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전이라고 다 옳고 맞는 말은 아니다! ①

雲靜, 仰天 2018. 11. 6. 10:44

고전이라고 다 옳고 맞는 말은 아니다!

 

나는 고전의 경구라고 해서 그것을 무턱대고 옳다고 보는 기계론적 사고, 無思考 혹은 무신경을 거부한다. 시대가 바뀌고 利器가 변화하고 환경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고전도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세상이 바뀌지 않고 변화하지 않더라도 다르게 보고, 달리 생각해야 할 고전의 경구도 적지 않다. 오늘은 두 가지 짧은 구절만 예를 들겠다. 采根譚에 나오는 遇朋友交遊之失, 宜凱切不宜優遊明心寶鑑 省心篇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도 그 중 한 예다.

 

 

명말 홍자성이 지은 수필집 채근담. 채근담은 한국에 전해진 고전들 가운데 민간에 가장 많이 전승되고 회자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다.

 

두 구절의 뜻을 옮기면 전자는 친구 사이에 허물을 보면 마땅히 충고해야 하고 주저하면 안 된다가 되고, 후자는 향이 있으면 자연스레 향기가 나니 굳이 향기가 나게 하려고 꼭 바람 앞에 서려고 하는가?”가 된다.

 

위 구절 중 凱切알맞고 적절하게’, 혹은 간곡히 충고함을 뜻하고, 優遊優柔와 같은 의미로서 주저하면서 그냥 내버려두는 걸 말한다. 何必은 현대 백화문에서도 그대로 쓰이듯이 하필이면 꼭’, ‘구태여’, ‘굳이로 해석하면 된다먼저 첫 번째 구절과 관련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친구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 배우자, 부모형제에 버금가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관계다. 친구는 어떤 경우엔 배우자 부모형제 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다.

 

그런데 친구 사이에 허물을 보면 마땅히 충고해야 하고 주저하면 안 된다는 위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이 구절에선 朋友가 어느 정도 친한 친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친구라고 해서 다 절친한 사이가 아니다. 정말 진정한 친구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나 역시 그렇게 권장하고 싶고 내게도 그리 해주길 바란다.

 

다만, 이 경우에도 친구가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만큼 일정 이상의 그릇이 있는 도량의 소유자라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친구 사이엔 공적인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간이나 혹은 개인적인 문제들이 주가 되니까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내 경우 과거 사업에 실패한 친구에게 재기를 하라고 억대가 넘는 돈을 차용증 없이 주고 나중에 부도를 내고 나타나지 않아도 차용한 사실 자체를 인정한 이상 그에게 전화로 용서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친구가 반사회적인 범법자가 됐을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중대한 죄를 짓고도 전혀 뉘우침이 없는데 그를 용서해주는 게 도량과 관용이 아니듯이 도량이란 무턱대고 용서하는 걸 뜻하지 않는다. 30년 전 내게 회사를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빌려 달라기에 두 말 없이 퇴직금 210만원 전액을 고스란히 빌려준 친구를 최근에 만나 변제를 요청했더니 처음엔 빌린 기억이 없다고 딱 잡아떼다가 내가 증거를 내밀자 중간에 정산을 해서 지금은 갚을 게 없다고 한 친구도 있다. 법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시효 10년이 훨씬 지났으니 갚지 않아도 된다고 본 모양이다.

 

지금 그는 연 매출 500억을 올리는 작지 않은 기업을 운영하는 오너임에도 차용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에 젊은 시절 친구 간의 의리와 신의를 저버리는 배은망덕이라고 생각돼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점에선 나는 도량이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도량과 관용도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일정한 요건이 갖춰져야 베풀 수 있지만 전두환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지 못할 경우임에도 용서하는 것은 도량과 관용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본능이 내재돼 있다. 그게 자존과 깊숙이 엮여져 있으니까. 도량이 협소한 용렬한 자이거나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 보통 술친구이거나 각종 동기일 경우에 그런 충고는 오히려 역효과다. 사이만 벌어지거나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정말 친구에게 충고를 하려면 사심이 없어야 되고, 평소 그 친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 자라야만 자격이 있고 충고의 효과가 생겨난다.  

 

두 번째 구절 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은 조금 의역하면,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한 결과 인간됨이 격조가 있고 인품이 고매한 사람은 한 송이 꽃처럼 자연스레 향기를 내뿜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자랑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반문의 의미가 있다. 사실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은 나를 봐주십사 하고 몸을 까부대지 않고 가만있어도 향기가 나고 아름답게 보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말도 절반 정도만 타당하다. 사향이든, 꽃향기든, 여타 생명의 芳香이든 있는 그대로 맡고 기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는 어느 사회든 다수가 아니다. 향들이 그윽이 풍기거나 산들바람을 타고 흘러도 맡지 못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꽃 보다 더 진한 사람의 향을 맡거나 보아도 일부러 모른 체하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친구와의 사귐을 한 치의 손해도 보지 않고 저울 달듯이 이익을 교환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또 인간은 자기기준으로 남을 보는 게 본능인 듯해서 상대 향기의 농도와 너비는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초가삼간 지붕이 자신이 부대끼는 세계의 전부인 굼벵이에게 이 넓은 우주 천지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듯이 말이다.

 

그래서 어떤 잘난 사람의 잘남이 그 자신의 개인을 위해서 작위적으로 잘났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라면 作爲人爲도 필요하다. 때로 침묵과 겸양은 황금은커녕 주변에 널브러진 자갈보다 못할 때가 있다. 침묵하는 이의 내면을 읽을 줄 아는 친구에게만 그 침묵이 빛을 발한다.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直觀의 마음이나 도량을 갖추지 못한 자에겐 십중팔구 조용한 침묵과 겸손은 되려 폄훼와 뒷담화의 꺼리가 되고 만다. 그게 인간사회, 특히 내가 한 갑자가 돌기까지 체험하거나 직관한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상처 받지 않을 지혜와 담대함 그리고 隨處作主가 중요하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주인이 된다는 건 자신이 삶을 주체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선 고전이라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현대사회에 합당한 것만 받아들일 수 있는 밝은 良知를 길러야 한다.

 

 

 

2018. 11. 6. 07:02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