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 내용, 무엇이 문제인가?

雲靜, 仰天 2015. 3. 12. 11:53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 내용, 무엇이 문제인가?

 
올해 3월 들어 SNS상에서 “울림이 큰 글”이라며 소개된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서울대 신입생들을 상대로 한 축사와 그에 대해 코멘트 한 글을 올립니다. 코멘트 글은 김 교수의 축사 내용에 대한 나의 다른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위 두 글을 올리는 의도는 몇 가지 복합적인 동기가 포개져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의 인식에서 엿볼 수 있듯이 대학 교육에서 공부 보다 더 중요한 정신성을 간과하고 있는 한국 대학교육이 이래도 되는 것인지 관심을 가져보자는 겁니다. 또 청년문제에 대한 인식이 다양해야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희망이 사라진 청년세대를 살리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을 다 같이 생각해보자는 취지도 있습니다. 비교와 평가는 두 글을 다 읽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길지만 두 편을 모두 차례대로 실었습니다.  
 
 

 서울대 입학식 축사

 
김난도(소비자아동학부 교수)
 

안녕하십니까? 저는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김난도입니다. 평교수인 제가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축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기회를 주신 총장님과 선배 교수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1963년 3월 2일에 태어났습니다. 3월 2일요. 그렇습니다.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어릴 때는 내 생일이 싫었습니다.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라 제대로 생일잔치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늘이 제일 좋습니다. 1년 365일 중에 아무 날이나 생일로 고를 수 있다고 한다면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오늘 3월 2일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일 아침에 전국의 학생들이 모여 일제히 새 학년을 시작한다는데, 선생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생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사주팔자 같은 것은 믿지 않지만, 그래도 생일만큼은 선생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직업이 천직이라고 여길 수 있으니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축사를 하는 김난도 교수

  
오늘 저는 여러분을 가르치게 될 선생으로서 축하와 당부의 말씀을 함께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저희 동기들의 대학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잠시 희망을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군홧발로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참담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뜬 대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사치 정도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순전한 무사유의 범죄였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엄혹하고 처절한 시기를 저희는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는 많았기 때문입니다. 졸업을 하면 어디든 일자리를 골라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영역이든 조금만 진지하게 계속하면 나름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세대가 더 총명하거나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되지 않던 대한민국이 지금 3만 달러에 육박하기까지,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성장을 누리는 30년 동안 우리는 청춘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젊은 세대가 힘들다고 합니다. 좋은 데 취직하는 것이 어렵고, 제때 결혼하는 것이 어렵고, 제대로 된 방 한 칸 마련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유사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고 하는 이 세대가 말이지요. 물론 이것은 시대적 변화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성장의 시대에서 침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경제와 인구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그 많았던 기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 것은 단지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올라간다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경기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지만 전 국민이 금반지를 꺼내 모으며 재기를 꿈꿨던 때도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기침체가 영구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이 나라가 난국을 타개할 변화의 역량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절망이 정녕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얼마 전 인기 있었던 웹툰드라마 <미생>에 ‘사업놀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진짜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고 그저 열심히 하는 흉내만 내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드라마에서 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은 나라의 분열을 걱정한다면서 실은 자기 재선을 위해 국민을 이념으로 지역으로 갈라놓고 갈등을 이용하는 ‘정파놀이’를, 관료들은 공익을 도모한다면서 실은 자기 예산과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나라의 시스템을 비효율로 몰아넣는‘규제놀이’를, 대기업은 국가경제에 이바지한다면서 단가후려치기, 사람·기술 빼앗기 등 각종 불공정한 관행으로 시장을 황폐화시키는 ‘갑질놀이’를, 일부 고용주들은 취업난을 악용해 ‘열정페이’다 뭐다 해서 청년 구직자의 노동을 약탈하는 ‘착취놀이’를, 저를 비롯한 교수들은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수수방관하며 자기 연구실적만 채우는 ‘논문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이 교착상태를 풀어낼 리더십은 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좋은 날에 답답한 얘기를 꺼내 미안합니다. 저는 오늘의 축사를 준비하면서 새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어떤 아름다운 축원을 해줘야 할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저는 듣기 좋은 덕담보다는 여러분이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엄혹한 도전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분발을 당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 소중한 기회를 막연한 인사말로 채우기에는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따끔한 각성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선생이 할 일이기도 하니까요.
 
지금 여러분이 헤쳐 나가야 할 두 가지 도전과제가 있습니다. 나라 안의 도전과 나라 밖의 도전입니다. 먼저 나라 안의 사정을 살펴보면, 가장 걱정되는 것은 ‘세대이기주의’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에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라고”요. 하지만 지금의 기성세대가 나중에 오늘을 뒤돌아볼 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재의 경제·고용·복지 등 담론의 줄기를 보면 나중에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가 아니라 우리 자식이 겪게 해서 참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높은 자의 책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말은 어느 언론인의 표현을 빌리면 ‘세니오르 오블리주(senior oblige)’, 즉 나이 든 자의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 자들은 나이든 자들과 경쟁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기성세대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원과 정보와 인맥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단지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희망의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투자하고, 양보하고, 그들의 미숙함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에 내일은 없습니다. 청년들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나라 밖의 도전은 더욱 심상치 않습니다. 작년 여름 저는 연구를 위해 일본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도쿄에 들를 때마다 혐한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잡지광고며 기사들의 상당 부분이 한국을 폄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다시 유치에 성공한 올림픽 준비에 들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또 지난 겨울에는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갈 때마다 놀랍도록 변하는 곳이지만, 어느새 우리보다 훌쩍 앞선 나라가 돼 있었습니다. 흔히 중국을 짝퉁의 나라 정도로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국은 압도적 1위의 외환보유국이고, 이미 우주정거장, 항공모함, 비행기, 고속철도를 자체 기술로 만들어내는 나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중국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또래 젊은 세대의 열정입니다. 흔히 ‘쥬링허우’라고 부르는 중국의 90년대생들은 제2의 마윈, 제2의 레이쥔을 꿈꾸며 밤새워 도전의 열기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중국의 대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합니다. ‘개미굴’이라는 10평 남짓한 아파트에 십여 명의 학생이 함께 기거하면서 해만 뜨면 도서관으로 뛰어나가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돌아옵니다. 우리는 중국 인구의 1/27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국에 뒤지지 않으려면 27배 정도 열심히 노력해야 할 텐데, 지금은 중국이 27배 더 노력하는 형국입니다.
 
우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에선 증오의 감정이 커지고 있고, 우리와 바다를 맞대고 있는 나라가 한순간에 세계 최강국으로 자라났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여러분에게 희망을 겁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우리 젊은 세대가 교착상태에 빠진 나라에 새로운 모멘텀을 부여할 세계적인 인재로 성장해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주십시오.
 
제가 대학시절을 돌이켜 생각할 때 후회되는 일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것은 역시 치열하게 공부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펙이 아니라 지성의 성장을 위해, 좋은 직업이 아니라 조국의 미래를 위해, 혼신을 다해 공부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다시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나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여러분이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할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이타정신을, 여러분은 이 교정에서 배워나가기 바랍니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선함’을 가슴에 품고 개인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때, 인류와 나라와 학교와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성장이 서로 접점을 찾아 만개할 수 있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미터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여기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제일 높겠습니까? 답은, 히말라야 산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이유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히말라야 산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이 만약 바다 한가운데 혼자 있었다면 높아봐야 한라산이나 후지산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산은 세계의 지붕이라는 티베트 고원의 거봉들과 어깨를 맞대고 있습니다. 그 준령에서 한 뼘만 더 높으면 바로 세계 최고의 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나라를, 우리 학교를 히말라야 산맥으로 함께 키워나갑시다. 바다 위에서 혼자 높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야 할 사회적 약자들과 우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선하고 책임 있는 인재로 성장해야 합니다. 당신이 여기 앉아있기 위해 탈락시킨 누군가를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승리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채무자입니다. 선함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우리 공동체를 히말라야 산맥처럼 만들고 나서, 자신이 한 뼘만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학생들이여, 선해지십시오, 성장하십시오. 당신이 희망입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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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서울대 입학식 축사 내용, 무엇이 문제인가?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얼마 전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가 서울대 신입생들에게 행한 축사는 한 마디로 그들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한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자구로만 보면 그의 축사는 현 실태에 대한 기성세대의 책임을 언급하고 청년들이 개인의 이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위하는 자세로 더 열심히 노력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곧 자신이 살았던 1980년대와 IMF가 급습한 1990년대는 지금보다 더 냉혹한 시련기였음에도 기성세대는 이겨냈으니 ‘여러분들도 더 열심히 치열하게 공부하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입니다. 그의 말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한 현실진단과 그에 임할 청년들의 자세나 과제 혹은 역할에 관해 김 교수와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는 청년실업, 싼 임금으로 청년들을 부려 먹는 청년노동력 착취,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취직의 어려움 등의 문제를 봄에 한국사회에 대한 현실 진단을 안이 하게 한 나머지 한국사회의 구조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간과한 채 단지 기성세대의 청년세대에 대한 투자, 양보, 배려와 청년들의 분발만을 촉구하는 작지 않은 결함을 않고 있다는 것이죠.
   
현실이 아무리 답답해도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고요? 김난도 교수도 청년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이타정신을 배울 것을 당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선함’을 가슴에 품고 개인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때, 인류와 나라와 학교와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성장이 서로 접점을 찾아 만개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죠.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이타정신을 배우는 방법이 제대로 제시돼 있지 않고 ‘혼신을 다해 공부하라는 것’이 비단 서울대 신입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전체 한국 청년들에 해당되는 메시지인 듯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바꿔 말하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유일한 방법인듯이 제시됐으며, 서울대 신입생이라는 특수성은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또한 젊은 청년들인 이상 전체 한국의 청년들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사표 혹은 지표가 제시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흠이 있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대학생들은 비싼 대출금을 안고 대학문을 나섭니다. 졸업을 해도 그 반은 취업이 안 되며, 이로 인해 결혼포기, 출산포기 나아가 자포자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혼자의 두 주먹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자살을 하는 이도 없지 않습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 할 수 없을 때 엄습하는 무력감에서 비롯되는 자포자기는 결국 이 나라 청년들을 깊은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김 교수의 축사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하다보면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사회와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걸 젊은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거나 마찬가지 논리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성세대들에게 투자, 양보 및 배려할 것만 촉구하지 그들이 불합리한 현실 타파를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서울대 교수에다 청년문제로 자신의 책이 300만 부가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 작가까지 된 명성에 비춰보면 조금 안이하고 편의적인 진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청년들을 보수화 시키려는 의도적인 기획 축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군요.
  
어느 나라든 젊은이들은 그 연령다운 특성과 장점이 있습니다. 국가는 그들의 장점이 최대로 발휘되도록 교육하는 게 바람직하고 실제로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청년들에게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일까요? 내 혼자만 잘 살겠다는 생각 보다 남들과 더불어 같이 잘 사는 가운데 사회와 나라도 강성해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겠죠. 국가발전을 개인발전 보다 우위에 놓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내팽개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 게 국가와 개인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오늘 한국의 청년들이 지녀야 하고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는 사회를 기형적으로 만든 기성세대와 정치인들, 국가지도자들의 무능하고도 탐욕스런 불의에 도전해서 혁파하겠다는, 즉 공동체의식에 기반한 강력한 정의감과 도전의식을 기르는 게 우선입니다.
  
이와 관련해 잠시 작금 우리 사회의 현실에 눈을 돌려 봅시다. 정치지도자와 기득권자들을 포함해 사회의 현행법적 부조리와 도덕적 일탈을 사전에 막고 질책, 견제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순기능을 유도해야 할 국회의원, 법조계, 감사원, 경찰, 국세청, 언론기관들이 어디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법과 질서를 지켜 나라와 사회의 모범이 돼야 할 국가최고 지도자와 정치지도자를 포함한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모범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일반인들 보다 훨씬 더 비리를 많이 저지르고 전과도 더 많습니다. 장관 이상의 정부 고위층 인사와 그 자제들이 군대에 가지 않은 비율은 근 40%에 육박합니다. 보통 사람의 군 면제율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0%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각종 청문회 상에서 적나라하게 벗겨지듯이 고위 공직자 후보자의 십중팔구가 위장전입은 액서사리이며, 부동산 투기, 다운계약서 작성, 병력기피, 탈세, 논문표절(그들은 이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인식하는 게 더 큰 문제임), 공금의 사유화(사적 유용)에다 거짓말은 어찌나 잘 둘러대는지 그 뻔뻔스러움에 혀를 내찰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비리의 온상이요, 비리의 종합백화점이죠. 이런 지도층 인사들에게서 김 교수가 언급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차치하고 ‘세니오르 오블리주(senior oblige)’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권력화된 지 오래된 일부 언론은 기득권층에 편승해 언론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 없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는 저소득층 근로자들이 자신을 더 어렵게 만드는 법과 제도를 양산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고 표를 주도록 하는데 교묘한 방법으로 ‘언론’이라는 사회적 공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곡학아세요, 직무유기죠! 또한 이 세상에, 없이 사는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과 빛과 소금이 돼야 할 마지막 보루인 교육계와 종교계(특히, 일부 정치 권력화 된 삿된 종교지도자들)도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거나 되려 그걸 앞장서서 조장하고 있으니 나라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리 만무하죠.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끼리 서로 앞뒤에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배를 더 채우려고 세상을 노략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청년문제의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이 척결되지 않고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야 청년들의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그들이 희망을 품고 꿈을 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국은 부와 가난, 기회와 능력이 대를 이어 세습되는 사회에 도달해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성실하게 고생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자신의 미래가 보장해준 과거 세대가 살은 세상과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정말로 옛날 일입니다. 세상의 제도와 시스템은 개인의 힘과 능력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의 기울어짐과 부의 편중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양질의 교육을 많이 받으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경제적 보장이 이뤄지고, 그것은 다시 그 자식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개인을 소외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부의 편중을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님에도 기성세대는 여기에 문제의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의 편중은 자본주의 수출국인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에 올라서 있습니다. 한국정부의 1년 국가 예산인 약 350조 원 중에 최상위 1,500명이 300조 원의 자산을 차지하고 자식에게 세습하고 있습니다. 또 비정규직 부모의 자녀 78%가 비정규직이고, 이는 자녀의 69.9%가 비정규직이라는 정규직 부모와 자녀의 62.8%가 비정규직이라는 자영업 부모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영업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그 자식 세대는 부모의 직업적 지위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거죠. 부자의 자식도 부모의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서울 강남의 잘 사는 집 초등학생들이 수억 원대의 예금을 가지고 있고, 친구들과 동심으로 어울려야 할 그 연령에 벌써 자신이 크면 부모가 누리는 부를 누릴 수 있을까, 즉 호화저택에 살고 값비싼 외제차를 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사실인 것입니다. 이는 상당 부분 교육의 불평등에 기원을 두고 있는 문제입니다. 기회의 균등을 담보해주기 위해 평등해져야 할 교육의 기회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불평등해진 지가 오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정녕 이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하는지요? 이런 총체적 난국을 기성세대가 풀어줘야 합니다. ‘미생’은 이런 사회의 결과물이 아닙니까? 이 상황을 혁파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겁니다. 나아가 민족의 운명이 걸려 있는 사회개혁, 정치개혁, 정신개혁 등의 전국민적 과제를 풀어 가는데 청년의 정의감과 용기도 힘이 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청년들도 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의 일각이고 미래사회가 그들의 것인 한 권리와 의무, 책임도 기성세대와 함께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책임은 적고 권리가 많아야겠지요. 그런 사회를 만들고 물려주게 된 게 기성세대이니 기성세대는 책임도 당연히 많아야겠지요. 구체적으로 이 나라 청년들에게 강조할 바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겠죠.
  
현실에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일처럼 공공의 문제에 개입하라. 비정한 경쟁게임에 뛰어 들어 체제의 그물망에 갇혀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보다 자신 보다 못한 처지의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봉사하고 화합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라. 사악한 탐욕과 근거 없는 권위에 저항하라. 평화, 자유, 인권, 복지, 자연보호, 생태계 보존 등의 인류 보편정신과 같은 높은 이상을 가지고 현실을 보라. 이러한 가치들은 널리 인간사회를 이롭게 하라는 國祖 단군의 가르침인 ‘홍익인간 재세이화'정신에 다 담겨 있으니 우리는 이를 머리로만 이해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스펙 쌓기 따위의 공부는 부차적이다. 한민족의 미래, 남북통일, 사회적 진보, 역사의식, 시대정신, 휴머니즘, 공동체의 공존에 고심하고 마음을 쏟는 식의 좀 더 본질적인 큰 공부를 하라.
  
大學, 즉 큰 공부란 지구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과 균형감각, 항상심, 정의감과 의연함을 기르기 위한 공부여야 합니다. 스펙 쌓기 식의 공부는 작은 공부에 해당 됩니다. 작은 공부는 큰 공부가 되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지만, 큰 공부가 되지 않으면 작은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그런 사람은 한갓 기능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 작은 공부로는 청년들에게 기대되는 영감과 창조성도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 대학생들 사이에는 취직에 얽매어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만 좋은 곳에 취직해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다 싸잡아 그렇게 매도한다면 그렇지 않은 청년들을 화나게 만드는 처사이겠지요. 모두가 그렇다는 소리가 아니라 주류적 추세이며, 그런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어쨌든 이런 근시안적이고 소시민적인 정신으로는 국가는커녕 세계를 무대로 뛸 큰 일꾼, 큰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정의롭고 양심 바른 시민이 사회의 다수가 됐을 때 사회는 맑아지고 건전하게 발전합니다. 거짓말과 꼼수를 밥 먹듯이 하는 정치지도자가 득실대는 이 나라에 진실로 그런 기상과 양심을 지닌 큰 지도자가 한 사람이라도 배출되면 나라는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현재 그런 인물, 그런 정치지도자와 기업인을 육성하는 게 교육의 역할 가운데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입니다.
 
우리 윗세대들은 6.25전쟁의 폐허 위에 경제를 일으켰고, 우리세대들은 엄혹하고 서슬이 시퍼렇던 독재시대에도 불의에 맞서 싸워 민주화를 이루는데 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및 사회진보를 위해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 편안한 삶의 욕구를 포기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뒤로 하고 우리 모두의 공동체적 관심과 애정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정신과 가치관이 자신도 살고 사회와 나라도 살게 만드는 길입니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처럼 온실 속에서 그저 혼자만의 취직을 고민하고 스펙 쌓는데 목을 매거나 더욱이 기성세대들, 특히 재벌과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정치인이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이런 체제를 지속시키려는 작위에 눈을 감고 있어선 자신도 일어설 수 없고 사회와 나라도 제대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절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또 그 틀을 깨지 않고 청년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십니까?
  
이러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공부만 더 열심히 하라는 식의 당부는 가진 자들이 쳐놓은 구도 속에 안주해 영원히 사회적 약자, 즉 ‘미생’이나 ‘을’이 돼 살아가라는 거와 다를 바 없지요. 그 말은 기성세대, 특히 정당한 방법으로 부와 명예를 쌓은 존경 받는 기업가, 기득권자가 아니라 불법, 위법, 탈법, 편법과 자본의 횡포에 의해 그것들을 ‘착취’, ‘착복한 사악한 기업가, 기득권자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와 논리를 인정하라는 거와 같습니다.
  
서울대 교수라고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가 ‘큰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첫발을 들여놓는 신입생들에게 해주는 축사가 그 정도이니 이 나라 젊은이들이 청년이라면 가져야 할 호연지기, 태산도 뚫을 듯한 기백과 웅혼한 기상이 눈에 띄지 않지요.
  
김 교수는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에게 양보하라는 게 기성세대가 할 일이라고 하는군요. 그것 밖에 없나요? 그걸로 문제가 해결될까요? 기성세대라고 해서 모두 양보할 수 있을 만큼 가지거나 여유가 있을까요? 기성세대들 중에도 사는 게 너무나 버거워, 삶을 비관해 혼자 생을 마감하거나 혹은 가족 동반자살 하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매일 40명 가까운 생명이 자살로 죽어가고 있는 게 한국사회입니다. 자살의 동기는 여러 갈래이지만 그들이 죽음을 결행할 때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형언불가의 비통, 애통, 혹은 크게는 국가, 사회 작게는 타인과 지인들에 대한 원망, 분노, 저주 등에는 한 오라기도 관심을 두지 않는 비정한 이들이 서로 더 잘 살려고 제살 뜯어먹기 하는 비정한 승자독식의 사회,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가 돼가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이 기막힌 현실을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일까요? 투자하고 양보, 배려하라고 부탁한 기성세대란 축사의 논리적 맥락을 따져 보면 아마도 정당하지 못한 탈법, 위법, 불법, 편법 혹은 남이야 어찌되든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비정하고 이기적인 ‘갑질’로 부와 권력을 가진 자, 기득권자들을 가리키겠죠. 투자하고 양보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기성세대는 마음이 있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글쎄 능력을 갖춘 기성세대들이 같은 기성세대들에게도 베풀지 않는 마당에 젊은 세대들에게 투자하고 양보할까요? 그들이 젊은이들에게 투자하고 양보하려고 했다면 건전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저마다 사내에 천문학적인 유휴자금을 쌓아두고 투자는 꺼리고 신입사원 뽑는 건 최소화해서 생색만 내고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세상의 변화를 읽고 변화를 이끌어가야 할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기는커녕 단가후려치기, 인재와 기술 빼가기 등 각종 불공정한 거래의 강권에다 골목의 구멍가게와 아동들의 코 묻은 돈까지 긁어모으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가 정신 지수(GEDI)에 의하면, 한국의 기업가 정신은 120개 국 중 겨우 32위입니다. 이는 남미의 콜럼비아나 중동의 오만 보다 못한 것입니다. 내가 시력이 좋지 않아 그런지 한국의 기업가들에게서는 투자와 양보는커녕 눈꼽만큼의 배려도 찾을 수 없군요. 그런 작태는 사회 저층 근로자들의 구매력을 저하시키고 저성장, 저물가 기조의 디플레이션을 장기화 시켜 다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공동체를 해체시킴은 물론, 재벌 자신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사회와 나라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걸 알고도 저러는 걸까요?
  
이 나라의 중소기업인과 소상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악덕 대기업(그렇지 않은 대기업은 소수임)에 영원한 ‘을’이 돼 갖은 자본의 횡포에도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런 대기업과의 비정상적인 관계의 끈을 끊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로지 연명하기 위한 몸부림일 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공존, 공생, 상생 따위는 꿈같은 현실입니다. 사회적 정의는 꿈도 꿀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 악덕 재벌이 재벌 총수의 자식에게 편법으로 상속세 제대로 내지 않고 천문학적인 돈을 물려줘도 눈 감아 주고 그들이 더 잘 살도록 법인세 인하, 부자감세 정책을 펴면서, 재벌이 떨궈 주는 콩고물을 받아 부를 채우려는 얼빠진 정치인들이 다수인 게 오늘 우리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치인들은 소수 유력한 실세 정치인들이 해외 자원외교라는 명목으로 수십조 원에 이르는 국민의 혈세를 허비해도 이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 돈이 자신의 돈이었다면 지금처럼 팔짱 낀 채 가만히 있을까요? 그런데도 나아지지 않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그런 국민의 세금을 회수하는데 노력하기는커녕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 하에 내놓는 거라곤 없는 서민들의 호주머니와 봉급쟁이들의 지갑만 터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또 내수 진작, 부동산시장 활성화라는 땜질식의 임기응변적 미봉책은 오히려 장기적으로 경제를 망칠 가능성이 큰 것이 아닌가요? 정녕 국민을 ‘호갱’으로 보지 않는 한 이런 싸구려 정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최근 수년 간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나 기가 막혀 침묵하다가 갑자기 이런 주제를 접하니 할 말이 많아집니다. 할 말을 다하려면 다 하기도 전에 정신건강에 이상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김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더 열심히, 치열하게 공부만 하라고 주문합니다. 그런 절박한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실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지금 보다 27배의 노력을 더 할 것을 주문합니다. 바깥의 도전이 거세다고 하면서 일본과 중국을 이기기 위해서랍니다. 그의 셈법대로라면 한국 청년들은 최소 27배 이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즉 중국이 인구가 한국 보다 27배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중국에 뒤지지 않으려면 그들이 하는 27배 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잖아요.
  
젊은 청년들의 일자리는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이 대부분입니다. 이 문제는 당장 해결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은 청년착취를 갈등의 문제로 포착하지 못하는 무능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기막힌 현실을 교묘히 외면하고 있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사회개혁과 정치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이 사회에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형성돼 있는 ‘비정상적’ ‘과욕’을 혁파할 수 없으면 스펙 쌓기와 같은 노력만으로는 결국 기존의 사악한 기득권층이 만들어놓은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삶을 반복하게 될 뿐입니다.
  
청년시절의 공부란 지식습득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선 물론이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긍휼심과 정의감과 공동체적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인문학적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래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평균적 삶의 질을 담보하게 하기 위해서도 청년들은 삶의 낭만을 구가하고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자는 그들을 정의와 역사 앞에 겸허해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작금 한국의 교육이, 교육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김난도 교수도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내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기침체가 영구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이 나라가 난국을 타개할 변화의 역량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절망이 정녕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단군 이래 최고의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우리 젊은 세대가 교착상태에 빠진 나라에 새로운 모멘텀을 부여할 세계적인 인재로 성장해주기를 간곡히 바라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듣기에 따라선 그럴싸한 말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기존 기형적인 구도의 개선을 도외시 하는 한 그러한 언설들에 내재돼 있는 의미의 본질은 기성체제, 기득권 체제를 옹호하거나 견고히 하는데 일조하는 논리를 교수라는 신분으로, 수사적으로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축사를 들은 서울대 신입생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감동? 울림? 용기와 발심? 무덤덤? 혼동? 실망? 분노? 비애? 절망? 각자의 근기와 계층적 처지 혹은 인성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다르겠지만, 전체적으론 이 축사에 적어도 감동을 받는 신입생들은 많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혹여 감동을 받았다거나 큰 울림이 있었다거나 하는 신입생이 많았다면 그 대학은 이미 늙었다는 증거이거나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쉬이 늙어 갈 것이며, 대학의 미래도 밝지 않습니다.
  
꿈과 이상을 품기는커녕 대학생활이 고통이 될 정도로 암담한 삶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이런 식의 얘기 밖에 할 수 없다는 건 좀 냉혹하게 얘기하면, 김 교수 자신의 전공에 걸맞게 기존 기득권 체제의 공고화에 젊은이들을 '소비'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IMF 외환위기 이후 학생들에게 생존에 직결된 취업을 우선시 하게 되면서, 또 학문과 가르침마저도 경쟁과 자본의 논리에 침윤되고, 잠식된 대학이라는 상아탑 안에서 혼자만 고고하게 말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두서없이 써내려간 졸문이니 글이 정치하지 못하고 논리적 오류가 있더라도 널리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상과 청년세대를 보는 시각이 다양해야 해법도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지 않고 종합적이고 圓融的이 될 것입니다.
 
2015. 3. 8. 05:37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