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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선 안 될 ‘미투’ 선언의 본질과 용기 있는 삶의 자세

雲靜, 仰天 2018. 3. 13. 14:51

변해선 안 될 ‘미투’ 선언의 본질과 용기 있는 삶의 자세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는 게 있다. 도움이 필요한 어떤 현장에 사람이 많이 모여 보는 이들이 많을수록 제각기 내가 아니라도 이 가운데 누가 도와주겠지 하고 생각해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책임의식이 분산되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는 현상을 가리킨다. 심리학, 사회학의 전문용어로 ‘방관자 효과’, ‘구경꾼 효과’라고도 한다.

 

내 경험에 의하면, 또 내 경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건 대체적인 확률문제다. 생명이나 재산에 관계되는 위험한 일일수록 대부분 방관자가 될 확률이 높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꽉찬 20대 후반 언론사에 입사해 첫 직장생활을 하던 중, 어느 봄날 오후 회사와 가까운 현재의 서울 서대문 로터리 근처 독립문 방향으로 가는 오른쪽 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20여 미터 앞 전방에 사람들이 수십 명이 모여 비명을 지르거나 웅성거리고 있지 않는가?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있다 싶어 바로 그쪽으로 뛰어갔다.

 

주위를 둘러싼 많은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아, 글쎄! 서대문 로터리 인근의 학원에 다니던, 20대 초반의 재수생 7~8명이 한 명의 재수생을 집단적으로 무자비하게 패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중 어떤 놈은 옆에 있던 공중전화 박스의 유리를 깨어 뾰족하고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거머쥐고 자기 손에 피를 흘리면서 상대를 여러 차례 찌르고 있었다. 집단 난타를 당하던 그 재수생은 꼼작 없이 맞고 앉아서 머리, 얼굴, 팔 등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옷이 다 붉게 젖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군중들은 누구 한 사람 뜯어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말리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고, 단지 저마다 “엄마야!”, “아이고, 저런저런!”하며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다들 무서웠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경찰에 신고를 했는지도, 경찰이 출동했는지도 몰랐지만 아직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니, 이걸 보고 가만있다니! 그냥 놔뒀다간 사람이 죽을지도 모를 판이었다. 이 광경을 보게 된 나는 즉각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 구타를 가하는 애들 서너 명을 뒤편에서 순식간에 제압하고 유리조각을 들고 반항하던 놈까지 안뒤축후리기(유도의 한 기술)나 모두걸이(씨름 기술)로 한 번에 넘어뜨려 눕혀버렸다.

 

그때서야 구경하던 군중들 중 남자 어른들 너 댓 명이 합세해 나머지 애들도 다 붙잡았다. 재수생들은 전원 신고를 받고 인근 교남파출소에서 달려온 경관들에 인계됐다. 병원 구급차도 불러 부상자를 위한 응급조치를 취해줬다.

 

그리곤 경찰의 요청에 응해 나도 경관들을 따라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교남파출소에서 내가 본 과정을 있었던 대로 진술해줬고, 그 이튿날인가 또 한 차례 다시 그 파출소의 협조요청 호출을 받고 가서 선처를 호소한 몇몇 피의자 부모들과도 얘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 피의자 부모들에게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진술해주고 경찰에게는 아직 청소년기를 갓 벗어 난지 얼마 안 되는 재수생들이니 합리적으로 잘 수습되길 바란다고 부탁하고 이 사건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내 자랑을 하게 된 듯하지만, 이 얘기는 가감 없는 완전 실화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와 유사한 일, 혹은 이 보다 더 살벌한 일을 맞닥뜨린 일도 적지 않다.

 

1964년 3월 13일 오늘 새벽, 미국 뉴욕시 퀸즈의 바텐더 캐서린 제노비스(Catherine Genovese, 1935~1964)라는 여성이 퇴근 후 도달한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8명의 이웃사람들이 창문을 통해 35분 동안이나 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Kitty"로도 불려진 케서린 수잔 제노비스의 생존시 모습
캐서린 제노비스를 강간 후 살해한 범인 윈스톤 모슬리(Winston Moseley). 범인은 제노비스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묻지마 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뉴욕타임즈’의 기사가 과장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내가 현장에 있지 않아서 실상은 어떠했는지는 단언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제노비스가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됐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은 게 없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제 겪은 경우라든가 혹은 제노비스가 당한 경우처럼 목격자는 여럿이지만 누구 한 사람 도와주려고 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살해된 이 여성의 이름을 따서 ‘제노비스 신드롬’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최근, 우리 사회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미투’선언이 야권과 거대 그룹 간에 기획한 모종의 배후설이 거론되거나, 의도된 정치모략, 혹은 여권 내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둥, 갖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심지어 논란이나 비난 차원을 넘어서 피의자라고 폭로되거나 지목된 이들 중에는 자살까지 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그 여파가 일파만파의 해일 수준이다.

 

하지만 ‘미투’선언의 확산은 설혹 그 이면에 어떤 배후나 정치모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등의 행위가 명백하다면, 먼저 그 자체에 주목하고 봐야 한다. ‘미투’ 확산을 기획하고 터뜨려 여론몰이로 뭔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배후 공작이 있다손 치더라도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의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걸 제대로 인식해야 할 일이다.

 

또 한 가지! 성 범죄가 자행되고 있는 현장에 있는 목격자는 상당한 용기와 정의감이 필요해서 선뜻 나서기란 쉽진 않겠지만, 범행을 보고도 무심코 지나치거나 못 본체 침묵해선 안 된다. 또 다른 제노비스 신드롬의 당사자가 돼선 안 될 것이다. 그걸 수수방관하거나 못본 체 지나치면 유사한 범죄들이 극성을 부려 나중엔 내가 당할 수도, 내 가족이나, 내 이웃이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무작위 다수 시민들의 정의로운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뭐라고?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겁나서 용기나 나지 않는다고? 평소 호연지기를 품거나 증장시키는 삶을 살면 의협심, 정의감과 용기 같은 것은 자신도 모르게 용수철처럼 저절로 튀어나오게 돼 있다.

 

2018. 3. 13. 08:14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