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새로 불붙는 우주탐사 경쟁 유감

雲靜, 仰天 2017. 11. 29. 12:34

새로 불붙는 우주탐사 경쟁 유감

 

1969년 7월 20일 미국의 우주선이 달에 착륙해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 1930~2012)이라는 꽃미남 얼굴의 우주인이 달 표면에 발을 디딘 장면을 본 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수나무 절구로 방아를 찧는 옥토끼가 수천 년 간 인류에게 선사한 신비감이 벗겨지던 순간이었다. 가히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1969년이었으니 아폴로 11호가 우리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사라진 게 어언 반세기가 다 돼 가고 있다.

 

 

닐 암스트롱. 그가 달 표면에 내렸을 때 그는 39세였다. 그는 6·25전쟁 당시 제트기 조종사로 참전해서 78회나 출격한 군인출신 우주인이었고, 달에 착륙한 그해에 한국도 방문한 바 있다.

 

그 뒤 오랫동안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미국이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리곤 달은 우리에게 또 다시 머나먼 미지의 존재로, 우주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남게 됐다. 이 사이 반세기 가까이 인류가 달에 가지 않았던 것은 달에 대한 경제적, 과학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이면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은 만큼 성과가 없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판단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50년 가까이 중단됐던 달 탐사가 다시 우주과학의 선진강대국들 사이에 레이스가 재개되고 있다. 이번엔 냉전시대 소련과 미국이 경쟁적으로 벌였던 정부주도의 방식이 아니라 민간기업들이 나서고 있다. 앨런 머스크를 비롯한 세계적인 부호들이 2027~2040년엔 달에 거주민을 보내고, 향후 50~100년 내에 지구인 정착촌을 완성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 기업들이 목적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찾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원래 ‘우주협약’엔 각국 정부는 달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고 개인이나 민간이 가질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렇다고 각국 정부가 바라만 보고 팔짱을 끼고 있지는 않다. 유럽과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이 현재까지 달 탐사를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여오고 있다. 지난 번 오바마 대통령도 민간 우주 개발지원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번엔 미국이 러시아와 합동으로 달 탐사계획을 세웠다. 미국이 달탐사계획을 잡은 이유는 미국의 나사와 우주과학계에서 달 표면에 존재하는 얼음상태의 물이 발견되어 현재 예측하고 있는 달의 물 양 보다 50% 더 이상 있을 거라고 추측한 결과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달에서 전초기지를 세울 것도 계획하고 있다는데 과연 실행이 제대로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정부도 미국과 우주개발 협약을 체결했고, 이태식 교수와 한양대팀이 이미 유럽우주청의 달 정착촌 건설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처럼 경쟁이 가열됨에 따라 달은 계수나무와 옥토끼 모습이 선연하게 각인된 '낭만의 달'에서 '골드 문'으로 새로이 뜨고 있다. 과연 인류는 달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걸까? 한 마디로 달 탐사는 투자하는 것보다 얻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달을 향한 골드러시의 동력이 되고 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포화와 고갈상태인 현재의 지구로는 인류가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올 것임은 필지의 사실이다. 오늘날 당장 지구의 생태계교란, 온난화와 에너지 고갈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지구와 인류의 생존은 이러한 범인류적 난제를 어떻게 여하히 해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재 우주탐사 레이스에 뛰어든 나라들은 달에서 He3를 얻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고 한다. 또한 어차피 달 하나만의 정복으론 부족하고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점에서 화성에 지구촌을 만들기 전 단계로 먼저 달에서 적응해보는 것도 필요한 과제다. 실제로 그들은 하와이와 마우이섬 등지에 달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체크하고 그에 보완할 것에 대한 해결점을 찾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내림에 따라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달의 설화, 전설, 문학적 상상력은 온전히 깨져 버려 더 이상 신비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우주탐험, 지구인의 새로운 거주희망지의 획득모색이라는 미답의 영역과 과학적 상상력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그 자리를 메워가고 있다.

 

그런데 내겐 여전히 누구나 가지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과연 인간은 달에서 인류가 생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갖출 수 있을까? 산소가 없는 무중력상태의 달에서 과연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 공기, 기압, 식량문제 등의 여건을 갖출 수 있을까?

 

어찌어찌해서 다양하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다행히 식량문제는 해결된다고 해도 현재 우주에 나가 있는 우주인들이 물이 귀해 자신의 소변까지 정화해서 마시는 사실에 비춰보면 물 부족으로 식량의 대량 재배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또한 달에서 과연 인간의 영속적인 생존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우주선을 타고 탐사를 다녀온 우주인들이 잠깐의 우주여행이었음에도 몸에 갖가지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걸 보면 인간이 달에 정착하게 되면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형체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T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달은 지구와 달리 무중력 때문에 남성의 음경에 피가 몰리지 않아 발기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발기가 된다고 하더라도 무중력 상태에서는 수정이 어렵다라고도 한다. 설령 아주 적은 확률로 수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주에서의 방사능 때문에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대단히 높다고 한다. 즉 인구난을 예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판단으로는 인간이 달에 다시 안착한다고 해도 지구와 동일한 존재양태로는 생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산다는 의미는 그저 살아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니 말이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하늘을 날고 싶어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하늘을 나는 꿈이 이뤄지자 이번엔 달로, 달에서 또 우주의 끝을 보고 싶어 한다. 우주의 끝은 빛의 속도로 138억 LY에 있다고 하는데 과연 다다를 수 있을까? 다다를 수 있다면 언제 가능할까? 아마도 이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 대신 지구에서 가까운 행성 정도라면 도달이 가능해질 수도 있겠다.

 

대저 인간이 지구를 박차고 나가 달로, 우주로 나가 그 끝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실체는 무얼까? 그건 아마도 자신을 가두는 물리적인 벽이나 울타리, 혹은 보이지 않는 제한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심리나 자유의 욕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일종의 우주적 차원의 거대한 폐쇄공포증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금지된 것이라면 더 해보고 싶고, 금지된 음식이라면 더 먹고 싶어지는 인간심리의 발로이리라. 무엇보다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인간의 과욕 탓이리라.

 

하지만 나는 날마다 달과 별과 해가 자극하는 우주의 신비와 그 황홀경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아직도 굳이 밤하늘의 검푸른 은하수와 포근한 달무리로 감싸여 있거나 휘영청 밝은 예쁜 달을 바라보지 않더라도 상상의 날개가 퍼득이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

 

달에 가는 것이 쉬워지는 세상이 도래한다고 해도 부자가 아닌 사람들에겐 우주선 티켓을 손에 쥐어 보는 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아주 극소수의 부호들만 다닐 것이다. 마치 전용기를 타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이는 극소수의 세계적인 대부호뿐인 지금처럼 말이다. 살아생전 나는 지금까지 지구도 다는커녕 아주 좁쌀만큼의 지역만 다녀봤을 뿐이다. 내겐 지구 안에서만 살라고 해도 지구는 평생 다 못 가볼 정도로 너무 광대한 존재다. 하물며 우주라는 건 내게 너무나 먼 터부가 아니겠는가?

 

나 같은 범부는 그저 지구만이라도 잘 가꿔가기 위한 노력을 실천하고 사는 게 장땡이다. 내가 평소 집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라도 꼭 내손으로 제대로 하고자 하고, 매달 환경단체인 '그린피스'에 얼마 안 되는 푼돈이라도 기부해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최근엔 고향 철강공단의 심각한 생태계파괴와 환경오염에 대해서도 가만 두고만 볼 수 없어서 직접 행동으로 나선 까닭도 이 때문이다. 나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과학만능주의의 사고가 싫다. 내가 자란 소싯적과 비교하면 세상의 문명이기는 내게 과하게 편리함을 선사해주고 있다. 살기에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족하다. 더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그건 해와 달님에게 미안한 일이다. 별님에겐 잠을 깨우는 일이다.

 

2017. 11. 25. 10:17

고향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