에서의 독일 권익 일체를 계승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중 나중에 국제적 문제가 된 마지막의 제5호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
  
베이징 중앙정부에 유력한 일본인을 초빙해 정치, 재정, 군사 방면의 고문으로 앉힐 것, 중국경찰을 일중 합동으로 하고, 중국경찰청에 다수의 일본인을 고용할 것, 중국정부가 필요로 하는 병기의 반을 일본에서 공급할 수 있도록 할 것, 또는 일중 공동으로 병기창을 설립해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재료를 공급하도록 할 것, 우창(武昌)-지우장(九江)-난창(南昌)선 철도 및 난창-항저우(杭州)선, 난창-차오저우(潮州)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허여할 것, 푸졘(福建)省 내 철도, 광산, 항만의 설비(조선소 포함)에 관해 이국 자본을 필요로 할 경우 먼저 일본과 협의할 것이다. 한 마디로 정치, 재정, 군사, 치안,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중국정부를 일본 정부의 영향 하에 두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해 열강은 즉각 반발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21개조’의 강요가 중국의 독립과 통합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일본에 자제를 요청했다.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lson) 대통령도 그것이 중국의 독립과 통합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문호개방에도 위배된다고 하면서 일본이 만일 무력으로 이를 관철하려고 할 경우 미국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이미 일본은 문호개방정책의 모든 보증을 배신하고 조선을 병합한 전력이 있어 미국 지도자에게 신의를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오히려 이것이 중국의 통합을 강화시킨다는 억지스런 궤변으로 대응했다.
  
중일 두 정부는 2월 2일부터 장장 84일 간에 걸쳐 산둥문제에 관해 정식회의 25회, 회의 이외 절충 20회의 마라톤 교섭을 벌였지만 의견 차이로 결말을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베이징 부근에 군대를 보내 무력시위로 베이징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결국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 정권이 ‘21개조 요구’ 중 제1~제4호와 제5호 중 푸졘 관련 요구(나머지 조항은 후일 다시 협상하기로 했음)를 모두 받아들임에 따라 그 달 25일 ‘中日조약’과 외교문서가 교환됨으로써 일본은 각종 중국에 대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교주만, 교제(膠齊)철도, 철도 등 산둥성 내 모든 독일의 권리를 계승하며, 러일전쟁 승리로 러시아로부터 계승한 남만주의 다롄(大連), 뤼순(旅順), 안펑(安奉)철도의 조차기간을 99년으로 연장한 것이었다. 요컨대 일본은 이 조약으로 중국 내 침략범위를 정식으로 산둥, 푸졘, 창장(長江)과 중국 연해지역으로 넓힐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으며, 남만주와 동몽골에서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둘째, 해군의 작전인데 서태평양 해역과 지중해가 주된 활동지역이었다. 해군작전은 독일 해군세력을 태평양 해역에서 몰아내는 작전과 독일잠수함 및 무장상선을 제압하는 작전의 두 단계로 나눠진다. 제1단계 작전은 독일의 동양전대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개시됐는데, 당시 막스밀리언 폰 쉬페(Maxmilian Fön Schffe) 중장이 지휘한 동양전대는 주력인 장갑순양함인 경순양함 4척과 포함 4척으로 편성돼 있었다. 그 주력은 개전 후 칭다오를 포기하기로 하고 6월 20일 계획된 남해 순항차 칭다오를 출항해 행방을 감추었다. 일본해군은 영국해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함정들에 대한 수색을 주 임무로 한 남양군도 방면의 작전을 수행했다. 10월 중순까지 서태평양의 독일령 남양군도(마리아나제도, 카로린제도, 마셜제도 등)를 점령했다.
  
이외에도 일본해군은 7월 31일 칭다오를 떠나 인도양으로 출항한 경순양함 엠덴(Amden)의 추적도 전개했다. 또한 전쟁발발 시 남양군도에 파견돼 있다가 우세한 일본해군을 피해 남미 대륙 최남단의 혼岬을 경유해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동태평양으로 떠난 독일의 동양전대에 대한 추적도 전개했는데, 추적은 코로네이 앞바다에서의 해전과 포크랜드 해역에서의 해전으로 연결됐다. 또한 일본해군은 호주와 뉴질랜드군의 호송, 태평양의 거의 전역에 이르는 초계, 특히 1915년 2월에 싱가포르에서 일어난 인도인 병사들의 반란에 대한 진압도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물자를 전부 영국이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세 차례나 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해주라는 요청(9월), 발트해로 파견(10월), 다다넬즈 해협(Dardanelles strait) 봉쇄작전에 참가해주라는 요청(11월)을 받았지만 여기에는 일체 응하지 않았다.
  
지중해에서의 활동은 주로 선단 호위 및 병력호송과 소규모 전투였다. 1916년 12월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지중해로 함대를 파견해주라는 요청을 받게 됐는데, 일본으로서도 이 호위 임무 대신 서태평양에서 독일령 제도의 할양 등 전후 강화회의를 내다보고 요청을 수락했다. 일본은 영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17년 2월 10일 각의에서 해군파견이 결정된데 이어 4월 총 8척으로 구성된 해군 제2특무함대를 지중해로 보내 동년 2월부터 개시된 독일의 이른바 “무차별잠수함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국 측 선박 호송임무에 참여했다. 파견된 함선은 순양함 아까시(明石)함과 구축함 8척에다 그 후 아까시함 대타로 나온 이즈모(出雲)함과 구축함 4대를 포함해 도합 18척이었다.
  
이 특무함대가 맡은 임무는 당시 영국령이었던 지중해의 말타를 기지로 하여 주로 말타-프랑스 마르세유, 말타-이탈리아 타란드를 연결하는 해상교통로에서 필요한 호송이었다. 지휘체계는 형식상 독립적 임무를 수행하게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말타의 이탈리아 영국 지중해함대사령관의 명령을 받아서 활동했다. 1917년 5월 일본 해군 제2특무함대는 2척의 구축함으로 인력 및 군사물자를 수송하던 도중 독일잠수함으로부터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한 영국의 여객선 ‘트란실베니아(Trasilvania)호’의 구조활동을 벌여 승선자 약 3,300명 가운데 3,000명을 구조했다.
  
제2특무함대는 총 348회에 걸쳐 호위 임무를 수행했으며, 연합국함정 및 수송선 788척을 호송했는데, 약 75만 명의 요원들을 호송함과 동시에 34회의 전투를 수행했다. 다른 전투를 포함해 지중해에서 일본군 장병 78명이 전사했다. 독일 U보트의 무제한 잠수함작전에서 인도양과 지중해에서의 연합국 측 상선 787척이 수송선이 피해를 입었는데, 일본해군은 이들에 대해 총 350회의 호위와 구조 활동을 벌였다. 구축함 榊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잠수함 ‘U27'의 공격을 받아 대파돼 59명이 전사했다. 인도양에 제1특무함대를 파견해 아시아 식민지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영국과 프랑스 수송선단의 호위를 맡았는가 하면 제3특무함대를 호주, 뉴질랜드 해역에서 경비, 구조, 수색 활동을 펴기도 했다.
  
셋째, 1918년 8월부터 “정식”으로 개시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이다. 러시아 영토의 점령과 레닌정권에 대한 압살을 목적으로 한 연합국의 러시아 파병목적과 달리 일본의 시베리아출병 목적은 당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 수상과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 1862~1918) 외상이 밝힌 바 있듯이 한마디로 볼셰비키혁명에 반대하는 강력한 친일반공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은 혁명러시아와 독일세력의 동진을 막아 줄 강력한 완충국(buffer state)을 시베리아, 극동러시아 영토 내에 창설해 이를 울타리로 극동 및 동북아시아에서의 군사, 경제적 패권을 노렸던 것이다.
  
또한 백군의 군사지도자 세묘노프를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그를 통한 괴뢰정권 수립도 획책한 바 있듯이 정치, 군사적으로는 완충국을 통해 만․몽지역과 러시아의 극동 3개 주를 합병, 통제하고,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방대한 노동인력과 자원을 역내개발에 투입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당시 일본정부의 지도적 인물들의 논의를 종합하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는 대체로 세 가지 정도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①러시아 극동지역 출병과 그 지역의 군사적 점령, ②사전 예비조치로 혁명러시아에 공동으로 대항할 중일 군사동맹의 체결, ③러시아 백군에 대한 지원 및 부식을 통해 하나의 완충국으로 반볼셰비키정부를 시베리아에 수립하자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 뒤 1922년(사할린의 보장점령을 포함하면 1925년)까지 계속된 이 출병에서 일본은 7만 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했다.
 
Ⅱ. 得과 失에서 본 일본의 참전목적 달성 여부
 
일본은 참전으로 처음 일본정부가 설정한 전쟁 목표를 달성했는가? 이에 관한 답은 상당 부분 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전으로 득을 본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실도 많았다. 먼저 득 부분을 파악해보면 다음과 같다.
 
1. 得
첫째, 국외의 몇몇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군사적 측면에서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는 이익을 얻었다. 독일군을 항복시키고 일본군이 11월 7일 점령한 칭다오는 첫 전리품이었다. 일본은 칭다오 점령 직전부터 진행해오던 철도 건설을 통해 육상으로도 독일을 봉쇄해야 한다는 명분에 따라 산둥성 전역에 군을 배치하였고, 랴오닝의 선양(瀋陽)과 양자강 유역의 한커우(漢口)에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면서 중국 전역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됐다. 즉, 일본군이 중국과 그 해역 부근에 위치한 독일 식민지 및 전략적 요충지 등 독일의 군사기지를 확보함에 따라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전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를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칭다오 공략과 비슷한 시기에 수중에 넣은 태평양상의 남양군도도 일본이 참전목적을 달성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일본해군이 점령한 군도로는 마셜 군도의 잘루트(1914년 9월), 독일 동양전대의 전략기지인 야프(Jap) 섬(10월) 등이었다. 일본은 독일 동양전대의 거점을 제거함으로써 독일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을 했지만 칭다오 함락 이후 중립국 스웨덴을 통해 “독일에 대해 더 이상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유럽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시함으로써 영국해군에게 독일 동양전대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영일동맹으로 참전한 일본이 군사적으로 협력하면서 태평양상으로 진출할 근거지를 확보했던 것이다.
  
둘째, 각종 해군작전을 수행해 연합국의 승리에 일조함으로써 일본의 국제적 위신, 존재감, 열강으로서의 이미지 고양 등 이른바 “국제적 지위 향상”이라는 참전목적도 달성했다. 이 주장에 대한 논거들은 다양하다. 1917년 상반기부터 일본해군 제2특무함대가 지중해에서 수행한 대독일 잠수함작전에서는 군사적 역할이 미미했지만 그래도 일본해군은 영국으로부터 나름대로 평가를 받았다. 예컨대 독일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한 영국 여객선 ‘트란실베니아호’의 구조 활동도 그 중 하나였는데, 독일잠수함이 근해에 잠수하고 있는 것을 알고 실시한 이 구조 활동으로 영국 국왕으로부터 사령관 이하 27명의 일본해군 장교 및 해군병사들이 훈장을 받았다.
   
또한 동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북안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세유로 병력을 함선으로 수송하는 ‘대수송작전’의 호위 임무를 성공시켰다. 유럽의 서부전선에서 연합국 측의 열세를 뒤집는데 일조하는 등 일본 해군 제2특무함대가 지중해에서 수행한 호위임무는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을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유럽 사람들에게 명확히 보여줄 수 있었던 많지 않은 기회였다. 그리고 전후 이 함대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제국을 방문했을 때 이 전쟁의 승리에 기여한 일본의 공헌에 대해 유럽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만들었다. 이처럼 일본해군이 태평양, 지중해, 인도양 등의 해역에서 각종 군사지원 활동을 벌인 것은 일본에 대한 평가고양에 한몫 했다.
   
1918년 11월 18일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연합국의 승전에 일조한 공로로 일본은 전후 5대 연합국의 일원 자격으로 1919년 1월 18일부터 열린 파리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회의에 대표단을 보낸 나라는 총 26개국이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주재 자국 대사를 비롯해 관료, 경제인, 법학교수를 포함한 64명에다 타자수, 통역, 의사까지 합치면 총 106명이라는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외교적으로 전승국의 전리품을 인정받았으며, 덤으로 국제적 지위도 향상돼 제국주의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1870년 독일-프랑스 전쟁 이래 세계 최강의 군대로 자리매김한 독일육군을 물리친 사실 자체가 서방세계에 일본의 발언권을 높여주었기 때문에 국제적 발언권을 확보하려고 한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구체적으로 일본은 베르사유조약으로 새로 창설된 국제연맹으로부터 미국이 식민지배 하던 필리핀과 하와이 사이에 위치한 파라오와 마셜군도 등 적도 이북의 남양군도를 위임통치령으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됐다.
  
연합국측이 독일령 식민지를 처분하게 됐을 때 국제연맹이 연합국의 각국에게 해당 식민지역의 통치를 위임하는 형식을 띠게 됨에 따라 일본도 전쟁에서 획득한 적도 이북의 구독일령 제도들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산둥지역의 권익에 대해서만큼은 중국대표가 이 조약의 조인을 거부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는 일본이 권리를 득하지 못했다.
  
셋째,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뒤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레닌정권에 대한 군사적 간섭을 지속하면서 그 세력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배타적 경제블럭을 구축했다. 일본은 ‘21개조’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위앤스카이 정부의 무력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중국대륙 확보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또한 시베리아 출병을 계기로 중국의 段祺瑞정권과 ‘中日陸軍共同防敵軍事協定’을 체결함으로써 원래 염두에 뒀던 중국과의 반공조약 체결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넷째, 일본의 참전은 국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일본의 국내 경제와 사회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전쟁특수경기로 인해 경제가 살아났으며, 그에 수반된 여러 가지 부대효과들이 나타났다. 대전 발발 이전 6~7년 동안은 급속한 성장의 반작용으로 불경기가 지속된 상황이었다.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과다한 일본정부의 군사비지출로 인해 나타난 국제수지의 역조가 계속 누적돼 1904~13년 기간 11억4,000만엔에 달해 경제성장이 한계에 부딪치고 극심한 불경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곧 구체적 수치를 밝히겠지만 원금상환은커녕 이자지불도 곤란했을 정도의 막대한 외채를 더욱 증가해 불경기를 격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 초기 한 때는 전쟁돌발에 따른 해외무역의 두절, 해운업의 침체, 국내물가 하락 등의 상황 탓에 경제 전반이 일시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대외무역과 해상 운수업이 급격히 감소했거나 혹은 완전히 중단됐는데, 유럽의 원면이 일본 진입이 어렵게 돼 일본의 면방직업계의 조업이 단축되기도 했다.
  
또 은행계도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한 동안 대출을 줄였다. 이로 인해 전체 산업계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기업의 생산규모가 축소되거나 도산이 줄을 이었다. 동시에 생사수출도 격감했는데, 이에 따라 생사 가격이 폭락해 갑작스런 쌀 가격의 폭락과 함께 농촌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도시와 농촌에서 모두 엄청난 경제 침체 현상이 속출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고 1915년 하반기부터 경기가 활성화 되는 이른바 전쟁특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쟁특수에 따른 경기회복의 요인은 연합국 측에 대한 군수품 수출이었다. 이 대전이 물자에 대한 수요를 세계적 범위로 크게 증가시켰는데, 참전 연합국들이 일본에게 대량의 군수품을 주문하고 구입한 데에 힘입었다. 일본은 동맹국인 영국에 해군을 중심으로 무기를 대량으로 수출했다.
 
1916년 러시아군의 브로시로프 공세가 일본의 무기, 탄약 없이는 실시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듯이 대러시아 무기 수출도 상당한 양에 달했다. 또 일본은 프랑스에도 무기를 수출했는데, 프랑스를 위해 12척의 구축함을 건조하기도 했다. 일본이 무기와 탄약을 연합국 측에 수출한 사실은 유럽 학자들에게 잘 인지되지 않고 있지만 무기, 탄약 수출은 거의 모두 유상이었으며, 일본은 이를 통해 제법 많은 량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일본제품의 수출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1916년 경부터였다. 또한 1917년부터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됨에 따라 전쟁으로 인한 경기가 활성화 돼 일본의 대미 수출도 늘어났다. 따라서 공업생산량의 증대가 눈에 띄게 변화를 보였다. 일본은 기존의 공업기반을 바탕으로 전쟁특수를 거치면서 아시아 최대의 공업국이 돼 공업생산량이 농업생산량을 앞지르게 됐다.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에 관심을 가질 수 없던 사이 일본이 아시아 시장, 특히 중국시장을 독점하게 됐다. 중국을 비롯한 몇몇 아시아 국가들은 전쟁 발생 전 오랫동안 유럽 공업국들의 수출에 의지해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이것이 중단된 상황에서 근대공업국가로서 공업이 발달한 일본에 상품을 주문하게 됨으로써 유럽공산품을 대신하게 됐다. 대전발발 시인 제2차 오쿠마내각 성립 당시 6억 엔이 넘었던 수출총액이 2년 뒤인 1916년 즉, 오꾸마 내각 말기에는 그 2배인 약 12억 엔으로 늘어난 것이다.
  
주요 수출품은 연합국 측이 주문한 군수품 그리고 유럽을 대신해 중국, 인도, 동남아, 호주, 남양에 이르는 시장에 내다판 대량의 일반 공산품이었다. 이 가운데 섬유제품이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당시 일본 공업의 중심은 경공업이었는데, 이 가운데서 섬유분야가 주를 이뤘다. 섬유제품의 수출가가 면사의 수출고 보다 높았다.
 
또한 중화학공업도 발전하게 됐는데, 이 시기 동력의 전환이 이뤄져 전기가 증기 보다 사용도가 높아진 것도 한 가지 배경이었다. 유럽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인해 선박이 세계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힘입어 조선업도 발달하게 됐다. 이는 일본 내에서 건조된 상선(화물선, 여객선)의 판매량이 1916년부터 가파르게 급속히 신장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선박의 톤수와 금액을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았다.
 

【표-1】제1차 세계대전 기간 및 그 후 일본의 상선 톤수 및 금액

 

연도

총 톤수

총 금액(엔)

1914

            94,329

        14,901,419

1915

             53,968

          9,470,667

1916

222,266

         71,521,990

1917

495,191

325,127,345

1918

659,731

443,838,873

1919

830,579

230,433,338

1920

            657,650

153,826,102

1921

266,629

45,020,340

 
또 만주철도 주식회사가 중국의 ‘鞍山제철소’를 건설하게 됨에 따라 철강업도 발전했다. 다만 철강업은 발달했지만 조선업의 발전에 수반되는 철강수요의 확대로는 대응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 수출을 끊는 통에 일본의 화학공업이 자립하게 됐다.
  
군수품과 수출공산품 주문의 급증으로 인한 수출의 증가는 해운업의 회복과 발전을 가져다 줬다. 즉 무역호조와 산업 전반의 활황에 연동돼 운수와 유통산업의 발전까지 가져오는 부대효과가 뒤따른 것이었다. 특히 해운업이 번영을 맞이하게 됐는데, 운송비와 선박임대비도 크게 상승했다. 예를 들어 1914년 말 일본은 증기선 2,331척 185만여 톤이던 것이 1918년 말 2,865척 248만여 톤으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3대 기선회사의 승객운임 수입도 4,600여만 엔에서 3억8,000만 엔으로 폭증했다.
  
다섯째, 무역 외에 일본의 국제수지와 정부세수도 눈에 띄게 개선됐다. 명치 초기 이래 일본의 무역 수출입은 수입초과가 다수를 압도해왔다. 1912년 1.2억 엔이던 수입초과가 1913년에는 1.4억 엔으로 늘어났다. 이것이 갑자기 수출초과로 급변한 것은 1915년이었다. 1914년 수출액이 6억3,190만 엔이었는데, 1918년에 20억7,230만 엔으로 폭증해 2.3배가 늘었다. 1914~18년 사이 수출이 급증해 국제수지 면에서 약 14억 엔이라는 거액의 외화가 들어왔다. 4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일본으로 들어온 통화가 28억 엔(약 14억 달러)에 달해 그 이전 6년간 5억5,000만 엔까지 치솟았던 수지 적자를 흑자로 반전시켰다.
  
1915년에서 1920년 사이 일본정부의 수지는 15억 달러가 흑자였다. 이 액수는 비록 미국의 166억 달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명치 이후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러일전쟁 후 심화돼온 악성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게 되고 수입초과에서 수출초과로 나아가게 돼 외환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는 일본의 대외 채무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일본정부의 채무는 급격히 감소했고, 대량의 외국 공채 매입과 차관을 통해 일약 채권국이 됐다. 명치초기 이래 줄곧 채무국이었던 일본이 채권국으로 바뀐 것이다.
  
수출 증대는 또한 민간기업의 발달을 가져왔는데, 기존 기업들이 확장되고 새로운 기업들도 생겨났다. 주로 면방적, 기계, 조선, 학학, 광업, 철도, 전력, 해운, 상업, 금융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확장과 신설이 크게 이뤄졌다. 그 결과 경제가 발전했는데 이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1914~19년 간 산업별 생산지수는 공업이 78%, 농업 19%, 광업 29%, 철도운송 20%가 증가했다. 공장노동자수도 118만7,000 명에서 202만5,0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게다가 중공업 발전에 수반된 남성노동자의 비율이 높아졌는데, 이는 1910~20년대에 농업취업인구가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감소한 반면, 공업노동자수가 크게 증가한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1916년부터 소득세수가 증가되기 시작해 익년에는 일본 근대사상 처음으로 소득세가 地租를 웃돌았으며, 소득세를 중심으로 정부세수도 급증했다.
  
여섯째, 일부 유럽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된 사실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은 분명 지양되고 부정돼야 한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는 때로 질병과 같은 부정적인 것도 전파되고 퍼트려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기를 발전시키는 부대효과를 가져다 줄 때도 적지 않았다. 이에 관한 예는 수 없이 많다. 한두 가지만 예를 들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매독이 대표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적국인 독일을 통해 뜻하지 않게 일부 유럽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 그 구체적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일본은 청도전투에서 생포한 독일군 포로 약 4,700명을 1914년 11월 중순 일본으로 호송해와 東京과 서일본의 12개 도시에 분산 수용했다. 일본으로 이송돼온 독일인들은 군인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있었다. 이들이 수감된 곳은 토쿄(東京), 시즈오카(靜岡), 나고야(名古屋), 히메지(姬路), 오사카(大阪), 마츠야마(松山), 마루가메(丸龜), 도쿠시마(德島), 오이타(大分), 구루메(久留米), 후쿠오까(福岡), 구마모토(熊本)다. 도쿠시마현의 반도(板東)포로수용소(Bando prisoner-of-war camp) 치바(千葉)현의 나리시노(習志野) 포로수용소, 히로시마(廣島)현의 니노시마(似島) 검역소 등이었다.
  
이 중 포로 대우가 가장 정중했던 수용소는 반도 포로수용소였는데, 이곳 수용소장 마츠에(松江豊壽)의 배려로 독일병사들에게 현지 주민들과의 만남까지 허락됐다. 독일군 포로들과 인근 주민들 사이에 음악연주회, 스포츠 경기, 강연, 미술전람회를 통한 집단적 교류가 이뤄지면서 자연스레 여러 가지 독일문화가 전해졌다. 예를 들면 이때 독일군 포로들이 연주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은 처음으로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각 처 수용소에 분산 수감된 독일군 포로들의 강연, 출판, 체육경기, 연극, 전람회, 연주회와 같은 각종 여가 활동을 통해 체육, 음악, 미술 분야가 일본인에게 선보여졌다.
 
또한 화학, 물리학, 식물학, 조류학, 기상학 등도 강연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소개됐다. 독일군 포로 축구팀이 현지 사범학교 축구팀과 시합을 하는 과정에서 독일식 축구기술이 전수되기도 했다. 또한 지금은 일본어로 완전히 정착돼 있는 ‘빗꾸리(びっくり)’라는 단어는 독일어의 ‘정말로’, ‘실제의’ ‘진정한’이라는 뜻을 지닌 ‘Wirklich’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2. 失
첫째, 중일관계의 악화를 불러일으킨 점을 들 수 있다. 앞 장에서 상세하게 밝혔다시피 일본의 ‘21개조’의 강요는 총통에서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야에 광범위한 반일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위안스카이 총통이 당시 중국정부의 고문이었던 일본의 반자이 리하치로(坂西利八郞) 중장에게 “일본은 평등한 우방으로 중국을 만나야 할 것인데 어찌 돼지와 개처럼 취급하려고 하는가?”라고 하면서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반 중국인들도 분격하게 됨에 따라 대일 감정이 악화됐다. 위앤스카이가 ‘21개조 요구’를 수락한 5월 9일은 중국인들에게 국치일로 수십 년간 기억됐다. 게다가 일본이 집요하게 베르사유 회담에서까지 산둥의 독일권익을 계승하려고 하자 성난 군중들이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칭다오의 환수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으며, 중국 전역에서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일어났다.
  
둘째, 영일동맹 준수를 명분으로 한 참전에서 일본은 칭다오 군사점령 그리고 태평양상의 독일령 남양군도에 대한 과감한 군사행동으로 영국을 비롯해 구미열강들이 경계하고 의심하게 됨에 따라 국제적으로 외교상의 대립과 국제적인 고립을 초래한 점을 들 수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것이었다.
  
일본은 아시아 각지에서 제각기 이익을 가지고 있던 유럽 열강들이 전쟁에 참전하거나 휘말려 들어가게 되면서 아시아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기회를 이용해 참전한 결과 제국주의 군사대국이 됐고, 국력신장을 꾀할 수 있었지만 중국 대륙에 대한 정복 야욕을 내보였다. 예컨대 중립을 선언한 중국의 몇몇 지역을 반식민지화 했을 뿐만 아니라 ‘21개 조’의 제5호 중 일본인을 중국정부의 고문에 앉히려는 음모를 비밀리에 진행함으로써 영국의 지지 마저 잃었다. 이 건은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은 그 내용을 수정하게 됐다.
  
특히 일본육군의 칭다오 점령과 해군의 태평양 진출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와 상충하는 것이어서 미국으로서도 좌시할 수 없는 도발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반일 감정까지 증폭시켰다. 이는 그러지 않아도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점증해가던 미국 내 반일감정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확보한 하와이와 필리핀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된 미국은 약 20년 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 강제병합 등을 봐온 일본의 팽창을 너그럽게 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내에서도 일본인 이민이 많은 캘리포니아 주 등을 중심으로 황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을 배경으로 일본위협론이 지지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눌러진 인종차별적 지향을 지닌 여러 세력들이 황화론을 퍼트리면서 일본인들에게 대한 배타적 악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배일이민법에 의한 일본에서 미국으로 들어가는 이민이 금지됐다. 미국의 인종차별이 배경이 돼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적대적 행동에 대해 일본에서도 반미감정이 고조돼 미일관계까지 악화됐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이 더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낸 나라들이 러시아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는데도 일본은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고 계속 시베리아에 주둔시킨 것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지나친 팽창을 추구한다는 열강의 의구심을 더하게 만들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군을 보낸 일본의 시베리아출병은 여타 열강의 군사행위와 달리 시베리아, 몽골, 베이만저우(北滿洲) 일대의 광활한 영토를 4년여 이상이나 점령하면서 레닌의 혁명정권을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압박한 주된 위협 요소였다.
  
일본이 과도하게 팽창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한 미국은 종주국으로서 관계가 깊은 영국으로 하여금 자국을 선택하게 만들어 일본과 이격시켜 일본을 견제했다. 미국이 영국에 영일동맹을 철폐하도록 압력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주장한 인종차별 철폐안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압력을 가하도록 한 것이 그 예다. 일본의 대륙진출 시, 경우에 따라 무력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시사할 정도로까지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 중국에서의 자국이익을 지켜야 할 필요성에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영일동맹은 해소됐다. 그래서 러일전쟁 후 우방이 된 러시아가 혁명으로 공산화됨에 따라 일본은 실질적으로 동맹국을 가지지 못한 상태가 돼버렸다. 미국이 제창한 “태평양에서의 영토와 권익의 상호존중”과 “모든 섬들에서 비군사기지화”를 결정한 ‘4개국 조약’이 1921년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사이에 체결됐다.
  
또한 베르사유회의에서 중국의 조약 조인 거부로 결말이 나지 못했던 현안, 즉 산둥의 독일 조차지를 무조건 일본에 양도하라는 일본의 요구가 1922년 2월 워싱턴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 일본이 산동에서의 독일 이권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결정됐는데, 크게 교주만의 독일조차지와 교제선 철도를 중국에 돌려주고 일본군이 산둥에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한 내용이었다.
  
그 이전 1917년 1월에서 3월에 걸쳐 일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정부와 각기 전후 산둥 및 서태평양상의 독일령 남양군도에서의 독일 권익을 일본이 이어받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비밀조약을 맺을 수 있었지만, 산둥 관련 권익의 일본 양도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도 강한 반대에 부딪쳐 철회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대미 관계 소원, 미국의 압력으로 영일의 사이가 벌어지고 일본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로 이어지는 요인이 됐다.
  
셋째, 참전은 일본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계기가 됐지만 그렇다고 경제발전이 모든 면에서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건 아니었다. 전쟁특수로 인한 호황이 계속됐지만 그러한 성장의 과실은 일반 민중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재벌, 기업가, 졸부들에게만 집중된 게 문제였다. 호황에 연동된 과도한 팽창이 뒤따른 결과 급격한 인플레가 진행돼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호경기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킨 쌀값의 앙등을 부른 결과도 초래했다. 1917년 중반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쌀값은 6월 1석에 20엔이었던 게 이듬해 7월에는 30엔 대로 올랐다. 동년 8월 8일자 ‘오사까 아사히’(大阪朝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8월 7일의 쌀값 시세는 43엔 20전이 됐다고 한다. 또 매일 1엔에서 1엔 50전씩 큰 폭으로 앙등하기 시작했다.
  
쌀값이 폭등한 원인은 대략 네 가지였다. ①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으로 인해 농촌에서 노동인구가 도시로 흘러들어감에 따라 쌀을 생산하는 인구가 감소하고 도시 인구의 급증은 쌀의 수요에 공급이 뒤따르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②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외국산 쌀의 수입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여기에는 외국산 쌀의 수입관세를 철폐하지 못한 정책적 미비도 한 몫 했다. ③시베리아출병을 위해 일본군이 대량으로 쌀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쌀의 절대량 부족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결과가 됐다. ④쌀의 재고량 감소에 편승해 미곡상들과 지주들이 투기로 쌀을 매점매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쌀값의 앙등은 정액 소득자의 실질소득을 감소시켰다.
  
넷째, 대전 후 일본에 엄청난 경제불황을 초래한 것을 들 수 있다. 전쟁경기는 그야말로 전쟁의 특수로 반짝할 뿐 전쟁이 끝나면 끝나고 만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전후공황’ 혹은 전쟁으로 인한 ‘반동불황’이라고 일컬어진 불경기에 휩싸였다. 전쟁 중 생산과잉은 제품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일본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트렸다. 1920년 3월 15일 발생한 주가폭락은 불황의 시작을 알린 것이었고, 바로 다음달 4월부터 일본경제는 전후 불황에 직면하게 됐다. 주가는 한 달 만에 50%나 떨어졌으며, 이 해에 물가도 50%나 하락했다. 이 여파로 기업이 대량으로 파산했으며, 특히 지방의 소은행의 파산이 심했는데, 그 영향은 대형 은행에까지 미쳤다.
 
Ⅲ. 일본이 거둔 得과 失의 의미와 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이 참전으로 거둔 득실을 검토하면서 참전목적 달성 여부에 관해 자세히 논했다. 이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게 다양한 영역에서 다대한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분명하며, 영향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외관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하게 파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得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었는가하면 失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평가돼온 득실은 모두 일본정부와 위정자들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특히 득은 국수주의적인 일본 우익 기득권층의 입장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침략을 당한 주변국이나 일본민중들의 처지에서 보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참전목적의 달성 및 득의 의미―심지어 영향까지도―는 인류의 평화와 발전이라는 보편사적 가치를 지향하지 않았던 국수적인 일본의 기득권층에게는 긍정적으로 인식될 것들이었기에 그들에게만 중요했을 뿐이다. 그 연장선에서 오늘날에도 일본학계의 일각에서는 일본의 참전은 과실만 있었지 희생은 거의 없었던 것이었으며, ‘무사도정신’과 ‘국제정의의 실천’으로 평가하고 있다. 과연 참전이 국제정의의 실천이었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득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새로이 평가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먼저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부터 찾아보자. 당시 일본이 영국의 참전요청을 끝까지 거절할 가능성은 없었을까? 이 전쟁이 3국협상국(영국, 프랑스, 러시아)과 3국동맹국(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대결구도로 전개된 것은 세계체제라는 구조적 면에서 보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그랬듯이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되거나 모순된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일본도 영일동맹, 일본-프랑스협약, 러일협상 등의 한 고리로 연결돼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그 때문에 무조건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더 언급하자면, 그 보다는 중국을 두고 이권쟁탈 경쟁에 뛰어든 서방 열강들이 돌연 세계대전 참전으로 중국과 아시아에 힘의 공백이 생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국이 중국으로 진출해오기 시작한 이상 미국의 진출이 본격화되기 전에 중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참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참전을 국운융성, 국내문제 해결의 탈출구로 적극 활용하려 했던 이유였다. 환언하면 참전의 능동성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가토 요코(加藤陽子)가 지적한 바 있듯이 19세기 후반 청일전쟁, 20세기 벽두의 러일전쟁을 통해 타이완과 한반도를 강점해온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해외 식민지나 다를 바 없는 중국 및 독일령 섬들과 그 권익을 탈취한 배경은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국내 과잉인구의 탈출구로서, 실업문제의 해결수단으로서, 즉 사회정책적인 측면에서 전쟁과 식민지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는 16세기 이래, 혹은 최소한 19세기 근대이래 국가위정자들이 자주 써먹었던 일본의 정치적 특성이었으며, 그 후 1930년대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동일한 양태를 보였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대외참전이라는 중대한 국가대사를 결정하고 수행하기 위해 군을 멀리 중국, 태평양, 지중해까지 파견하면서도 일본국민의 이해는 구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일본국민들은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제도면에서도 참전을 막을 장치가 돼 있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사망 후 최고 원로가 된 야마가타가 세계대전을 하늘이 일본을 도우는 “천우신조”로 규정한 만큼 그나마 우익 내 존재했던 소수 참전 반대자들의 반대가 다수를 점할 수가 없었다. 참전 찬성론자들은 이 전쟁을 군국주의(독일) VS 민주주의(연합국) 간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참전 명분으로 독일군국주의의 분쇄로 치장한 것은 반대자들의 반대명분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참전을 독일 응징과 군국주의의 척결로 포장했지만 참전결정 과정의 이면을 보면 동아시아 지역패권 장악과 중국침략 목적이 우선이었다. 일본은 중국침략에 국운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해군만 유럽전선에 파견하고 육군은 유럽전선에 보내지 않고 중국에만 보낸 이유였다.
 
그래서 전쟁 발생 이태 째인 1915년부터 전황이 연합국 측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영국 외에 프랑스와 러시아까지 합쳐 총 세 차례나 일본정부에 육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매번 그 요청을 거절했다. 가토 외상이 발표한 성명처럼 국민개병의 징병제도로 소집된 일본군 병사들을 국익에 직접 관련이 없는 외국출정에 참가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한 까닭도 중국에 지상군 군사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지상군 파병 요청을 거절한 이유로 든 세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참호전이 주가 된 유럽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가늠하기 어려웠을 정도도 전망이 불투명했다.
 
둘째, 유럽전선에서 전과를 올리려면 최소한 육군 20개 사단을 보내지 않으면 불가능했고, 이같이 대규모 사단을 파병하는 데는 방대한 전비가 필요한데 그것이 불비했다. 육군파병은 육로로는 불가능하고 해로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500만 톤짜리 선박이 갖춰져 있어야 했지만 당시 일본은 겨우 70만 톤의 선박뿐이었다. 일본측이 말하는 병력 수송상의 곤란과 경비마련은 미국이 참전하게 됨에 따라 미군의 협조로 해결될 수 있었음에도 일본은 여전히 “수송상의 곤란”을 들어 파병을 거절했다.
 
셋째, 일본육군은 “조국방위, 국권의 옹호” 임무를 지닌 자위군이기 때문에 유럽까지 출병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 점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이유들은 표면적인 명분이었을 뿐 감춰진 목적은 육군을 결집시켜 중국 주둔 독일군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을 장악해 경제적, 군사적, 안보적 이익을 확장하기 위해 일본은 칭다오 주둔 독일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중립까지 무시하고 적극적으로 침략을 감행했다. 중국정부는 과거 러일전쟁의 예를 모방해 戰區로 획정한 룽커우(龍口), 라이저우(萊洲)灣 및 膠州灣 부근 지역을 제외한 여타 중국 전역에 대해서는 중립규정을 시행해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의도적으로 전구를 확대해 중국정부가 중립지역으로 정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행군작전을 폈으며, 심지어 독일군의 관할지역이 아닌 지역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중국의 저항을 일본의 적을 도우는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 결과와 책임은 모두 중국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일본이 중국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고 국제법을 어겨가면서 거둔 일본군의 산둥 점령은 중국내정 개입을 가능케 해줄 군사근거지 확보라는 중국 자체에 대한 전략적 의미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의 시베리아 점령과 함께 식민지가 된 한반도와 만저우지역의 배후안전을 공고히 한 측면도 있었다. 침략으로 획득한 국외영토에 대해서도 일본은 같은 시기 유럽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원인이 식민지획득 경쟁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시대에 당연한 걸로 여겨졌던 식민지라는 것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인 생각이 생겨났지만, 일본은 반성은커녕 오히련 식민지를 가진 것에 대한 성취에 대해 스스로 대견스러워 하며 자부심을 가졌다. 이는 아마도 당시 각의, 의회 등 일본정부가 거의 모두 일본의 대외 확장, 그리고 서구와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게 국위를 선양하는 걸로 착각한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민중들도 언론 혹은 국가가 개입한 교육과 홍보에 파묻혀 실상을 접할 수 없었다.
  
파리 베르사유평화회의와 워싱턴회의에서 일본이 거둔 성과는 득실이 교차했다. 예컨대 베르사유평화회의에서 일본은 승전국이자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각국의 여론들이 모두 일본의 산둥점령을 비난함에 따라 사실상 수동적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일본이 대중국 ‘21개조 요구’의 강압으로 중국의 주권 탈취와 각종 경제적 이권의 침탈이 불러일으킨 중국내 반일감정의 고조와 양국관계의 악화는 중대한 손실이었다. 일본이 ‘21개조’ 내용을 다소 완화시키면서 강대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것도 관계를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미국까지 격앙시킨 일본군의 산둥점령은 그 후의 역사흐름을 봤을 때 특히 그러했다. 미 의회에서 심지어 일본과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였다.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의회를 비롯해 여타 열강들도 일본이 산둥성의 이권을 중국에 되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 강경했다. 이는 중국에서의 이익을 겨냥한 것이긴 해도 결과적으로는 중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형식을 취해진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열강의 일본비난은 그간 중국이 처한 외교적 고립무원을 완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이는 나중에 1921년 11월에 개최된 워싱턴회의에서 산둥문제를 확정짓게 만드는데 토대가 됐다. 즉 워싱턴회의에서 일본은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리품 대신 외교적으로 속박당하는 처지가 돼버렸는데, ‘21개조’의 제5항에 대해 논의하기를 원했으나 미국이 주도한 압박으로 인해 오히려 영일동맹 해체, 일본해군의 감축 등 일본의 과격한 대외정책이 제한됐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열강의 압력과 견제로 산둥성의 이권도 중국에 반환했다. 이것이 곧 일본으로 하여금 제1차 세계대전 후 그간 벗어나지 않고 지켜온 전후의 국제질서였던 베르사유체제와 워싱턴체제를 적극적으로 타파하는 정책을 취하게 만든 국제적 배경이 됐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이 더 큰 규모의 전쟁으로 나아가게 된 비극의 불씨였다.
  
일단 열강의 견제로 일본의 직접적, 노골적 중국침략 의지는 한풀 꺾였지만 그 대신 기존 식민지인 한국과 타이완에 대한 식민지배가 본격화됨으로써 제국주의로 가는 노정이 가속화 되는 계기가 된 점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만저우를 중심으로 각종 이권에 기초한 경제적 침투가 이뤄짐과 동시에 자본투자가 진전되는 전환점이 됐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참전이 일본국내에 파급된 영향에 대해 평가해보자. 먼저 정치 영역에서 일본의 정치체제 변화에는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전쟁으로 유럽에서는 3개 제국(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이 붕괴됐을 정도로 전쟁의 결과가 막대했던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단지 현실 정치 수준에서 몇 가지 작은 변화들만 있었을 뿐이다.
 
예컨대 원로 야마가타 가 각지에서 일어난 ‘쌀소동’(米騷動) 폭동으로 내외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보고 하라 다카시(原敬)를 수상으로, 정우회를 여당으로 한 정당내각을 탄생시킨 것이다. 당시까지는 외무대신, 육군대신, 해군대신 이외의 각료를 전원 정우회 회원에서 충원한 적이 없었는데, 하라의 본격적인 정당내각(1918년 9월 20일~21년 11월 4일)이 만들어진 것은 의미 있는 변화였다.
 
또한 일본내 제 정치세력들 간의 갈등도 촉발시켰다. 오쿠마 시게노부 수상이 어전회의 소집, 군 통수부와 절충도 거치지 않고 의회승인도 없이 참전을 결정한 것은 전례를 무시한 것이었는데, 군부를 경시한 이러한 결정은 나중에 정부와 군부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오쿠마 내각의 평판을 악화시킨 것은 가토 외상이 구미 제국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산둥과 독일령 군도에 대한 군사점령과 같은 수단, 그리고 비밀외교를 고집하면서 사실을 일체 공표하지 않았던 게 원로들의 감정대립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15년 중국에 들이민 대중국 ‘21개조 요구’의 강요도 비밀리에 추진한 것이었는데, 이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오쿠마 내각이 궁지로 몰렸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경제, 사회면에서도 일본에게 다대한 변화를 가져다 줬다. 일본은 참전과 대외침략으로 일시적이긴 했으나 국내경제를 되살려 경제성장을 이루고 공업국가가 됐다는 건 앞서 거론한대로다. 그러나 그 성격이 기형적 독점자본주의였으며, 동시에 군국주의의 대외침략으로 치닫게 만든 원인제공을 자초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업제품을 소비해줄 해외시장 확보를 위해 침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재벌과 대기업이 산업을 주도하고 생산량에서도 중소기업을 압도해 경제성장의 중심 역할을 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재벌과 대기업의 발전이 생산력의 집적과 자본의 집중을 초래해 중화학공업에서 뿐만 아니라 경공업에서도 독점적 지배체제를 형성하는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기업합병과 도산이 반복돼 1890년대부터 시작돼 러일전쟁 시기 모든 산업에 걸쳐 형성돼가던 재벌기업 간의 카르텔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반화됐다. 일본지도층이 대외침략으로 거둬들인 각종 이권에 따른 경제호황이 가져다 준 경제성장의 과실도 모두 기업가들의 금고로만 들어갔다. 미츠이(三井), 미츠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등 메이지 시대 초부터 발흥한 기성 재벌과 닛산(日産), 쇼덴(昭電) 등 세계대전 기간에 급속히 성장한 재벌 기업들만 호황을 구가했을 뿐이다.
  
이 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윤이 확대 재투자되면서 경제규모가 커지는 선순환적 결과를 낳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오히려 가난해지고 삶이 궁핍해졌다. 당시 부유층과 빈곤층의 소득격차가 10배에 달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졸부가 출현한 것은 전쟁으로 경기가 살아났고, 참전 연합국들로부터 군수품 주문을 받아 갑자기 돈을 번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졸부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면서 부자랍시고 남을 얕잡아 보고 거들먹거리는 방약무인의 태도를 보여 빈곤층과의 사회적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도박의 승리자”로 불릴 정도였는데, 주지육림의 생활태도로 가산을 탕진한 자들이 있었는가하면, 투자가 아닌 투기로 선박을 매수하거나 새로운 조선을 발주해 떼돈을 번 자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금력으로 정계에 진출한 자들도 생겨났다. 전체적으로 그들의 발호와 폐해로 사회기풍이 크게 저해됐다.
  
상대적으로 봉급생활자를 포함한 하층 노동자들의 삶만 열악해졌다. 실질임금이 물가상승을 따라 잡지 못한 격차로 정액근로자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임금수치는 1912년을 100으로 잡으면 1914년에 102, 1919년에 224로 상승했지만 물가지수는 1912년의 100에서 1914년에 99로 떨어졌다가 1919년에 다시 238로 올랐다. 즉 같은 기간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94로 떨어졌던 것이다. 주된 식량인 쌀값의 앙등이 노동자들에게 실질임금의 저하를 피부로 느끼게 해줬다.
 
전쟁 중 공업성장으로 인한 생산력 증대에 따른 일자리 창출로 도시인구의 집중화가 이뤄지는 등 생활이 크게 변했다. 농민과 하층노동자의 도시유입의 요인들 가운데 일자리가 중요했지만 도시인구 급증의 근원적 원인은 증세와 쌀값 앙등이었다. 앞 장에서 구체적 수치가 제시된 바 있지만 쌀값 폭등은 직접 민중들의 생활을 압박함에 따라 주로 전쟁특수가 한창이던 1918년 7~9월에 전국적으로 이른바 ‘쌀소동’ 폭동으로 이어졌다.
 
아오모리(靑森), 이와테(岩手), 아키타(秋田), 오키나와(沖繩) 등 4개 현을 제외하고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쌀소동 폭등은 전쟁의 여파로 일반대중의 생활고가 어떠했는지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원인은 쌀값 앙등에 따른 근로자들의 실질소득 저하로 생활이 곤궁해진 일반대중의 대정부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도 빈발했다.【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동쟁의 발생은 1916~19년 사이에 가장 많았다.
 

【표-2】제1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 국내 노동운동 추이

 

연도

노동조합수

노동조합원 수(천명)

노동쟁의 건수

노쟁쟁의 참가인원(천명)

1913

 

 

47

5

1914

 

 

50

8

1915

 

 

64

8

1916

 

 

108

8

1917

 

 

398

57

1918

107

 

417

66

1919

187

 

497

63

1920

273

 

282

36

1921

300

103

246

58

1922

387

137

250

42

1923

432

126

270

36

1925

469

228

333

55

 

여기에는 투기로 폭리를 취한 상인, 지주, 전쟁으로 벼락부자가 된 졸부들에 대한 반감, 그리고 쌀값 폭등에 대해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한 정부에 대한 불만도 크게 작용했다. 쌀소동 폭동은 계급의식을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쟁의와 결합되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노동쟁의와 결합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던 쌀소동 폭동은 데라우치(寺內) 군부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하라 내각을 출범시켰을 정도로 정치적인 문제를 초래했다.
  
총괄하면, 국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일본 정치지도자들과 달리 평화를 희구한 보통의 일본인들,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사의 흐름에서 평가하면 일본의 참전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목적을 지닌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고 평화를 선호한다. 당시 청일, 러일 두 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고통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겪어온 다수의 보통 일본인들 역시 평화를 희망했다. 평균적 일본인들의 평화지향은 대략 1903년부터 반전, 평화운동을 주도한 일단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표출돼왔었다.
 
맺음 말
 
본 연구를 통해 도출 가능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국내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했다. 심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제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당시 일본정부 지도자들에게 때 마침 발발한 이 전쟁은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도운 것(“天佑”)이었다. 국가발전 전략과 지정학적 전략 측면에서 일본제국의 국내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참전 동기였다. 참전의 목적은 크게 제국주의경쟁에 뛰어들어 중국 내 독일의 권익을 가로채고 산둥성의 일부와 태평양상의 독일령 섬들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통한 국력신장과 그에 따른 국가지위의 상승, 발언권 강화와 독일에 대한 복수 등이었다.
  
타국 영토의 점령을 통한 국력신장과 강대국 도약이라는 목적은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적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동기와 표리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것은 곧 동아시아지역에서의 군사적 패권 확립과 경제대국 건설이었다. 한 마디로 일본은 자국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해 이웃 나라를 침략했던 것인데, 국내 정치적 혼란을 국외침략으로 해소하려는 이러한 발상과 행위는 일본이 근세부터 써오던 정치적 특성이었다.
 
따라서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내건 영일동맹의 준수와 독일군국주의의 타파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을 뿐, 중국을 정치, 군사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것이 최우선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중국에 군사력을 집중시켰는데, 바꿔 말하면, 참전의 능동성과 자발성이 강조돼야 한다.
  
일본은 참전 후 중국과 태평양상의 군도들을 침략한 결과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각종 권익을 가로채는데 그치지 않고 영토까지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이를 통해 명실상부하게 제국주의열강의 반열에도 오를 수 있었다. 국내적으로도 전쟁특수로 인한 수출증대, 무역호조, 정부재정 호전, 공업발달, 경제호황이라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다 줬다. 이처럼 일본은 최초 설정한 여러 가지 참전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렇게 평가될 뿐, 일본이라는 일국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 나아가 세계사적 보편사의 시각에서 보면 얻은 것 보다는 잃은 게 더 많았던 참전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산둥지역과 태평양의 독일령 군도에 대한 군사점령이 중일관계 악화는 물론, 영일동맹의 해소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까지 소원하게 만들어 결국 일본이 대외침략을 본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참전은 청일전쟁 이후 제국주의, 군국주의 노선으로 나아간 일본을 더욱 그 길로 매진하게 만든 기폭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국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일본정부를 위시한 우익세력에게는 일본의 국운융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일본의 군사침략을 받은 국가와 민족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런 치욕의 역사였다. 따라서 일본의 참전은 동아시아와 세계사라는 범인류적 측면에서 보면 비극이었으며, 이를 결행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평화의 교란자, 파괴자였다.
 
또한 일본정부 혹은 우익 정치세력의 입장에서 ‘득’이었다고 볼 수 있는 일본 국내외의 각종 호전된 상황들도 평화를 희구한 일반 일본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예컨대 참전으로 얻게 된 전쟁특수는 기형적 독점자본주의 형태로 재벌기업들과 일부 졸부들의 배만 불리게 만들었을 뿐, 그 밖에 대부분의 일본 대중들을 급격한 인플레, 쌀값 폭등, 심한 빈부격차로 생활을 더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종전 후 참전 전 보다 더 큰 경제 불황인 이른바 ‘전후공황’까지 닥쳐오도록 만든 것은 참전이 가져다 준 영향 가운데 하나였다.
  
세기가 바뀌어 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이 되는 해다. 현재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1세기 전의 당시와 매우 유사한 정치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일본을 대외 전쟁수행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만들기 위해 자위대의 해외파병은 물론, 대외전쟁 결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평화헌법’까지 개정하고자 ‘강한 일본을 만들고, 국제사회의 평화유지에 공헌하자’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내건 명분과 완전히 일치한다. 오늘날에도 당시처럼 국위선양, 영토, 국가이익, 아시아 패권 장악, 대미 군사협력 등의 문제들이 가로 놓여 있다.
 
작금 과거사문제, ‘군대 위안부’, 영토문제 등에서 반역사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일본의 정치, 영토, 군사적 상황에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이 평화와 번영을 지속할 것인지 아니면 1세기 전으로 되돌아가게 될지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세계대전을 “하늘이 도운 것”이라느니 혹은 주변국에 대한 침략을 “진출”이라느니 하는 식의 기존 언어의 유희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선배들이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결과를 교훈으로 삼아 과거의 침략사를 제대로 가감 없이 가르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열쇠말 :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득실
 
 
English Abstract

 

Trade-off Evaluation of Japan’s Participation in World War I: Beyond a National History to a Universal History
 
 

Suh, Sangmun(Senior Research Fellow, Institute of Military History, MND of Korea)

 
   Japan which participated in World War I also carried out activities related to military assistance and diplomacy for mainly combat and allied powers in the four regions, namely China, the South Sea Islands, Europe(Mediterranean Sea), and Russia (Siberia). From participation in the war, Japan had achieved the purpose of war which was established before the war started such as the emergence into global power, promoting the national glory, obtaining the rights and interests, and others.
 
From the position of Japanese government, this could be accounted as an advantage in some aspects, but also disadvantage in other parts. As advantage, some examples are described as following: a leap forward as a superpower, enhancing the national prestige, overseas pillage(occupation of Shandong Province in China and the South Sea Islands, obtaining various rights and interests from China) and the subsequent vitality of domestic economy, economic growth, improvement of balance of international payments for Japanese administration, industrialization, development of sea transport, and the transfer of European culture from Germans into Japan.
 
In reality, the international isolation could be taken as a foremost example, and especially contributed by the breakup of the Anglo-Japanese alliance caused by aggravation of US-Japan relations, deterioration of Sino-Japanese relations, and the May Fourth Movement of 1919 which was caused from intense anti-Japanese sentiment for Chinese people. In the domestic sphere, it brought upon extreme inflation caused by excessive economic expansion, and to add to the matter, rapid industrialization and concentration of population in urban areas caused impoverished rural society, the rapid rise of urban poor, and the gap between rich and poor.
  
Such advantage could be analyzed as a benefit from the perspective of Japanese government and Japanese history, but from the viewpoint of “universal history” which is known as mutual peace and development beyond the narrow framework of a country’s history, multilateral peace, and security of East Asian region and its historical development, it was rather more of a disadvantage.
 
For example, Japan’s rise as a superpower in the world by winning the war and the various war trophy and subsequent economic development were completed by sacrifice of the invaded state and destruction of peace in East Asia as well as the exploitation and sacrifice of lower class in the native land. Furthermore, it allowed Japan to progress into militarism and imperialism. Japan’s economic development which was assessed as an advantage, resulted in stuffing out the belly of some privileged class and thus the alleviation of income polarization which was carried out in-depth today is not an appropriate way of economic development in the 21st century, even though it became a global assignment.
 
Moreover, the introduction of European culture in Japan could be possible if internationalization is further developed, even without the channel of war. In this aspect, Japan’s imperialistic invasion war was not necessary by all means. From the perspective of current era, it should not be assessed as legitimate, and it also undermined the historical development.
 
Keyword : the First World War, the First World War and Japan, Japan’ entry into the First World War, Gains & Losses of Japan's Entry into the First World War
  
위 논문은『전쟁과 유물』, 제6호(2014년 12월)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