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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정치

雲靜, 仰天 2012. 9. 27. 23:12

역사와 정치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역사는 과거 사실을 탐구, 평가하지만 역설적으로 과거와는 무관하다. 20세기 미국사의 아픈 속살을 예리하게 파헤쳤던 제임스 볼드윈(James Boldwin)은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학자 제임스 볼드 윈

 

이탈리아 역사가 크로체(Benedetto Croce)가 모든 역사는 늘 현대사라고 주장했듯이 역사란 객관사실로 간주되는 지적 가공물들과 문헌들이 역사가의 생각을 거쳐 그와 동시대적 가치의 영향 속에서 재창조된 것이다.

  

역사는 정치와 무관한 게 아니라 숫제 정치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역사행위자가 탐욕과 자기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둘은 서로 뒤엉겨 존재한다. 이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요, 오늘날만의 일도 아니다.

 

500여년 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후세 사가나 국가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여기엔 과거 기억을 독점한 정치권력에 대한 평가와 결부돼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그린 기록화

 

아메리카의 '발견'을 마치 신세계가 탄생했으므로 미국이라는 국가적 자부심의 출발점으로 기념해야할지 아니면 원주민들이 절멸당하고 노예제가 시작된 서막으로 가르칠지에 따라 국가권력을 바라보는 인식과 평가가 확연히 달라진다. 역사가 정치가에 악용됐던 방식을 모르고 그저 정부의 공식입장을 따르거나 세뇌돼선 안 될 이유다.

  

역사엔 진리의 근사치도 존재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일본군 성피해여성, 미국의 노예무역과 흑인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부정하는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과 학문적 기준은 분명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미국사에서 노예제만큼 학문연구와 대중의 인식 사이에 단절이 심한 분야는 없는데 빌 클린턴이 대통령 시절 아프리카 방문길에 최소한 말로나마 노예제에 대해 사과한 것도 합리적 근거 때문이다.

  

박정희도 그랬지만 전두환의 신군부는 자신들의 군사쿠데타에 대해 역사가의 판단에 맡기자고 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도 5·16군사쿠데타와 10월유신에 대해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입장이었다. 피해자들과 다수 국민은 반발했다. 결국 과거사가 현재의 정치문제가 됨과 동시에 미래에의 길목을 막아선 장애물이었다.

 

원인은 정치가가 역사 인식의 주체와 역사의 목적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 모두의 소유이지만 동시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후손을 위한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를 위한 것이다.

  

5·16의 평가공방을 시발로 유신, 인혁당, 장준하 타살의혹의 '역사'가 범람하는 가운데 박근혜 후보가 마침내 5·16과 유신, 인혁당사건의 과오를 시인했다.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면서 피해자들에게도 사과했다. 발표는 장준하 타살의혹 사건이 빠져 있고, 시의성도 의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제3자적 시각에서 당시의 공과와 함께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까지 건드림에 따라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사과의 진정성은 자신이 말한 내용과 유가족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다. 정치와 역사가 뒤엉긴 카오스가 오는 대선에선 정제되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위 글은 2012년 9월 28일자『경북일보』아침시론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