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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의 유래와 세시풍속

雲靜, 仰天 2017. 11. 3. 04:35

중양절의 유래와 세시풍속

 

음력으로 9월 9일인 10월 28일 오늘은 중양절이다. 중양은 양 수가 겹쳤다고 해서 붙인 명칭인데, 9가 겹쳤다 해서 重九라고 부르거나 구구절이라고도 부른다. 9월 중 유일한 속절(俗節)인데, 중양(重陽) 또는 중광(重光)이라고도 한다. 중양과 중광은 양(陽)이 겹친다는 뜻이다. 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陽의 수’ 라 하고, 짝수(隅數)를 ‘陰의 수’라 하여 ‘양의 수’를 吉數로 여겼다.
 
중양절은 설(1월 1일), 삼짇날(3월 3일), 단오(5월 5일), 칠석(7월 7일)과 함께 전통사회의 節日이다. 이 속절들은 ‘陽數’를 吉數로 여기는 奇數民俗들이다. 기수민속은 양의 수가 중첩된다는 의미에서 다 중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중양이라고 하면 중구를 가리킨다.
 
중구를 비롯한 기수민속은 다른 세시풍습이 그렇듯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漢代 이래로 중구절에 賞菊, 登高, 詩酒의 풍속이 있었고, 唐宋代에도 관리들의 휴가일로서 추석보다도 더 큰 명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구의 풍속이 신라 때부터 전해 오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이날 연례적으로 안압지의 臨海殿이나 月上樓에서 군주와 신들이 모여서 시가를 즐긴 듯 하며, 고려시대에는 중구의 향연이 국가적으로 정례화 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삼짇날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추석에 행하던 기로연을 중구로 옮기고 유생들에게 과거를 실시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東國歲時記』9월조에 의하면 “서울의 풍속을 보면 중구날 남산과 북악산에 올라가 먹고 마시며 단풍놀이를 한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누런 국화를 따다가 찹쌀떡을 빚어 먹는데, 그 방법은 삼월 삼짇날 진달래 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으며, 이를 화전(花煎)이라 한다. 지금의 국화떡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배와 유자와 석류와 잣 등을 잘게 썰어서 꿀물에 타면 이것을 화채라 하는데, 이것은 시절음식도 되지만 제사에도 오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보아 중구의 시절음식으로 국화전과 화채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들로 보아 중구는 우리의 풍속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문인 柳晩恭이 지은『歲時風謠』에는 중구에 대한 詩가 있다. 이 시는 중구의 풍속에 대한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금꽃을 처음 거두어다가 둥근 떡을 구워 놓고 상락주(桑落酒)를 새로 걸러 자그마치 술지게미를 짜냈다. 붉은 잎 가을 동산에 아담한 모임을 이루었으니, 이 풍류가 억지로 등고(登高)놀이하는 것보다는 낫다. 중양절(重陽節)의 술을 상락(桑落)이라고 한다.”
 
중구에는 지방에 따라 다양한 풍속이 전하여 온다. 예컨대 성주단지에 햇곡식을 갈아주며 제물을 차려 성주차례를 지낸다. 또 중양놀이도 했다고 하는데, 부녀자·소년·소녀들은 제각기 무리 지어 하루를 즐기고, 문인들은 시를 짓고 풍월을 읊어 주흥을 즐겼다. 궁중 사람들이나 선비들은 교외로 나가 작시, 그림 그리기 외에 楓菊놀이를 하면서 가을 산하를 즐긴 것이다. 마치 지금의 가을소풍처럼. 그리고 忌日을 모르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며, 연고자 없이 떠돌다 죽었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또 추석 무렵에 햇곡식이 나지 않아 차례를 지내지 못한 지역에선 이날에 차례를 지냈는데, 첫 생산된 햇곡식을 조상에게 바치고자 하는 정성을 담았다. 또 이때쯤이면 약초가 한고비를 이루는데, 구절초는 이때 가장 약효가 좋다고 하여 산이나 들에 나가 채취했다.
 
국화전에 국화주를 마셨다는  오늘 중양절, 친구와 국화주 한 잔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 군침이 살짝 돈다!

 

2017. 10. 28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