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고전기행 : 杜牧의 山行

雲靜, 仰天 2017. 10. 30. 00:13

고전기행 : 杜牧의 山行

 

청명한 가을, 산이나 들엔 단풍이 한창 물이 오를 때입니다. 울긋불긋 자태를 뽐내기 시작한 가을 정취에 어울리는 한시 한 수 올립니다. 이 시 역시 자고로 중국인들에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명시의 반열에 드는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역시 옛날 중학교 시절에 교과서에 등재된 걸 배웠는데, 이 시를 암기한답시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읊은 기억이 나니깐요. 즉 고전이라는 소리죠.

 

山行/杜牧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산행/두목
 
멀리 늦가을 산을 오르니 돌길이 경사져 있고,
흰 구름 이는 곳에는 인가가 있구나
가마 세워 노을 지는 단풍 숲을 즐기는데
서리 맞은 단풍이 2월 봄꽃보다 더 붉구나.
 
위 시의 저자 두목(803~852)은 중국 晩唐시대 문인입니다. 그는 일찍이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주석을 달았을 정도로 병법과 문장에도 능했지만, 시에도 능했습니다.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렸으며, 작풍이 杜甫와 비슷하다고 해서 소두(小杜)로도 불렸죠. 그는 인생 말년에 병이 들자 스스로 묘지(墓志)를 지었는데, 자신이 지은 문장을 모두 불태우라고 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의 시풍은 수식을 좋아하는 게 특징입니다.
 
山行은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시처럼 산 밖에서 산을 보고 느낀 감상이 아니라 산길을 걸으며, 즉 산 속에서 느낀 늦가을의 감상을 적은 것입니다. 시기가 만추에서 ‘늦가을’ 사이의 시기일 것이라고 추론해 번역한 까닭은 ‘霜葉’과 ‘寒山’이라는 시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특별히 해설이 필요한 단어가 없거니와 구문도 평이합니다.
 
다만 楓林에 대해선 조금 설명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楓林은 그야말로 단풍 숲을 이르는 것이어서 옛적부터 중국인들에겐 숲의 미칭으로 사용됐지만, 좋아하는 好意가 확대돼 봉황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仙境을 비유해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의 구도는 대단히 간결하고, 동원된 시어도 즉물적인 것들뿐입니다. 제2구의 흰 구름과 제4구의 붉은 단풍이 대비되는 구도인데, 흰색과 선홍색의 붉은색이 묘하게 어울리고 있는 풍광을 묘사함으로써 시를 읽는 이들에게 강렬한 한 폭의 산수화가 떠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용어도 복잡하고 추상적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산을 오르면 누구에게나 눈에 바로 들어오는 사물들을 나타내는 것들이 시어로 동원되고 있을 뿐입니다. 늦가을 단풍, 산길, 흰 구름, 초막집, 가마, 노을, 서리, 붉은 단풍, 봄꽃이 그런 것들이죠. 하지만 저자는 이 시어들을 엮어 결국 탈속적인 다른 세상을 그리게 만들고 있는 것을 놓쳐선 안 될 것입니다. 부연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시어들엔 모두 하나 같이 추상이 스며들 공간이 없는 즉물적인 단어들이지만, 일단 이 사물들을 접하고 나면 직관과 관조를 넘어 상상의 다른 세계로 인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겉으론 지은이의 심사는 드러나지 않는 자연 관조적인 ‘산빡함’만이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지만, 실제는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평심하게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얘길 하고 있는데, 이 광경을 한 번 마음속에 떠올려 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나요? 보통 흰 구름은 사람들에게 덧없음, 일시적, 소박함, 깨끗함, 순진무구함, 탈속적 등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그런 흰 구름이 뭉글뭉글 이는 곳이라면 해발이 조금 높은 곳이겠죠. 얕은 곳에 이는 구름이라고 해도 적어도 수백 미터에서 천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겠죠. 지금이나 옛날이나 그런 곳에 사람이 많이 모여 살지는 않습니다. 동양화, 특히 중국인들이 그린 실경 산수화에 보이듯이 그런 곳에 사람이나 인가는 꼭 한 둘 정도뿐이죠. 또 대궐 같은 기와집이 아니라 늘 작은 규모의 초막집이 예사로 나옵니다.
 

상상컨대 아마도 두목이 오른 한산은 이런 정도의 풍광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속과 멀리 떨어진, 혹은 번삽한 세속을 떠나 살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가 한 번쯤은 해보는 바람이죠. 특히나 날마다 속세에서 일로, 사람에 치여 스트레스 받고 사는 사람에겐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어쩐지 신선이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이는 곧 중국인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무릉도원 같은 도가적 세계를 동경한 것으로 보입니다. 탈세속적, 무위자연을 최고의 善으로 본 노자나 장자가 그린 理想鄕말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지은이 두목도 여타 시인묵객들 마냥 자신도 세속을 떠나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늦가을 낙엽 지는 산에 올라서 멀리 바라다 본 흰 구름이 있는 인가가 어쩌면 자신이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 居하고 싶은 자연적 삶의 동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이 시 전반 2구까지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 후반부 2구를 보면 세속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을 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예컨대 위 시에선 저자 두목은 흰 구름 속에 언뜻 보이는 인가가 주는 느낌엔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곤 바로 노을 지는 울긋불긋한 단풍을 즐기는 감상으로 옮겨갈 뿐입니다.
 
그래서 서리 맞은 단풍을 보고선 단풍이 너무 붉고 고혹적이어서 봄꽃 보다 더 붉다고 감탄할 뿐 그 이상은 없습니다. 영탄의 최대치는 붉은 단풍에 꽂혀 있습니다. 2월 봄꽃보다 더 붉다고 탄복하니 말입니다. 흔히 단풍의 붉기를 얘기할 때 자주 쓰는 “2월 봄꽃보다 더 붉다”라는 대목에서는 본의 아니게 독자들에게 상상을 멈추게 만들어 버린 듯합니다. 또 서리를 맞은 단풍을 말해도 그에 대해 마음이 더 이상 서리라는 단어가 주는 哀想 같은 곳으로는 전이되지 않네요.
 

 
이는 자연을 통해 인생사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노래하는 여느 시들과 달리 한 마디로 즉물적이고 직관적인 禪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禪은 보일 시(礻)변에 간단 單이 결합된 한자(礻+單=禪)이듯이 사물을 간단하게 바로 본질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두목은 이 시에서 자신이 자연이나 단풍의 본질을 바로 보고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뭐 시 전문가가 아닌 내가 생각하기엔 시라는 게 꼭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본 그대로 읊고 즐긴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건 아니니까요.
 
조금 시비조로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지은이는 가을 산을 두 발로 올라간 게 아니라 가마를 타고 올라간 점이 아쉽네요. 단풍 감상도 그렇고, 맑은 기를 들이키기엔 아무래도 약간의 거추장스러움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과거 유교를 떠받든 나라에선 옛날 사대부들은 거의 다 평소 땀을 흘리고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 역시 그랬나 봅니다.
 
구한말 조선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열심히 테니스를 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멀리서 본 도포 입고 갓 쓴 양반이 “저런 힘든 일은 상것들에게 시킬 일이지 왜 저리 땀을 뻘뻘 흘리고 고생하느냐”라고 한 일화가 생각나듯이 중국에서도 사대부들에겐 운동은 거리가 멀었습니다.
 
단풍 절정기는 대략 다음 달 중순까지일 듯합니다. 붉은 단풍이 이월 봄꽃보다 더 붉을 때입니다. 그 사이에 가을 정취를 한껏 즐길 수 있습니다. 두목의 산행을 읊조리면서 짧은 한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자연과 하나가 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2017. 10. 29. 08:02
단풍이 묽게 물들기 시작한 구파발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