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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또 토오루 일본 오사카 시장에게 고한다!

雲靜, 仰天 2012. 9. 13. 23:39

하시모또 토오루 일본 오사카 시장에게 고한다!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하시모또 토오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시장, 안녕하십니까? 폭염과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덧 중추가절이 다가오는 절기입니다. 변호사 출신 시장으로서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는 가운데 폭 넒은 사회참여와 왕성한 시정을 펼치느라 다망한 줄 압니다. 최근 귀하가 이끌고 있는 ‘일본 유신회’에서 중의원 총선에 400명 전후의 후보들을 출마시키겠다고 하고, 실제로 어제 12일 창당을 선언했다는 소식도 들리는군요.

  

본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역사학자로서 한일관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희구하는 한 사람의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입니다. 최근 시장께서 일본군 “위안부(성노예)가 일본군에 폭행, 협박을 당해 끌려갔다는 증거를 한국이 내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보도를 접한 순간 퍼뜩 이 발언은 시장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일본 우익 전체를 대변하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 마침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도 비슷한 논조의 말을 하더군요.

 

 

"위안부 제도는 필요했다"고 망언한 하시모또 토오루 오사카 시장. 이 젊은 친구는 이 발언 외에도 갖가지 문제 있는 발언을 해댄 망발제조기다.

 

특히 아베 전 총리가 자민당이 재집권하면 과거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시정약속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세 차례의 담화〔1982년의 미야자와 키이치(宮澤喜一) 관방장관 담화, 1993년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담화, 1995년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담화〕를 뒤엎겠다고 한 발언은 일본 우익세력의 대반격이 시작됐음을 알린 게 아닌가 하는 본인의 판단을 뒷받침 합니다.

 

이 정도면 한일관계가 최소 20년 이상 뒷걸음치게 만든 중대한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즉각 반박 글을 쓰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소 때가 늦었지만 반박과 함께 몇 가지 충언을 드리려고 뒤늦게 펜을 들었습니다.

  

먼저 보도대로 상기 발언을 한 게 사실인지 묻겠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하시모또 시장께선 일본정부나 군 당국이 직접 지시한 공문서만이 위안부의 존재유무와 이들에 대한 일본군의 폭행, 협박과 유괴, 납치 등의 강제성을 밝히는 유일한 증거로 삼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공문서가 없다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군요.

  

개인사든 국가 수준의 역사든 과거사실을 규명할 때 각종 공문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하고 전부인 건 아닙니다. 특정 사건이나 상황을 몸소 겪은 당사자, 이를 목격한 자, 그리고 이를 시행한 행위자 등 모든 관련자들의 기억과 증언기록도 중요하죠. 역사학에선 공문서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기억, 회고, 증언, 제3자의 기록이나 채록 등을 종합해서 과거사를 재구성합니다.

  

더군다나 공문서란 게 처음부터 행위자가 범법이나 악행을 행할 경우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거나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후대의 불리한 증거로 남을 것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단지 암시만 하면서 간접적으로 행위를 지시하기도 합니다. 관련 문서들엔 특정 사안에 대한 명백한 지시가 언급돼 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937년 12월의 남경대학살 사건이 좋은 예입니다.

 

일본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대원수인 히로히또 ‘천황’(이하 ‘일왕’)이 내린 지시의 공문서는 현재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휘하 장병들에게 “산천초목이 모두 적”이라고 적개심을 고취시킨 중국 현지의 화중방면군 제10군 사령관 야나기가와 헤이스케(柳川平助)의 훈시와 “남김없이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라”라고 지시한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의 명령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당시 일왕은 위안부 강제징발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본영의 계획 혹은 시행에 대해 묵인하거나 방조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막하의 일본군 대본영에서 폭행, 협박, 사기로 군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서가 아닌 구두로 내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죠. 또 공문서에 지시를 명기했는데도 그러한 공문서를 찾을 수 없다면 패전 직전 혹은 그 후에 일본정부나 군부가 고의로 이를 없애버렸을 수도 있겠죠. 전전 히로히토 일왕이 아시아 침략전쟁에 깊숙이 개입해 각종 작전을 지시하거나 변경한 사실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본정부가 일왕의 지시 공문서들을 한 건도 남겨 놓지 않았듯이 위안부 강제 징발 관련 공문서도 계획적으로 없앴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만일 강제징발 지시를 공문서에 명기하지 않았다면 당시의 지시자가 지시내용을 나쁜 악행이라고 인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반증의 예로서 에도(江戶)시대 막부(幕府)가 일본 내에서 천주교 포교활동을 해온 선교사들을 추방할 목적으로 천주교 금지와 선교사 강제 추방의 이유 열 가지를 공고했는데, 그것은 명령자인 막부가 금압과 추방 이유를 정당한 통치행위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역사연구자들에겐 기본적 이해사항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공문서뿐만 아니라 관련자들의 기억, 회고, 증언, 제3자의 기록들도 매우 중시하는 까닭입니다. 물론 당사자나 목격자라고 해서 그의 기억과 증언을 액면 그대로 온전한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100% 다 취하지는 않습니다. 왜곡, 과장, 편견, 경험의 한계, 합리화, 미화, 합목적적 의도 등 여러 불순물이 섞여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사료 비판과 검증을 거칩니다. 이 과정은 역사학의 ABC입니다.

  

그런데 위안부로 강제 징발된 여성이 한 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인데다, 하나 같이 동일한 맥락의 얘기를 하고 있다면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역사연구자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한국인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과거 일면식도 없고 이해관계도 전무한 대만, 중국, 동남아 국가들, 인도,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러시아와 같은 다국적 여성들도 유사한 경험을 증언한다면 그 기억과 상흔들은 문서화된 그 어떤 공문서보다 더 유력한 증거 사료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치 재판에서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문서가 없더라도 사건과 정황들 간의 정합성이 계합되는, 이른바 ‘알리바이’가 성립되면 당사자의 주장이 사실로 인정되는 거와 마찬가지 맥락인 거죠. 한국, 대만, 중국과 일부 일본의 역사학계에선 이미 당사자들의 증언, 제3자의 기록들과 정황 등을 종합해 ‘군 위안부’가 일본군에만 있었던 특수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폭력, 강압, 납치, 감언이설의 사기, 기망과 유괴로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지 오래됐습니다.

  

그런데도 하시모또 시장께선 당사자들의 존재는 물론, 역사가들의 연구결과 마저 믿지 않고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모집’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떼’를 씁니다. 혹시 돈벌이를 위해 일본군의 모집에 응한 일부 창기들을 위안부로 징발된 여염집 부녀자들과 혼동하는 건 아닐까요? 당사자인 성노예 할머니들만큼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미군이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일본군 관리하에 있던 성노예피해여성들
바로 위 사진 속 여성들이 세월이 지나 자신이 일본군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갔거나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였다고 증언했다.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식 가능한 것임에도 한국 성노예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증언과 ‘군 위안부’와 관련된 퇴역 일본군의 회고가 들리지 않습니까? 설마 보고 듣고도 증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혹여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강제로 끌려가고, 속아서 징발됐다는 피해자들의 한 맺힌 육성을 믿지 못하겠다면 1993년 8월 “일본군이 강제로 위안부를 모집하는 데 관여했다”고 발표한 ‘고노 담화’까지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이 담화는 일본군이 ‘군 위안부’ 문제에 직접 관여한 사실이 담긴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공문서들에 근거해 일본정부가 벌인 진상조사 결과 사실로 판명된 내용입니다. 1993년이라면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의 일입니다. 시장이 25세 청년이었을 때였죠.

 

혹시 그때 이 담화를 듣지 못해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담화내용을 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또 1940년 10월에 작성된 미국 측 문서에 한국 여성 20명이 일본군에 속아서 ‘군 위안부’로 미얀마에 가게 된 내용을 기록한 것은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중국 주재 일본군이 강제로 ‘군 위안부’를 모집한 내용이 기재돼 있는 1948년 11월 토쿄(東京) 재판소 판결은 공문서가 아니란 말입니까?

   

하시모또 시장! 위 내용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변호사 출신이기 때문에 평균적 일본인보다 법률적 소양이 깊을 거라고 믿습니다. 물론 법률가가 아니더라도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하면 자신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죠. 또 당사자의 증언도 상대의 반증이 없으면 법적 증거로 인정된다는 사실쯤은 알고 계시겠죠. 이러한 상식마저 부정한다면 법률가로서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근한 예로 북한 당국이 일본인 납치를 지시한 서류를 내놓아서 북한을 납치 당사자라고 지목하는 겁니까? 납치된 당사자들의 증언을 듣고 일본정부가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가령 납치를 지시한 그 어떤 문서도 내놓고 있지 않은 북한이 공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인 피납자가 북한에 폭행, 협박을 당해 강제로 납치당했다는 증거를 일본이 내놨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뭐라고 말할 지 궁금해집니다.

  

피해자들이 지금도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위안부 징발의 강제성을 부인한다는 건 그만큼 사물을 보는 하시모또 시장 본인의 눈이 균형감각을 잃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또 역사가의 존재와 역할을 무시하는 결례이기도 합니다. 시장께선 눈과 귀와 가슴을 모두 닫고 있습니다. 아니 애써 닫으려고 작정한 듯이 보입니다. 논리성을 생명으로 삼는 율사로서의 이성마저 스스로 기망하려 드는 단계에 와 있군요.

  

시장의 언행은 일본의 기성 정치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구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그런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어 본인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실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정치신조와 정책 면에서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전 수상을 모범으로 삼아왔습니다. 이에 대해선 개인의 자유이니 가타부타할 게 못됩니다.

 

그러나 군대보유를 헌법으로 금지한 상황에서 징병제를 찬성하고, “지금 일본에서 가장 필요한 건 독재”라든가, 중국을 여행 중인 일본인이 현지 중국인 여성과 성매매를 하다 적발된 사건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 같은 것”이라고 한 주장은 상식 이하의 언행으로서 주변국을 안중에 두지 않는 오만한 처사입니다. 특히 타국에서의 성 매수라는 범죄행위를 어떻게 경제원조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따름입니다.

   

2008년 2월 오사카부 의회에서 일본공산당 호리타 후미이찌(堀田文一)의 부락해방동맹 활동에 대해 하시모또 시장이 “근거 없는 말”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또 ‘府民連合’이라는 단체로부터도 “사실오인, 인식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은 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드는군요. 혹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사실오인, 인식부족”에 따른 극도의 편협성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요? 더욱이 지방 자치단체장이 국가 차원의 정치 현안들을 거리낌 없이 공표하는 것을 보면 우익세력을 결집하고자 하는 정치적 동기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하시모또 토오루 시장을 비판한 호리타 후미이찌

  

하시모또 시장! 역사의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 역사의 순류를 거슬러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에 쏟는 열정과 노력은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고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데에 보태십시오. 현재의 독도, 위안부, 과거사왜곡 문제 등이 원만하게 풀리기를 바라고 있는 한일 양국의 건전하고 상식적인 시민들에게 희망이 되도록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시장께 인류의 보편적 입장에 서서 한일관계를 넘어 인권의 시각으로 성노예 문제를 바라볼 것을 당부 드립니다.

 

일본 정치계에서 차세대 리더의 한 사람으로 부각되고 있는 시장이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국가권력을 잡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시장께선 수상의 신분 혹은 외무대신의 신분으로 미래의 한일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소임을 짊어져야 하니까요.

  

광기의 우익 세력을 결집해 표심을 움직여 국가권력을 잡을 요량으로 신성한 인권, 역사와 영토문제를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제 창당한 ‘일본 유신회’의 당 로고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게 바로 역사적 진실을 정치에 악용하는 행위입니다. 독도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국 땅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 내에도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말해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많고, 동일한 주장을 하는 양심적인 학자들도 있으니까요. 그러한 정보를 접하고서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귀하는 정치가에게 필요한 기본적 인지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또 만일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라면 그건 비열한 작태입니다. 당장 ‘일본 유신회’의 당 로고에서 독도를 지우길 바랍니다. 이번이 어쩌면 귀하에게 정중한 어법으로 드리는 마지막 충고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여러 면에서 침체일로에 있는 일본이지만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을 일궈낸 저력을 믿는 자신감을 가지고 시대의 필연에, 역사의 요구에 당당하게 정면으로 대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정에 바쁜 줄 알지만 꼭 한국을 방문해 ‘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한 번 만나 보라는 말씀을 간곡히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 시장께선 어릴 적부터 들어온 “남에게 상처 주지마라”는 자당(慈堂)의 가르침이 떠오를 겁니다. 또 눈물이 많은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히면서 그간의 부정적 인식이 확 바뀔 것입니다.

 

위 글은 2012년 9월 13일자 인터넷 신문『오마이뉴스』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