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군에 대한 총질”이라고? 바른 내부총질이 없다는 게 더 문제다!

雲靜, 仰天 2020. 12. 30. 11:18

아군에 대한 총질이라고? 바른 내부총질이 없다는 게 더 문제다!

 

현재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상당히 많은 정치적 문제들은 이것저것 다 떼고 핵심과 본질만 간추리면 마지막엔 건전한 견제는 없고 악의적, 권력투쟁적 비난(이건 견제와 비판과 다른 것임)뿐인 것이라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즉 정치는 없고 정쟁만 있을 뿐이다. 견제는 비판의 여러 목적들 중의 하나이고, 비판은 견제와 相補의 한 수단이다. 이게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임과 동시에 바람직한 작동원리여야 하지 않는가?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완벽하게 견해나 주장이 일치되는 일은 없다.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르기도 하고, 많이 다르기도 하고, 조금 다르기도 한다. 심지어 한 집에 같이 사는 가족들 간에도 견해나 주장이 다르다. 부모형제간에도, 부부간에도, 부모자식들간에도 그렇다. 친구나 지인들도 그런데 개인의 이익을 국민 전체의 공익보다 더 우선시 하는 한국의 정치계는 일러 뭐하겠는가? 오히려 완벽하게 일치하는 게 이상하다. 다름을 인정하고 어떻게 공동의 이익, 모두의 이익을 위해 어느 것이 최선인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대전제이자 작동 원리다.

 

그런데 그 견제와 비판이란 반대편의 견제와 비판만이 아니라 자기 편 내부에서의 견제와 비판도 포함된다. 내부 견제와 비판은 어쩌면 외부 견제와 비판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을 건너뛰거나, 견제의 목소리를 무시하거나 제거하기 때문에 오로지 섹트주의적 패거리만 생겨난다.

 

그로 인해 문제해결은커녕 일단 반대 당, 반대세력에 대한 우위확보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경쟁력이 취약해서 정치 산물의 향유자가 돼야 할 보편 국민의 입장에서는 더 큰 문제 혹은 새로운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부의 견제와 비판에 대해 아군에게 총질한다고 비난조의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보이는데 현실을 역사적 안목으로 좀 길게, 큰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내부 견제와 비판을 총질이라고 치자. 설령 총질을 많이 해서 국가권력을 다른 정당에게 내주어도 권력을 획득한 그 정당이나 세력은 마찬가지로 유사한 처지와 작동시스템에 놓이게 되고, 결국 그것은 끝없는 악순환이 돼서 그 폐단과 불이익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총질의 내용과 수위에 따라 조금은 다르겠지만 일반론으로는 총질을 하지 않아서 잃는 것들의 총량보다 총질해서 얻는 것들의 총량이 언제나 더 클 수밖에 없다. 서로 총질을 하더라도 어떤 사회, 어떤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지향성과 어떤 가치를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면에서 동일한 좌표에서 있는 것만 확인이 되면 족하다.

 

같은 당 안에서 계파들 간의 내부 견제와 비판이 그렇게 격렬하고 빈발했고 지금도 그래도 100년 이상이나 당이 분당이나 깨어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중국국민당도 있다. 조금만 비판이 있어도, 서로 주장과 견해만 달라도(사실은 욕심이 다르기 때문임) 당장 때려치우고 나가서 다른 당을 만들기를 밥 먹듯이 해오고 있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여기선 길게 설명할 여유가 없지만, 한 마디로 내부 견제와 비판이 부재했거나 그걸 무시했었기 때문에 정치적 파행 혹은 부정부패와 악행이 지속이 되고 나아가 독재가 건재하고 지속되는 것이다. 이를 예증하는 사례들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숱하게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단적으로 한 가지만 예를 들면, 박정희의 독재는 외부의 저항, 즉 비판과 비난만 있었지 내부의 견제와 비판이 거의 혹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18년간이나 지속됐고, 결국 동업자였던 김재규가 내부 비판을 전격적으로 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아성이 무너짐으로써 비로소 종언을 고하게 되지 않았는가!

 

만약 김재규가 내부에서 아군에게 총질을 하지 않았다면 박정희 독재가 더 연장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로 인해 국민들에게 가는 피해는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내부 총질로 독재권력이 무너졌다면 내부 총질을 긍정적으로 봐야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 인식과 행위의 모순이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만 할 게 아니라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다.

 

내부의 견제나 비판을 죄악시 또는 사갈시, 이적시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기분 상해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것이 악의적인 음해, 없는 사실을 지어내어 퍼트리는 저열한 언행이나 인신공격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런 류의 정치꾼들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흔히 볼 수 있는 자들이다. 다만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가 되고 주류가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을 소수가 되고 주류가 되지 못하게 해서 맥을 못 추도록 하는 게 목표여야 한다.

 

내부의 견제나 비판을 받아들이거나 논쟁을 통해 종합과 창조의 결과로 수렴시킬 수 있는 지적 함량이 적고, 무엇 보다 마음의 그릇이 작은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릇이 작으면 담기는 것도 적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게 부족한 이라면 견제와 비판을 소아적인 자존심, 명예, 연령의 다소, 지위고하 따위의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요소들에 결부시키지 않는 정신적 도량을 키우기 위해 쉼 없는 마음 수양이 필요하다.

 

이만 각설하고, 내부 견제와 비판 없이 동업자들끼리 해 처먹은 역사적 패악질의 예를 멀리 다른 나라에까지 갈 거 없이 가까운 우리 현대사에서 찾아본다. 법비들인 양승태와 정비들인 김기춘의 과거 죄행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아래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으로 보이는 사례의 일부를 정래해놨다.

 

http://m.blog.daum.net/suhbeing/623

 

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자면, 검찰개혁은 정말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이것마저도 꼼수로 본질을 외면한 것이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법개혁과 동시에 진행되어야 된다. 단번에 이루겠다고 하든, 단계적이든, 아니면 장기적으로 이룰 것이든 검찰과 사법부의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의 의지와 계획을 청사진과 로드맵에 올려야 된다는 소리다.

 

2020. 12. 28. 11:4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