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리더십 : 대국 장수 길들이는 용심술
올해는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425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에서 맨 먼저 출발한 제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가 지휘한 1만 8,700명의 왜군은 부산 앞바다(정확한 해역은 節影島=오늘날 影島)에 도달해 하룻밤을 지내면서 부산포의 상황을 염탐한 후 이튿날 공격을 개시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이었다. 425년 전 음력 4월 중순이면 5월 16일 오늘 이맘때쯤이다.
오늘날 일본의 서남부 지역과 동북지역과 홋카이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국을 평정하고 중국 명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이른바 征明假道의 명분으로 조선을 치기로 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제1~제9군 15만 8,700명의 왜군 후방에 별도로 제10~제16군 12만 7,300명을 예비대로 삼아 조선 진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1선의 본대와 후방의 예비 병력을 다 합하면 조선침략을 위해 동원된 왜군은 총 29만 명에 가까운 대군이었다.
당시 조선군은 수도 한양에 집중된 근왕병까지 포함해 지방 각지의 전국에 산재해 있는 병력을 다 모아도 5만 명이 넘지 않았다. 임란초기 각 수군의 수영별 병력이 어느 정도였었는지 확인 가능한 자료는 없다. 갑오년 초 임진장초 자료를 종합하면, 삼도 수군을 모두 합해서 2만여 명 정도 되는데, 최대 병력수로는 2만1,500명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육군은 명부상 숫자로는 훨씬 더 많았지만 훈련된 상비군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이광의 두 번째 근왕병이 약 5만 명이었다고 하니 설령 5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들 전쟁 준비가 전무한 상황이었으니 전투력은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됐다고 봐도 틀릴 게 없다.
논란이 많았던 이율곡(1536~1584)의 10만 양병설이 받아 들여졌어도 병력 수는 절대 부족인데, 그마저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에 들어가게 된 조선이었으니 강한 국방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
왜군은 부산포의 조선 수군을 제압하고 세 갈래로 한양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조선 땅에 최초로 상륙한 조선침략의 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상륙과 함께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후 무인지경의 경상도 일대를 유린하면서 밀양, 대구▶ 상주▶ 문경새재를 넘어 불과 2주 만에 충주에 도달해 삼도(경상, 전라, 충청)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 1546~1592)이 이끄는 조선의 주력군과 맞닥뜨리게 됨에 따라 이른바 탄금대 전투를 앞에 두게 됐다. 하지만 임란 초기 조선의 운명이 걸린 물러설 수 없는 건곤일척의 이 탄금대 결전은 조선군의 패배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진행됐다. 500여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용약한 군주로 평가되는 선조가 한양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임진강을 넘어 여차하면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튀기 위해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의주행에 나섰고, 왜군은 한양을 거쳐 음력 6월 초순 경 대동강에 당도해 평양을 넘보고 있었다.
6월 9일, 왜군 적장의 요청으로 대동강 상의 배 위에서 진행된 조선의 이덕형(1561~1613)과 왜군 적장과의 담판이 벌어졌다. 이 담판에서 왜군 적장은 조선과 전쟁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는 것이니 왕을 모시고 이곳을 피해주고 요동으로 가는 길을 터 달라고 했다.
이덕형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선조실록에는 이 회담의 대화 장면이 기록돼 있는데, 왜군 적장의 요구에 대해 이덕형은 정문일침을 놓듯이 정곡을 찔렀다. “귀국이 명나라만을 침범하려 했다면 어찌 절강(浙江=중국 상해 쪽의 동해 연안지역)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왔습니까?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계책입니다. (중략) 죽어도 들어줄 수 없습니다.” 이로써 “그렇다면 강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왜군 적장의 말대로 강화가 결렬됐고 조선의 절박한 요청으로 명나라 군이 지원병으로 조선강토에 건너왔다.
명나라가 왜 청과 대치하던 중국 河北지역 산해관(山海關) 일대의 정예군을 보내 조선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게 됐는지, 또 그럼으로써 명군이 수비하던 산해관이 무너지고 청군이 입관하게 됨에 따라 이 영향의 여파로 결국 명이 망하고 청이 중국대륙의 새로운 패자가 된 과정과 역사적 의미 및 영향에 관해선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여기선 본고의 주제인 이순신의 리더십 중에 명나라 장수를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점만 다루겠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여송(李如松, 1549~1598)에게 4만 3,000여명의 명나라 군(明軍)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1593년 1월 명군은 휴정(休靜, 1520~1604)과 김응서(1564~1624) 등이 이끄는 조선의 僧軍, 官軍과 연합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을 기습 공격해 평양성을 함락시켜 탈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 지상에서의 상황은 명군이 의도적으로 적극 대응하지 않아서 소강상태에 빠졌다.
왜군과의 화의가 결렬되고 왜군의 재침략이 이뤄진 정유재란의 발발로 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함에 따라 왜군의 군량미, 군수물자의 해결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점에서 후방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해상의 제해권이 대단히 중대한 문제가 됐다. 조선의 지원요청으로 명조정에서 수군을 보낸 것은 정유재란 때였다. 1598년 수군으로 지원에 나선 진린(陳璘, 1543~1607) 도독이 조선해역에 들어선 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합세하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로 향했다.
그런데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고 사나워서 남과 불화를 일으킨 일이 잦았고, 문제가 이만저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매우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 진린의 군사들도 조선군에 대한 횡포, 요즘말로 하면 ‘갑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은 임금 선조가 보는 면전에서도 거리낌 없이 고을 수령을 마구 때리고 모욕했다.
진린의 부하장수가 명나라 사신과 명나라 군에 대한 접대 업무를 맡아보던 조선의 관리인 찰방(종 6품 외관직) 이상규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녀서 얼굴에 선혈이 낭자할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처참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땟놈”(“대국놈”의 전화) 군의 병사들이 남의 나라 관리들을 무슨 개, 돼지 취급하며 구타하는 등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재상으로서 전시 총사령관격이었던 유성룡(1542~1607)이 이를 보다 못해 역관(통역관)을 통해 풀어주도록 권유했지만 땟놈들은 듣지 않았다. 명나라군은 조선의 재상이자 전쟁을 총괄 지휘한 유성룡의 말까지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장수 진린까지 성깔이라면 한 성깔 하던 선조도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성깔이 고약한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이를 보게 된 유성룡과 신료들은 진린이 이순신(1545~1598)과 함께 진영에서 공동으로 연합작전을 펴기로 한 것에 대해 이순신이 장수로서의 지휘권을 뺏겨 패할 것이라면서 한 숨을 쉬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명나라 군사들은 조선 군사들에게 포악하게 굴 것인데, 강직하고 꼿꼿한 원칙주의자인 이순신이 진린의 의사나 기분에 거스르면 더욱 화를 낼 것이며, 그에게 순종하여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어서 이순신이 패할 수밖에 없다면서 조정의 많은 이들이 탄식을 했다.
그런데 그 뒤의 상황을 보면 모두가 우려한 것과 다른 일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진린이 자신과 조선군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깍듯이 대하고 존중하도록 만들었다. 어찌 해서 그렇게 됐냐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순신의 외국장수 길들이기 수완을 눈 여겨 볼 대목이다.
난중일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진린을 길들인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진린 도독을 맞이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준비한 것에 관해선 유성룡이 남긴『懲毖錄』에 기록돼 있다. 또 절이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둔 승첩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거둔 전과를 진린 도독에게 돌린 사실에 관해선『李忠武公傳書』世譜年表와『忠武公行錄』, 成海應이 지은『硏經齊全集外集』의『李忠武閒山記畧』,『督府忠義傳』등에 기록돼 있다. 이 자료들의 내용을 종합하면 전말은 이러했다.
1598년 음력 7월 16일, 명의 수군도독 진린은 휘하장수인 총병 등자룡(鄧子龍, 1531~1598)과 더불어 5,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 삼도수군통제영에 합류했다. 즉 조명연합수군이 형성된 셈이다. 그 전 진린이 최초로 곧 이순신 장군의 진영에 당도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낚도록 명령했다. 사슴, 돼지와 해산물을 매우 많이 잡아 잔칫상을 차리고 술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오자 이순신은 군대의 의장을 갖추고 멀리 나가 영접했다. 그런 다음 진린의 병사들을 성대하게 대접하니 장수 이하 실컷 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사졸들이 서로 “과연 훌륭한 장군이구나”라고 말하였고, 진린도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선조의 명을 받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했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일생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통한의 시절이었다. 그의 모친은 아들이 영어의 몸이 됐다는 소릴 듣고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선상에서 사망했다. 이순신 장군은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상중이었다. 왜군은 이순신 장군이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되고 없던 사이 일으킨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궤멸시키고 영호남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복귀한 이순신은 명량해전의 승리로 수군의 전력을 회복시키고 정유재란의 흐름을 180도 바꿔놓은 데 이어 절이도 해전을 벌였다. 이 해전은 명량해전 이후 조선과 왜군 함대 사이에 벌어진 최대 규모로서 가장 치열한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다시 장악하게 됐다.
그런데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한 것은 순전히 조선수군의 단독 전과였다. 왜냐하면 이 해전에 출전한 것은 조선수군뿐이었고 명나라 군사들은 바람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수군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해놓고도 전투 후엔 조선 수군의 전공을 가로채기에 열중했다.
조선수군이 왜적을 포획한 절이도 해전에 자신의 군사들이 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진린 도독이 매우 격분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이 전공을 모두 돌려주겠다면서 달랬고, 실제로 7월 24일 이순신 휘하의 장수 송여종(1553~1609)이 포획해온 왜선 6척과 왜군 머리 69급을 진린에게 보냈다.
이순신이 조선수군의 전공을 진린에게 돌린 것은 이뿐만 아니었다. 한 번은 왜군 배가 인근 섬을 침범하자 이순신은 군사를 보내 적선을 물리치고 적의 머리 40여개를 가져왔는데, 이것도 다 진린에게 주어 그의 공적으로 삼았다. 진린은 자신이 바라던 것 이상이어서 아주 기뻐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군대와 자신의 군대가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단속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자주 진린 도독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이순신 장군은 빠듯하고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에 걸쳐 주연을 베풀어 진린 도독에게 상상을 초월한 대접을 융숭하게 해서 명나라 군의 인간적인 호의를 샀다.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의 진영의 형편이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조정에서 지원해주는 것도 없어 스스로 농사짓고, 소금을 생산하여 군비를 마련해 화포, 총통을 제조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 물품을 바치고 명나라 군에도 군량도 제공했다.
더군다나 놀랍게도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 함선보다 더 크고 뛰어난 전함인 조선 수군의 판옥선 2척까지 명 수군에게 주었다. 수군에게 가장 중요한 전함인데 두 척 중 한 척은 진린 도독의 기함이 됐고, 다른 한 척은 등자룡 총병의 전함이 됐다.
실오라기 하나라도 백성의 것을 뺏는 자는 모두 잡아다가 사안의 경중에 따라 참수하거나 혹은 곤장을 쳐서 군기를 엄정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감히 이순신 장군의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으니 섬 안이 태평했다. 이를 보고 마음속으로 감복한 진린은 임금께 이런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이고, 국운을 만회할만한 큰 공적이 있다.”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에게 대하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때부터였다. 결국 이순신 장군의 이런 응대에 마음이 움직여 진린은 확 변했다. 어떻게 변했느냐고? 먼저 이순신을 속국의 일개 장수나 부하로 보던 눈이 바뀌어 전우이자 뛰어난 인품과 실력을 가진 대단한 장수로 평가했다. 이는 이순신을 부르던 호칭에서 나타났다. 이순신을 “리예”(李爺)라 호칭하기 시작했는데, 중국어에서 ‘예’라고 발음되는 야(爺)는 ‘어르신’이란 뜻으로 당시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에겐 상대를 공경하는 존경의 마음이 담긴 말이다.
진린의 변화는 행동에서도 드러났다. 걸을 때도 진린이 앞에서 걷고 이순신이 뒤에 걷게 하던 것이 함께 대등한 위치에서 걸었으며, 나갈 때도 가마를 이순신과 나란히 해 절대로 앞서 가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과 애국충정을 알고 협력하기로 결심한 진린은 모든 일을 이순신에게 물어 처리했고, 다른 명나라 장수들이 철수하는 왜군을 공격하는데 소극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조선의 최고 전쟁 지휘자인 재상의 말도 듣지 않았으며, 국왕 선조까지도 안중에 두지 않고 허투루 하게 업신여긴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에게만큼은 진심으로 공경하고 존중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그 어떤 신하가, 그 어떤 장수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노량해전 직전, 진린은 갑자기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 이순신에게 불길한 일이 있을 것 같아 그는 걱정을 하면서 심지어 명 황제 神宗(萬曆帝)에게 선조가 이순신을 시기하여 걱정되므로 명의 신하로 삼으라고까지 주청했다. 그렇게 진린은 변했고, 이순신을 공대하면서 그의 전우가 돼 마지막 노량해전을 함께 치렀다.
치열한 전투 중에 진린의 전함이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조선수군이 뛰어들어 그를 구해줬다. 함선을 지휘해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이는 다름 아닌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었다.
진린이 예감한 대로 이순신 장군은 결국 전사했다. 함선에서 지휘하던 중 왜군의 총탄에 맞은 이순신은 “방패로 나를 가려라.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면서 죽어갔다. 조카 이완은 피눈물을 흘리며 방패로 이순신을 가리고 대신 이순신이 지휘하는 것처럼 북을 울리며 독전했다.
진린이 이순신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전투가 끝나고 그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을 때였다. 이순신의 전사를 알게 된 진린은 대성통곡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오호 통제사여 나라가 피폐하거늘 누구와 더불어 다스릴 것이오. 군영이 어지럽거늘 그 누가 다시 일으키리오."(嗚呼 統制 該國凋殘 誰爲與理 兵戎狼狽 誰爲振起) 또한 진린은 "충무공이야말로 듣던 대로 훌륭하다"고 극찬했으며, "충무공은 작은 나라의 사람이 아니고 중국에 들어간다면 천하의 대장감"이라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선조에게도 글을 올려 이순신을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국운을 만회할 만한 공로를 세울 분"(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고 극찬했다.
그리하여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장사시에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추모했다. 진린의 이순신에 대한 존경은 대를 이어 영향을 미치고 있을 정도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 수습에 참여한 진린 도독의 후손 중엔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도 있다. 또 중국에 살고 있는 진린 도독 후손은 몇 년 전에 여수 등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와서 예를 올린 적도 있다.
이제 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안하무인과 포악한 성정의 진린이 왜, 무엇 때문에 이순신 장군에게는 고분고분한 협력자로 변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대국인연한 초면의 진린과 그의 병사들에게 진심으로 대우한 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보면, 여러 곳에서 장군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신이 마신 술은 한 번도 개인적 차원에서 마신 게 아니라 상사나 부하들을 위해 공무 혹은 사기 진작을 위한 수단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진린 도독과 명나라 수군들에게 자주 술과 안주를 장만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 대접한 것이 진린과 명군의 마음이 감동을 받은 것이리라.
기본적으로 진린과 이순신은 성격이 안 맞는 사람이었다. 진린은 성정이 거만하고 포악한 인간형이었다. 또 시야가 좁아 보인 장수였다. 그에 반해 이순신은 차분하고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런데다 전체 국면을 보는 시야가 넓은 장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전공을 미련 없이 진린에게 줄 리가 없다. 아무리 마음이 넓고 대국적인 견지라고 하지만 대국인인 척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안하무인, 방약무인의 외국군 장수에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어서 속으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개인의 자존심이나 치욕감을 다 떨쳐 버리고 오직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성의를 다해 진심으로 그를 대했다. 당시 이순신의 마음이 와신상담의 심정이 아니었겠는가?
둘째, 인간미를 갖춘 인품 그리고 장수로서의 군사적 지휘능력과 휘하 병사와 지역백성들에 대한 정치적 치세 능력이 출중했던 점이다. 실력과 능력이 없는 자가 행하면 더욱 비굴하게 보이겠지만, 문무겸비에다 장수로서 용장, 지장, 덕장의 품덕까지 갖춘 이순신이 그렇게 하니 진정 겸손과 공대의 의미로 전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이순신의 장수로서의 능력은 자신의 병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오합지졸 같았던 명나라 수군에 비해 조선 수군은 군기가 엄정했으며, 절이도 해전에서 보여줬듯이 전투에서도 싸울 줄 아는 전투력을 보여준 것도 주요한 변화 요인이었다. 명 수군은 군 기강이 형편없으니 당연히 전투력도 시원찮아 조선 수군보다 더 나은 게 없어 실전에서 큰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게다가 단순한 마음씀씀이가 아니라 상대를 믿게 만든, 전공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진린에게 선선히 돌린 것과 죽음의 어려움까지도 불사한 신의가 깃든 태도들이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절이도 해전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명 수군이 합류한지 겨우 사흘 밖에 안 되었으니 쉬면서 지켜보라고 하고선 단독으로 출전한 점, 그리고 그 뒤의 여러 해전에서도 조선 수군이 위기에 처한 진린 도독과 명 수군을 수차례나 구출해준 것이 진린과 명수군이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신뢰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셋째, 미국이라면 다 알아서 간과 쓸개까지 빼주면서 비위를 맞추고 비굴한 태도를 보여준 오늘날 일부 한국군 장성들과 달리 이순신은 결코 약소국이라고 해서 대국에 머리를 조아린다거나 알아서 기지 않고 누구를 만나도 속이 꽉 찬 장수로서의 엄정함과 결기가 있는 위엄이 진린을 변화하게 만든 작지 않은 몫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마치 예전에 주한 미군이 그랬듯이 명 수군이 대국 군대라는 자신들의 지위만 믿고 조선 수군과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지휘권을 넘기라고 윽박지르자 이순신은 즉각 단호하게 조선 수군 전원에게 철수령을 내렸다.
이에 허가 찔린 진린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이순신에게 철수명령을 취소해줄 것을 청하면서 앞으로는 명나라 수군의 행패를 엄정하게 단속하고 조선 수군을 차별대우하지 않겠다고 약속함과 동시에 조선 수군의 지휘권에 대해서도 존중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던 일화가 이에 해당되는 예다.
넷째, 이순신 장군이 진린 도독의 허와 실을 다 움켜 쥔 것도 주효했다. 진린에게는 명나라 수군 단독으로는 출전해봤자 왜군을 격파할 수 있는 전투력이 없었고, 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반해 조선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매번 승첩을 올렸다.
그렇지만 이순신 장군은 명 수군이 활약이 없어 심드렁한 진린 도독에게 여러 차례 조선 수군이 어렵사리 거둔 전리품들을 계속 보내 그의 전공으로 돌린 것은 앞서 얘기한 대로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은 진린 도독이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는 공식적인 전황보고서 외에 진짜 전황과 전공을 기록한 별도의 보고서를 조선 조정에 올렸다.
바꿔 말하면, 진린의 전공은 사실상 그의 것이 아니라 조선 수군의 전공이며, 진린의 전공보고서는 허위보고서라서 이는 이순신 장군과 조선 조정의 마음먹기에 따라선 진린 도독의 신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아킬레스건이었다.
한 마디로 이순신 장군이 진린 도독의 약점을 손에 거머쥐고 있었다는 점을 뜻한다. 자신의 약점이 잡혀 있었던 데다 이순신 장군이 조선 수군의 공마저 자신에게 넘겨주는 것을 본 진린은 자신이 전공을 세우려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강자에게는 비위를 맞추고 약자에게는 “갑질”을 잘 하는 일부 한국인의 성정이 반영된 것인지는 몰라도 특히 강대국에 대해선 저자세인 한국외교관들이 이순신의 자세에서 배워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 보다 큰 틀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강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만백성을 유린한 임진왜란(근래는 ‘조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함) 중에 우리가 정말 잊어선 안 될 교훈이 있다.
그것은 종주국이라고 자처한 명나라가 조선을 따돌리고 일본과 화의를 추진하면서 조선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를 일본에게 넘기려 했던 사실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당시 선조와 조선 조정이 중국이 대국이라고 무턱대고 믿고 기댄 나머지 그들에게 국가로서의 군사적, 외교적 결정권, 즉 운명결정권까지 맡겨버린 허약한 국력과 무사 안일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점은 지금 미국이 동맹국이라고 무턱대고 믿고 따라선 안 된다는 시사점을 말해준다. 우리 사회엔 미국이라면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구해준 은인이랍시고 무조건 믿고 보는 경향이 있고, 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골빈당’들이 적지 않다. 미국이 소련과 함께 국익을 우선시한 강대국의 세계전략 논리에 따라 한국영토를 남북으로 분단시켜 일제처럼 한국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사실은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체 한다.
미국이 우리에게 “병 주고 약준 것”을 알아야 하는데도 약을 준 것만 알고 병을 준 것은 모르니 ‘골빈당’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우리는 자주의식이 없는 그러한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강대국이랍시고 우리를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이 미국이든, 중국이든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르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요즘 남북한, 북미, 중미, 북중관계, 한중관계, 북일관계 등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를 보면 우리가 섬 아닌 섬으로 70여년을 지낸 상황을 벗어나 대륙과 해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첫걸음이 시작될 수 있는 일대 전환점에 서 있다. 먼저 우리는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각축전을 벌이는 북미와 중국의 외교전략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트럼프와 김정은 둘 다 성격이 괴팍스럽고 종잡을 수 없어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인물들로 일컬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무쌍함은 고도로 계획된 의도적인 정치행위라고 봐야 한다.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응대할 것인지 이순신 장군이 대국 장수 진린을 길들인 것에서 시사점과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순신이 그랬던 것처럼 대국이라고 기죽거나 알아서 기지 말고 당당하게 대응할 것이 요망된다. 또 지성이면 감천이라 진정성 있게 최선을 다한다면 아무리 강대국의 장수가 거만하고 안하무인으로 놀아도 그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이미 김정은은 전세계에 비핵화를 여러 차례 공언을 했기 때문에 북미회담이 결렬될 수는 있어도 당분간은 과거 김정일 정권이 그랬듯이 비핵화 약속을 내팽겨 치고 또 다시 핵무기실험을 지속하고 과거처럼 천안함 침몰, 연평도포격 등의 대남 도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김정은은 약간의 자승자박적인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순수하게 사람을 대할 때와 달리 냉혹한 전쟁에서나 혹은 외교전에서는 상대의 약점 혹은 약한 고리가 있다면 그것을 파악해 그곳을 급소로 움켜쥐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 나라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장수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진정성과 정성을 가지고 주변국들에게 신뢰를 쌓아가는 지속적인 노력과 함께 한국이 처한 전략적, 경제적, 문화적 가치와 잠재력을 널리 인식시켜 그들도 우리도 다 함께 상호 이익이 되는 존재라는 점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2018. 5. 16. 11: 49
고향에 도착한 KTX 열차를 내리면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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