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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정치의 불일치 시대

雲靜, 仰天 2012. 10. 11. 23:00

언어와 정치의 불일치 시대

 

서상문(세계 한민족미래재단 이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세계가 건강하고 정의로운 곳이길 바라는가?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쓰고 있는 언어가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로운 세상의 가늠자에 뜬금없이 웬 언어라니, 둘 사이엔 무슨 관련이 있을까? 흔히 정치는 말로 한다고 한다. 동물분류학상 인간이 본시 ‘말하는 사람’, 즉 호모로퀜스(Homo loquens)인 이상 그럴 수밖에! 실제로 비전, 국가통치철학, 정책 등의 정치적 구상과 개념은 먼저 언어로 말해진 후에 행정을 통해 실행되는 게 일반적 과정이다.

  

사람들은 한국정치가 혼탁한 원인을 인간의 탐욕, 독재, 이념, 승자독식의 정치구조 등에서 찾는다. 틀리지 않았다. 현상의 이면에 내재된 근본원인은 결국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은 언어와 행위를 통해 표출된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혹은 사회와 국가별로 다르게 사용되기도 하는 게 언어다. ‘고백(告白)’이 구한말엔 ‘광고’의 의미로 쓰였으며, 오늘날 애인(愛人)이란 한자말이 한국에선 이성간의 연인을 가리키고 중국에선 배우자를 뜻하지만, 대만과 일본에선 불륜상대를 뜻하듯이 말이다.

 

근대 일본지식인은 서양철학을 수용하면서 존재, 본질, 철학 등의 생경한 개념들을 모두 한자어 중심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보니 서양철학의 원의가 일본인의 일상 언어속의 뜻과 멀어진 결과를 낳았다. 한국역사에서 천년 이상 불교의 한문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사용함에 따라 불교교의가 어렵게 느껴지고 저자거리에 스며들지 않았던 거와 마찬가지 결과다.

  

결국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어와 행위의 합일성이다. 언어, 생각, 개념을 같이 하는 인식공동체가 그 뿌리다. 두 사람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단어에 대해 같은 생각, 의미와 관념을 공유하는 시대와 마음이 일치하지 않으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언어철학자 오스틴(J. Austin)은 "언어를 발화하는 것이 곧 행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정의, 민주, 쿠데타, 혁명 등 추상적 개념의 언어들은 의미전도가 일어나 사용돼온 것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 침략임에도 해방으로 호도하는 북한의 ‘남조선해방전쟁’과 일본의 ‘대동아전쟁’,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실상을 전도시킨 잘못된 ‘네이밍’의 무수한 사례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도치된 언어에 대한 비판의식이 박약해지면 그 사건은 정당화되고 세뇌돼 결국 ‘역사적 사실’이 되고 만다. 장기간 ‘5․16혁명’으로 부르도록 교육받음으로써 군사쿠데타가 자연스레 정당화되고, 미화, 찬양됐듯이 특정 사건에 대한 전도된 평가가 고착돼 있다는 건 그만큼 기득권을 누린 세력들이 기존 정치질서를 지속코자 한 결과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강조했듯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정치로부터 소외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에선 어떤 후보가 어떤 언어로, 뭘 말하는지 조목조목 따져봐야 한다. 국가의 운명이 그들의 언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대선 주자들이 쏟아낸 ‘경제정의’, ‘복지국가’ 등 굵직한 비전들의 함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포장되는지 허와 실을 분별하자. 한글창제 566돌인 그저께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창의적, 과학적인 우리글말의 위대성, 언어의 다의성과 정치와의 상관성을 반추하면서 느낀 단상이다. 한글날이 국가공휴일에서 해제된 지 20여년이나 돼 세종대왕께 죄짓는 기분이다.

 

위 글은 2012년 10월 12일자『경북일보』아침시론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