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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정치

雲靜, 仰天 2012. 9. 27. 23:24

역사와 정치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역사는 과거 사실을 탐구하고 평가하지만 역설적으로 과거와는 무관하다. 20세기 미국사의 아픈 속살을 예리하게 파헤쳤던 제임스 볼드윈(James Boldwin)은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상관이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학자 제임스 볼드 윈

 

이탈리아 역사가 베네디토 크로체(Benedetto Croce)가 모든 역사는 늘 새로 봐야 하는 현대사라고 한 주장과 동일한 맥락이다. 이렇듯이 역사란 객관사실로 간주되는 지적 가공물들과 문헌들이 역사가의 생각을 거쳐 그와 동시대적인 시대 가치의 영향을 받아 재창조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문제들이 대개 미해결된 과거문제에서 지속되거나 파생된다는 점에서 역사는 과거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역사가 “과거와 관련이 없다”라는 의미는 과거를 현재적 관점과 시대정신에서 파악하고 해석 및 평가하라는 강조어법이다. 따라서 역사는 정치와 무관한 게 아니라 숫제 정치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역사행위자가 탐욕과 자기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둘은 서로 뒤엉겨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요, 오늘날만의 일도 아니다.

  

500여년 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후세 사가나 국가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여기엔 과거 집단적 기억을 독점한 정치권력의 자신에 대한 평가와 결부돼 있다.

 

아메리카의 ‘발견’을 마치 신세계가 탄생했으므로 미국이라는 국가적 자부심의 출발점으로 기념해야 할지 아니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절멸당하고 노예제가 시작된 서막으로 가르치느냐에 따라 국가와 정치권력을 바라보는 인식과 평가가 확연히 달라진다. 역사가 정치가들에 이용당하거나 남용 혹은 오용됐던 방식을 모르지 않는 한 단순히 정부의 공식 입장을 따르고, 이에 세뇌되고 반복해선 안 되는 이유다.

  

역사에는 진리의 근사치도 존재한다.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나치의 홀로코스트, 일본군 성피해여성과 대외 침략, 미국의 노예무역과 흑인에 대한 인식 및 평가를 부정하는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과 학문적 기준은 분명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미국사에서 노예제만큼 학문적 연구와 대중의 인식 사이에 단절이 심한 분야는 없는데, 빌 클린턴이 대통령 시절 아프리카 방문 길에 최소한 말로라도 노예제에 관해 ‘사과’한 것도 노예제도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들과 합리적 근거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는 자신들의 군사쿠데타에 대해선 역사가의 판단에 맡기자고 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도 5·16이나 유신에 대해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입장이었다. 피해자들과 다수 국민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반발, 저항했다. 결국 과거사가 현재의 문제가 됨과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는 길목을 막아선 결과를 초래했다. 유난히 굴곡진 우리 현대사가 남긴 共業이다.

 

원인은 정치가가 역사학의 주요 개념인 역사 인식의 주체와 역사의 목적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 모두의 소유이기도 하고, 동시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미래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에게 평가를 맡길 게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역사가와 국민들에게 맡겨야 한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5·16군사쿠데타에 대한 평가 공방을 시발로 10월유신, 긴급조치, 인혁당 사건, 장준하 타살의혹 사건 등 ‘역사’가 범람하는 가운데 박근혜 후보가 마침내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에 대해 과오를 시인했다.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본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이번 발표와 사과는 장준하 타살의혹사건이 빠져 있고, 시의성도 의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제3자적 시각에서 당시의 공과는 물론, ‘헌법 가치 훼손’이라고 거론했을 정도로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까지 건드림에 따라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또 사과의 진정성은 자신이 말한 ‘국민통합위원회’를 설치하고 관련법을 어떻게 시행해나갈 것이며, 유가족에 대해 어떻게 처우하는가에 달려 있다. 일단은 정치와 역사가 뒤엉긴 카오스가 오는 대선에선 정제되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위 글은 내용을 축약해 2012년 9월 28일자 『경북일보』아침시론의 칼럼으로 게재했고, 본 블로그의 언론기고문에도 축약본을 올려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