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가을에 읽는 將進酒

雲靜, 仰天 2017. 11. 8. 17:10

가을에 읽는 將進酒

 
한가위가 지났습니다. 절기로는 오늘밤이 가장 밝은 달이 뜨게 돼 있지만, 여긴 가랑비가 내리고 있어 달을 보기엔 무망할 것으로 보입니다. 상상으로라도 둥기둥~ 보름달이 뜨는 걸 보면 술이 생각나고, 술하면 대작할 벗이 있어야겠죠. 중국 시문학사에서 이 모든 요소를 안고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속칭 “주태백”이라고 불리는 당나라 시대의 詩仙 李太白입니다. 太白은 자이고, 李白이 성명입니다.

이백의 대표적 시작 가운데 하나인 권주가를 소개합니다. 술을 권하는 詩歌 장진주(將進酒)입니다. 將은 “청컨대”, “청하노니” 등의 의미가 있고, 進酒는 “술을 드십시요”라는 말로서 將進酒는 “청하노니 술 한 잔 드시죠”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進酒라는 단어는 구어체로도 중화권 지역에선 오늘날 그대로 쓰이고 있는 말입니다.
 
이백의 이 시는 조선 선조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등 100수가 넘는 많은 시조를 지어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짐과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극보수 꼴통인 당대 서인의 영수였던 松江 鄭澈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송강이 지은 ‘將進酒辭’를 보면 인생이 덧없으니 “먹새 먹새” 술이나 먹새라는 권주가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전체적인 내용이 이백의 ‘장진주’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비 뿌리고 한기 도는 바람이 부는 이 가을날, 한 술 하시는 분들은 이태백의 장진주를 읊어 보십시요. 원문과 번역문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적어봤습니다. 읽어보시면 아련하기도 하고 비애를 느끼게 하는 정념이 가슴을 파고들어 술이 술을 끌어당기게 만들 것입니다.
 
이백은 왜 술을 권하는 시를 이렇게 길게 읊었을까요? 당시 그가 처한 상황과 심사는 제쳐두고, 한 마디로 “내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잊고져 하노라!”라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도 마시지 않을 재간이 있는 이가 있겠사옵니까? 있다면 그는 가슴이 木石이거나 콘크리트여서, 요즘 말로 공감능력 제로의 인간일 겁니다. 주석에서 술잔을 들고 돌아가면서 한 두 소절씩 낭송을 해보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겁니다.
 
將進酒

李白

君不見(군불견)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불부회)
君不見(군불견)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래)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岑夫子 丹丘生(잠부자 단구생)
將進酒杯莫停(장진주배막정)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請君爲我傾耳聽(청군위아경이청)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但願長醉不願醒(단원장취불원성)
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
陳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안평락)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五花馬千金裘(오화마천금구)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與爾同銷萬古愁(여의동수만고수)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흘러 흘러 바다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은 도도하게 흘러 황해로 들어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높은 당상에서 거울을 보며 백발을 슬퍼하고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가 저녁에 흰 눈 맞은냥 백발이 된 걸 말이오
인생에 뜻한 바가 얻어졌다면 마시고 즐길 줄도 알아야지
괜시리 빈 술잔에 달빛만 어리게 하지 말지어다.
하늘이 나 같은 인재를 냈으면 반드시 쓰일 곳이 있을 것이요
천 냥 돈도 다 쓰고 나면 다시 생기는 게 인생이거늘
우선 양을 삶고 소를 잡아 즐겨보세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 되지 않겠는가?
잠선생 단구생이여!
술을 권하노니 술잔을 멈추지 말게
내 그대에게 노래 한 곡조 불러줄테니 내 노래에 귀 기울여 주게.
좋은 음악, 좋은 음식도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니지 않는가?
허나 난 오랫동안 취해서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로다.
옛날부터 성현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홀로 쓸쓸했다네.
마시고 즐길 줄 아는 자만이 이름을 남겼을 뿐일세
옛날 조조의 아들 진왕이 평락궁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말술을 퍼마시며 즐거워하지 않았던가?
주인은 어째서 돈이 적다고 말하는가?
우선 술을 받아와서 즐겨나보세.
살찐 말과 천냥짜리 외투를 가지고
아이를 불러 좋은 술로 바꿔오게 하여라.
내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잊고자 하노라!
 
 
내용 중에 “단지 나는 오랫동안 취해서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는 것과 “옛날부터 성현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홀로 쓸쓸했을 뿐이로다”라는 어구가 유달리 비수 처럼 폐부에 꼽히네요. 무슨 의미인지 감이 오겠죠?
 
다른 어구는 설명이 필요 없더라도 중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로 인해 잘못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會須一飮三百杯’, 즉 ‘한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부분인데, 이 문구대로 읽으면 이백이 300잔이나 마실 수 있는 술고래처럼 이해가 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의 술잔은 한국의 대접처럼 큰 게 아니고 소주잔의 3분의 1 정도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건 근래의 일이 아니고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술문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막걸리가 주종이었던 옛날 전통시대의 고려나 조선에선 사발이나 대접으로 마셔왔던 거와 달리 중국술은 보통 50도 이상의 독한 백주 위주여서 큰 잔으로 벌컥벌컥 마실 수가 없고 작은 잔으로 마셔야 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백이 300잔을 마신다는 건 우리의 소주로 치면 대략 10병 정도 되겠죠. 두 사람이 마시면 적지 않은 주량이긴 해도 여럿이서 소주 10병 정도라면 엄청난 주량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한 잔씩 할 때마다 한 번씩 낭송해보이소. 언젠가는 저절로 암송이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즐길 줄 아는 자만이 천하를 가지고 놀 수 있겠죠?
 
2017. 10. 6. 10:53
고향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