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케 小稿
12월 20일 오늘은 18세기 말 서양 근대역사학의 정초를 놓은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자 레오폴드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가 224년 전인 1795년에 태어난 날이다. 랑케는 자신이 살던 그 시대에까지 통용되던 계몽주의적 진보사관과 헤겔(J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관념주의적 역사서술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한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어서 서양사학사에선 충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랑케는 인류의 역사가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고 주장한 역사학자 꽁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1743~1794) 류의 낙관주의적 계몽사관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하느님이 행하는 “인간 구제의 역사”라고 본 헤겔류의 철학적 관념론을 단호하게 비판하고 배격하여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인 역사만이 진정한 역사라는 근대 사학이론의 기본 틀을 제시한 역사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역사를 주관적인 요소가 가미된 “신적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화된 “인간 관점”으로 전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랑케 역시 신을 완전히 역사에서 몰아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그 역시 헤겔처럼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신이라고 보았으니 말이다. “신은 살아 있으며 모든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 그의 발언이 신이 인간을 구제하는 게 역사라고 한 헤겔과 본질적으론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랑케도 세계의 움직임을 신의 섭리의 구현으로 이해했으며, 역사를 신의 계시로 인식했다. “모든 것은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신을 통해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역사는 모든 존재, 모든 상황, 모든 사물 속에서 무한한 것을 보며, 신에게서 유래하는 영원한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의 기본원리이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심지어 랑케는 그가 역사가인지 기독교 성직자인지 모를 정도로 대놓고 신을 찬양하고 경배했다. 역사가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건 잘못된 게 아니다. 신의 의지가 현현되는 것이 역사라고 볼 정도로 역사연구를 신의 그늘 아래 두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삼위일체이신 전지전능한 신이시여, 당신은 無로부터 나를 부르셨나이다. 여기에 나는 당신의 성좌 앞 계단 아래 엎드려 있나이다.”
이 정도라면 랑케는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균형감각을 요체로 한 역사가가 아니라 신의 死去를 선언한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이전 창조주로서의 신을 경배한 전형적인 유럽의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 역사에는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생각한 랑케는 종교적 경건파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후대 역사철학자나 사학이론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반면, 랑케는 과거 역사기록물들에 대한 내적 비판의 원칙들을 공식화했다. 이러한 사료비판의 합리성과 엄격성에 대한 강조는 서양의 역사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는 역사학이론을 발전시킨 그의 공로라고 봐야 한다.
랑케는 역사학과 관련해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이해하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다소 자가당착적인 면이 보인다. 그는 인간에 관한 지식을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전제했다. 그중 하나가 개별적인 지각을 통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을 통한 길이라고 했다. 그는 후자가 철학의 길이요, 전자가 역사의 길이라고 단정했다.
랑케는 역사가란 완전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과거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서술의 객관성과 이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엄정한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요컨대 역사가는 역사 서술시 자신이 안고 있는 일체의 선입견, 편견, 가치판단의 주관성이나 호불호 같은 감정 따위를 완전히 배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역사가는 오직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만 순수한 사랑을 느껴야만 되고,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하는 것만이 역사서술의 최고 법칙이라고 했다.
심지어 이를 위해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역사가 자신이 사는 당대의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과거를 보아야 하며, 과거의 사건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그대로(즉 wie es eigentlich gewesen)를 서술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는 과거를 판단하고 미래의 세계를 예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책은 단지 역사가 왜 실제로 발생했는가를 말할 뿐이다.” 이런 주장이 서양사학계에서 그를 실증주의 사학 이론을 정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과연 과거 사실에 대해 완벽하게 객관적인 인식과 서술이 가능할까? 더군다나 그는 하느님의 절대성과 섭리가 인간사에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역사해석에서 과연 그것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랑케 자신도 역사연구방법의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들 가운데 첫째로 꼽은 게 있다. 즉 모든 국가와 시대는 그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는 이념의 틀(그는 이것을 “Zeitgeist”, 즉 “시대정신”이라고 불렀다)에 지배된다고 믿었다.
이처럼 그 역시 인정했듯이 역사가도 사료를 해석하고 평가할 때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와 동시대의 이념과 가치관에서 초연하거나 무관할 수가 없다. 동시에 그 역사가가 나고 자란 생장배경, 자신이 받은 교육, 정치 사회적 위치 및 입장, 시대적 상황, 역사적 요인 등등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인간의 지각능력은 완전하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지 않는가? 이러한 비판적 인식 내지 성찰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거론되고 증명된 것들이다. 그런 관점에서 랑케 타계 후 유럽사학계에서 과거 역사에서 완벽하게 객관적인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는 비판이 일어났음은 물론이다.
끝으로 세 가지만 더 덧붙이겠다. 랑케는 역사를 신의섭리로 본 헤겔의 역사관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역시 역사를 신의 계시로 봤는데, 이 점을 놓쳐선 안 된다는 점이 첫째다.
또한 그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인 종교개혁 역사서【Deusche Geschichte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6 Bde, 1839~1847(종교개혁 시대의 독일사) ; Die Roemischen Paepste, ihre Kirche und ihr Staat im 16. und 17. Jahrhundert, 1834~1836 (16~17세기의 로마 교황들, 그들의 교회와 국가)】를 저술하면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독일의 위대한 민족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는 게 둘째다.
게다가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감정을 잘 통제해 이성과 합리적인 균형감각을 발휘해온 랑케가 오히려 역사서에서는 프로이센과 호엔촐레른 가문을 뜨겁게 찬양했는데 이러한 서술이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한 쇼비니즘적이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셋째다.
이러한 랑케의 저서들도 프로이센학파의 등장으로 개시된 독일민족주의를 고양시킨 쇼비니즘적 역사서술들과 함께 훗날 20세기에 들어와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그 연장선에서 히틀러의 출현을 도운 독일사학계의 역사서술 형식의 발원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2019. 12. 20. 15:13
강원도 원통행 버스 안에서
雲靜 초고
■ 참고로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역사는 반복되는 게 아니다! 아래 졸고에 자세하게 규명해놓았다.
https://suhbeing.tistory.com/m/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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