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식 : ‘세계혁명’이란 무엇인가?
세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두 개념은 상이하나 본고에선 설명 생략)운동사 그리고 여타 그 하부 차원의 중국, 인도, 일본, 인도네시아, 조선, 북한, 몽골, 티베트, 베트남, 타이완 등지의 아시아 공산(사회)주의운동사를 연구할 때 늘 예외 없이 만나게 되는 용어 중에 ‘세계혁명’(世界革命, World Revolution)이라는 말이 있다. 지구상에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 등 극소수만 잔존하는 오늘날 이제는 철지난 느낌을 주는 용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알아서 뭣하게? 일견 맞는 말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장 북한이 여전히 노동당 당강령에서 남한을 적화하겠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고, 우리 사회 내에서도 아직도 사회주의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과 호응하는 사상적 지체아 같은 골빈당(특히 ‘민중민주’로 불리는 People's Democracy 계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상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그들이 신봉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사상 및 이론에 연원을 두고 있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권 내 패권을 겨룬 중소 대결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응한다는 이름으로 그것에서 돌연변이로 배태된 기형적인 사회주의가 주체사상이다. 사실 주체사상은 사회주의의 탈만 썼지 사회주의도 아닌, 전제적인 왕조체제를 옹위하고 합리화 하는 주장일뿐이다.
아뭏든 이 같은 한민족의 현실을 제외하고 한 때 사상적 패자인듯이 20세기 전지구적으로 요원의 불처럼 타올랐던, 혹은 전염병처럼 세계의 구석지고 후미진 곳으로까지 번졌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이념이었으니, 20세기 세계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을 수 없는 주제다.
‘세계혁명’이란 말은 요즘이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1953~)이나 북한의 김정은(1984~)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입에 올리는 이들이 없지만, 지난 세기 때만 해도 1910~20년대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 뜨로츠키(Lev Trotskii, 1879~1940) 등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로 걸핏하면 내세웠기 때문에 그 파장 속에 있던 비공산주의 진영의 각국 역사학계(특히 공산주의운동 연구자들에게)나 매스컴에서도 자주 나오던 역사용어이다. 우리에게는 386, 586운동권 애들이 힘에 부쳤든지 처음부터 “세계혁명”은 선동의 구호로 부르짖지 않아서 생경한 개념이다.
과연 “세계혁명”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세계를 혁명하겠다는 뜻? 아니면 세계적 차원의 혁명? 왜, 어떻게 혁명하겠다는 소리인지 역사적 맥락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이 말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세계 공산(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 대해선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용어다. 이런 맥락에서 연구자들이나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소개한다.
유럽과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이 자주 언급한 ‘세계혁명’이란 사실상 유럽의 근대적 자유, 민주, 사회주의운동 전체의 역사적 전개상황에서 살펴봐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전체 유럽사회의 이념적 정초가 된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반발, 즉 안티테제로 생겨났기 때문에 유럽 각국의 개별 상황을 떠나 유럽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유럽의 공산(사회)주의운동을 짧은 이 지면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설명할 순 없다. 따라서 전문 학술 논문이 아닌 여기서는 사상이나 이념과 현실상황의 상호 작용 및 전개과정은 생략하고 단지 결과론적 설명만 가할 수밖에 없다.
먼저, 세계혁명을 최초로 말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그의 친구로서 최대의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였다는 점부터 말하면서 시작하자. 혁명을 추동할 혁명의 주체는 물론 프롤레탈리아였다. 그래서 명칭도 원래는 ‘프롤레탈리아 세계혁명’(중국에선 ‘世界無産階級革命’으로 불림)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두 사람에게 프롤레탈리아가 주체가 된 사회주의혁명은 세계적 규모의 혁명이어야 하는데 이것이 실현되려면 프롤레탈리아의 사회주의혁명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국가에서 동시에 발생하거나 혹은 최소한 이 국가들 중에서 먼저 한 국가에서 반자본주의혁명이 발생하고 여타 국가에서 계속 혁명이 연이어 발생해서 먼저 발생한 혁명에 부합하고 이를 고조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고 넘어가야 한다. 즉 마르크스는 프롤레탈리아 혁명은 산업이 발달한 유럽사회에서만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해 전근대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경제적 후진사회인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 점이다. 이 부분은 레닌의 세계혁명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이다. 그러면 과연 '혁명'은 무얼 말하는가? 기존 정치체제를 반대하는 어떤 물리적 행위가 대략 네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하겠다.
그런데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사회주의혁명 이론을 조금 변형시켜 제국주의의 발전이 불균형적이라는 현실에서 결론을 도출해내어 사회주의혁명은 먼저 한 나라 혹은 몇 개 국가들에서 승리하고, 각국의 프롤레탈리아가 아니라 소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도달한 국가의 프롤레탈리아들이 국가를 초월해서 범지구적으로 연합해야만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말했지만 레닌은 마르크스와 달리 후진적 전근대 사회에서도 혁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할 때까지 때를 기다리지 않고 혁명을 인위적으로 추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그렇게 본 역사적 배경은 아래와 같다.
유럽의 정치사상사를 거시적으로 보면, 18세기에 들어와서 전제 왕조체제의 봉건사회에 사상적으로 금이 가게 만든 단초를 연 것은 장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라는 걸출한 사상가였었는데, 그가 주창한 사회계약설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사회변혁사상이 추동력이 돼 결국 프랑스혁명으로 봉건체제가 무너졌다. 봉건사회 타도의 주역은 중상주의를 부르짖은 신흥 부르주아지들이었고, 그들이 신봉한 사상이 자유로운 무역 및 상공업을 강조한 자유주의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부가 집중됨에 따라 기득권층이 돼가는 가운데 유럽의 자유주의의 폐단이라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마르크스가 중심이 된 공산주의사상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하면 아래와 같다.
산업혁명의 동력과 생산력의 증가로 인한 유럽사회의 계층변화는 기존 지배계급인 왕, 귀족, 성직자에 대항한 새로운 부르주아지 계층과 프롤레탈리아라고 불린 노동자 계급의 분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이나 그 시대나 늘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혹은 국가 전체에서 창출된 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분배의 문제였다.
마르크스는 귀족계급에 저항한 부르주아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도 부르주아지 계급에 저항해야 “유토피아”(Utopia)를 건설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선 자신들을 지배해온 왕공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을 모두 지배계급으로 적대시 하고 노동자계급의 생존권, 노동권, 기본권의 쟁취를 위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런데 마르크스 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는 기성 부르주아지 정당에 대항한 진보 정당을 설립하여 자신들을 조직화하고 정치 세력화를 꾀한 혁명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크게 급진 좌파, 좌파, 우파 사회주의자들로 분류할 수 있다. 로자 룩셀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가 급진 좌파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레닌이 좌파였으며, 우파는 칼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 1854~1938)와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이 대표적 사회주의 이론가였다.
이들은 부르주아지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서로 힘을 합치고 협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국가마다 정치 및 사회경제적 조건이 달라서 분파적 요인들이 많았고, 그리고 그에 따른 반목과 상호 비판이 작지 않았다.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투쟁에 대응한 법률, 제도의 내용, 압제의 정도와 수위는 유럽 각국 마다 일률적이지 않았다. 동일한 유럽사회에 있지만 영국과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달의 정도와 단계가 다르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방법과 수단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폭력을 동원해서 러시아 짜르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레닌과 달리 마르크스의 적자로 자임함과 동시에 독일 사회주의이론의 황제로 참칭한 칼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은 선거를 통해 프롤레탈리아의 대표들을 의회에 진출시켜 의회를 다수로 장악해서 합법적으로 프롤레탈리아 계급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흐름도 있었다. 즉 비폭력적 점진적 사회주의 주창자들이었다. (물론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의 주장과 방법도 서로 간에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이 제시한, 의회에 기반을 둔 비폭력적 사회주의사상과 주장이 그 뒤 오늘날의 북유럽 사회주의 사상의 원류였다.) 이것은 무너뜨려야 할 기존의 부르주아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체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고,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랐다. 그래서 이를 두고 로자 룩셀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나 레닌 등 좌익의 폭력적 사회주의자들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류의 우파를 “수정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고 적으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좌익 진영이 분열하게 된 분파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보다 조금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봐야 한다. 세계혁명 개념이 생성된 것은 거시적으로는 나폴레옹(NapoleonⅠ, 1769~1821)의 대외 정복전쟁의 실패로 프랑스는 1789년 이래 중단됐던 왕조체제로 복귀했고, 1815년 프로이센 등이 프랑스를 견제하는 ‘비엔나체제’를 성립시킴으로써 전체적으로 유럽 각국에서 보수반동이 강화된 현실과 대응적 표리를 이룬다. 그것은 유럽국가들에서 나타난 공산(사회)주의운동의 형태와 수준이 각국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상이에 따라 균질적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프랑스혁명에 대한 보수반동으로 회귀한 국가 정부들의 보수 권력, 이 체제를 뒷받침하는 기독교 세력의 부활, 생성 중에 있던 인종우월주의에 대항한 프롤레탈리아 계급의 국가적 연대 및 협력의 필요성이라는 두 가지 전제 위에 서 있다.
이로 인해 전체 유럽 내의 민주에 기반한 사회주의운동은 퇴조하게 됐고, 그 어떤 반정부적인 민중운동도 제국들 간의 공조체제에 따라 탄압, 제압을 받게 됐다. 예를 들면, 독일권 내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대 강국이 국내의 사회주의를 억압한 것이나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공동으로 폴란드의 모든 봉기를 진압하고, 또 프랑스가 스페인의 혁명봉기를 진압한 것처럼 유럽의 보수 강대국들은 자국 내에서뿐만이 아니라 국경을 초월해 기존의 봉건적 왕정질서를 교란시키는 모든 노동쟁의, 폭동, 봉기들은 힘을 모아 공동으로 진압했다.
유럽의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혁명도 그것이 민주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아니면 민족주의의 민족적 목표를 지녔든 간에 늘 보수적인 강대국들의 무력간섭을 각오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중부유럽의 혁명적 통일전선은 이미 1848년 초에 완전히 파괴됐다. 또 민주주의는 스위스를 제외하고 1871년 유럽대륙의 모든 나라에서 완전히 끝장나 있었다. 그 결과 1889년까지 근로인민의 자치는 관철될 수 없었다.
한 개별국가에서 새로운 폭력투쟁과 봉기가 발생할 때 타국의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동맹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 군주들의 폭력투쟁 및 봉기지역에 대한 무력간섭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지원하고 바쳐야 한다는 무조건적인 필연성을 인식했고, 혁명이 한 나라에 고립돼 머물러서는 안 되며 가능한 한 급속히 여타 전체 유럽국가들로 확산돼야 한다는 결론은 여기서 도출된 것이다. 이 세계혁명의 이론적 당위성과 구호를 주조해낸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 그리고 레프 뜨로츠키 등등의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레닌, 뜨로츠키 등의 러시아 볼셰비키들이 말한 세계혁명이란 문자 그대로 세계적화를 궁극적 목표(ultimate concern)로 삼는다는 혁명적 의미에 국한된 구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 즉 일국 내의 사회주의화라 할지라도 여타 각국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기존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국경을 초월해서 진압해온 유럽 강대국들의 보수 반동세력에 공동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목적달성이 어렵다는 판단이 전제된 범 유럽적인 연합전술이었다.
또 그들이 내세운 세계혁명의 개념에는 민족의 이익보다 계급의 이익이 우선돼야 한다는 전 세계 노동자계급이 대체로 1870년대부터 전 유럽에 걸쳐 불기 시작한 민족주의에 대항해 국경을 초월한 국제적인 계급연대를 모색해야 한다는 복합적 의미도 내포돼 있었다. 마르크스의 유언이 되다시피한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말은 이런 배경을 지니고 있다.
지난 20세기 10년대 볼셰비키의 러시아 10월혁명을 통해 러시아의 짜르체제를 무너뜨리고 국가권력을 잡은 레닌, 뜨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Grigorii Evseevich Zinov'ev, 1883~1936), 니꼴라이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 1888~1938) 등등의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신생 레닌의 공산주의 국가 혁명러시아를 고사시키고자 유럽과 아시아의 동서 양쪽에서 포위해서 들어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압박에 대항해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세계혁명을 호소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하고 공산사회 건설의 목적달성의 한 수단으로 그들은 1919년 3월 기존의 제2인터내셔널 조직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제3의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을 창설해 세계혁명의 이념을 세계 각국으로 전파하고 수출했다. 코민테른은 크레믈린의 자금과 배후 조종을 철저하게 받았음은 물론이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베트남의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 인도의 로이(Ram Mohun Roy, 1774~1833), 일본의 카타야마 센(片山潜, 1859~1933), 일제 식민치하 조선의 김일성(1912~1994), 박헌영(1900~1955) 등이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공산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바 있는 후진의 아시아에서 세계혁명 이념을 받아들인 주요 수입자였다. 이 가운데는 대표적으로 마오쩌둥과 호치민처럼 대부분 마르크스 레닌 이념을 자국의 실정에 맞게 변용한 자들도 있었지만 그건 한 참이 지난 나중의 일이었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으로 이어진 도시 프롤레탈리아 혁명을 우회한 소위 “농민혁명”의 마오쩌둥과 “전민혁명”의 기치로 베트남 독립투쟁과 혁명을 동시에 추진한 호치민의 혁명이론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선 또 다른 논의의 장이 필요해서 여기선 생략한다.
‘세계혁명’은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의 역사적인 경험적 인식에서 생성된 전술적 구호였다. 이제 지난 세기 마르크스를 위시해 레닌, 뜨로츠키, 스탈린, 마오쩌둥, 호치민, 김일성(국내 공산혁명을 우선시해서 세계혁명 구호는 남발하지 않았음) 등등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자주 세계혁명을 입에 올렸었는지 그 맥락을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공산(사회)주의운동 역사에 대한 열쇳말 하나가 자물쇠가 열리듯이 풀렸기를 바란다. 이 주제와 관련된 전문적인 내용을 더 넓고,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수요자가 있다면 필자의 졸저(서상문, 『혁명러시아와 중국공산당 1917~1923』, 백산서당, 2008년, 제2판)와 여타 필자가 발표한 논문들을 참조하면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이다. 본서에는 마르크스에서 레닌으로 넘어가는 러시아, 독일, 코민테른 등 유럽사회주의운동 역사의 한 흐름뿐만 아니라 그 옛날 고대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불교가 그랬듯이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중국에 들어와 중국적으로 변용 혹은 전유(專有 Proprietary)하게 됐는지 그 역사적 시원을 밝힌 내용들도 있다.
2020. 11. 19. 22:54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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