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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직한 대통령

雲靜, 仰天 2012. 10. 18. 22:57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직한 대통령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프레지던트(president). 단체의 장을 뜻하는 영어다. 조직의 성격에 따라 총재, 총장, 회장, 의장, 사회자, 지사, 대통령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대통령을 가리킬 땐 소문자 p를 대문자로 표기한다.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견미(遣美)사절단’이 미국방문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복명한 1883년 전후부터다. 기록으론 고종이 전권부대신 홍영식에게 미국“대통령을 만났느냐”, “대통령 궁실의 제도는 어떠하던가”라고 물은 것이 최초다. 대통령 호칭은 우리보다 29년 먼저 사용한 일본에서 들어왔다. 그 전까진 청나라에서 만든 President의 음역과 의역을 혼용한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고종이 관심을 보인 대통령직은 1910년대에 도입돼 손병희, 이승만 등을 거쳐 1948년 정부수립 후 총 10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현 이명박 대통령은 10번째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들이 거의 모두 비극적 말로를 맞았거나 재임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인 게 정치인의 책임만은 아니다. 초법적 3선개헌으로 임기 중 하야한 거라든가, 부하의 총탄에 비명에 간 경우, 쿠데타로 구속되거나 자식, 형제, 측근의 비리문제의 여파로 자살한 대통령까지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형제,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로 인한 곤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내곡동 사저 부지’ 특검에서 매입자금 흐름 추적 결과 다스의 실소유주가 이 대통령이라는 의혹이 또 다시 불거지면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워싱턴, 링컨, 처칠, 호치민처럼 전국민들로부터 추앙 받는 국가지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행한 대통령이 없어야 복된 국민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운, 불명예 대통령 일색이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시대적 제약과 후진적 정치작동, 당리당략에 목을 매는 협량한 정치인들이 유기적으로 엮어낸 것이다. ‘대통령’의 원조 미국도 대통령 권한이 막강하지만 3권 분립이 확고하게 작동되고 그 한 축인 의회와 국민으로부터 감시와 견제를 제대로 받고 있다.

 

 

미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초상

 

우리 대통령의 권한은 무소불위다. 제한을 받지 않는 대통령의 독단문제는 1987년 단임제와 민주화로 상당부분 해소됐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임기 중반까지 제왕처럼 군림하다가 말기엔 식물 대통령이 되는 등 대통령 단임제가 다른 폐해를 낳고 있다. 이런 폐단은 4년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으로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부정직, 균형감각 결여 같은 자질 문제는 제도로 해결할 수 없다. 엄격한 검증과 선거로 가려내야 한다. 윗물에서 자신과 조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눈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 자연히 아랫물은 흐려진다. “기회는 권력을 잡은 5년뿐이니 한 탕 해먹자”는 꾼들이 득실대는 것도 소위 물이 좋기 때문이다. 편법과 탈법을 저지른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이 버젓이 위증과 거짓말로 둘러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상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자에게 비전, 통찰력, 영도력, 역사의식 등 국가통치 차원의 리더십은 필수다. 의회의 존재와 기능을 존중하는 정치적 소양도 필요하다. 대기업과 기득권층의 요구만이 아니라 중소기업, 사회적 약자, 서민의 입장도 함께 고려하는 균형각감도 갖춰야 한다. 더 중요한 덕목은 정직한 품성이다. 깜냥과 자질이 부족한 자임에도 이념이나 이해관계가 충족된다고 해서 표를 줘선 안 된다. 과연 정직한 지도자의 품성은 식별이 가능할까? 그건 사익을 버리고 공익을 우선시하면 보인다.

 

위 글은 2012년 10월 19일자『경북일보』아침시론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