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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의 숨은 이야기

雲靜, 仰天 2018. 8. 14. 15:59
홍익대학교의 숨은 이야기
 
홍익대학교는 우리나라에서 미술교육기관으로는 최고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술대학으로 유명하지만 홍익대학교는 처음부터 미술대학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대종교가 세운 민족대학으로서 단군의 이념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홍익인간정신을 교육하는 대학으로 출발했다.
 
이 대학 역시 광복 후 여타 대학과 마찬기지로 반민족 세력이 민족세력을 밀어내고 점탈한 통탄스런 역사를 걸어왔다. 홍익대학의 역사는 단수히 일개 대학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현대사의 축약판임을 알게 해준다. 그 역사를 펌글로 소개한다. 
 

 

 
대종교가 세운 민족대학 홍익학원

1915년 조선총독부의 '종교통제안'으로 인한 탄압을 피해 1917년 중국 지린성(吉林省)으로 총본사를 이전했던 대종교 인사들은 광복 후인 1946년, 서울로 돌아왔다. 환국 직후 이들이 가장 먼저 추진한 행동은 민족 사학 설립이었다. 1947년 5월 원로회의에서 이들은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이념을 바탕으로 재단법인 홍익학원과 홍익대학관을 설립하고 당대의 국어학자 정열모(1895~1968)를 학관장으로 선임했다.

1946년에 홍문대학관을 인수해 당시 대종교 본부였던 서울 중구 저동 2가 7번지 덕우사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다. 7월, 종합대학으로 출발을 위해 홍익학원은 재단법인 홍익학원 설립준비위를 구성했다. 사재 1억 환을 기부한 이흥수(1896~1973)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군산의 실업가로 알려져 있던 이흥수는 대종교 6대 총전교(總典敎, 교주)를 지냈던 인물이다.

1949년 6월 27일, 대한민국 정부 대학령 제1호 대학으로 홍익대는 4년제 홍익대학교로 인가받았다. 초대 이사장은 이흥수, 초대학장 정열모, 초대 재단 상무이사는 정일, 초대 사무처장은 김현묵이었다. 당시 재단의 재산은 상당했다. 강원도 홍천, 경기도 양평, 경기도 오산 등에 200여만 평의 토지를 갖고 있었다. 그 후에도 이흥수는 수 년에 걸쳐 사재 15억 환에 이르는 자산을 학교에 더 투자했다.
 
서울시 남산동 교사, 서울시 누상동 교사, 서울시 문배동 교사,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대지 14000평,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교지 8만 평, 서울시 중구 주자동 홍익버스 운수주식회사, 전라북도 전주시 홍익 고무공업사, 경기도 인천 교사, 경기도 부천 영종도 염전 24만 평, 경기도 수원군 대룡면 토지, 전라북도 정읍 금광 등이 모두 이 학교 재단 재산이었다.

설립 당시 홍익대의 중심은 문과대였다. 국어학과와 국사학과가 이 학교의 자랑이었다. 설립 목표는 "민족정체성의 기본인 국학분야 인재를 양성하고 애국심 투철한 민족지도자를 기른다"는 것이었다.

홍익대의 중심인 민족주의 세력은 반공-공산주의 세력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나면서 학교는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남한 내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냉전 구도 하에서 축출되기 시작했음을 상징했다. 이흥수의 손자 이준혁은 "전체 민족진영에 대한 반민족 세력의 쿠데타였다"고 강조했다.

김구의 운구를 홍익대 3기생들이 맡았던 사실은, 격랑에 휩쓸리는 한국사에 홍익대도 표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김구 서거 후 홍익대는 그가 설립했던 건국실천양성소를 인수하기로 하고, 이렇게 인수된 건국실천양성소의 교사에 지금의 홍대를 대표하는 미술과가 설립됐다. 건국실천양성소는 총 12기까지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알려져 있다.

1950년 1월, 보도연맹사건이 터졌다. 이사와 교수, 학생 54명이 철도경찰대, 헌병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초대 학장 정열모는 빨갱이로 몰린 끝에 학장직에서 내려왔다. 곧이어 전쟁이 발발했다. 정열모를 비롯한 상당수 인물이 월북하거나 납북됐다. 남한에 남아있었다면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집단 학살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
 
반공 성향이 얕았던 민족 주의자 대종교 간부인 홍익대의 지도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이사직을 채운 건 검사였던 엄상섭 등이었다. 엄상섭은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학무국장을 지낸 인물이다. 독립운동가가 창설한 학교에 친일파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 1951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던 홍익대는, 1954년 서울로 돌아와 이 해 12월 마포구 상수동 와우산에 본관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어려워진 재정 상황은 이 학교 미래에 암운을 드리웠다. 이 때, 재단을 찾은 이가 있었다. 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해 1950년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충청도 출신의 이도영(1913~1973)이었다. 이도영은 1956년, 자신의 재산 10억 환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흥수는 이사로 재단에 남았고, 나머지 설립이사들은 전부 사퇴했다.

이도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도영은 도리어 족벌 체제를 강화하고 이흥수가 기부했던 재산을 팔아 자신의 부를 쌓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반발은 거셌다. 1957년 7월, 동창회와 교수단, 학생을 중심으로 동맹휴업 사태가 발생했다. 같은 해 9월 25일에는 동창회가 이도영을 업무상 배임, 횡령, 사기, 사문서 위조 및 조세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꺼꾸로 간첩으로 몰려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홍대 간첩단 사건이 이것이다.
 
새 희망이 온 건 1960년 발발한 4.19 민주화 혁명이었다. 오랜 투쟁 끝에 1961년 3월 10일, 이도영이 물러나고 총동창회와 학생, 교수들이 이흥수를 다시 재단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이도영은 이사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5.16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다.

군부는 이듬해 2월 2일, 미술학부만 남기고 나머지 학과는 모두 폐교 처분했다. 이어 문교부장관 친일파 김상협은 1962년 5월 30일, 이흥수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들의 임원 취임인가를 취소하고 최문환 관선이사장을 선임했다. 이 시기는 바로 정부가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를 강탈하던 때이기도 하다.

인가 취소 사유는 간단했다. 이도영이 10억 환의 재산을 출연했음에도 "이를 감독하지 못하였으며, 이로부터 목적 사업경영에 전혀 경비의 보조가 없이 학생공납금에만 의존경영"한다는 이유였다. 존재하지도 않은 돈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논리다. 이 조치의 의미는 이듬해 1963년 1월 15일 드러났다.
 
관선 이사회는 이도영을 다시금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시켰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이도영의 종제로 알려진 이원영이다. 새 재단 이사로 들어온 이원영은 공화당 창설 당시 정책위 부의장이었고, 1967년에는 공화당 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원영은 일제 강점기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고이소 구니아키 (당시 조선) 총독의 진보적인 통찰력과 확고, 불굴의 신념에 운명을 맡긴 조선은 행복하다"고 찬양하는 등의 행위가 후일 드러나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에 포함된 인물이다. 이도영과 함께 재단에 들어온 당시 이사 중 적잖은 이가 친일 논란에 휩싸인 전력이 있다.

군부의 힘으로 학교의 운영권을 쥐게 된 이도영은 이후 박정희 일가와 단단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우선 홍익재단은 군부 쿠데타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에게 제1호 명예박사 학위를 주었다. 이도영의 둘째 아들로 역시 홍익재단 이사를 지낸 이석훈은 육인수(육영수의 오빠)의 딸 육해화와 결혼했다. 육인수 또한 홍익재단 이사를 지냈다. 1966년 홍익대는 쿠데타 세력의 발상이었던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박정희의 흉상을 제작해 바쳤다.

이후 이도영은 군부의 핵심 정치조직이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하다 1973년 사망했다. 이도영 사망 직전, 재단을 빼앗긴 후에도 계속 민족운동을 이어오던 이흥수도 같은 해 5월 30일, 서울 대방동 상이 용사촌 골방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2대 이사장은 이도영의 부인 최애경이었다. 최애경도 설립재단이 마련해둔 재산을 속속 처분하자, 1994년 다시금 족벌재단 퇴진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퇴진하는 최애경의 뒤를 이어 1997년 새 이사장으로 들어온 인물은, 이도영의 육촌동생 이면영이었다. 지금의 홍대는 이렇게 세워졌다.

역사 지우기

1968년에 나온 <홍익요람>에는 재단 이사장에 이흥수로 표기돼 있었다. 같은 해 열린 졸업식에서도 학교의 창립 연도는 1948년으로 기록돼 있었다. 1978년 발행된 교지에도 창설 30주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도영과 이흥수가 사망한 후, 서서히 역사 지우기가 시작됐다. 1979년 발행된 자료에서 돌연 '설립자 이도영'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1983년엔 '도설 37년사'가 발행되는데, 여기서 갑자기 설립연도가 2년 앞당겨져 1946년으로 바뀐다. 홍문관 시절이 홍익대의 역사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홍익대의 창설자는 홍문관을 시작한 양대연이 됐다. 그리고 역사는 건너뛰어, 이도영 이사장이 들어온 1956년이 이어진다. '도설 37년사' 편찬을 주도한 이가 현재 홍익대 이사장인 이면영이다.

뒤바뀐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홍익인간' 이념을 담아 정열모가 직접 작사했던 교가는 관련 내용이 삭제된 다른 노래로 바뀌었다. 1956년 편찬된 <학교연감>에 실린 당시 교가는 "백두산 앞 뒤뜰에 퍼진 겨레는/ 오천년 뿌리박은 깨끗한 핏줄/ 빚어낸 불함문화 아름다우니/ 이상은 홍익인간 그 아니큰가/ 여명의 대한 땅에 샛별과 같이/ 숙명적 홍익대학 나타났도다"라는 가사로 구성돼 있다. 이 자료에는 '설립자 이흥수'라는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기도 하다.

이도영 일가가 오랜 기간 집권하면서 처분한 재산은 상상 이상이다.. 이도영 일가는 1957년 홍익운수공사, 홍익고무공업, 서울시 남산동 교지와 교사를 처분한 이래 수년에 걸쳐 학교 재산을 속속 팔아치웠다. 재단이 학교에 돈을 댄 게 아니라, 학교 재산을 재단 재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당초 교사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용산구 문배동, 마포구 염리동, 마포구 창전동 등의 교지가 모두 사라졌다. 당초 홍익재단은 서울시 곳곳에 홍익대학 캠퍼스를 세울 목표를 지녔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재산 처분 때문에 애초 8만 평 규모였던 상수동 부지는 현재 3만여 평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출처 : 프레시안
<대종교 총본사 직할시교당 시교사 김홍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